오랜만에 글을 쓰고자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 창을 띄우니, 전엔 이 넓은 페이지를 어떻게 채웠나 하는 놀라움과 제목을 짓는 것이 참으로 어려웠다는 사실을 새삼 상기하게 된다. 수백의 피지 못한 꽃이 한 줌 가루로 낙화한 지도 한 달 남짓 지났는데 아직 그때의 상처가 씻기지 않고 있다. 어마어마한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기에,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난 뒤 더욱 공허하게만 보이는 진도체육관의 사진을 보며 진저리 친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내 생에 세번째 죽음을 맞이하였을 때, 나는 읍내에 신설된 장례식장에서 그를 추모했다. 믿을 수 없는 죽음이었기에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나와 친구들의 발걸음은 얇게 언 호수의 위를 걷는 것처럼 조심스러웠고, 우리들의 자취에는 침묵과 슬픔이 서려 있었다. 마침내 까만 물결이 치는 건물 앞에 당도했고 우리는 서로 모르게 깊은 숨을 내쉬고 나서야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참담한 눈길로 고개를 들었을 때 보이는 것은 상아색의 대리석 벽이었다. 시린 형광등 불빛이 반사되어 투명하고도 새하얀 빛의 떨림이 눈을 통해 틈입하는 것을 나는 느꼈다. 온몸을 장악하는 듯한 상아색의 벽은 분향소 공간 전체를 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를 지나는 새까맣고 두꺼운 선. 그것은 마치 생사부의 이름 위에 그어진 붉은 색의 선 같아서, 나는 소름이 돋았다. 주저앉아서 고개를 숙여 얼른 그 벽에서 눈을 떼고 싶었다. 죽은 자의 신음 같은 빛의 파동에 심장이 계속 떨려왔다. 나는 친구들 틈에 껴서 얼른 묵념을 하고선 다신 그 공간에 눈을 주지 않았다.
공간이라는, 인간을 둘러싼 환경에서 주는 장악력을 나는 그때 확실히 알게 되었다. 아직 그곳에 남은 가족들, 밝은 기억만 가지고 견디기엔 너무도 힘들어서 마지막까지 기다리는 그들, 온힘으로 기다리는 그들이 그곳에서 느낄 감정이 어떨지 나는 공간에 관해서만 조금은 알 것 같다.
……글을 쓰니 생각을 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난다.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 늦은 밤까지 거리를 떠돌며 찬바람에 식혀야 했던 슬픔, 서럽게 울던 친구를 품에 안고 도닥거리며 받아주어야 했던 상처, 주저하게 되고 머뭇거리게 되던 떨림을 잊을 수 없다. 달리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더욱 안타까웠던 시간들. 하지만 나는 무덤덤했다. 벌써 두 번의 가까운 죽음을 겪어보았기에, 어떻게 그 상실감을 달래야하는지 방법을 터득했기에, 나는 친구들보다 빨리 그것에서 헤어날 수 있었다. 잊는 것이었다. 내 방법은 어떻게든 그것에 관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었다.
소진이 정욱이에게 우유를 먹이는 동안, 나는 거실 바닥으로 내려와 소파 다리에 등을 기댄다. 눈을 감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든다. 혼곤한 잠 속에서 방향을 잃는다. 여기가 어딘가, 저건 어떤 아이의 울음소린가. 언제인가. 나는 지금 언제에 와 있는 건가.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것 같다. 어지럽다. 가슴이 울렁거린다. 어쩌면 이렇게 환한가. 물이 번쩍이는 건지 공기가 번쩍이는 건지 알 수 없다. 다시 열세 살인가. 열세 살의 여름방학인가. 작은아버지를 따라 처음 고깃배를 탔나. 흔들리는 배의 이물에 납작하게 몸을 낮춘 채 나는 겁먹고 있다. 바다 가운데로 나오자, 눈부신 잔멸치 떼가 일제히 배 밑을 헤엄쳐 간다. 빠른 빛이다. 셀 수 없는 빠른 빛이다. 배까지 쓸려 뒤집힐 것 같다. 순식간에 모든 것이 지나가고 난 뒤, 물의 정적이 숨을 틀어막는다. 기포처럼 내 몸이 부서진다. 영원히, 시간이 정지한다. 나는 떤다. 두렵기 때문이다. 너무 아름다운 것도 고통이 된다는 것을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못이나 씨앗처럼 몸 안에 박히기도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평생토록, 끈덕지게 죽지 않고 살아 꿈틀거리리라는 것까지 열세 살의 나는 아직 모른다. 갈망과 절망, 풀리지 않는 긴장으로 내 몸이 들뜨고 지칠 것임을 모른다. 다만 두렵고 모호한 예감을 잠재우기 위해, 두 손을 빳빳이 펴 오목한 가슴을 누르고 있다. 강한 물빛 때문에 거의 눈을 감은 채, 토하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침을 삼키고 있다. 부신 눈을 가까스로 부릅뜨자, 입가에 온통 흰 우유를 묻힌 아이가 뒤뚱뒤뚱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 무방비 상태의 웃음을 물고 있다. (노랑무늬영원, '노랑무늬영원' 293p)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 혹은 할 수 없을 때마다 나는 한강의 이 소설집을 꺼내든다. 소수의 파랗고 붉은 점들의 앞뒤로 비치는 수많은 노란 점의 그림을 나는 망연히 응시하곤 한다. 한강이 소설에서 밝혔듯 이 점들은 해질녘, 산 너머로 이우는 해와 함께 몸 안에서 무언가가 함께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 그 시각, 나뭇잎 사이로 조각조각 나뉘는 샛노란 빛을 찍어낸 것이다. 무언가 빠져나간 빈 공간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生을, 광명을 바라보는 것은 나로 하여 애잔한 기분을 갖게 한다. 지금도 지나가버리고 있을, 내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안타까워서 나는 항상 나무 밑에서 고개를 처들곤 한다.
한강의 이 소설집은 읽을 때마다 새롭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내가 성숙하는 것도 한 이유가 될 것이고, 처음에는 보지 못했던 글의 가지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가장 큰 이유가 될 것이다. 소설집의 마지막에 실린 중편소설 '노랑무늬영원'이 특히 그렇다. 처음에 나는 잔멸치 떼가 상징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했다. 내게는 서로에게 질린 한 부부의 냉소와 그와 대비되는 산에서의 짧고 어색한 만남의 떨림만이 들어올 뿐이었다. 한강이 감각적으로 써낸 것을 나는 오로지 감각으로밖에 읽어내지 못했다. 두번째로는 '영원'이라는 단어에 주목해서 글을 읽었다. 단어가 주는 울림에 몸을 맡긴 채, 감정[感]은 스스로 팽창하거나 수축하거나 했다. 이제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잔멸치 떼'이다. 내 밑을 훑고지나가는 잔멸치 떼. 셀 수 없이 빠르고 거대한 무리. 순식간에 다리 밑을 스쳐지나는 그것. 그것은 生의 격정 자체이다. 격렬하게 生이 스치고 간 뒤 남는 공허감. 갈망과 절망, 가없는 동굴에 빨려들어가는 듯한 공포감.
生이란 너무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에 고통이 되는 것이다.
바닥에 떨어뜨린 유리가 깨어지듯 마음 속에서 어떠한 장면이 솟구쳐 오른다. 살아남았으므로 비통한 자들의 눈물, 이토록 아름다운 것을 홀로 누리게 된 고통에 가슴 치는 이들이 눈에 아른거린다. 어찌하여 생명은 이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일까.
죽음에 관한 짧은 수필을 쓴 적이 있다. 동아리 신문에 투고하기 위해 밤을 패가며 써낸 수필인데 신문의 편집을 맡은 친구가, 글을 메일로 보낸 다음날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 친구의 말로는 자기가 글을 읽으며 크게 감동받은 적이 딱 세 번 있는데 그 중 한번이 바로 내 글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 칭찬을 듣고 얼마간 의아해하며 집에 와서 다시 글을 읽어보았다. 새벽에 손이 가는 대로 적었던 글에는 죽음은 곧 진입이며, 죽음으로 인해 우리가 들어가게 되는 곳은 바로 無의 세계라는 약간은 피상적인 문장들이 가득했다. 가슴 깊이 느끼지도 못하면서 용케도 이런 글을 적었구나, 하고 자조하며 마지막 문단을 읽는데 가슴에 무언가가 마치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쓴 글임에도 생경했다. 내가 예전에 시를 한 편 읽었는데, 그게 자꾸 떠올라. 뭔데. 상갓집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신발들 있잖아, 그게 죽음이라고. 결국 죽음은 생과 분리된 게 아니라 생과 결부된 것, 더 나아가 생 그 자체인 거라는 말이지. 그도 발걸음을 멈췄다. 호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고 나를 응시했다. 그건 아닌 거 같다. 죽음이 생이라면 우린 아무것도 아닌 게 되잖아. 나는 고개를 내려 그와 눈을 맞췄다. …모르겠어. 나도 아직 잘 모르겠어. 우리는 서로 피식 웃었다. 나는 내가 이때 무슨 생각을 하며 이 문장을 적어내려갔는가 떠올리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죽음과 생의 결부…… 무엇일까. 내게 이런 글을 쓰게 만든 힘은.
그러나 나는 내가 적은 글이 한낱 고등학생의 중얼거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이제 죽음에 관해 정의하기보다 가슴으로 느끼려 한다. '노킹 온 헤븐스 도어'는 내게 그 시초가 된 영화이다. 뇌종양과 암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은 두 남자가 같은 병실을 쓰게 되면서 영화는 시작한다. 둘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공통점 외엔 전혀 다른 성격을 갖고 있다. 절제에 서툴어 난폭하고 거칠기만 한 마틴과 그를 마뜩잖은 눈길로 바라보는 루디. 둘은 서로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병원 주방에서 데킬라를 나눠 마신다. 데킬라 한 병과 소금, 많은 레몬… 그리고 바다. 루디는 자신이 바다를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마틴은 그런 루디에게 천국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천국에 관해서 못 들어봤니? 그곳엔 별다른 이야깃거리가 없어.
……바다의 아름다움과 바다에서 바라본 석양을 얘기할 뿐이야.
물속으로 빠져들이 전에 핏빛으로 변하는 커다란 공.
사람들은 자신이 느꼈던 그 강렬함과 세상을 뒤덮는 바다의 냉기를 이야기하지.
영혼 속의 불길만이 영원한 거야…….
마틴과 루디는 바다를 보기 위해 병원을 탈출한다. 生의 끄트머리, 천국의 문 앞에서 그들은 당돌해진다. 은행을 털기도 하고 주유소에 침입해선 자연스러운 연기로 경찰을 피하기도 하고, 호텔에 숨었다가 차를 훔치고…… 그러다보니 둘은 단지 바다를 보기 위함이었을 뿐이었는데 강도로서 쫓기는 신세가 되어 있다. 둘은 그 와중에 버킷리스트를 작성해 하나하나 달성해나간다. 마틴은 어머니에게 차 한 대를, 루디는 두 여자와의 잠자리를 이뤄내고야 만다. 우여곡절 끝에 그들은 언덕 앞에 선다. 바람이 부는 갈대밭이 퍼져 있는 낮은 언덕. 그리고 언덕을 넘어 바다가 나오고.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가 심장을 뒤엎는 것 같다. 장엄하게 펼쳐진 거대한 바다 앞에서 그들은 잠시 멈춘다. 파도를 만드는 바람을 맞으며 둘은 걷는다. 둘은 떨리는 눈으로 바다를 응시한다. 한참을 본다. 눈이 붉어진다.
쓰러진다. 모래 위에 검은 그림자가 쏟아지고, 파도는 친다. 끊임없이.
……결국 生은 바다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生은 데킬라 한 병과 소금, 많은 레몬이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하여 내가 지금 여기 앉아 있는 것이 헛됨이 아님을 안다. 生은 바다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것이 위대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찮은 생명은 하나도 없기에 우리는 죽음에 슬퍼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나의 위대한 별이 지는 것이기에, 그 별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는 것은 두 번 다시 생기지 않을 것이기에.
간단하지가 않은 것이다.
바다를 보고 싶다.
그러나 마주할 수 있을까. 그 앞에 마틴과 루디처럼 설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