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 이상화





1.


교회에 새로운 친구가 왔다. 한 집사님의 동생이었는데 미국에서 지내다 방학을 맞아 잠시 한국에 내려온 것이라 했다. 마침 나와 동갑인 남자아이였기에 나는 호기심을 가지고 살펴보았다. 미국에서 살아서인지 키는 나보다도 컸고 골격도 튼튼해보였다. 몸은 꽤 마른편이었고 캘리포니아에서 살다와서 그런지 바닷바람이 몸을 휘몰아치는 남해의 추위에 잘 적응하지 못해보였다. 연신 춥다고 말하면서 코트를 여몄다. 생김새는 중학교 2학년때 사회과목을 맡았던 선생님과 놀랍도록 흡사해서 도무지 또래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성격도 나와 비슷해보였다. 먼저 다가가지 못하고 부끄러움이 많은 듯한. 물론 그 친구야 여기가 처음이라 모든 게 어색하고 민망하겠지만 그 아이를 보는 내 심정도 그랬다. 마침 오늘 찬양대 연습도 길어지고 나도 피로한지라 이야기할 겨를이 없었다. 결국 친해지지 못하고 각자 집으로 향했다.


늘 느끼는 거지만 타인과의 관계는 첫 단추가 가장 끼우기 어렵다. 옷에서야 맞는 구멍에 끼워넣기만 하면 되지만 생면부지의 사람과 나를 맞춰간다는 것은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이름부터 나이, 취미, 하는 일까지 대강의 신상은 서로 파악한 후에야 대화를 어느정도 주고받을 정도가 되는데 문제는 신상을 파악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상을 알기 위해선 많은 질문이 필요한데 그렇다고 심문하듯 질문만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떠한 접점을 찾게 되면 그때부터 물꼬가 트이기 시작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내겐 좀 어렵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어떻게 그 사람에게 다가가느냐 인 것 같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파야한다고, 내가 먼저 마음을 열고 웃어주고 말을 계속 건다면 그 사람도 내 사람이 되는 것이다. 


말을 번지르르, 그럴 듯하게 하지만 역시 어렵다. 집사님 댁에 한 번 놀러가야겠다. 그 친구도 헤어지기 전에 집에 한 번 놀러오라고 그랬다. 빈말인 게 확실하지만 그래도 난 패기 있게 찾아갈 거다.





2.










(스토리 북이 있다. 사야겠다.)




어제는 친구들과의 약속이 취소되어 종일토록 집에 있었다. 저녁에 고모네와 삼촌이 들러 오리고기집에 가서 동생와 한 마리를 해치우고 오기 전까지 나는 씻지도 않은 채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들었다. 음악이라고 해봐야 요즘 푹 빠져서 듣고 있는 에이핑크의 노래들이고 책이라고 해봐야 예전에 읽다가 마지막장을 끝까지 읽지 못했던 테스를 읽었고 영화라고 해봐야 '드래곤 길들이기 2'였다. 


하지만 다 좋았다. 에이핑크의 노래들은 아주 발랄하고 귀여워서 자꾸 들어도 쉽게 질리지 않는다. 노래들이 전부 사랑타령이긴 하지만 예전에 짝사랑하던 기분도 살풋 들기도 하고 무료한 생활에 생수가 되는 것 같다. '테스'의 끝은 정말 비극이었다. 이런 비극을 이전에 읽어본 기억이 없을 정도였다. 책을 덮고 한참 가만히 있다가 일어서서 또 가만히 있었다. 영화가 제일 좋았다. 형만한 아우없다고 보통의 후속작들은 흥행 참패와 더불어 엄청난 욕을 먹기 마련인데 '드래곤 길들이기 2'의 평판도 그랬다. 북미에선 흥행이 저조했고 나도 재미없다는 평가를 들어왔다. 때마침 시작 부분이 지루하고 어색해서 한 주 전에 재생했다가 다시 창을 닫은 일도 있었다.


그러나 웬걸, 영화가 끝나갈 무렵 나는 엉엉 울고 있었다. 내가 영화를 보면서 울 때는 항상 머릿속으로 이것 때문에 눈물이 난다, 하고 인지하는 편인데 이것에서 벗어난 두 번째 경우였다. 처음은 일본 멜로 영화인 '다만 널 사랑하고 있어' 였다. 이 영화의 결말에서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책상에 툭 떨어지는 기이한 현상을 경험한 바 있다. 그나마 이 영화는 다양한 감정이 표출되는 멜로 영화이니 이해가 간다손 치더라도 '드길2'를 보면서 엉엉 우는 건 뭔가. 나는 휴지로 눈물을 훔치면서도 내가 왜 울고 있지? 하고 생각했다. 마음이 허하긴 한가보다 생각했다.


'드길 2'의 주인공인 히컵은 드래곤을 지배하려는 드라고 군단에 맞서 싸운다. 전형적이게도 드래곤과 진정으로 교감하고 화합하려 했던 히컵의 승리로 영화는 끝이난다. 영화 말미에 히컵은 침몰하는 드라고를 향해 이렇게 외친다. 충성심은 너처럼 무력으로 얻을 수 없어. 바로 나처럼 얻는 거지! 나는 영화수첩 30자 평에 이 영화를 이렇게 요약했다. "올라선다는 것은 지배가 아니라 지켜준다는 것"





3.


조금은 편파적인 글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아이들 보는 애니메이션 영화에서까지 이토록 윗사람의 책임과 태도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의 가장 큰 이슈인 조현아 부사장의 행태를 보면 한숨만 나온다. 갑과 을이라는, 언젠가부터 권력의 주종 혹은 상하관계로 정립되어버린 관계가 조부사장과 승무원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를 뒤덮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고 무섭기만 하다. 민주주의를 내세우는 국가에서 아랫사람을 존중하고 떠받치기는커녕 자신들의 몸무게를 늘려 지지대를 꺾으려고만 하니 진정으로 국가가 원활히 돌아갈까 의심스럽다. 지금껏 이런 사태로 처벌받고 비난받은 '갑'의 인간들이 수두룩한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이런 행위를 하다니. 내 머리론 이해가 안 간다. 자기한테는 비난의 화살이 비껴갈 줄 알았던 걸까?


중요한 것은 도의다. 조부사장은 법을 어긴 게 아니다. 그녀는 도의의 선을 넘어섰다. 아버지의 권력을 등에 업고 호가호위하다보니 세상에는 도의라는 것이 통용되고 있다는 것을 배우지 못한 것이다. 도의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는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교육 속에, 초중고 중등교육의 교과과정 속에 녹아 있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수용하고 정립해야 한다. 그녀는 이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일까. 자기가 어떤 짓을 하든 모든 것을 덮어주는 큰 이불과 같은 권력이 그녀를 떠받들고 있었으니.


뉴스를 봤다. 수원의 토막살인과 종북 콘서트, 조현아 부사장의 기사를 샅샅이 훑었다.


한 시간 가량 긴 글들을 읽어내려가며 나는 몇 번의 한숨을 내쉬었는지 셀 수 없다.


등 따듯하고 배 부르니까 자기들이 왜 배부르고 등 따신지 잊은 것 같다.


특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종북 콘서트다. YTN 뉴스를 보면서 나는 기가 찼다. 어쩜 저리도 당당히 카메라 앞에 서서 저따위 주장을 내세울 수 있을까. 그녀는 정말로 사람들과 언론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처럼 자기 주장을 역설하고 있었다. 가증스럽고 역겨웠다. 기사를 두 번 읽고 세 번 읽어도 나는 그녀들의 행보를 납득하기 어렵다. 김정일이 사망하자 최소한 검은 옷은 입어야 하지 않겠냐던 황 모 위원의 발언을 듣고는 내가 다 억울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 SNS에는 탈북 여성들의 억울한 호소를 담은 기사가 올라와 있다. 신은미 황선과 맞짱 토론을 요구하며 자신들의 고통을 읍소한 탈북자들의 이야기는 참으로 참담하다. 신 모씨는 미국 국적이란다. 아 나 또 어이없어. 그만 써야겠다. 이건 내가 화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국가적 재앙이다. 올해 우리나라에 악재가 씌었나보다.


박 씨는 시신을 훼손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럼 또 형량이 깎이겠지. 나는 화가 나다 못해 슬퍼진다.





4.


윗사람들에게 '드래곤 길들이기 2'를 어서 보여주고 싶다.


느껴라.





5.


밀회를 보고 있다. 야간 알바를 하면서 끝까지 다 볼거다.


미생도 봐야 겠다. 야간 알바를 하면서 재밌게 다 볼거다.


사실 나는 지금 아주 힘겨운 다이어트를 하고 있다. 저녁 여섯 시 이후로 아무것도 안 먹는 건 기본이고 보통 열시에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내내 굶거나 세 시 경에 가볍게 뭘 주워 먹곤 끝이다. 가만히 앉아만 있으니 에너지 소모가 많지 않아 덜 배고픈 덕에 미칠 듯이 허기지지도 않는다. 한창 먹어대면서 살 걱정을 할 때 한 친구가 허기를 즐기라고 했는데 이제야 그게 조금은 이해가 간다. 대학도 붙었겠다, 상경도 하겠다, 나도 이제 남들처럼 빼입고 애인도 만들고 대학생활도 즐겁게 하고 싶다. 살을 쫙 빼야 겠다. 두 달... 알바 하면서 틈틈이 스트레칭 하고 안 먹고 그러면 살이 빠지긴 빠지겠지.





6.


테스 리뷰를 써야겠다. 


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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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2014-12-15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애니메이션을 꼭 봐야겠어요 ㅋ

이진 2015-01-13 20:44   좋아요 0 | URL
꼭 보시길 바랍니다 ㅎ

아이리시스 2014-12-17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이 먹어요~아직어른아니야^^
나도 에이핑크♥ 밀회♥ 미생♥ 드길은 안봤고 야간알바는 ㅠㅠ 소이진님 잘지내요?~^^

이진 2015-01-13 20:44   좋아요 0 | URL
아직 어른 아닌거죠?
아이님 ㅠㅠ 보고싶어요 너무
저 지금 에이핑크 밀회 미생 전부 섭렵했어요... 이거 한다고 지금 바빠서 알라딘도 못하고!

ICE-9 2014-12-18 0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빨리 써요, 테스 리뷰^ ^
나는 에이핑크는 모르겠고 밀회는 안봤으며 드길은 1만 봤어요. 예전에 극장에서 3D로 아주 신나게, 혼자서! ^ ^
야간알바할 때 드렁큰 타이거의 편의점 들으니 참 쫄깃 하더군요. 미생은 강추!

이진 2015-01-13 20:45   좋아요 0 | URL
헤르메스님.. 강추하는 이유가 있었군요 미생 아우!!! 아우 좋아!!
드길!! 신나게 혼자서!! 저 이제부터 드길 같은 거 나오면 심야로 혼자서!! 아주 신나게 볼겁니다
야간알바할 때 드렁큰 타이거라...
참고해두겠습니다 ^_^

책을사랑하는현맘 2014-12-18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번 글이 눈에 쏙쏙 들어오게 맘에 드네요 ㅎㅎ 꼭 찾아가세요. 패기있게!
근데 살 빼려다 건강 해쳐요. 아직까지는 많이 먹고 잘 자고 열심히 운동하시면 더 좋겠네요^^

이진 2015-01-13 20:46   좋아요 0 | URL
현맘님! 반가워요
살 빼려다... 일단 먹어야지.. 하고 야간알바 하니까 체력이 후달려서 먹지 않고는 못 버티겠더라구요
그래서 이젠 헬스 다니면서 운동도 좀 하고 그러려구요!

jo 2014-12-30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살 빼려고요. 고3때 찔거니까 쪄도 돼지처럼은 안보일정도로 미리 살을 빼 둬야 해요. 전 이제 3년의 레이스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학교 신입생 설명회 갔더니 공부를 안하고 오면 3월달 달력이 찢어지기 전에 우리들 마음먼저 짖어질 거래요. 제가 선택한 레이스니 열심히 뛰어야 하는데 내키는 데로 되지는 않네요.

이진 2015-01-13 20:47   좋아요 0 | URL
조님.. 맞아요 살은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빼는 게 맞는 거 같아요
늦으면 늦을수록 마음도 나태해지고 몸도 불어서 빠지질 않아요 흑흑...
조님이 그러고보니 예고 들어갔던가??

jo 2015-01-17 13:02   좋아요 0 | URL
제가....... 예고라니요! 뭐 제가 뛰어나게 그림을 잘그리긴 하지만 아쉽게도 예고갈 정도는 아니라서 외고를 가기로 했습니다~ 서울빨리 오세요. 좋아요

마음을데려가는人 2015-01-02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경! 하시는군요. 이제 같은 서울 하늘 아래에 사는 건가요? 후훗 :)

이진 2015-01-13 20:46   좋아요 0 | URL
마음님 ^__________^
마음님과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살게 된다니 꿈만 같아요! 힛
 






학교를 가지 않으니 남는 시간이 되게 많아졌다.

다행히 얼마 전에 편의점 야간 알바를 구해 평일에는

낮에도 시내에 나가 편의점 일을 배우고 있다.

편의점 일은 생각했던 것만큼 재미있고 흥미롭다.

그러나 오늘 같은 주말은 참 무료하고 시간이 안 간다.

원래 오늘은 친구들과 점심도 먹고 노래방도 가려고 했었는데

갑자기 친구 한 명이 진주에 알바를 하러 간다고 해서 취소되었다.

신발도 빨아서 준비해놓고 옷도 다 꺼내놓았는데 필요가 없게 되었다.

집에 먹을 것도 없기에 편의점에 가 도시락을 사와서 

드래곤 길들이기 2를 보면서 점심을 먹었다.

이제 친구들이 모두 알바에 투입되어 평일에는 아예 놀 수도 없다.

책 읽고 영화나 봐야겠다. 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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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의 이 책 나는 도무지 못 읽겠다.

한 구절 적어보겠다.


앨리시어의 어머니가 짐승을 다스린다.

씨발 상태가 되어 씨발년이 된 그녀는 그녀가 가진 짐승의 머리뼈부터 꼬리뼈까지를 다룬다.

짐승을 향해 팔을 휘두를 때 그녀는 관절을 어깨 뒤쪽까지 젖혀 완전한 힘을 싣는다.

어깨를 움켜잡을 때는 엄지로 쇄골을 쑤시고 배를 때릴 때는 불시를 노리고

짐승의 자세를 바로잡을 때는 정수리에 돋은 머리칼을 쥐고 당긴다.

귀를 꼬집고 뺨을 때리다가 엉뚱한 모서리에 빗맞아 손가락을 삐고

악 소리를 지르며 누웠다가 발딱 일어나 짐승의 목을 쥐고 흔든다.

때리는 쪽도 맞는 쪽도 구토를 하며 보내는 시간이고 그럴 떄 그녀의 검은 눈은 쇠구슬처럼 작고 단단하다.

땀이 고인 얇은 턱은 악다물어 터질 듯하고 귀는 창백하다.

반들반들하고 나긋나긋하게 그녀의 기색을 먹은 옷자락에서 타는 듯한 피부 냄새가 난다.


독서할 수 없는 책이 있고 감상할 수 없는 영화가 있다.

황정은의 이 책이 그렇고 '마터스'가 그렇다.

나는 잠시 이 책을 옆으로 차치해두고 김훈의 남한산성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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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E-9 2014-12-18 0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쩌죠? 나는 정말 좋았는데~^ ^;
마터스도 환장했어요~^ ^; 나만 어쩌면 이상한 걸지도... 원래 공포영화 정말 좋아라 합니다만...^ ^;
 






0.


" 버스에 가장 오래 앉은 사람은


가장 바깥에 산다 그곳은 춥다 "     - 김소연, 수학자의 아침





1.






2.


버스에 앉아 창가를 물끄러미 내다본다. 스치듯 흐트러지는 풍경. 바삐 걷는 사람들, 올곧게 솟은 가로수, 밀도 있게 들어선 건물들, 그리고 공기와 생기와 삶들, 모든 곳에 녹아 있는 각자의 이야기. 단지 들여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속삭이는 이야기가 들리는 듯하다. 아무도 없는 버스 안에서 도로를 따라 덜컹거리는 좌석에 몸을 묻고 어디든 가본 고 싶을 때가 있다. 저마다의 풍경이 전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눈은 감은 채 세상 위로 부유하고 싶을 때가 많다. 그럴 때면 나는 외롭다. 그런 시간은 내게 있어 가장 추운 시간이고 몸을 움직이기 힘든 시간이다.


문득 그런 순간들은 찾아온다. 밥을 먹다가, 교실에 앉아서 책을 읽다가, 친구들과 거리를 걷다가, 도서관에서 컴퓨터를 하다가, 친구와 메신저를 주고받다가, 친구들과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다가, 여럿이 모여서 떠들고 있는 친구들을 보다가, 조용히 앉아 자습하는 친구들을 보다가, 창 밖으로 운동장을 지켜보다가, 학교 앞 화단에서 자라고 있는 야자수를 보다가 나는 울적해지고 외로워진다. 나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우울해진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내 울증의 원인을 알고 있다. 다만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아니 원인을 꺼내게 된다면 그것을 더 명확히 직면해야 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나는 더 우울해질 것이 확실하므로 나는 그것을 속에 꽁꽁 싸매둔다.


관계, 라는 것이 나는 참 두렵다. 그리고 아직 잘 모르겠다. 


간, 쓸개도 빼주고 평생 붙어다닐 것만 같았던 친구와 소원해졌다. 분명 내 문제도 있었고 친구에게도 잘못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서로에 대한 불만이 쌓여만 갔고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친구는 내게 절교 통보를 해왔다. 우리는 본래 부산으로 진학해서 함께 자취하자는 계획을 짜놨었는데 그걸 파기하자는 거였다. 사흘 정도 연락이 없다가 다짜고짜 전화를 걸어 선언한 것이었기 때문에 전화를 끊고 나서도 나는 한동안 맥없이 앉아 있었다. 정신이 들고 친구의 말이 절교 선언임을 깨닫고 난 뒤에 나는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홀가분, 시원함, 섭섭함, 서운함, 허함, 슬픔, 외로움, ……. 아니다. 이렇게 단어로 형용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나는 다소 피로했고 감긴 눈을 뜨기 힘들었다. 


그 일에 대처하지 못한 채 사흘이 지난 저녁이었다. 친구는 술을 잔뜩 마시고 우리집에 쳐들어왔다. 한창 특별새벽집회에 반주를 나가느라 잠을 통 자지 못해 초저녁부터 잠을 보충하고 있을 때였다. 나는 잠도 깨지 못하고 그를 맞아야 했다. 친구는 꽤 힘들어 보였는데 대학 때문인지 아니면 나 때문이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나는 그를 제대로 반기지 못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친구는 내 옆에 눕더니 내 팔을 잡아 당겨 자기를 감쌌다. 친구는 나를 정말 좋아하는 듯했고 나도 친구가 좋았다. 내게 있어 유일하다 싶은 친구였다. 


화해한 듯 했지만 내 육체는 그를 이미 차단해버린 것 같았다. 그가 불편했고 미소조차 지어지지 않았다. 눈 근육은 마비된 것처럼 경직되었고 친구의 전화도 반갑지가 않았다. 내 반응이 이토록 미적지근하자 친구도 점점 내게서 관심을 거두어갔다. 마침내는 지금의 상황에 이르렀다. 우리는 더이상 서로에게 말을 걸지도 눈길을 주지도 않게 되었다. 내가 자초한 일인 것만 같아 마음이 아프다. 나 혼자만의 착각인 것만 같아 불안하다. 하지만 더이상 예전처럼 마음을 터놓을 수 없다는 걸 내가 느끼고 있고 알고 있다. 시간이 더 흐르지 않는 이상 나는 전처럼 친구를 받아들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몇 안 되는 내가 나에 대해 파악하고 있는 일이다.





3.


내가 문득 외로워지는 것은 그 때문인가.


요 며칠은 친하게 지내는 여자아이들과 함께 놀았다. 부산에서 면접보는 친구를 따라가서 이틀 동안 놀기도 하고 피자도 먹고 치킨도 먹고 스파게티도 먹고 영화도 보고 즐겁게 놀았다. 그러나 그 순간이 지나고 집을 돌아왔을 때 나는 오래 멍한 상태에 머무른다. 내가 원하는 관계가 이것인가. 물론 좋다. 행복하고 즐겁고 기쁘다. 하지만 관계적인 측면에 보았을 때 나는 현재 얼마나 위태로운 줄 위에 서 있는 것인지. 의지할 곳도 기댈 곳도 없는 외줄 위에서 바람 부는 대로 휩쓸리고만 있는 것 같다. 심장에 굳게 박혀 있던 기둥이 한순간에 빠져버린 듯, 허하기만 하고 추운 느낌. 





4.


그래서 더 위축된다.


스스로 작아지려 하고 있다.





5.




안나 윈투어의 헌정작이라고도 할 만한 '셉템버 이슈'를 어제 봤다.


미국 보그지의 편집장으로서 현 패션계의 정점에 서 있는 여자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거물 안나 윈투어 휘하로 보그 9월호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다. 안나 윈투어의 말 한 마디에 패션계의 흐름이 좌지우지 되고 세계 4대 컬렉션의 순서가 바뀌며 디자이너의 미래가 결정되는 것은 물론 마크 제이콥스를 발굴해낸 여인이라고 하니 그 위상이 얼마나 높은지는 짐작할 만하다. 메릴 스트립과 앤 해서웨이가 유쾌한 연기를 펼쳐낸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모티프를 따온 여인이라고도 하니 어떤 여인일까 정말 궁금했다.


그녀는 냉철했지 냉정하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를 나긋했고 웃음도 많았다. 메릴 스트립의 연기만을 생각하고 있었기에 아주 차갑고 모진 얼음 마녀를 떠올렸지만 그녀는 오히려 패션계에 오래 근속한 일인자 혹은 우두머리라고 불릴만 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자신의 일에 자부심이 굉장히 뛰어나고 사람들과의 관계 또한 매끄럽다. 그녀가 냉철한 것은 오직 그녀의 잡지를 편집할 때 뿐. 잡지에 오를 사진을 고를 때면 그녀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스타일리스트인 그레이스의 사진마저도 빼버리는 결단력을 가지고 있다.


치열하고도 체계적인 그녀의 삶은 뭉클하게 다가왔다. 


무언가에 열정을 쏟을 수 있다는 것, 어떤 분야에서 최고로서 군림한다는 것, 또 그 자리에 걸맞은 능력을 가지고 지휘한다는 것 모두가 부러웠다.





6.


영화를 봐야겠다.


한바탕 울고 속을 게워내야겠다. 아니다. 슬픈 영화는 보지 말아야지.


드래곤 길들이기를 봐야겠다.





7.









" 난 쏘다녔지, 터진 주머니에 손 집어넣고,


짤막한 외투는 관념적이게 되었지 "     - 랭보, 지옥에서 보낸 한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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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03 0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03 1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03 08: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03 1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4-12-04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이진님, 오랜만이예요...
여전히 글이 따스하고 달콤하고 때로는 퇴폐적인 우울감이 들기도 해요, 개인적인 평가 미안해요. ^^

사람과의 관계, 그 마음 참 어려워요.
그리고 용기가 필요하더라구요, 내게 얼마나 절실한가의 문제인 것 같아요.
늘... 사람이 제일 어려워요. 그러게요. 그리고 저도 마지막처럼 열정을 다해 살고 싶다고 꿈을 꾸네요.

고등학생 조카같았는데, 이제 성인이 되는군요..... ^^
 






남해는 정말이지 알바할 데가 없다.

웬일로 알바천국에 편의점 야간 알바를 구한다기에 전화를 걸었다.

이런 전화는 처음인지라 한 시간 가량 고민을 하다 건 전화였다.

최저임금은 못 받지만 점장님은 좋은 분이라는 소리를 듣고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오래 전화를 받지 않기에 끊으려던 찰나 수화기 건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편의점 점장인 듯한 남자는 다짜고짜 나이를 물었다.

열 아홉에 고삼 끝난 남해고 학생이라고 하니 십 초 정도 흠-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힘들겠다면서 전화를 끊으셨다.

아 나는 당황스럽고 마음이 편치가 않다.

96년 생은 쓰지 않는다는 글을 많이 봤지만 실제로도 그렇다니.

친구랑 알바자리나 구하러 돌아다녀야 겠다.

팔십 만원이 필요한데 오만원밖에 없다니.

일단은 잠을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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