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 이상화
1.
교회에 새로운 친구가 왔다. 한 집사님의 동생이었는데 미국에서 지내다 방학을 맞아 잠시 한국에 내려온 것이라 했다. 마침 나와 동갑인 남자아이였기에 나는 호기심을 가지고 살펴보았다. 미국에서 살아서인지 키는 나보다도 컸고 골격도 튼튼해보였다. 몸은 꽤 마른편이었고 캘리포니아에서 살다와서 그런지 바닷바람이 몸을 휘몰아치는 남해의 추위에 잘 적응하지 못해보였다. 연신 춥다고 말하면서 코트를 여몄다. 생김새는 중학교 2학년때 사회과목을 맡았던 선생님과 놀랍도록 흡사해서 도무지 또래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성격도 나와 비슷해보였다. 먼저 다가가지 못하고 부끄러움이 많은 듯한. 물론 그 친구야 여기가 처음이라 모든 게 어색하고 민망하겠지만 그 아이를 보는 내 심정도 그랬다. 마침 오늘 찬양대 연습도 길어지고 나도 피로한지라 이야기할 겨를이 없었다. 결국 친해지지 못하고 각자 집으로 향했다.
늘 느끼는 거지만 타인과의 관계는 첫 단추가 가장 끼우기 어렵다. 옷에서야 맞는 구멍에 끼워넣기만 하면 되지만 생면부지의 사람과 나를 맞춰간다는 것은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이름부터 나이, 취미, 하는 일까지 대강의 신상은 서로 파악한 후에야 대화를 어느정도 주고받을 정도가 되는데 문제는 신상을 파악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상을 알기 위해선 많은 질문이 필요한데 그렇다고 심문하듯 질문만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떠한 접점을 찾게 되면 그때부터 물꼬가 트이기 시작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내겐 좀 어렵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어떻게 그 사람에게 다가가느냐 인 것 같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파야한다고, 내가 먼저 마음을 열고 웃어주고 말을 계속 건다면 그 사람도 내 사람이 되는 것이다.
말을 번지르르, 그럴 듯하게 하지만 역시 어렵다. 집사님 댁에 한 번 놀러가야겠다. 그 친구도 헤어지기 전에 집에 한 번 놀러오라고 그랬다. 빈말인 게 확실하지만 그래도 난 패기 있게 찾아갈 거다.
2.
(스토리 북이 있다. 사야겠다.)
어제는 친구들과의 약속이 취소되어 종일토록 집에 있었다. 저녁에 고모네와 삼촌이 들러 오리고기집에 가서 동생와 한 마리를 해치우고 오기 전까지 나는 씻지도 않은 채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들었다. 음악이라고 해봐야 요즘 푹 빠져서 듣고 있는 에이핑크의 노래들이고 책이라고 해봐야 예전에 읽다가 마지막장을 끝까지 읽지 못했던 테스를 읽었고 영화라고 해봐야 '드래곤 길들이기 2'였다.
하지만 다 좋았다. 에이핑크의 노래들은 아주 발랄하고 귀여워서 자꾸 들어도 쉽게 질리지 않는다. 노래들이 전부 사랑타령이긴 하지만 예전에 짝사랑하던 기분도 살풋 들기도 하고 무료한 생활에 생수가 되는 것 같다. '테스'의 끝은 정말 비극이었다. 이런 비극을 이전에 읽어본 기억이 없을 정도였다. 책을 덮고 한참 가만히 있다가 일어서서 또 가만히 있었다. 영화가 제일 좋았다. 형만한 아우없다고 보통의 후속작들은 흥행 참패와 더불어 엄청난 욕을 먹기 마련인데 '드래곤 길들이기 2'의 평판도 그랬다. 북미에선 흥행이 저조했고 나도 재미없다는 평가를 들어왔다. 때마침 시작 부분이 지루하고 어색해서 한 주 전에 재생했다가 다시 창을 닫은 일도 있었다.
그러나 웬걸, 영화가 끝나갈 무렵 나는 엉엉 울고 있었다. 내가 영화를 보면서 울 때는 항상 머릿속으로 이것 때문에 눈물이 난다, 하고 인지하는 편인데 이것에서 벗어난 두 번째 경우였다. 처음은 일본 멜로 영화인 '다만 널 사랑하고 있어' 였다. 이 영화의 결말에서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책상에 툭 떨어지는 기이한 현상을 경험한 바 있다. 그나마 이 영화는 다양한 감정이 표출되는 멜로 영화이니 이해가 간다손 치더라도 '드길2'를 보면서 엉엉 우는 건 뭔가. 나는 휴지로 눈물을 훔치면서도 내가 왜 울고 있지? 하고 생각했다. 마음이 허하긴 한가보다 생각했다.
'드길 2'의 주인공인 히컵은 드래곤을 지배하려는 드라고 군단에 맞서 싸운다. 전형적이게도 드래곤과 진정으로 교감하고 화합하려 했던 히컵의 승리로 영화는 끝이난다. 영화 말미에 히컵은 침몰하는 드라고를 향해 이렇게 외친다. 충성심은 너처럼 무력으로 얻을 수 없어. 바로 나처럼 얻는 거지! 나는 영화수첩 30자 평에 이 영화를 이렇게 요약했다. "올라선다는 것은 지배가 아니라 지켜준다는 것"
3.
조금은 편파적인 글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아이들 보는 애니메이션 영화에서까지 이토록 윗사람의 책임과 태도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의 가장 큰 이슈인 조현아 부사장의 행태를 보면 한숨만 나온다. 갑과 을이라는, 언젠가부터 권력의 주종 혹은 상하관계로 정립되어버린 관계가 조부사장과 승무원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를 뒤덮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고 무섭기만 하다. 민주주의를 내세우는 국가에서 아랫사람을 존중하고 떠받치기는커녕 자신들의 몸무게를 늘려 지지대를 꺾으려고만 하니 진정으로 국가가 원활히 돌아갈까 의심스럽다. 지금껏 이런 사태로 처벌받고 비난받은 '갑'의 인간들이 수두룩한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이런 행위를 하다니. 내 머리론 이해가 안 간다. 자기한테는 비난의 화살이 비껴갈 줄 알았던 걸까?
중요한 것은 도의다. 조부사장은 법을 어긴 게 아니다. 그녀는 도의의 선을 넘어섰다. 아버지의 권력을 등에 업고 호가호위하다보니 세상에는 도의라는 것이 통용되고 있다는 것을 배우지 못한 것이다. 도의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는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교육 속에, 초중고 중등교육의 교과과정 속에 녹아 있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수용하고 정립해야 한다. 그녀는 이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일까. 자기가 어떤 짓을 하든 모든 것을 덮어주는 큰 이불과 같은 권력이 그녀를 떠받들고 있었으니.
뉴스를 봤다. 수원의 토막살인과 종북 콘서트, 조현아 부사장의 기사를 샅샅이 훑었다.
한 시간 가량 긴 글들을 읽어내려가며 나는 몇 번의 한숨을 내쉬었는지 셀 수 없다.
등 따듯하고 배 부르니까 자기들이 왜 배부르고 등 따신지 잊은 것 같다.
특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종북 콘서트다. YTN 뉴스를 보면서 나는 기가 찼다. 어쩜 저리도 당당히 카메라 앞에 서서 저따위 주장을 내세울 수 있을까. 그녀는 정말로 사람들과 언론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처럼 자기 주장을 역설하고 있었다. 가증스럽고 역겨웠다. 기사를 두 번 읽고 세 번 읽어도 나는 그녀들의 행보를 납득하기 어렵다. 김정일이 사망하자 최소한 검은 옷은 입어야 하지 않겠냐던 황 모 위원의 발언을 듣고는 내가 다 억울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 SNS에는 탈북 여성들의 억울한 호소를 담은 기사가 올라와 있다. 신은미 황선과 맞짱 토론을 요구하며 자신들의 고통을 읍소한 탈북자들의 이야기는 참으로 참담하다. 신 모씨는 미국 국적이란다. 아 나 또 어이없어. 그만 써야겠다. 이건 내가 화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국가적 재앙이다. 올해 우리나라에 악재가 씌었나보다.
박 씨는 시신을 훼손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럼 또 형량이 깎이겠지. 나는 화가 나다 못해 슬퍼진다.
4.
윗사람들에게 '드래곤 길들이기 2'를 어서 보여주고 싶다.
느껴라.
5.
밀회를 보고 있다. 야간 알바를 하면서 끝까지 다 볼거다.
미생도 봐야 겠다. 야간 알바를 하면서 재밌게 다 볼거다.
사실 나는 지금 아주 힘겨운 다이어트를 하고 있다. 저녁 여섯 시 이후로 아무것도 안 먹는 건 기본이고 보통 열시에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내내 굶거나 세 시 경에 가볍게 뭘 주워 먹곤 끝이다. 가만히 앉아만 있으니 에너지 소모가 많지 않아 덜 배고픈 덕에 미칠 듯이 허기지지도 않는다. 한창 먹어대면서 살 걱정을 할 때 한 친구가 허기를 즐기라고 했는데 이제야 그게 조금은 이해가 간다. 대학도 붙었겠다, 상경도 하겠다, 나도 이제 남들처럼 빼입고 애인도 만들고 대학생활도 즐겁게 하고 싶다. 살을 쫙 빼야 겠다. 두 달... 알바 하면서 틈틈이 스트레칭 하고 안 먹고 그러면 살이 빠지긴 빠지겠지.
6.
테스 리뷰를 써야겠다.
춥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