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 버스에 가장 오래 앉은 사람은
가장 바깥에 산다 그곳은 춥다 " - 김소연, 수학자의 아침
1.
2.
버스에 앉아 창가를 물끄러미 내다본다. 스치듯 흐트러지는 풍경. 바삐 걷는 사람들, 올곧게 솟은 가로수, 밀도 있게 들어선 건물들, 그리고 공기와 생기와 삶들, 모든 곳에 녹아 있는 각자의 이야기. 단지 들여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속삭이는 이야기가 들리는 듯하다. 아무도 없는 버스 안에서 도로를 따라 덜컹거리는 좌석에 몸을 묻고 어디든 가본 고 싶을 때가 있다. 저마다의 풍경이 전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눈은 감은 채 세상 위로 부유하고 싶을 때가 많다. 그럴 때면 나는 외롭다. 그런 시간은 내게 있어 가장 추운 시간이고 몸을 움직이기 힘든 시간이다.
문득 그런 순간들은 찾아온다. 밥을 먹다가, 교실에 앉아서 책을 읽다가, 친구들과 거리를 걷다가, 도서관에서 컴퓨터를 하다가, 친구와 메신저를 주고받다가, 친구들과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다가, 여럿이 모여서 떠들고 있는 친구들을 보다가, 조용히 앉아 자습하는 친구들을 보다가, 창 밖으로 운동장을 지켜보다가, 학교 앞 화단에서 자라고 있는 야자수를 보다가 나는 울적해지고 외로워진다. 나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우울해진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내 울증의 원인을 알고 있다. 다만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아니 원인을 꺼내게 된다면 그것을 더 명확히 직면해야 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나는 더 우울해질 것이 확실하므로 나는 그것을 속에 꽁꽁 싸매둔다.
관계, 라는 것이 나는 참 두렵다. 그리고 아직 잘 모르겠다.
간, 쓸개도 빼주고 평생 붙어다닐 것만 같았던 친구와 소원해졌다. 분명 내 문제도 있었고 친구에게도 잘못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서로에 대한 불만이 쌓여만 갔고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친구는 내게 절교 통보를 해왔다. 우리는 본래 부산으로 진학해서 함께 자취하자는 계획을 짜놨었는데 그걸 파기하자는 거였다. 사흘 정도 연락이 없다가 다짜고짜 전화를 걸어 선언한 것이었기 때문에 전화를 끊고 나서도 나는 한동안 맥없이 앉아 있었다. 정신이 들고 친구의 말이 절교 선언임을 깨닫고 난 뒤에 나는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홀가분, 시원함, 섭섭함, 서운함, 허함, 슬픔, 외로움, ……. 아니다. 이렇게 단어로 형용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나는 다소 피로했고 감긴 눈을 뜨기 힘들었다.
그 일에 대처하지 못한 채 사흘이 지난 저녁이었다. 친구는 술을 잔뜩 마시고 우리집에 쳐들어왔다. 한창 특별새벽집회에 반주를 나가느라 잠을 통 자지 못해 초저녁부터 잠을 보충하고 있을 때였다. 나는 잠도 깨지 못하고 그를 맞아야 했다. 친구는 꽤 힘들어 보였는데 대학 때문인지 아니면 나 때문이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나는 그를 제대로 반기지 못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친구는 내 옆에 눕더니 내 팔을 잡아 당겨 자기를 감쌌다. 친구는 나를 정말 좋아하는 듯했고 나도 친구가 좋았다. 내게 있어 유일하다 싶은 친구였다.
화해한 듯 했지만 내 육체는 그를 이미 차단해버린 것 같았다. 그가 불편했고 미소조차 지어지지 않았다. 눈 근육은 마비된 것처럼 경직되었고 친구의 전화도 반갑지가 않았다. 내 반응이 이토록 미적지근하자 친구도 점점 내게서 관심을 거두어갔다. 마침내는 지금의 상황에 이르렀다. 우리는 더이상 서로에게 말을 걸지도 눈길을 주지도 않게 되었다. 내가 자초한 일인 것만 같아 마음이 아프다. 나 혼자만의 착각인 것만 같아 불안하다. 하지만 더이상 예전처럼 마음을 터놓을 수 없다는 걸 내가 느끼고 있고 알고 있다. 시간이 더 흐르지 않는 이상 나는 전처럼 친구를 받아들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몇 안 되는 내가 나에 대해 파악하고 있는 일이다.
3.
내가 문득 외로워지는 것은 그 때문인가.
요 며칠은 친하게 지내는 여자아이들과 함께 놀았다. 부산에서 면접보는 친구를 따라가서 이틀 동안 놀기도 하고 피자도 먹고 치킨도 먹고 스파게티도 먹고 영화도 보고 즐겁게 놀았다. 그러나 그 순간이 지나고 집을 돌아왔을 때 나는 오래 멍한 상태에 머무른다. 내가 원하는 관계가 이것인가. 물론 좋다. 행복하고 즐겁고 기쁘다. 하지만 관계적인 측면에 보았을 때 나는 현재 얼마나 위태로운 줄 위에 서 있는 것인지. 의지할 곳도 기댈 곳도 없는 외줄 위에서 바람 부는 대로 휩쓸리고만 있는 것 같다. 심장에 굳게 박혀 있던 기둥이 한순간에 빠져버린 듯, 허하기만 하고 추운 느낌.
4.
그래서 더 위축된다.
스스로 작아지려 하고 있다.
5.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4/1202/pimg_7525421361111636.jpg)
안나 윈투어의 헌정작이라고도 할 만한 '셉템버 이슈'를 어제 봤다.
미국 보그지의 편집장으로서 현 패션계의 정점에 서 있는 여자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거물 안나 윈투어 휘하로 보그 9월호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다. 안나 윈투어의 말 한 마디에 패션계의 흐름이 좌지우지 되고 세계 4대 컬렉션의 순서가 바뀌며 디자이너의 미래가 결정되는 것은 물론 마크 제이콥스를 발굴해낸 여인이라고 하니 그 위상이 얼마나 높은지는 짐작할 만하다. 메릴 스트립과 앤 해서웨이가 유쾌한 연기를 펼쳐낸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모티프를 따온 여인이라고도 하니 어떤 여인일까 정말 궁금했다.
그녀는 냉철했지 냉정하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를 나긋했고 웃음도 많았다. 메릴 스트립의 연기만을 생각하고 있었기에 아주 차갑고 모진 얼음 마녀를 떠올렸지만 그녀는 오히려 패션계에 오래 근속한 일인자 혹은 우두머리라고 불릴만 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자신의 일에 자부심이 굉장히 뛰어나고 사람들과의 관계 또한 매끄럽다. 그녀가 냉철한 것은 오직 그녀의 잡지를 편집할 때 뿐. 잡지에 오를 사진을 고를 때면 그녀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스타일리스트인 그레이스의 사진마저도 빼버리는 결단력을 가지고 있다.
치열하고도 체계적인 그녀의 삶은 뭉클하게 다가왔다.
무언가에 열정을 쏟을 수 있다는 것, 어떤 분야에서 최고로서 군림한다는 것, 또 그 자리에 걸맞은 능력을 가지고 지휘한다는 것 모두가 부러웠다.
6.
영화를 봐야겠다.
한바탕 울고 속을 게워내야겠다. 아니다. 슬픈 영화는 보지 말아야지.
드래곤 길들이기를 봐야겠다.
7.
![](http://image.aladin.co.kr/product/13/83/coveroff/8937418037_1.jpg)
" 난 쏘다녔지, 터진 주머니에 손 집어넣고,
짤막한 외투는 관념적이게 되었지 " - 랭보, 지옥에서 보낸 한 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