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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발자국 ㅣ 창비시선 222
손택수 지음 / 창비 / 2003년 1월
평점 :
살을 감싸는 차가움은 옷을 입어도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페이퍼를 쓸 지 리뷰를 쓸 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엊그제 휴관일인 도서관에 잠입하여(사실 잠입했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 열람실은 개관 중이었기에. 그런데 요즈음 청소년들, 아니 현대인들, 최소한 우리 지역의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도서관은 곧 열람실이고, 열람실은 곧 독서실, 그러므로 도서관은 곧 독서실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 말인즉슨 도서관에서 책을 안 읽는다는 거다. 도서관 갈래? 하는 말은 이제 책 읽으러 갈래? 가 아니라 도서관 열람실에 가서 인강 들으며 공부할래? 하는 말이나 똑같다. 여기엔 독서실이 없으니 더욱 그럴 수 밖에.) 잡지 코너 테이블에 앉았다. 종합자료실-갖가지 책이 들어선 장소는 잠겨있었지만 잡지는 통로에 공간을 만들어 따로 빼두었기 때문에 그것으로라도 허기진 뇌를 채우고자 했다. <PAPER>라는 잡지에 실린 이이체 시인의 인터뷰를 읽으며 감탄하던 중이었다(이이체 시인은 스스로 게으름뱅이라고 칭하는데 얼마전 글틴 캠프에 다녀온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이체 시인은 그 자체로 시인이며 일반인은 따라갈 수 없는 고차원의 정신세계를 지니고 있단다. 등단하기까지 천 권을 읽었다는데 그 과정을 살펴보면 참 웃기다. 광화문 교보문고가 개장하자마자 시집 코너에 가서 시집을 읽다가 점심 때가 되면 밥을 먹고 담배 한 대 피우고 또 시집 읽고 저녁 때가 되면 수업을 파한 문창과 친구들과 저녁 먹고 술 마시고 담배 한 대 피우고 서점 문을 닫을 때까지 다시 시집을 읽었다고 한다. 이것이 아버지에게 충동적으로 내뱉은 "한 학기 안에 등단 못하면 시고 뭐고 때려치고, 아버지 원하는 거 할게." 하는 선언 때문이었다고 하니.). 물을 마시려 고개를 들었는데 눈 앞에 <한겨레 21>이 있었다. 불현듯 신형철이 떠올랐고, 나는 예전 호를 모아두는 곳에서 거의 칠십 권 정도를 가지고 다시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두어 시간 정도 신형철의 문학 사용법만 찾아서 읽었다. 좋은 글이 수차례 머리를 때리는 것은 상당히 즐거운 일이었다. 신형철의 글은 두손두발 다 들어 백기를 들고 싶을 정도로 훌륭했고, 그가 소개하는 시나 소설들마저 하나같이 빛났다. 특히 나는 그 중에서 그가 김중일의 시집을 소개해둔 지면이 가장 좋았고 그 시를 가져와보려 한다. '용산, 천안함 그리고'라는 부제를 가진 시다.
이것은 이상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나의 이상형은 털 없이 매끄러운 피부에 가급적 눈물의 숱이 적은 평범한 사람입니다
……
시신의 일부 같은 저녁의 서쪽 하늘 아래서 어머니는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고 나면 온몸에 털이 무성해지는구나
흑백사진 속 인화된 작약 같은 음색으로 어머니는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꿈속에 숨어서 혼자 많이 우나 보다
깎아도 깎아도 끝이 없구나
누나는 턱밑까지 흘러내린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자신의 얼굴을 엉망으로 헝클어뜨린 긴 머리카락을
마당을 가득 채운 편서풍을 이용해 정리하곤 하였습니다
그 며칠 아버지와 형은 한 방울 그을린 눈물처럼
길에서 흔적 없이 흩어졌습니다
걷다가 모르게 빠진 한 올 머리카락처럼
길의 질량과 부피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
- 눈물이라는 긴 털, 김중일 『아무튼 씨 미안해요』
길의 질량과 부피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자신도 모르게 빠진 한 올 머리카락 같은 죽음. 그런 죽음으로 남편과 아들을, 아버지와 同氣를 떠나보내야한 어머니와 누이의 시간 모르고 자라나는 털. 자고 나면 무성해지고, 깎아도 깎아도 끝이 없고, 얼굴을 망쳐놓는 털들. 김중일은 눈물과 털을 훌륭하게 뒤섞어놓는다. 신형철은 이를 두고 "옳다."고까지 표현했다. 털은 누군가에게 내밀한 것이다. 누군가에게 털은 수치스러우며 부끄러운 것일 터다. 적어도 어머니와 누이에게 털은 바로 그런 것임이 분명하다. 눈물처럼 사라진 가족을 눈물이라는 긴 털로 배웅하는 여자들의 처절하고 비참한 모습은 절로 애도적 분위기에 잠기게 한다.
이렇게, 단 한 편의 시밖에, 그것도 일부만 보았지만, 김중일은 가족을 향한 애도와 슬픔을 '털'이라는 이미지로의 치환을 통해 표현했다. 눈물과 털, 그리고 은유라는 시의 기능이 조화되어 시너지효과를 십분 발휘했다. 그러나 손택수 시인은 그와 조금 다르다. 손택수 시인에게는 좀더 사실적이고 담담한 묘사가 자리하고 있다. 자신 가족을 향한 따뜻하고 서글픈 시선, 그리움, 애틋함, 동정……이 시어가 잔잔하게 깔리듯 시집 전체에 묻어 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시들도 바로 그러한 시들이고, 아마 시인이 특히 공들이고 사랑하는 시들도 바로 그러한 시들일 것 같다.
프레이야님의 페이퍼에 오른 안도현 시인의 시를 읽고 오래 가슴이 저렸다. "내 눈 밑으로 열을 지어 유유히 없는 길을 내며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내려다본 적 있다, 16층이었다//기럭아, 기럭아/나 통증도 없이 너의 등을 보아버렸구나/내가 몹시 잘못했다"(안도현, 등 『북항』). 통증도 없이 너의 등을 보아버렸구나... 통증도 없이 너의 등을. '등'이란 단어를 두고 생각했다. 그저 기댈 수 있는 버팀목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던 등이 사실 통증의 부위였구나. 등이란 알고보면 얼굴과 몸의 뒷면, 즉 암면이구나. 불거진 척추 마디 사이사이에 고된 노동과 피로, 쓸쓸함이 때처럼 끼어 있구나. 손택수 시인도 등을 애틋한 부위로 기억한다.
아버지는 단 한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
- 아버지의 등을 밀며, 손택수 『호랑이 발자국』(이하 동일)
"화성군 어디 공사장을 떠돌던 아버지"(송장뼈 이야기, 66쪽)는 한평생 제 몸보다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왔을 것이 분명하다. 변변한 직장 하나 없이 여러 공사장을 떠돌며 아내와 자식들을 부양해야 했을 가장의 부담이 가장 클 테고, 뭐 어디 공사장 막노동이 쉬운 일인가. 벽돌과 콘크리트를 지게에 지고 땀을 뻘뻘 흘리며 계단을 올라야했던 고되고 쓰라린 흔적이 아버지의 등에 남은 것이다. 아버지는 "가슴 깊이 가시를 물고 떨고 있"(탱자나무 울타리 속의 설법, 17쪽)는 빗방울처럼 "살속을 파고든 비수를 품고 둥그래진"(동일 詩) 것이 아닐까. 비수 같은 등의 흔적은 아버지에게 '털'과 같은 것이었을 지도. 아들에게 권위적이고자 했던 아버지는 그래서 아들과 목욕탕에 가지 않을 것일테다. 눈물같이 등에 그을린 지게 자국을 차마 보여주지 못하여서.
시인은 아버지가 무척 그리운 듯싶다. 조심스럽게 자신을 드러내는 그의 시엔 대부분 아버지가 등장한다. 아버지는 때로 권위적이고 엄하고 강하지만, 위의 시와 같이 여리게 등장한다. 또 '아버지와 느티나무'에서는 젊은 청년이다. 시를 통해 아버지와 교감하고 싶었던 것일까. 시인은 아버지는 물론 다른 가족들을 하나하나 챙긴다. 송곳니가 닮은 할아버지부터 찾아오는 이에겐 무조건 숟가락부터 쥐어주었던 외할머니…… 시인은 모두를 따뜻한 시선으로 챙긴다.
시인이 보듬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각박한 세상, 빠듯한 현실, 우리 모두의 삶을 능숙하게 다뤄낸다. 특히 불교적인 결합으로써 시인은 하고자하는 바를 충실히 드러낸다. 이시영 시인은 이를 두고 "오랜만의 생동하는 민중서사적 시인"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주로 비근한 소재를 들고 시를 쓰는 손택수 시인은 최근 문창과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이나 신춘문예를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고개를 가로저을 것이 눈에 선하다. 내가 활동하는 합평 카페에 만약 이 같은 시를 들고 간다면 무섭고 깐깐하신 멘토분들은 이것은 시가 아니라고 쳐낼 것도 같다. 나는 시집을 읽으며 연신 고개를 기울였다. 이렇게 좋은 시인데, 이렇게나 마음에 와닿는 시들인데 왜 시가 아닐까. 그렇다면 그분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서정시의 시대는 갔다. 그렇다. 손택수 시인은 서정시인이라는 데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오로지 서정시를 쓰는 시인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의 시는 서정시라기엔 다른 무언가가 있다. 그렇다고 서정시가 아닌 것도 아니다. 신서정이라고 할까. 이것이 옳은가.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손택수의 시는 무언가 쓸쓸하다. 아름다운 서정이 아닌 쓸쓸하고 고된 서정이다. 눈물 같은 시들, 지게자국 같은 시들이 시집을 일궈내고 있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일년 전부터 붉은 거미가 보인다고 하였다. 붉은 거미가 천장에서 내려와 큼큼한 냄새가 나는 방안을 흰 머리카락 같은 거미줄로 가득 채워놓고 있다 하였다. 아무도 그걸 치워주지 않는다며 까까머리 어린 손주의 손목을 잡고 거미줄에 걸린 나비 날개처럼 파르르 떨리는 숨을 몰아쉬곤 하였다. 그때 삭정이 손가락이 가리킨 곳, 눈곱처럼 먼지가 끼어 있떤 창문 너머론 짱짱한 가을 햇살이 하얗게 쏟아져내리고 있을 뿐이었는데
아십년도 더 지나 아픈 몸으로 시골집에 내려와서 당신이 앓아 누웠던 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다보니 보인다. 여전히 눈곱이 끼어 있는 창문 너머로 사방에 거미줄을 치고 있는 태양. 햇빛에 돌돌 말려 몸속의 수액이 빨려 올라가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는, 듣고 있어야 하는, 붉은 거미의 줄에 걸린 생. 누구도 벗어날 수 없고 아무도 대신 걷어줄 수 없다면
나는 그때 창문에 때묻은 커튼이라도 한 장 달았어야 했다.
허공에 손을 내젓는 시늉이라도 한두번 해주었어야 했다.
-붉은 거미, 22쪽
벚꽃이 진다 피어나자마자
태어난 세상이 절벽이라는 것을
단번에 깨달아버린 자들, 가지마다 층층
눈 질끈 감고 뛰어내린다
안에서 바깥으로 화르르
자신을 무너뜨리는 나무,
자신을 무너뜨린 뒤에야
절벽을 하얗게 쓰다듬으며 떨어져내리는
저 소리없는 폭포
벚꽃나무 아래 들어
귀가 얼얼하도록 매를 맞는다
폭포수 아래 득음을 꿈꾸던 옛 가객처럼
머리를 짜개버릴 듯 쏟아져내리는
꽃의 낙차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서
-폭포, 8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