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하성란의 글을 읽었다 그녀는 짝사랑하던 남자가 다른 여자와 사귀자 두달 동안을 끙끙 앓았다고 했다 그것을 그녀는 실연이라고 표현했다 실연한 그녀는 썼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를 주야장천 외우며 그녀는 썼다 그녀가 쓴 것은 혀일까 글일까 마음일까 몸일까 혀가 쓰다면 사랑은 초록 채소이고 글을 쓴다면 사랑은 사랑일 것이고 마음과 몸이 쓰다면 사랑은 무기이다 그녀는 글을 썼다 기형도도 글을 썼다


짧았던 밤 사랑하므로 짧을 수밖에 없었던 어둠 사랑을 잃었으므로 가혹하게 길어질 수밖에 없는 밤길

따듯하고 포근한 겨울 안개 혹은 뜨거운 사랑의 열기로 창에 서린 습기 그 사랑을 밝혀주던 촛불들

잘 있거라, 사랑아

아마도 좋지 않았던 때 두렵고 공포스런 마음으로 써내려간 사랑 얼굴을 흐르던 흔들리는 사랑

그토록 두려웠던 사랑아,

소유하고 싶고 소유되고 싶었던 주고 싶고 받고 싶었던 내 사랑 간절히 열망했던 사랑

나 이제 문을 잠그네 눈을 꼭 감고 떨리는 팔로 문을 닫고 문고리를 거네 가엾는 나는 갇혔네 어두운 사랑없는 빈집에 갇혔네 가엾는 내 사랑 내가 가뒀네 어둡고 헤진 빈집에 내가 가뒀네

잘 있거라, 사랑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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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06 2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06 2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착한시경 2013-02-07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들의 중학교 1학년 국어교과서에 엄마 걱정이라는 기형도의 시를 읽고 마음이 울컥했던 기억이 나네요~
기형도 자신의 어린 시절 모습이었을 것 같은데... 참 외로웠던 것 같아요~ 시장으로 열무 삼십단 팔러 간 엄마는 해가 져도 오지 않고~ 아무리 숙제를 천천히 해도 집으로 돌아오는 엄마의 발자국 소리는 들리지 않아요.팔리지 않는 열무를 바라보며 엄마는 얼마나 혼자있을 아들 걱정을 했을까요 ? 혼자있을 아이의 두려움과 외로움에도 맘이 아팠지만..가난한 형편때문에 아들을 혼자두고 장사를 다녀야 했던 엄마의 아픔이 더 이해가 되더라구요...역시 읽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시는 다양하게 읽혀지나 봅니다. 좋은 글 감사히 읽고 갑니다^^

이진 2013-02-07 23:30   좋아요 0 | URL
착한시경님, 이제 알라딘에는 점차 적응을... 하셔가나요? 들러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동생 국어교과서를 훑어가는데 기형도의 바로 그 시가 있더군요.
제대로 읽지 않고 설렁설렁 넘기기만 했었는데, 착한시경님께서 홀로 아들을 두고 일을 나가야 했던 엄마에게 이입되었다는 이야기는 정말 공감가요. 아이의 시각을 통해 그 뒷면까지 함께 보여주는 기형도는 참 멋진 시인인 거 같아요. 이 시는 뒤집어 볼 겨를없이 곧바로 다가와버리네요. 사랑을 잃고 스는 것이요.

좋은 밤 되세요 XD

단발머리 2013-02-07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시집을 손에 들고, 저 시를 읽고 나서 망연자실. 아.... 시란게 이런 거구나. 이런 사람이 천재구나. 감탄에 감탄, 슬픔에 슬픔을 껴안았던 때가 생각나네요. 소이진님 덕분에, 나는 구정에 기형도를 읽습니다. 어울리나요? 구정과 기형도. 구정엔 기형도. 안 어울리는 것 같은데...... ^^

이진 2013-02-07 23:32   좋아요 0 | URL
확실히, 저도 기형도의 시를 읽으며 시에도 플롯과 이야기가 있고, 구성이 존재하는 것을 느꼈어요. 시집이 한 권 인것이 가슴이 쓰리도록 비통하네요. 한 권이라도 남아 있는 것에 감사해야 할까요. 저도 구정에 기형도를 읽어야겠습니다. 구정에 기형도, 안 어울리면 어쩔 수 없이 김혜순을 읽어야지요. 더 안 어울릴까요. ㅎㅎ

jo 2013-02-07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 ㅎㅎ 첨에 제목보고, 소이진님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나? 하고 기대 했는데.. ㅜㅜ
전 요즘 이문열의 세계 명작 산책을 읽습니다. 저에게 아직 약간은 어려운 내용의 책도 있지만 그래도 도전하렵니다. ㅎㅎ

이진 2013-02-07 23:33   좋아요 0 | URL
이문열 작가의 소설도 참 좋아요. 글 쓰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많이 된다고 해요.
세계명작... 그래요 조님 나이엔 세계 명작을 많이 읽어두세요. 저는 그 때 펑펑 놀아서... 걱정이 태산입니다. 오 헨리 단편선... 같은 거도 읽어야하는데 엄두가 안 나네요. 시간적 여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