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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3판 ㅣ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추파춥스를 입에 물고 달콤한 맛을 빤다. 베토벤의 5번 교향곡을 소리를 크게 하여 듣는다. 추파춥스와 베토벤 교향곡은 어떠한 면을 들먹여도 썩 어울린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괴리적이다. 추파춥스는 작고 달콤하며 부드럽다. 입에서 돌돌 구르며 치아를 두드리는 동그란 알은 딱딱하고 끈끈하다. 뜨거운 열과 침에 서서히 녹아가는 추파춥스는 입 속에 달큼한 당으로 남는다. 엄지손가락 첫마디만큼 커다란 동그란 알은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듯 줄어든다. 그 모양 그대로 줄어들 때도 있고 타원형으로, 납작하게 작아질 때도 있다. 그리고 결국엔 없어진다. 입 안에 여운으로만 남아 있을 뿐 형태와 더 즐길 수 있는 사탕은 없어진다. 베토벤의 교향곡은 크고 감칠맛 나고 웅장하다. 스피커를 타고 흘러 귓속을 치열하게 파고드는 음파는 거대하고 장중하다. 환희의 열기와 生으로 치닫는 열정은 온 몸에 전율로 남는다. 무겁고 고통스럽게 시작한 곡은 서서히 장조로 변주된다. 모든 악기는 환희를 노래하기 시작하고 그 사이로 비치는 광명의 빛을 현을 떨며 반갑게 맞이한다. 악기의 연주는 끝나도 내비치는 빛과 은은하게 울리는 현의 떨림은 여전히 남는다. 사라지지 않고 귀에서 몸으로 혈관을 타고 퍼진다. 결국에는 내 몸이 베토벤 교향곡 안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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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ques Louis David Marat assassiné (1748~1825)>
흰 말이 갈기를 휘날리며 앞발을 최대한 쳐올리고 있다. 금방이라도 히이잉 하고 울음소리가 들릴 듯 벌어진 입술과 눈은 광기 어린 모습을 취한다. 열정으로 가득한 광기다. 그 위에는 산맥 위를 향해 손가락을 뻗은 채 앞을 응시하는 나폴레옹이 있다. 깊게 파인 눈과 꽉 다문 입은 그의 장군으로서의 패기와 결단력을 대신한다. 화려한 붉은 망토가 휘날리는 이 그림을 모두가 안다. 나폴레옹 그림을 그린 자크 루이 다비드는 살해당한 정치인을 그렸다. 바로 위의 [마라의 죽음]. 나폴레옹 그림이 반 타의적이며 인물을 미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면 마라 그림은 비슷하면서 다르다. 다비드는 오로지 자의적으로 자신의 친구였던 마라의 죽음을 그려낸다. 마라는 프랑스 대혁명을 이끌었던 자코뱅당의 일원이었다. 마라는 다수의 지롱드당원을 단두대로 보냈는데 여기에 분노한 지롱드당원 샬롯 코데이는 마라를 살해한다. 칼은 정확히 그의 가슴에 찔렸고 마라는 즉사한다. 코데이는 그 자리에서 잡혀 나흘 뒤에 처형당한다. 다비드는 이 역사적 사실에 시선을 주기보다 마라를 돋보이게 하였다. 세로로 긴 구도에 절반은 어둠으로 둘러싸여 있다. 적막이 짙은 공허 속에 마라는 욕조에 누워 죽어 있다. 가슴팍에서는 피가 철철 흐르고 욕조물은 빨갛게 물드는 동시에 상체와 고개를 비스듬히 젖히고 한쪽 팔을 욕조 밖으로 빼낸 채. 연설문과 펜을 끝까지 쥐고 있는 그의 손가락은 나중에 보더라도 그의 몸에 은은히 비치는 어떠한 빛을 오래 응시해야 한다. 마치 베토벤 교향곡에서의 광명의 빛, 환희의 빛과 같은 밝음이 마라의 몸을 감싼다. 공허 속의 빛. 다비드는 마라를 순교자와 같이 그려냈고, 성공했다. 온화한 표정과 밝고 부드러운 빛은 가히 신성하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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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vard Munch The Death of Marat 1863∼1944>
또 하나의 그림이 있다. 마라와 코데이를 그린 작품은 많다. 폴 자크나 장 자크 오에르의 그림말고도 더 있다. 다비드부터 시작해서 대부분의 마라 살해 사건을 그린 작품은 사실적이며 묘사적이다. 역사를 그리는 데 필수불가결한 것이기 때문일 터. 하지만 뭉크는 다르다. 특별한 그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작품 다수가 그렇듯 그가 그린 마라의 죽음 또한 무섭다. 거칠 필선과 아무렇게나 보이는 선들은 매우 불안하게 느껴진다. 초록색은 안정감을 준다는 색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뭉크가 사용하니 불안감을 더해준다. 마라는 죽어가는 것인지, 죽은 것인지 침대에 누워 있고 그 앞에 샬롯 코데이가 서 있다. 이목구비가 뚜렷하지 않은 얼굴은 유령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나신인 몸은 의아함을 불러낸다. 어라, 왜 나신인 걸까. 마라도 나신인 것으로 보아 두사람 사이에 관계가 있었던 것일까. 중요한 의문점은 아니라 생각되니 이만하고. 다비드가 마라의 희생정신, 혁명정신에 초점을 두고 성스럽게 그려냈다면, 뭉크는 마라의 '죽음'과 코데이의 충동성과 불안 등을 한데 모아 거칠게 그려냈다.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이하 파괴)>는 다비드의 그림을 차용했지만 사실 뭉크의 그림과 더 어울리지 않나 싶다. 불안하기 짝이 없는, 어딘가 검은색 물감으로 칠한 필선이 거칠에 드러나는 듯한. 분명 김영하의 글은 뭉크처럼 직설적이면서 추상적이고 불안하지 않지만 뭉크의 그림 같은 구석이 있다. 많다.
<파괴>를 읽는 것은 그림을 왼쪽 위 모서리부터 오른쪽 아래 귀퉁이까지 훑어가는 것와 비슷하다. 느낌이 닮았다는 것. 마라의 죽음을 다룬 그림 두 편을 구석구석 살펴보며 언뜻 보아선 알 수 없는 세세한 면까지 찾아가는 희열이 그것이다. <파괴>를 읽을 때의 기분이 아직 생생한데 바로 그것이다. 한강의 단편소설 '몽고반점'을 읽을 때 그랬다. 거칠게 요약하면, 머리카락이 숭숭 빠진 중년의 남자가 성욕을 이기지 못하고 비디오 아티스트&행위예술가라는 직업적 명목으로 여자를 범하는 내용이다. 작가 스스로 '파격적'이라는 평은 싫다고 말한 이 소설을 나는 학교에서 읽으며 방망이로 두들겨맞은 듯 멍했다. 입을 다물 수가 없었고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이혜경의 표현을 빌리자면 몸 속 어딘가가 터져 피가 봇물 터지듯 새어나오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 느낌이 <파괴>와 닮았다. <파괴>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파괴>는 정적이고 '몽고반점'은 동적이다. 말하자면 <파괴>는 그림 같고 '몽고반점'은 영화 같다. 느낌과 분위기 말고도 <파괴>와 '몽고반점'이 공통적으로 품고 있는 것이 하나 있는데 비디오 아티스트와 행위예술가이다. 두 작품 모두 비디오 아트를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파괴>는 예술욕, '몽고반점'은 성욕이다. (<파괴>에서는 아티스트가 품은 예술욕으로 인해 한바탕 싸움이 일어나는데 그것을 깊게 건드릴 능력은 되지 않고 이 문단 바로 다음에 인용하겠다.) 행위예술 또한 두 작품에서 자그마한 차이가 있다. <파괴>의 행위예술가는 당당하고 자존감이 높은 반면 '몽고반점'의 행위예술가는 곧 바스라질 듯한 고목 같이 힘 없고 순응적이다. 예전 어느 리뷰에선가 데려온 실레의 나무 그림과 그녀는 닮았다. 분위기를 좀 더 건드려보자면 두 작품은 환상적이면서도 지극히 현실적이다. 여성적이면서 남성적이고. 딱히 적확하다고 칭송할 만한 형용사가 없다는 점이 두 작품 사이의 가장 큰 공통점이 아닐까 싶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당찬 한 마디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김영하는 자살청부업자로 형상화한다. 살인청부업자도 아닌 자살청부업자. 작가의 말에 의하면 실제로 일본에 있는 직업이라고 하니 현실성이 조금은 부가된다. 어찌 되었든 김영하가 자살청부업자로 내세운 남자는 소설 전체의 화자이기도 하다. 남자는 매일을 자신의 손님을 찾는 데 쏟아붓는다. 신문에 조각기사를 내걸고 도서관 미술관 공원을 전전하며 재목을 탐색한다. 밤엔 동성애자부터 아버지에게 강간당하는 여학생까지 각종 고민을 가진 사람들과 전화를 한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을 걸러내어 결국 재질을 갖춘 사람이 나타나면 곧바로 낚아챈다. 즉시 남자의 손님이 된 사람은 남자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거나 혹은 함께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남자는 손님에게 어떤 자살 방법이 있는지 어떤 자살 방법이 덜 고통스러운지를 안내해준다. 그렇게 손님을 보내고 남자는 머릿속에 저장된 것을 꺼내어 소설을 쓴다. 유디트와 유미미, C와 K의 이야기는 남자가 쓴 소설이다.
"왜 비디오를 두려워하죠?"
그의 질문에 그녀는 눈을 크게 뜨며 맞받았다.
"두려워하다니요? 전 단지 싫었을 따름이에요."
"두려움은 흔히 혐호의 외피를 쓰곤 하죠. 자전거를 배우려면 쓰러지는 쪽으로 핸들을 꺾어야 해요. 그리고 힘차게 페달을 밟으면 되죠."
그녀는 한참을 말없이 그의 말을 곱씹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침묵이 수긍의 표시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절 두려워하잖아요. 제 실재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을 말이에요. 그래서 비디오를 들고 나온 거죠? 아닌가요? 정작 쓰러지는 쪽으로 핸들을 꺾어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당신일 수도 있어요"
그들의 이야기를 또 거칠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어머니의 장례식을 마치고 자기 집에 돌아간 C는 거실에서 관계를 맺고 있는 K와 유디트를 본다. 그리고 며칠 뒤에 C와 유디트가 거실 소파에서 동일한 행위를 하고 있다. 생일이라고 C를 불러낸 유디트와 멀리 떠나는 도중 내린 폭설로 둘은 구속된다. 거기서 한 번 더 섹스를 하고 C가 잠깐 잠든 사이 유디트는 어디론가 사라진다. '몽고반점'의 영혜가 그랬듯 유디트는 어딘가 이상하다. 섬뜩하기도 하고 기괴하기도 하다. 미친 여자 같다. 영혜는 진짜 미쳤고 유디트는 미친 척 하는 여자 같다. 그녀는 항상 공허하다. 그래서 자신의 구멍들을 채워야만 한다. 추파춥스를 달고 사는 것은 그 때문이고, 어떤 남자든 몸을 내어주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C와 둘이 있는 차 안에서 자위를 하고 동그랗게 뭉친 눈을 아랫입 속으로 집어넣는 것 또한 그 때문일 것이다. 그에 반해 후에 C와 만나게 되는 유미미는 꽉 채워져 있다. 자신에 대한 자부심,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에 대한 사랑 등 모조리 자신에 대한 것으로 빈틈없다. 그것에서 오히려 공허가 생겨난다. 그래서 유디트와 유미미는 닮았다. 둘 다 공허한 여자이다.
<파괴>에는 여자가 셋 나온다. 유디트, 유미미, 그리고 나머지는 자살청부업자인 남자가 외국을 여행하다 만난 동양의 여인이다. 동양인 여자는 물을 마시지 못하는데 몸을 팔던 시절 정액을 페트병에 모아두고 여자에게 마시라고 강요했던 남자 때문이다. 유미미에게도 비슷한 과거가 있다. 고등학교 시절 선생과 몸을 섞었는데 학교에 찾아온 선생의 아내에게서 받은 눈빛이 그것이다. 남편과 유미미가 혼란에 빠져 소리를 내지르고 있을 때 그 아내는 무서울 정도로 평온했다고 했다. 유디트에게도 있다. <파괴>의 여자들은 전부 몸 전체를 뒤덮을 만큼 큰 상처를 갖고 있다. 이것이 작품을 구성하는 불안의 한 요소일 터. C와 K를 포함, 작중 화자를 제외한 소설의 등장인물은 모두 동일하다. <파괴>를 써내려가기 위한 최소조건이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뭉크의 샬롯 코데이 같은 인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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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t de Sardanapale Ferdinand-Eugène-Victor Delacroix (1798~1863)>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일단 밝과 화려한 색채감에 압도되고 다음으로 칼에 찔려 죽는 여인들이 보인다. 맨몸의 여인들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무사들의 손에 잡혀 여린 살 칼에 찔린다. 흑인 병사는 보석 장식을 한 왕의 것처럼 보이는 말을 잡아 끌고 있고 그림 옆 편에서 사람들이 손을 뻗어 살인 행각을 추도한다. 그림의 저 위편 어두운 곳에서 사르다나팔 왕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다. 한 편의 영화를 보듯 머리에 팔을 괸 채로. 그의 얼굴에는 어떠한 감정이 드러나 있지 않은데 그래서 더욱 처참하다. 자신의 수하물의 말살을 지켜보는 폭군의 최후. 그것을 들라크루아는 이렇게 표현했다. 감정의 절제. 절제로 인한 폭발의 미학. <파괴>가 그렇다. <파괴>는 결코 폭발하는 법이 없다. 터지기 직전 압축시킨다. 절제하고 덮어버린다. 그것으로 인해 작품의 美는 살아난다. 삼류작가라면 그것을 폭발시켰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두 작가의 수작.
자살청부업자인 남자는 사르다나팔의 표정을 끝까지 취한다. 유디트와 유미미를 추억하며 남자는 우리에게 말한다. 유디트와 유미미가 비단 남의 일만 같으십니까? 아닙니다. 당신도 저 칼에 찔려 죽는 하녀의 처지가 될 수, 마라를 찔러 죽인 샬롯 코데이의 처지가 될 수 있습니다.
순간 절실하게 그녀들이 그립다. 그들의 이야기를 담은 글도 완성되었고 이제 이 글을 그들의 무덤 위에 놓일 아름다운 조화가 될 것이다. 이 글을 보는 사람들 모두 일생에 한 번쯤은 유디트와 미미처럼 마로니에 공원이나 한적한 길모퉁이에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나는 아무 예고 없이 다가가 물어볼 것이다. 멀리 왔는데도 아무것도 변한 게 없지 않느냐고. 또는, 휴식을 원하지 않느냐고. 그때 내 손을 잡고 따라오라. 그럴 자신이 없는 자들은 절대 뒤돌아보지 말 일이다. 고통스럽고 무료하더라도 그대들 갈 길을 가라. 나는 너무 많은 의뢰인을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는 내가 쉬고 싶어진다. 내 거실 가득히 피어 있는 조화 무더기들처럼 내 인생은 언제나 변함없고 한없이 무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