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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가면 14 - 애장판
스즈에 미우치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3년 6월
평점 :
절판
요즘 나오는 순정만화의 세련되고 쿨한 그림을 보다가 이 만화의 그림을 몇장 쓰윽 넘기면 '무슨 그림이 이래!' 란 반응이 제일 먼저 나오는 건 당연하다. 6학년짜리 딸애의 반응이 그러하였다. 볼만한 만화는 거의 다 봤다며 거만을 떠는 딸에게 이 만화를 권해준 나는, 그러나 자신만만하였다. "한권만 봐봐!"
역시 나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두꺼운 애장판 1권의 한 반쯤 읽었을까? 딸애는 자기방에서 뛰어나와 과장되게 숨을 헐떡거리며 이렇게 말하고 들어갔다. "엄마, 너무 재밌어서 숨이 안 쉬어져!!"
그래서 방학 하자마자 하루에 한권씩, 우리 모녀 셋(작은 딸까지)은 서로 먼저 보겠다고 쟁탈전을 벌이며 책 속에 빠져들었다. 중간 쯤 보았을 때, 그런데 이 책은 완결이 없다고 가르쳐 주자 실망하는 딸의 표정이란....우리 모두 이렇게 이 책의 완결을 기다리는데, 무책임한 저자여, 종교단체의 교주도 하면서 만화도 그릴 수는 없는 것인가, 정녕?
요즘의 시각에서 본다면 유치하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그림체에도 불구하고(이 만화가 70년대부터 그려진 것임을 감안하면 그건 충분히 용서가 되는 사안이다) 이 책에는 한번 보면 책을 놓을 수가 없는 극적 장치가 너무도 풍부하다. 두 대조적인 천재 소녀의 연기대결, 신비에 둘러싸인 연극작품(그 극의 주인공은 누가 될 것인가), 만화 속에 등장하는 각각의 연극에서 주인공은 어떻게 난관을 극복할 것인가, 또는 어떻게 천재성을 드러내 보일 것인가, 음모를 꾸미는 자들, 선과 악이 서로 꼬이는 상황 등등이 마치 한편의 장대한 대하드라마를 보는 듯 하다.
또한 주인공들은 충분히 전형성을 획득하고 있으면서도 식상하거나 단선적인 인물이 아니다. 주인공인 마야는 모짜르트와 같은 천재다. 남들이 피나게 노력해야 겨우 얻을까 말까한 재능을 사소한 계기만 있으면 펼쳐보일 수 있다. 그러므로 아유미의 화려한 부와 명성과 배경에도 불구하고 이 만화에서 마야는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살리에르가 모짜르트를 이길 수는 없는 노릇. 아유미는 주인공의 라이벌이긴 하나 이 만화는 선악 대결구도가 아니다. 아유미도 너무 멋지다. 부족한 재능(마야에 비해 그렇다는 말이다)을 피나는 노력으로 메꿔나가는 노력형의 천재인 것이다. 그래서 만화를 보다보면 처음엔 주인공의 라이벌이라는 이유만으로 미워하다가 점점 더 정정당당하고 고결한 모습에 감탄하며 바라보게 된다. 그러다 마지막 쯤에 이르러서는 마야만 홍천녀의 주인공이 된다면 인생이 너무 불공평하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천재는 그리 흔치 않으니 나의 마음은 아유미가 훨씬 나랑 비슷하다고 느끼는 것일지도?
그리고 이 만화에서 아주 중요한 설정인 '보라색 장미의 사람.' 이 사람의 심리도 아주 복잡하다. 그는 사업적으로는 악인이나 마야에게는 몰래 뒤에서 응원해주고 도와주는 소중한 사람이다. 미워할 수도 좋아할 수도 없는 이 캐릭터도 아주 설득력이 있다.
나는 이 만화를 어렸을 때 보고 이번에 두번째로 보았다. 내가 어렸을 때 본 유리가면은 주인공 이름이 한국 이름이었고, 기모노는 다 한복으로 덧칠해져서 나왔다.(해적판이었던 것) 어렸을 때는 줄거리에만 온 정신을 집중하고 과연 누가 홍천녀가 될 것인가, 마야와 마스미의 사랑은 이루어질 것인가에만 촛점을 맞추어서 보았는데 지금 보니 다른 것에 눈길이 갔다.
이야기의 중요한 모티브 <홍천녀>는 매우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작품이다. 홍천녀는 홍매화나무의 정령. 이 정령이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람은 바로 홍천녀의 몸인 매화나무를 잘라 불상을 조각해야 하는 조각가이다. 이 애절한 스토리 속에 모든 자연물에는 신이 깃들어 있다는, 일본만화를 보면 자주 등장하는 사상이 표현되고 있으며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부처가 있다는 불교적인 메시지도 있다. 자연과 인간과 신과의 합일...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보면서도 어렴풋이 느낀 것인데, 이것이 일본인의 보편적인 종교감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