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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문제
이마 이치코 지음 / 시공사(만화) / 2000년 8월
평점 :
품절
부모님은 이혼을 했다. 내가 5살 때. 아빠가 자신이 ‘게이’임을 자각해 버렸던 것이다. 그 후 10여년이 지나 아빠는 결혼을 하셨는데, 글쎄 상대는 나보다 겨우 여섯 살 위의 청년(A라고 하자). 그러니까 A는 나의 새엄마? 거기다 동성결혼은 법적으로 허용이 안되므로 아버지는 A를 양자로 입적했는데 그럼 그 청년은 나의 형? 설상가상으로 엄마는 그 A의 형(물론 유부남. B라고 하자)을 좋아하게 되어버려서 B는 이혼을 하고 훨씬 연상인 나의 엄마와 결혼을 했다. 그럼 나의 새엄마이자 형인 A는 이제 나의 작은아버지가 되는 건가?
이런 콩가루 집안이 있다. 그럼 그 다음 이야기는 어떻게 이어질 것 같은가? 그 이야기 자체를 남에게 얘기할 때 어떤 분위기일 것 같은가? 부모가 이혼만 해도 상처가 되고 남에게 이야기하기 쉽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만일 저게 실제 상황이라면 그 가족을 보는 주변의 시선은 너무도 차가울 테고 인간 같지도 않게 여길 것이고, 변태들의 집합소라고 끼리끼리 모여 화제에 올리며 수군거릴 게 뻔하다. 그게 만약 자신의 이야기라면 부모를 당연히 원망할 것이고, 자신에게 더러운 피가 흐르고 있지 않은가 고민할 것이며 자살을 해도 주변에서 그럴 만 하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멋진 작가는 ‘가족은 증식해 가는 것이다.....어릴 때부터 우리 집엔 남에겐 말할 수 없는 사정이 많이 있었다.....어느 가족에게나 조금씩은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라는 쌈박한 결론으로 저 복잡하고도 심각한 문제를 간단히 정리해 버렸다. 아, 왜 이렇게 맘에 드는 거냐구!!!
결혼은 오직 한번만이 정상적인 것이며 재혼부터는 뭔가 얘깃거리가 되고, 처음 결혼에서 이루어진 부부와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 외의 다른 가족 형태(한부모 가정, 재혼해서 각자의 자녀를 같이 키우는 가정, 동성 부부 등등)는 모두 뒤돌아서 다시 한번 쳐다보게 되는 이 사회의 획일성이 나는 너무 갑갑하다. 심지어는 결혼 안하고 혼자 사는 독신가정도 비정상 취급을 받지 않는가. 그래서 가족의 새로운 대안이 나오는 이야기에는 나는 무조건 별점을 주는 경향이 있다. 현실에서 갑갑한 내 숨통을 그 이야기가 좀 터주는 것 같아서 고마워서 말이다.
드라마 <아일랜드>에서도 그 비슷한 이야기가 제시될 듯 하여 기대를 많이 했는데 결국은 두루뭉수리하게 끝나 버려 좀 김이 샜었고, 옛날에 읽었던 하인라인의 SF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에서 제시된 새로운 결혼,가족 제도에 솔깃한 적도 있었다. 얼마 전 김형경의 <성에>에서도 한 여자와 두 남자가 이룬 가족에 대해 욕할 사람은 욕하겠지만 가족제도에 정답은 없다고 생각하는 나는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하며 읽었다.
그런 나에게 이 책은 홈런이다. 현실에서 절대 용납될 수 없는 여러 가지 상황을 주인공은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너무도 비도덕적이야!’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 가족이 가진 갖가지 문제(사실 문제 없는 가족이 어디 있단 말인가!) 중 하나로 생각하며 그냥 가볍게 지지고 볶는다.
내가 써놓고도 너무 정확한 표현이다. 정말 말 그대로 지지고 볶는다. 주인공의 철없는 아빠는 A와 문제가 생길 때마다 주인공과 엄마에게 달려와 해결해 달라고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리고, 요리를 못하는 엄마는 맛난 게 먹고 싶으면 전 남편의 파트너-A 말이다-를 집으로 불러 맛있는 걸 해달라고 조른다. A가 게이임을 알게 된 A누나의 사돈될 사람들이 파혼을 통보하자 A는 눈물로 호소하며 사귀고 있는 사람과 헤어지고 새 인생을 시작하겠다고 하여 누나의 결혼을 성사시킨다. 주인공이 “정말 우리 아빠랑 헤어질 거야?”라며 놀라자 “일단 어떻게든 속여서 결혼하고 나면 끝이잖아”라는 뻔뻔하고도 무심한 대답이 되돌아온다. 사실 그렇다. 동생이 게이라는 사실이 누나의 결혼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는 ‘이 사회에서 무엇이 허용되고 무엇이 금지되는가’라는 의문보다, ‘인간에게 무엇을 허하고 무엇을 금지해야 하는가. 그 기준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사람들이 서로에게 더 많이 했으면 좋겠다. 그러면 이 세상에 용서 못 할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이 콩가루 집안의 스토리도 절대 허용할 수 없는 그 무엇은 아니다. 그저 어느 가족에게나 조금씩은 있는,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사정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을 남에게 자연스레 말할 수 있는 사회, 난 이 지구가 그런 아름다운 사회가 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