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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시일反 - 10인의 만화가가 꿈꾸는 차별 없는 세상 ㅣ 창비 인권만화 시리즈
박재동 외 지음 / 창비 / 2003년 8월
평점 :
절판
수업시간에 6학년 아이들에게 퍼즐 만들기를 시켜놓고 한바퀴를 돌고 있는데 한 녀석 책상에서 만화책이 눈에 띄었다. 아니, 이 녀석을 그냥....혼구녕을 내주려다가 제목을 보니 <십시일反>, 얼마전 로드무비님 리뷰로 접했던 그 책이 아닌가. 나는 잽싸게 얼굴빛을 바꿔 "얘, 너 어떻게 이렇게 좋은 책을 읽고 있는 거니, 나 하루만 빌려주라" 모드로 돌입했고 그 녀석은 능글맞게 얼마를 주실거냐는 둥 수작을 주고 받다가 딱 하루를 빌리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렇게 해서 빌린 책에는 6학년 아이가 느끼기에는 너무도 무거울 듯한 삶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결코 밝고 희망차지 않은 이야기가....그러나 그들도 알아야만 하는 이야기들이. 이 책을 사주셨다는 그 녀석의 어머니도 그렇게 생각하셨겠지.
대한민국에서 '약자'에 속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여기에 망라되어 있다. 가난한 자, 성적 소수자,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 여자..... 비장애인이고 이성애자이고 그다지 가난하지 않은 나는, 이 만화의 장면장면을 볼 때마다 미안했다. 아, 나는 여자이긴 하니까 남녀차별을 언급한 부분만 빼고. 그 부분은 화가 났다.
이 땅에서 약자로 살기는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아직도 대한민국은 장애인 시설이 들어설라치면 집값 떨어진다고 데모하는 곳이며(박재동-집값), 이동권을 보장받기 위해 장애인들이 철로에 드러누워야 하는 곳이고, 어려운 사람들이 몇푼이라도 벌라치면 그동안 국가에서 지급해왔던 생계비가 끊기는 곳이고(유승하-새봄나비), 외국인 노동자들이 밀린 임금을 받기도, 잘라진 손가락을 보상받기도 어려운 곳이다(최호철-코리아 판타지).
이 책에는 그들의 이야기가 처참하도록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기도 하고, 풍자적으로 그려져 있기도 하며, 유머를 동반하여 표현되어 있기도 하다. 그리고 장애인 소녀의 이동권을 그린 이희재의 <첫발자국>에서는 살며시 희망의 빛을 보여주기도 한다. 친구의 이동권을 보장해 달라고 가슴에 리본을 달고 운동장에 나간 그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일까? 그것이 있었던 일이건 아니건 우리가 해야할 일도 그런 것일 거다. 십시일반의 정신으로 내 가슴에 리본을 다는 일.
리뷰를 쓰다가 영 생각이 안나서 다른 분들의 리뷰를 훔쳐보니 너무 사회의 어두운 면만 부각시킨 것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가진 분도 계신 것 같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접하면 마음이 편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사회에 편견이나 제도에 희생되는 사람들이 단 한명이라도 있다면 이런 이야기를 멈추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 눈물 흘리는 사람이 한명이라도 있다면 나도 행복할 수 없다는 연민의 마음이, 나는 인간 본연의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얼마전 읽은 르귄의 단편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는 내내 그 위에 겹쳐졌다. 오멜라스의 어두운 지하실에 사는 불행한 소년을 위해, 울어주기라도 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일 것이다. 가능하면 작은 리본이라도 달고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