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욕망의 특정성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다고 했다. 왜 굳이 어찌하여. 거기에 그 이상한 데에 꽂혀버리는 거냐능. 난 ㅇㅇ에 꽂혔어. 말로 하면 재미없고 시시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꽂혀있는 것은 욕망을 말하는 것. 그러니까 ‘말’ 하는 것. 그 원리.

심각한 구조주의자는 각자의 욕망이 특수하면서도 ‘구조적’ 원리를 지닌다는 사실이 재밌고. 그리고 그것은 이해가 아니라 오해에 빚을 지며 드러나고 또 발명되어간다는 지식에서 상쾌함을 느낀다.

내가 친밀함을 느끼는 타자들이 나를 통해 보는 것과 그들이 하는 말들. 그들 혹은 우리들이 갈망하는 기호. 여기에 조금 더 사적이고 어쩌면 사회적일 수 있는 나라는 사람을 이루고 있는 역사(특별히 사건이 현재 진행형인. 다뤄지지 않은 다뤄져야 하는. 아니, 했던. 내 입 말로 밀린 숙제)와 공명할 때. 그래 그때 그게 빛나 보였어. 아무도 못 보는데 나에게는 반짝반짝했다니까.


삶에서 인식해야 했던 것들. 때로는 순진함의 제거, 깊은 환멸을 동반한. 내 안에서 같이 살고 있는 것들. 내가 살려고 밀어내 버린 것들. 다시 귀환 되어야 하는 무엇. 욕망. 곧, 그 사람. 그를 움직이게 하는 것. 그것은 고유하므로 기성의 도덕은 일시정지된다.

욕망의 인식에 필요한 것은 좀 짜증 나는 개념이지만 … 그리하여 더 자명한 타자, ‘안다고 가정된 주체’. 한동안 니가 뭘 알아,를 입에 달고 살았던 나는 저 ‘안다고 가정된’의 자명함에 뼈를 맞았다.

어떤 부분에서 내 말은 완전히 효과가 없어졌는데, 그 말은 염려의 외피를 두르고 있었지만 결국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었고, 내가 두려워하는 것을 그가 두려워하지 않고 있어서 무력화된 걸까. 보다 중요한 것은. 누가 말하는가 이겠지. 똑같은 말이라도 내 말에는 없는 발화자의 기호가 섞여있는 말. 우리는 표식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니까. 권위를 필요로 하는 인간에게 전문가의 말이란 더는 알기 싫음의 증거로 기능한다.

음.

모든 주체는 (여기서는 라캉의 주체, 말하는 주체) 분열되어 있고… 애석하지만 여성의 욕망은 조금 더 복잡하고 왜곡되어 있다. 욕망이 젠더화 되어있다는 게 서글프지만ㅋㅋㅋㅋㅋ 신은 여성에게 섹슈얼리티를 주셨다! (물론 이건 이성애적 욕망이다… 제도화된 모성 포함) 암튼.

옆으로 새지 말고.
그래서 무엇을 원하냐고?
중요한 건. 내가 원하는 건데.

나는 고독을 원한다. 가랑비처럼 옷 젖는 줄 모르게 스며들어버리는 타인들의 말로부터 떨어져 있는 시간. 이 시간에 나에게 진지하게 다시 묻는다.

뭘 원해?

내가 도달하지 못한 기호들. 거기에 따라오는 권력들. 안다고 가정되는. 안다고 가정된. 안다. 안다는 것. 알고 싶다. 궁금하면 오백원.

분석이 끝나는 시점이 사랑이 끝나는 시점이다. 즉 안다고 가정된.에서 당신이 내려와야 하는 시점. 보다 더 정확하게는 그것이 오해라는, 내가 오해하고 싶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91) 주체는 '타자'를 의문시하는 데까지, 즉 자신의 출발점이었던 가설을 완전히 뒤집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진리는 더 이상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 지점에서 주체가 자신의 힘으로 결정함으로써 비로소 창조된다. 이는 어디까지나 주체 자신의 문제다.”

나의 성장이 멈추는 순간. 너로 인해서는 더는 깨달을 게 없다는 (실은 그 역시 오해되었을지 모르는) 인식. 혹은 내가 내 일상에 이미 통합해 버린 너의 속성들.

사랑은 사건이 아니라 상태(혹은 증상)라고 생각한다. 이다음의 앎을 위해서 지금의 앎을 버리겠다는 결단. 해서 이미 많이 있는 사람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닥 자주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다. 어쩌면 일어나는 것이 기적이다.

우리는 변하기 위해서 사랑을 하고, 변하기 위해서 분석가를 찾아가고, 변하기 위해서 책을 읽는다. 문제는 사실은 변하고 싶지 않다는 데에 있거나. 지금이 견딜만하다는 것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여 지금을 견딜 수 없어하는 사람이 사랑하기 좋은.

약자가, 되어야 하는 구나.
점점 더 사랑하기 힘든 세상이 되어간다.

내 욕망의 구조가 다른 단계(?)에 진입해버렸다는 것을 좀 느끼고 있다. 이런 나를 괴짜라고 하든 말든 이제 내 그걸 귀엽게 여겨보기로. 후후 귀여우면… 게임 끝ㅋㅋㅋㅋ

#라캉과철학자들 #자크라캉 #욕망




주체는 ‘타자‘를 의문시하는 데까지, 즉 자신의 출발점이었던 가설을 완전히 뒤집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진리는 더 이상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 지점에서 주체가 자신의 힘으로 결정함으로써 비로소 창조된다. 이는 어디까지나 주체 자신의 문제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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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4-08-15 08: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언제나 감탄해요. 쟝님의 이 해석들에. 마침 이 책이 왔으니 (세상에서 엄청 귀엽고 엄청 섹시하고 엄청 지적인 어떤 분이 하사하심) 저는 흥분을 좀 가라앉히고 문장들에 탐닉해봐야겠어요.

공쟝쟝 2024-08-15 08:39   좋아요 2 | URL
저랑 라깡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제게 라깡을 읽혀주셔서 감사합니다. 푸코로는 부족해!

수이 2024-08-15 08:46   좋아요 2 | URL
세상을 다 가지시라고 어떤 분이 말씀하셨죠. 그 분의 탁월한 선견지명이라니!

공쟝쟝 2024-08-15 20:40   좋아요 0 | URL
세상을 가지기는 어렵구 있을 자리를 제 힘으로 만들고 싶어요. 여기 있어도 될까요?

단발머리 2024-08-15 20: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욕망의 특정성‘에 대해서 마리 루티가 책에서 어깨라고 했던가, 팔뒤꿈치라고 했던가, 아무튼 신박한 표현으로 놀랐던 적이 있어요. 제 서재 뒤지면 나올텐데, 지금 미역국 끓여야 해서 못 하겠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사람 아니면 안 되는 순간이 있고, 그 사람의 어떤 점에 너무 끌릴 수 있고요. 근데, 나중에는 그 사람의 어떤 점을 도저히 봐줄 수가 없는 그런 형국도 있잖아요. 저는 그걸 좀, 연구해볼께요. 호감은 언제 비호감으로 변신하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4-08-15 20:43   좋아요 1 | URL
애정의 크기는 환멸의 크기와 비례하는 것 같아요. 호감이 비호감으로 변한다는 건 ㅋㅋㅋㅋ 잘은 모르겠지만 ㅋㅋㅋㅋㅋㅋ 지금 즈이 집은 야구 땜시 나 빼고 난리거든요. 애정의 크기는 욕 할 권리이기도 ㅋㅋㅋㅋㅋ

cyrus 2024-08-15 13: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번 달에 레비나스 철학책 읽기 모임이 있어서 레비나스의 <전체성과 무한>이라는 책을 읽고 있어요. 그 책에 ‘욕망’과 ‘향유’라는 단어가 많이 나와서 신선했어요. 책 저자 이름이 안 적혀 있으면 라캉이 쓴 책인 줄 알았을 거예요. ^^;;

공쟝쟝 2024-08-15 20:47   좋아요 1 | URL
이름만 들어도 어려운 책 같아여. 저는 보부아르와 공명하는 지점에서 레비나스가 싫었는데, (편견) 타자와 환대에 대해서 레비나스를 꼭 봐야한다는 소리를 읽긴했어여. 비호감으로 치면 라깡도 만만찮았기 때문에 언젠가는 읽어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