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한국의 포스트 담론(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 구조주의, 포스트 마르크스주의, 포스트 식민주의)이 주로 미국으로부터 수입되어 오면서 애당초의 푸랑쓰 담론의 맥락이 탈각돼버린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을 말하고 계시는 데… 어쨌든 내가 막 페미니즘 읽으면서 계속 으잉? 주체가 죽으면 그만입니까? 언제는 나보고 주체가 되람서. 난 주체(서울사람ㅋㅋ)이기 싫었는데. 징징. 이놈의 주체. 주체… 투덜투덜에 한줄기 빛처럼. 주체의 자율성의 조건으로서의 타율성이라는 문장을 만나버림. 네에- 이거였음 ㅋㅋㅋㅋ (이미지)
할튼 글의 요지는 ‘주체의 죽음’을 그렇게 훑어내듯 간편하게 이해하면 안 된다는 것이며 ㅋㅋㅋㅋㅋ 그러나 내가 누구인가. 모듈화에 능한 일본인의 책과 (아마도 대체로 페미니즘이었으므로 페미원산지) 미국 특유의 기능/실용주의적(?) 관점으로 한번 걸러진 글들로나마 포스트 담론 퉁쳐 이해하고자 한 신자유주의적ㅋㅋㅋㅋㅋ (드라마 10분 몰아보기처럼 잘 다듬어진 입문서로만 읽고 싶은)독서인 아닌가? 지난 나의 읽기 과정을 고려해 봤을 때ㅋㅋㅋ 조금 뜨끔합니다만… 실은 제가 주체가 되지도 못했는데 죽기가 아깝긴 했었거든요…….ㅋㅋㅋㅋ 뭐 나 정도의 읽기는 반지성주의 중에서도 반(半)지성으로 쳐주면 안될까요? 누구한테 물어보냐.ㅋㅋ
포스트 담론에서 (특히 프랑스) 포스트 구조주의가 가지는 특징.을 눈여겨보는 중에 만난 책. #애도의애도를위하여
매우 재미지다. (😞중증임)
잠깐 야전 홀딩하고 얘 먼저 찍고 가야겠다. 주체에서 주체화(들)로. 우리의 연장통 푸코가 등장합니다. (이미지 참고)
“(65) 요컨대 주체가 자율적 존재자로서 존재하기 위해서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주체 생산의 조건과 메커니즘을 해명하는 것, 따라서 주체의 자율성의 조건으로서 타율성을 설명하는 것이 (포스트) 구조주의의 근본적인 철학적 과제였다고 할 수 있다. ”
“(66) 신자유주의와 관련해서도 예속화-주체화라는 문제 설정은 신자유주의를 경제정책이나 금융자본의 이데올로기로 파악하는 관점을 넘어 새로운 종류의 주체 생산이라는 각도에서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이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이나 대안을 모색하는 데서 매우 중요한 이론적 기반이 될 수 있다.”
신자유주의라는 (얘는 사상이 아니라고 엊그제 희진 샘이 말씀하시었다 ㅋㅋㅋ) 통치 시스템에 걸맞은 인재로서 부단히 주체화된 신자유주의 페미로서…(신자유주의 덕분에 긱 노동이나마 가능해져 개인의 위치를 부여받은 탈여성이 되어버린고로 독서시공간 확보한 1인가구)… 이렇게는 통치당하지 않는 저항을 한번 살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가장 먼저 해볼 수 있는 일들 : 권력, 권위 있는 말은 잘 못 알아먹는 척하기. 실은 농땡이 치면서 열심히 고생하는 척해서 사회 전체의 생산력을 떨어뜨리기. 그리고 이딴(?)거 적어서 내일 일하러 가는 사람들 근로의욕에 초 치기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우리는 눈치껏 대충 살아야 합니다.
요컨대 주체가 자율적 존재자로서 존재하기 위해서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주체 생산의 조건과 메커니즘을 해명하는 것, 따라서 주체의 자율성의 조건으로서 타율성을 설명하는 것이 (포스트) 구조주의의 근본적인 철학적 과제였다고 할 수 있다. - P65
신자유주의와 관련해서도 예속화-주체화라는 문제 설정은 신자유주의를 경제정책이나 금융자본의 이데올로기로 파악하는 관점을 넘어 새로운 종류의 주체 생산이라는 각도에서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이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이나 대안을 모색하는 데서 매우 중요한 이론적 기반이 될 수 있다. - P66
따라서 두 번째 중요한 효과는 이러한 상호 무력화로 인해 포스트 담론의 이론적·실천적 지향에 대한 맹목이 일반화되었고, 포스트 담론은 이데올로기로서의 포스트주의로 전락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마르크스주의와 새로운 이론들 사이의갈등 관계에 대한 정확한 인식 역시 장애를 겪게 되었고, 포스트 담론이 제기하는 새로운 이론적·실천적 과제들에 대한 모색에도 지장을 초래했다. 포스트 담론이 대결했어야할 과제는 앞서 언급한 대로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몰락이라는 현실 앞에서 새로운 종류의 갈등과 적대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라는 문제였으며, 또한 포스트 담론을 통해 역사적 마르크주의 (및 좀더 넓게는 근대성 일반)의 한계들을 성찰하고 넘어설 수 있는가라는 문제였지만, 국내에서 이러한 문제가 본격적으로 다루어지는 경우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 P51
그 대신 포스트 담론은 주로 애도와 청산의 알리바이로 기능했으며, 이로부터 다양한 종류의 ‘이행‘시도가 산출되었다. 가령 거대서사에서 작은 이야기로, 계급 내지 민중에서 소수자로, 보편성에서 차이로, 민족에서 탈민족으로, 이성에서 감성으로, 정치에서 문화로의 이행등과 같은 이행의 논의들이 그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문제는 대립의 두 항 사이의 관계가 배타적인 대립이나 선형적인 이행의 관점에서 파악된다는 점이다. 곧 거대 서사의 문제점에 대한 비판은 곧바로 거대서사의 폐기와 작은 이야기들의 특권화를 낳게되고, 노동자계급 중심 정치의 한계에 대한 지적은 자유주의 정치의 전면적 수용으로 나타나며, (중략) 이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강요된 청산으로 이어졌으며, 그와 결부된 계급론의 문제나 정치경제학 비판의 문제 설정의 소멸을 낳게되었다. - P52
알튀세르나 푸코(또는 들뢰즈 가타리)가 해명하려고 했던 문제는, 근대철학의 기본 원리이자 마르크스주의 정치의 핵심 전제이기도 한 자율적 주체가 사실은 이데올로기나 규율권력에 의해 예속적으로 생산된 주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이들에게 예속적 주체 생산의 문제는 항상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이나 규율권력의 메커니즘 같은 구조적이고도 제도적인 실천의 차원과 결부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예속적인 주체화 양식과 구별되는 새로운 주체화 양식의 길이 어떤 것인지 해명하기 위해서는 국가장치들이나 권력의 메커니즘을 어떻게 개조할 것인가라는 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 역으로 생산양식이나 국가의 변혁이라는 과제는 새로운 주체화 양식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문제를 해명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사고될 수 없다. 내가 볼 때 포스트 담론의 핵심적인 문제제기는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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