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이성 중심의 철학-문학-글쓰기에서 예외를 담당했던 글쓰기가 있었으니 그것이 ‘시’였다! (식수는 이 에세이에서 이성/감정을 비롯한 이분법을 끈덕지게 심문한다) 이성의 횡포에 포섭되지 않은 글쓰기로써의 ‘시’는 무의식을 그 동력으로 삼는 다는데… 허허 그렇다면, 성기완의 무의식은 무엇으로 되어 있나. 로체스터 백작과 존 어윈은? ㅋㅋㅋㅋ
우리는 왜 그의 무의식을 함께 보며 고통 받아야 하는 가요ㅋ 여러분 차라리 제 무의식을 보세요ㅋㅋㅋㅋㅋㅋㅋ 어떤 남자 낙오자는 사랑을 사랑하는 시를 쓰고, 어떤 낙오자는 무의식 깊은 곳에서부터 오랄을 하고 생리를 해. 그걸 써. 그걸 막 써. 책을 막 내. 책을 막. 나무여. 나무여. 미안하다. 인류가 지은 죄가 많다. 근데 인간의 남자들은 그렇다고 한다. 대놓고 자기들이 쓰는 게 막 자위라고 글은 원래 그런 거라고 막 은유까지 써가면서 뻔뻔하게 잘난 척을 해.
근데 여자가 글을 쓴다? 여자가 감히 자위를? 여자는 자위를 하면 안되지! 이게 무슨 소리🙄 그걸 페미니스트들은 용납을 할 수가 없다고요. 그리하여, 일찍이 여성의 글쓰기에 천착하신 우리 식수 언니가 ‘여자여! 글을 써라!’라고 몸소 글을 써 보이시며 여자여, 숨어서 자위하지 말라고 덧붙이셨죠. (응?) 대놓고 하고 끝까지 가라고 ㅋㅋㅋㅋ 자위엔 자위로!!! 여자는 더 오래 할 수 있...(읍!🫢) 난 그의 문장을 좋아해서 소개하고 싶어, 사실 이 글을 써 보았다. 오랫동안 숨어서 썼고, 때때로 숨고 싶은 나의 글쓰기를 독려하는 식수의 글.
“(12) 글쓰기는 위대한 자들, 다시 말해서 ‘위대한 남자들’에게 국한 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대는 약간 글을 썼었다. 그러나 숨어서 썼었다. 그건 좋지 않다. 숨어서 썼기 때문이다. 글을 쓴다는 것을 스스로 벌했기 때문이다. 끝까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면 글을 쓰면서 저항할 수 없이, 우리가 몰래 자위를 하듯이, 멀리 가고자 한 것이 아니라 그저 긴장을 완화시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너무 지나쳐서 고통스럽게 되지 않을 정도로만 긴장을 풀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향유하고 나자마자 우리는 서둘러 자신에게 죄의식을 부과했었다 —스스로를 용서받게 만들기 위해서. 아니면 서둘러 망각하고 매장했다. 다음번까지.
글을 쓰라. 아무도 그대를 만류하지 못하리라. 아무것도 그대를 멈추지 못하리라. 남자도, 바보 같은 자본주의 기계도 그대를 멈추게 하지 못하리라. 자본주의적 기계 속에서 출판사들은 우리들의 이익에 반하여 우리를 짓밟고 우리 등 위에서 작동하는 경제라는 지상 명령을 전달하는 교활하고 비굴한 중계국이다. 그대 자신조차도 그대를 멈추지 못하리라.
여성들의 진정한 텍스트들, 여성이라는 성을 가진 텍스트들은 그들에게 두려움을 준다. 그들, 남성 독자들, 전집의 책임자들, 옥좌 위에 군림하는 사장들을 불쾌하게 한다.
나는 여성을 쓴다. 여성이 여성을 써야 한다. 그리고 남성은 남성을 써야 한다.” -<메두사의 웃음>
후, 같은 자위라도 넘 수준 높은 자위 아닙니까? ㅋㅋㅋ 출판사 사장들을 불쾌하게 하는ㅋㅋㅋ 무튼 그녀가 이런 글을 쓴지 채 오십년이 지나지 않아 바야흐로 여자들이 남자들 보다 더 열심히 책 읽고, 글 쓰고 또 책 사고 그래서 동방의 어떤 나라는 출판 시장이 여성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데, 난 참 또 괜히 가슴이 벅차오른다. 다, 엘렌 식수를 비롯한 선배 여자 선생님들이 열심히 글써서 이뤄낸 여성의 성과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무튼 저는 남자들의 무의식에는 사실 그다지 관심이 없지만, 그들에게 펜pen이 페니스penis라고 하니깐요. 이제 그만 그 작고 힘 없는 펜을 꺾…든지 말든지 신경조차 쓰고 싶지 않은 데. 남자 작가들아! 글 좀 잘~쓰세요. 생리도 안하는 쾌적한 남자 몸으로 태어났으면 *잘* 쓰기라도 해야 할 거 아니야. 펜 빠지게 경쟁하세요. 탁월하게 잘쓰세요. 경쟁 사회임.
그런데, 아마 잘 쓰기가 힘들 것이다. 왜냐면, 남자 몸으로 태어났으니까. 내가 그 몸으로 안살아봐서 모르겠는 데, 그 몸으로 살면서 사회화가 되면 타자화는 습관이고 맨스플레인을 하기 쉬워진다 하더라고. 나는 성격이 좀 급해서 성급하게 일반화가 되어 가지고 하여튼 경험에서 온 교훈이라는 것이 있잖아요? 내가 아예 모를 때는 좀 사서 읽고 좀 좋아하고 그랬는 데, 정말로 이제는 의식하지 않아도 그런 (남자) 글을 안 사 읽게 되더라. 글좀 쓴다는 판사, 의사, 검사, 겨수님들도 점점 돈 주고 사 먹기엔 맛이 없어... 하물며 그들이 내놓은 글이란 게, 대체로 민주주의와 예술의 ‘적’인 경우도 많고 그래서ㅋㅋㅋㅋ 일단 안.삼. 알라딘아, 아무리 추천을 해봐라. 내가 사서 읽나 봐라. 빌려 읽지. 흥.
그럼 남자는 쓰지 말라는 것이냐? 그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이 시대에 남자 몸으로 태어난 원죄(ㅋㅋㅋ)로 글을 잘 쓰려면 어떻게 써야 하는 지 친절한 설명 들어간다. 내가 한 말은 아니곸ㅋㅋㅋㅋㅋ 정희진 선생님이 이런 자의식을 경계하라고 하셨으니까. 남자 몸으로 글 쓰려거던 참조하시고 명심하시라.
“(15) 타자화(他者化)란 “나는 그들과 다르고 그 차이는 내가 규정한다”는, 이른바 ‘조물주 의식’이다. 이러한 자기 신격화는 민주주의와 예술의 적이다. 윤리적인 글의 핵심은 다루고자 하는 존재(소재)를 타자화 하지 않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을 알고, 변화시키고, 재구성하는 것이다. 남을 억압하는 사람은 자신을 해방하지 못한다. … (중략)… “나는 작가다”라는 식의 자의식에서는 자신에 대해 질문이 나올 수 없다. 특히 이러한 자세는 이른바 *진보 진영의 글쓰기*에서 두드러지고, 혹세무민의 위험도 크다. 근거 없는 반북(反北)이나 숭미(崇美), 약자에 대한 혐오를 표출하는 글은 그 해악을 판단하기 쉽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안다, 혹은 몰랐다.” “그들의 상황은 이렇다.”(숭배, 연민, 공감……), “나는 그들로부터 현실을 배웠다.”는 식의 글쓰기나 *초월적 주체*들의 ‘힐링서(書)’는, 나쁜 글로 보이지 않는다. ‘우월한 자신’을 재생산 하는 이러한 글쓰기가 바로 폭력이요, 지배의 재생산이다. 오리엔탈리즘과 *여성에 대한 남성의 언설*이 가장 광범위하고 역사가 깊은 예다. 자신을 주체(one)로 상정하고, 자신을 중심으로 삼아, 나를 제외한 ‘나머지들(the others)’로 세계를 규정하는 것이다.”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말해 뭐해. 성기완 시인님 진보 인사던데? ㅋㅋ 어휴 ㅋㅋㅋㅋㅋㅋㅋㅋ 난 언제부터인가 정희진 선생님 말마따나 우월한 자신을 재생산하는 배운분들이 팔짱 끼고 현실 개탄 하는 글도 눈살 찌푸려가며 읽게 된다. 남자면 짜증이 올라오고, 여자라도 반복되면 점점 정 털림. 그런데 그런 거 아닐까? 사람들이 글 안 읽는 이유. 그런 글 읽으면서 비위 상하느니 예쁜 그림(유튭, 인스타, 넷플릭스) 보는 게 더 좋은 거.
그렇다면 너는 윤리적인 글을 쓰냐고? 글쎄, 타자화 대놓고 한 남자는 나도 함께 타자화하고, 수시로 한국남자를 일반화하여 뭉개지만... 적어도 몽정하고 싶다는 시는 안 씀. 몽정을 할 수 없기도 하고요? ㅋㅋㅋㅋ 아이참, 성기완씨의 무의식을 드러낸 시 때문에 좀 흥분하고 말았는 데, 그의 무의식은 유구한 역사를 가진 인류 문명의 폐해 일 뿐. 이 글은 성기완씨 개인을 저격하고 타자화하기 위한 글이 아니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맞습니다. 푸하하. 나는 당신을 타자화 할거야, 어떻게? 이렇게.
당신만 괴롭히는 게 아니라 댁 올려쳐준 비평가도 함께 괴롭히려고. 문학계의 알탕 연대!! 까부숴 주맠ㅋㅋㅋㅋㅋㅋ 어느 순간부터 안 읽게 되는 남자 저자 1인 (좋아하던 때가 분명 있었는 데, 점점 왜 좋아했는 지 조차 몰라져 버리다가 이제 신간 소식이 나와도 찾아보지 않게 되는 현재 한국의 거의 유일한 ‘유명’ 평론가) 신형철의 산문에서 나는 성기완 시인의 시집에 대한 평을 찾아내 버리고 마는 데… (자비로운 구글은 잊혀질 권리를 허용하지 않지😤)
“(135)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사랑해’라고 말하지 않고 ‘안에다 싸도돼?’라고 말하기. 부드러운 발라드 사운드를 유지하던 시는 저 문제의 구절에서 노이즈를 만든다. … 그냥 솔직한 시인이구나 하고 넘어가면 그만 일까. 아니다. 연애시에서 섹스를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 정도야 대수겠는가. 우리가 지금 노이즈라 부르는 것의 층위는 훨씬 넓다. 이 시인은, 마치 앰비언트 뮤직에서처럼, 일반적인 연애시의 사운드에 여러 환경적 요소(텍스트)들을 도입해 음악과 소음의 경계를 흔든다. … 그저 실험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묘하게 서정적이다… 어쩌면 이 전도 효과가 이 시인의 주요의도 중 하나 였을까. 실상 우리의 연애라는 게 발라드 이기만 한 것은 아니니까. … 물론 이 시집에는 그 결과가 아슬아슬한 시들도 있다. 그런 시들이 만만해 보여서 ‘이런 것이 시라면 나도 쓴다’라고 하실 분도 있을 것 같다. 근데 써보면 안다. 나도 쓰겠다 싶은 그런 시, 막상 써보면 잘 안써진다. *화음에 정통한 자 만이 소음으로도 시를 쓸 수 있는 법이다.*” -<느낌의 공동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닠ㅋㅋㅋㅋ이 무슨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돼지목에 진주 목걸이냐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딴 시에 저토록 황홀하게 의미 부여해주는 평론가들이 있어, 안에다 싸도 돼?가 문학과 지성을 가진(-_-) 연애시로 둔갑하고, 그것이 연애가 되고, 하아… 대환장. 에말이요, 이보시요,(흥분해서 전라도 방언 나옴) 그건 “(136) ‘찌질한’ 응석 따위의 노이즈”가 아니라고요.
사랑하면(사랑안해도) 노콘노섹이지 안에다 싸도 돼가 아니라니깐? 아, 진짜ㅋㅋㅋㅋ 세상이 서울대 출신이라고 지면도 주고 펜도 주니까 자기들끼리 말이여 막걸리여 이게 뭐하는. 성기완, 신형철, 윤석열(응? 니가 외 여기서나왘ㅋㅋㅌㅌㅌ) 아아, 서울대 나온 문과들아ㅋㅋㅋ 여러분 거기서 뭐하니? 뭐하세요?ㅋㅋㅋㅋㅋㅋㅋ 네? 서울대 문과 출신 인사들 몇 명 더 생각나는 데, 지겨워서 그만 할란닼ㅋㅋㅋㅋㅋㅋ 적당히 해라 진짜ㅋㅋㅋㅋ 인간들아 서울대까지 가서 뭐 배운 거냨ㅋㅋㅋㅋㅋㅋㅋ
어쩌다보니 나도 모르게 출판계의 전설 신형철을 까버렸네. 🤷🏻♀️🤷🏻♀️ 뭐 어쩔 수 없지. 어쩌겠어요. 저는 아인슈타인도 하이젠베르크도 깝니다. 남자는 일단 까고 보면 깔 것이 나오더라고요? 하지만 저 신형철 책 네권 있는 사람임. 다섯권 째 부터는 안삽니다! 안 살래요~ 나 아니어도 많이 사더라고?
여기서 궁금한 거… 성기완의 시집이 흑역사일까 신형철의 성기완 시집에 대한 평론이 더 흑역사일까? 누가 더 이불을 많이 킥할까. 2천년대 후반에는 없던 수치심을 이제와서는 견딜 수가 없어서 공개적으로 반성문이라도 쓴다면 엘렌 식수가 말한 낙오자 사랑 시인유형 카테고리에 넣어줄까도 싶은 데… 두분 다 이미 출신부터 낙오자가 아니네요. 그냥 자기들끼리의 칭찬하는 것에 취해서 써도되는 글인 줄 알고 썼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이런 글 쓸 수 있죠. 근데 책으로 나와있는 거 너무. 그런 시절이었죠. 후, 반성하지 마세요. 제가 좋아요 50밖에 안되는 제 블로그에 박제는 해놓겠습니다.
그러니 언제나 조심하라고, 자기 검열을 좀 합시다. 이제 여자들이 글쓰는 시절이여요. 아재들아, 지면준다고 그렇게 막 휘둘러선 안돼! 펜이 페니스라니까?!! ㅋㅋㅋ 이건 내가 말한 게 아니라 남자 문학가, 철학가, 역사가, 비평가, 예술가들이 한 말 입니다. 알고 휘둘렀든 모르고 휘둘렀든 이제 2022 업데이트! 막 좋다고 막 쓰면 안되는 시절이 왔어요! 그동안 속 시원히 하고 싶은 말, 쓰고 싶은 글 다 쓰고, 욕 안먹고, 지적인 척, 예술인 척, 고상한 척 하는 삶을 사셨죠? 이제 어디 여자가 돼서 입 좀 막혀봐. 조신하게 입 안에서만 혀를 돌려 그리고 입 열고 싶으면 그냥 콱 깨물어 버렷!!!!!
“(33) 입을 열기 전에 7만 번이나 혀를 돌리고, 그리고도 말을 하지 않는 여자. 그 여자는 그 때문에 죽거나 혹은 자기 혀와 입을 그 누구보다 더 잘 아는 여자가 된다. 이제 나-여성은 법을 폭파 시킬 것이다. 폭발은 이제 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은 피할 수 없다. 폭발이 이루어지기를. 지금 당장, 언어 속에서.” -<메두사의 웃음>
아시겠어요? 7만 번. 그래. 7만 번은 과하니까 77번. 77번만 숙고하자. (내가 이렇게 관대하다) 자고로 남자는 조심하고 조신해야 함! 시대가 바뀌니까 남성성도 바뀌어야죠? 우린 더불어 같이 살아가야 하는 인류니깐요. 그러게 왜 저런 글을 쓰고, n번방이 나올 때 까지 불법 촬영물 신나게 보고도 부끄러운지 모르고 그랬어요. 남자들아. 다 돌아오는 거야. 업보여. 😩
어쩌다 보니 서울대 나온 남자 시인, 평론가(곁다리로 검사까지 ㅋㅋㅋ)까다가 7천자를 또 넘기고 있는 시점인 데… 지난 번의 독서괭님 페이퍼에서 부터 사실 원래 내가 쓰려던 글은 이거였다. “(95)살해하기 위해 우선 분석해야 한다.” (네... 이제사 다.미.여 본론입니다. 지쳤나요?)
“(78)가부장적 서구문화에서 텍스트의 저자는 아버지이자 창시자이며 낳는 자, 펜을 음경처럼 생산의 도구로 쓰는 미학적 가장”이었다. 여성은 pen이 없어서 남성 텍스트에 갇힌 인물과 이미지로 환원되었다. 그렇다면 penis(펜)가 없는 채로 글을 쓰는 여성은 어떻게 해야 텍스트의 저자가 될 수 있는가? “(95) 여성은 자기를 ‘살해해’ 예술에 가두어놓았던 미학적 이상(남성 작가가 만들어 놓은 ‘천사’ ‘괴물’)을 죽여야 한다.” 즉, 여성은 천사도 죽여야하고 괴물도 죽여야 한다. 그리하여 내 기준에 이 책 <다락방의 미친 여자>의 1장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문장은 바로 이것이다.
“(95) 페미니즘 비평가인 우리에게 천사와 괴물 둘 다 ‘죽이는’ 울프 적인 행위의 시작은 이런 이미지의 기원과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다. 페미니즘 시학을 수립하고자 한다면, 살해하기 위해 우선 분석해야 한다. 특히 여성이 쓴 문학을 이해하려면 그래야 한다.” - <다락방의 미친 여자>
살해하기 위해 우선 분석해야 한다.
살해하기 위해 분석해야 한다.
살해하기.위해.분석해야.한다.
직관과 촉이 지식과 권위로 포장된 듣기 좋고 예쁘기까지 한 언어들 보다 훨씬 더 나의 삶에 약이 되는 경우가 있다. 일견(일견이다!!) 물리적 폭력이 거세가 된 현대 사회에서 말과 글, 이미지의 생산과 유포는 중요하고 점점 더 중요해질 것이다.
교언영색. 자본이 있다면 그걸 대량으로 대규모로 할 수 있고, 없어도 그런 발화 권력을 가진 사람 (인플루언서)에게 우리는 기꺼이 돈을 지불한다. 내가 싫어하는 말인 ‘선한 영향력’은 한때 우리 사회의 키워드였고, <부의 추월차선>의 저자 엠제이 드마코가 강조하는 것 역시 “영향력을 가지고 그걸 팔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의 문법이 이렇게 되어버렸다. 나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고. 짜증스러운 일이다.
일상에서 만나는 가장 흔한 이야기, 가장 흔한 언어들로 내가 통치 되고 있다는 것. 그 언어를 무력화 시키는 것은 역시나 ‘언어’ 뿐이라는 것. 페미니즘 비평은 ‘페미니즘’이어서가 아니라 ‘지금을 그나마 덜 휘둘리고 살아가는 데’에도 훌륭한 통찰을 준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쏟아지는 언어와 이미지 속에서 나를 분리해 내어 갈라 볼 촉이 있다면 여러분 그걸 연마하자. 나를 죽이는 흔한 것들에 대한 인식을 훈련하는 것이다.
그것들을 살해,하기,위해 분석,하는,방법. 힙하다고 일컬어지는 진부하고 흔한 말들 속에서 거품처럼 사라져버리는 나의 직관과 나의 촉을 다시 되살려내는 분석. 그걸 하자. 그렇게 살자. 그것은 내 몸의 말을 듣는 것. 몸이 말을 안 듣는다면 그럴 땐 말이 깎아 내려버린 내 몸이 보내는 신호를 잘 들여다 보는 글을 쓰는 것.
흔한 말은 아니라 귀에 쓰고, 순간 불쾌하더라도 그 언어가 내 무의식 어딘가를 건드린다면 방어 기제를 내려놓고 차분히 들여다 보라. 음, 이렇게 쓰니까 어렵다. 여자들아, 글을 읽자. 읽을 때는 생각하자. 어떤 몸에서 출발한 글인가? 그 몸을 내가 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리고 여자들아, 글을 쓰자. 내 몸과 내 경험과 내 앎이 만나는 범위 안에서, 내 안에 있는 목소리와 가장 비슷한 말들을 이미 만들어진 언어들 속에서 찾아보는 것이다. 문장이면 문장, 문단이면 문단, 단어면 단어. 왜 거기에 긁히는 가. 그리고 그걸 긁는다. 왜 나를 아프게 하는 가. 긁는 과정, 그걸 쓴다.
써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쓰다보면 (분석하다보면) 그것들은 천사도 괴물도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천사를 죽이되 분석으로 죽여라. 괴물도 죽이되 분석으로 죽여라. 천사와 괴물을 죽이려고 쓴 글들도 죽여라. 결국 언어는 몸이 아니니까. 말은 글은 몸이 아니니까. 그러나 몸을 가진 인간은 언어로 지어진 사회(공동체) 속에서 살아가지.
자본주의가 지속되는 한 타자화하고 싶은 욕망의 글쓰기를 참지 못하는 페니스를 쥔 글들은 계속해서 팔릴 것이다. 그것을 죽이려고 쓰는 글들은? 글쎄?
내가 믿는 것이 있다면 7만번이나 혀를 돌리고도, 말을 하지 않던 여자들이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돈을 번다는 거다. 그리고 여자들이 글을 쓴다. 여자들이 글을 더 많이 쓴다. 잘 쓴다. 그래봤자 남자들이 세상을 망치는 속도가 더 빠를 것이라, 어차피 세상은 망하고 다행스럽게도 나는 죽는다.
문제는 더 빨리 안 망하면 100살까지 살아버릴 수도 있다는 건 데.... 이렇게 된 김에 여자들아, 글을 써서 세상을 더 빨리 망하게 하거나, 살아있는 한 재밌게 살다 가거나. 그러자. 뭐.
엘렌 식수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자기 자신을 글로 표현하는 것을 자기만의 운동으로 삼으라.” -<쓰기의 말들>
어쩔 수 없이 살아남아 버려서 돈까지 벌고 있는 나는 일단 그녀의 믿음에 슬쩍 발을 담궈 보고자 한다. 굳건한 믿음 아니고 아주 아주 미약한 믿음. 그녀가 1975년에 뿌린 씨앗이 지금의 세상이고. 지금 내게 살아 볼만한 이유가 있다면, 여자들의 글을 읽는 것이라는 사실이 가장 크니까. 어쩔 수 없다. 나는 간다. 끝까지.
“(213) 여성적 글쓰기를 통해 식수는 남성 중심적이며, 배타적인 이성 중심적인 현실을 무너뜨리고 변화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식수는 이를 위해 사회 전복을 꾀하는 혁명가와 같이 거리로 나서는 사람들을 모으지도, 그들의 힘을 결집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여성적 글쓰기를 통해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유포시키고, 현재의 기만적인 현실을 꿰뚫어 보여 주면서 그것을 풍자하여 우리에게 비판적인 통쾌한 웃음을 터뜨리게 한다. 바로 메두사의 웃음을.
이렇게 식수는 의식의 변화를 통한 평화롭고 점진적이며 확고한 전복과 혁명을 글쓰기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여성적 글쓰기를 통해 의식의 변화를 위한 씨앗을 뿌려 그것이 자연스레 사회 구조의 변화라는 열매로 거두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메두사의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