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 남성, 여성 그리고 강간의 역사
수전 브라운밀러 지음, 박소영 옮김 / 오월의봄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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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한달간. 그리고 3월 절반을 끌어오던 책을 오늘 드디어 끝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분들을 보냈다.(이제는 안타깝지도 않다) 먼저는 수용소군도의 솔제니친, 그 다음에는 프란츠 파농... 그리고 우리의 프로이트와 롤링스톤즈, 맥시코의 혁명가 판초비야까지... 그러고 보니 이런 띵언을 만난 적이 있다. 여혐에는 좌우없다.”


한 때는 좋아하고 존경했던 것들이 여성의 시각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느낄 때, 씁쓸하기도 하고 어디부터 정리해야 하나 답답했는데. 수전 브러운 밀러의 책에 간단한 힌트가 있었다.

 

“(324) 그럼에도 다시 강조하건대 나는 압세커에게 많은 빚을 졌다. 그는 강간이 정치적 범죄라는 사실을 내게 처음으로 말해준 사람이었다. 또한 나에게 변증법적 논리라는 도구를 사용하는 법도 가르쳐주었다. 그러니 내가 그의 주장을 그가 의도한 것보다 더 멀리 밀고 나간다고 해도 그는 결코 놀라지 않을 것이다.”

 

변증법적으로. 혹은 그들을 발판삼아 더 멀리 나아가기. 얼마전에 읽었던 변영주의 강연집도 생각난다. 사람은 성과만큼의 쓰레기와 숙제를 남긴다.” 익숙한 존경과 이별하고, 이제는 그들의 언어를 발판삼아 낯설지만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야한다. 


*

 

원시시대부터 현대까지 강간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이 두꺼운 책을 누구라도 시간 내어 읽었으면 한다. ‘강간자체에 대한 신화 강간범에 대한 신화, 강간 이데올로기, 강간문화가 얼마나 만연하고, 역사적이며 세계적인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유명 연예인의 몰카범죄가 폭로되었는데, 그 몰카 내용을 궁금해하며 피해자를 추측하고 있는 2차가해의 나라에 살고 있으므로 뭐 세계까지 둘러볼 필요는 없을지라도.

 

여성팬들의 굿즈장사로 주머니를 채우는 남자연예인들이 (고마운 줄도 모르고) 여혐을 하고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은 별로 충격적이지는 않지만 많이 괘씸하다. 그 와중에 #승리유어낟얼론 따위의 해시태그를 보는 것은 꽤 참담하지만, 내가 더 분노했던 포인트는 지난 날 정준영을 받아주고 환대하던 방송계안의 든든한 남성연대였다


그래, 그랬지.

 

남자들은 여자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남자가 미치도록 사랑하는 것은 자기 자신 뿐이다. 남자들은 언제나 그들 안에서의 인정과 서열에 더욱 목마르다. 그 안에서 여성은 쟁취의 대상이거나 그들의 낮은 자존감의 보상해줘야 하는 존재로서만 기능한다. 장담컨대 정준영치들에게 여자(혹은 몰카 동영상)’란 유희왕 카드를 모으듯 수집하는 것, 그리고 그 수집 목록으로 봐봐, 나 이정도야!” 게임 아이템처럼 자랑하고 선물하기도 하는 그들끼리의 힘자랑 혹은 인정투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290)(청소년 집단 강간 사건 심리연구 사례)... 이는 이들이 강간 경험에서 얻은 성적 관계와 성적 느낌이 대부분 소녀와의 관계가 아니라 소년끼리의 관계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해준다.”


“(296-7) 내가 14가의 지하철 승강장에 서서 동전을 빼내려고 껌 자판기를 요령 좋게 때리고 있는, 점점 더 과감하게 때리는 한 무리의 청소년들을 거의 홀린 듯 지켜보고 있었을 때, 내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저 자판기가 내 몸 일수도 있다는 것 뿐이었다남성연대는 여성 멸시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며, 불신에 의해 강화된다. ... 남성연대는 사회적 유대의 본보기 처럼 기능하며 보통은 집단 폭력과 강간이라는 과장된 형태로 본보기를 제공한다.”

 

*

 

그래서 우리가 이 사례로 다시금 환기해야 하는 것은 연예인 몇몇에 대한 단죄와 매장(도 해야한다)이 아니라 이미 미세 먼지처럼 일상이 되어 모두의 숨을 못쉬게 만들고 있는 사회 안의 강간문화다. 책에 따르면 “(271)미국의 전형적인 강제강간범은 여자에게 폭력을 행사하기로 작정한 공격적이고 적대적인 젊은이로서 범죄자의 61퍼센트가 25세 이하, 다수가 16~24세 구간에 집중되어 있다.

 

즉. “(612)강간은 비이성적이고 충동적이며 통제할 수 없는 욕정에 의한 범죄가 결코 아니다. 정복자가 되고 싶은 남성이 여성에게 두려움을 주고 협박하려는 의도로 계획한 비하 및 점령 행위, 즉 의도적으로 여성을 적대하는 폭력 행위이다. 이것이 바로 강간의 실체이다.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 문화 속에 그런 폭력적인 태도를 장려하고 선전선동하는 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한다. 문화에 내재한 그런 요소들은 남성들, 특히 잠재적인 강간 예비군을 형성하며 쉽게 외부의 영향을 받는 남성 청소년들이 폭력 행위를 저지르도록 심리적으로 부추기고 그들에게 이데올로기를 제공하면서도, 그런 행위가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려주기는커녕 처벌받을 수 있는 범죄라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게 만든다.”

 

남녀공학 중학교를 나온 나는 1학기 초에는 함께 깡통을 차면서 놀던 천진한 남자 동급생들이 어느 순간부터 여남을 따지고, 자기들끼리 킥킥거리며 무언가를 돌려보고, 반여학생들 순위를 매기기 까지하던 2학기후반의 묘한 균열의 시간들이 기억난다.

 

'진짜 남자'가 되기 위해 먼저 나서서 여자를 멸시해야하고 급기야는 강간을 하고 그것을 영상으로 찍어 공유하는 그놈들의 문화. 단죄해야하지 않겠는가? 이제는 없애야 하지 않겠는가?

 

*

 

“(633) 반격하라.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불균형을 바로잡고, 우리 자신과 남성들을 강간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게 하고자 한다면, 우리 모두가 여러 층위에서 함께해야만 하는 일은 바로 맞서 싸우는 것이다.

그저 한 개인의 수준에서 강간을 피할 방도를 찾거나, 강간이 더빈번히 일어나지 않도록 통제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강간은 근절할 수 있다. 하지만 강간 근절은 장기간에 걸쳐 다수가 협력해야만 가능하며, 여성만큼이나 남성의 이해와 선한 의지가 필요하다.

나는 이 책을 통해 강간에 역사를 부여하고자 했다. 이제 우리가 함게 강간의 미래를 단호히 부인할 차례이다.”

 

*


저자의 경험, 저자가 만났던 사람들, 그리고 사건들.

읽으면서 책 자체가 투쟁의 산물이라는 생각이 들어 몇번 뭉클했다.

두께와 내용모두 다소 힘든 독서경험이었지만 읽고나니 그 만큼 뿌듯하다. 

아마 함께 읽지 않았더라면, 어려웠을 것이다. 

이렇게, 좀 늦긴했지만 완독! 함께 읽어준 알라딘 마을 책 벗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이 책을 쓰는동안 가장 자주 받은 질문은 짧고 노골적이며 불쾌한 것이었다. "강간당한 적 있어요?"
나도 짧게 받아친다. "없습니다." - P4

가장 초기의 남성연대는 무리지어 사냥감을 찾아다니던 남자들이 한 여자를 윤간하는 형태였을 것이다. 이렇게 남성연대가 이루어진 이래로 강간은 남성의 특권일 뿐 아니라, 남성이 여성에게 힘을 과시하는 기본무기이자 여성에게 두려움을 일으키며 남성의 의지를 관철하는 주요 동인이 되었다. 여성이 온 몸으로 저항하고 싸우는데도 그 몸에 강제로 삽입하는 일은 여성의 존재를 지배했다고 선언하는 수단, 즉 힘의 우위와 남자다움의 승리를 증명하는 궁극의 수단이 되었다.
남성이 자신의 성기를 두려움을 일으키는 무기로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일은 불의 사용과 돌도끼의 발명과 함께 선사시대에 이루어진 가장 중요한 발견으로 꼽아야만 한다. 강간은 선사시대부터 지금까지 결정적인 기능을 수행해왔다. 모든 남성이 모든 여성을 공포에 사로잡힌 상태에 묶어두려고 의식적으로 협박하는 과정이 바로 강간이다. - P25

인디언전쟁 기간의 강간은 대개 그때 그때 되는대로 이루어지는 보복성 행위로서, 남성이 남성에게 복수하기 위해 여성의 몸이라는 편리한 수단을 이용한 현상이었던 반면, 노예제 가부장들이 가부장적 제도‘라고 부른 시스템에서 강간은 제도의 불가분한 일부로기능했다. 백인 남자들은 인디언에게서 땅을 빼앗고 싶어 했고, 흑인에게서 강제노동을 뽑아내려 했다. 이렇게 목적이 달랐기 때문에 백인 남성이 흑인 여성과 맺는 관계나 흑인 여성을 이용하는 방식도 인디언전쟁 때와는 달랐다. 노예제에서 강간은 폭력을 발휘하는 수단에 그치지 않는다. 노예제에서 강간은 제도화된 범죄로서 백인 남성이 경제적, 심리적 이득을 얻기 위해 한 종족을 예속 시키는 데 핵심이 된다...... 그녀는 노동자이자 재생산자로서 이중 착취를 강요당했다. - P236

인기 있는 영화배우나 운동선수, 록가수, 집단 내에서 존경받는 남성처럼 가해자가 일종의 문화적 우상인 경우, 이들이 지닌 우상의 후광은 물리적 폭력을 덜 써도 된다는 심리적 유리함을 제공한다.... 강도나 사기 사건에서 피해자가 분위기에 휩쓸렸거나 바보 같다고 해서 가해자의 죄가 가벼워지는 경우는 없지만, 강간 사건에서는 사정이 달라지는 것이다. - P395

강간 신화의 핵심 명제
"모든 여성은 강간당하기를 원한다"
"자신의 의지에 반해 강간당하는 여성은 있을 수 없다"
"그녀가 원했다"
"어차피 강간당할 상황이면 긴장을 풀고 즐기는 편이 낫다"
이 모두는 지독하기 짝이 없는 남성의 강간 신화이자,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지배하는 왜곡된 격언이다. 이 장에서 앞으로 전개할 논의에서도 이 신화가 핵심이 된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이 신화를 믿을뿐 아니라, 남성권력의 성패가 얼마나 많은 여성에게 이 신화를 납득시키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한 여성이 자신의 패배에 기꺼이 동참하도록 만들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전투의 반은 이긴 것이기 때문이다. - P484

장담하건대 여성을 재산으로 간주하는 개념이 사라지면서 처녀성의 중요도가 줄고,‘처녀성 파괴의 고통‘이 구시대적으로 보이게 된 것처럼, 생리통부터 출산 시의 극심한 진통까지 여성들만 겪는 산부인과적 고통 역시 언젠가는 구시대의 것이 될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런 고통을 여성의 의무로서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 것이 아니라 현대적 노력을 통해 경감·통제·완화되어야 하는 고통이며, 앞으로 그렇게 될 것이다. - P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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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03-15 0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생 많았어요, 쟝쟝님.

여혐애 좌우없다는 말에 씁쓸해지네요. 정말 그러니까요.

공쟝쟝 2019-03-15 01:03   좋아요 0 | URL
책 속 통계를 보니 위 아래도 없는 것 같아요😂

단발머리 2019-03-15 06: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년끼리의 관계. 그게 핵심인 것 같아요. 전 이 책을 읽을 때는 인용해주신 290쪽이 가깝게 와닿지 않았는데...
허어... 근간의 사태에서 확인되네요. 소녀보다 소년이죠. 여친보다 친구. 주고 받고 같이 웃고 떠드는 친구 ㅠㅠ

수고많으셨어요, 쟝쟝님.
아침부터 잘 읽고 갑니다^^

공쟝쟝 2019-03-15 10:42   좋아요 0 | URL
저도 친구 좋아하지만, 친구들에게 잘보이려고 누군가를 멸시하지는 않죠.. 슬퍼요 ㅠㅠ

블랙겟타 2019-03-15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혐이라는게 최근에 불거진 단어가 아닌 역사적으로 오래되어 왔다는 것을 저는 예전에는 부끄럽게도 느끼지 못했어요.

최근 몇년 간 페미니즘 관련 서적을 여러 권 읽으면서 ‘어? 언제는 세상이 혹은 남자들이 여혐을 안했던 적이 있던가?’라고 생각이 들고 있어요. 정치적 성향, 인종을 뛰어넘는 암묵적인 연대가 되어있다는 것을요.

지금 읽고 있는 <가부장제의 창조>에도 말하고 있지만 언제는 역사적으로 여자를 동등한 존재로 대했던 적이 있던가요? 페미니즘 책을 읽으면서 슬프게도 이런 생각이 맞다는 것을 점점 느끼고 있네요.

쟝쟝님, 책 읽느라 수고많으셨어요!
글 잘 읽었어요. :))

공쟝쟝 2019-03-15 15:31   좋아요 1 | URL
저두 강남역 사건이 없었더라면 페미니즘? 그거 프로불편러들 아니야? 했을 1인으로서 부끄럽 또 부끄러울 뿐입니다. 저 잘읽었죠? 히히!!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왤케 칭찬 좋지???)

블랙겟타 2019-03-15 15:42   좋아요 1 | URL
공교롭게도 저도 그 사건을 계기로 세상을 다시보는 계기가 되었어요...

네! 잘 읽으셨어요!!
저의 칭찬(?)이 힘이 된다면 언제든지 해드릴 수 있죠. 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