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스피드
김봉곤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평점 :
품절


이 소설을 게이 문학이라고도, 사랑에 대한 소설이라고 정리 할 수 있겠지만, ‘글쓰기에 대한 사랑’을 구구절절 표현한 글이라 말하고 싶다.
사랑을 쓰기 위해 글을 썼다기 보다는 글을 쓰기 위해 사랑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p.217)
그와의 사랑이 시작되었을 때 나는 아무것도 쓸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사랑이 시작될 때 모든 것이 그로 수렴했듯, 사랑이 끝나가는 지금도 그를 생각하는 에너지는 최고조로 치닫는다.
그와의 사랑이 끝났다고 예감했을 때에야 비로소 나는 이 글을 쓸 수 있었다. 쓰지 못하는 시간도 있었다.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 나를 차갑게 식혀야 했고 동시에 그를 다시 한 번 사랑해야만 했다. 그를 사랑하지 않으려는 나를 믿을 수 없었고, 그를 포기하려는 마음을 끊임없이 지연시켜야만 했다.
글쓰기에 있어 거리감의 상실이 언젠가 나를 완전히 소진시키고 말 것이란 두려움 속에서도 그것을 멈출 수 없었다. 정념에 휩싸이지 않고서는 글을 썼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고, 정염없이는 시작할 수조차 없었다. 헤퍼지지 않고는 도무지 버티질 못했다.”

글을 쓰기 위해 사랑을 한다는 것은 나의 추측이 아니라 어쩌면 진실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쓰는 동안 만큼은 다시 사랑하는 상태로 돌아간 그 역력한 흔적들이 보이니까.
글과 소설 속의 ‘나’와 작가의 거리감이 너무나 찰싹 달라붙어서 당황한 건 오히려 읽고 있는 나였다.

솔직히 -‘퀴어’라는 코드를 빼 놓는다면- 소설 속 ‘나’들의 연애사는 달가워하지 않는 종류의 것이다. (지금보다 다섯살 어렸다면 모르겠다.) 친구라면 한대 쥐어박았을 거고 고나리질도 서슴지 않았겠지. 너의 박복을 탓하지말고, 휘발되는 정욕의 관계들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말지니.

하지만, 소설로써 항변하는 그의 말들
“ (p.187) 어쩌면 그것을 정의하는 것은 불능일지도 모른다. 전형성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협소하게 뜻을 재정의하는 것은 오히려 사전의 기능에 역행하는것은아닐까? 혹은 사랑에 보편을 요구하고 정의하려는 것은 언어의 영역에서 벗어나는 일은 아닐까? 어쩌면 사랑은 영원히 정의되지 못한 채 부유하며 말할 수 없음,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혹은 그것을 느꼈다, 라고 말하는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소설가는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책 한 권을 써내며, 음악가는 선문답처럼 음악을 만들고, 누군가는 춤을 추며 투박해지는 것에 저항한다.”
에 나는 동의하기로 한다. 더군다나 주인공이 내 친구도 아니므로.

소설을 읽고 그의 인터뷰를 찾아 읽었다. 작품에도 등장하는 ‘세월호를 가지고 일인칭으로 쓰기’라는 과제는 작가가 직접 겪은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제가 그런 과제를 받았고, 도저히 쓸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어쩌면 제가 첫 번째 작품집에서 저 자신에게 집중한 계기가 된 것 같아요. 타인을 안다고, 이해한다고 말하기보다는 저에 대해 자폐적으로 쓰는 게 윤리적이라고 생각했어요. 편협하단 얘기를 들을망정 내 얘기부터 시작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든 사건이었죠. ˝ -연합뉴스 인터뷰중에서-

아 그랬구나. 그래서 이렇게까지 내밀하게 자신에 대해 사랑에 대해 쓸 수 있었구나. 너무나도 솔직한 글쓰기. 그리고 쓰는 것에 대한 사랑. 사랑에 대해서 쓰려 하는 글. 지어는 글과 따로 떨어져 있지 않는 것 같은 그 삶의 방식 마저. 수긍되어 버린 인터뷰.

비슷한 구조의 짧은 단편들이 반복되어 읽는 동안 갸웃갸웃 하긴 했지만. 아직은 쓸 것과 사랑이 너무 많다는 작가의 다음 소설도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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