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다. 아빠가 찍어놓은 사진이다. 그다지 아름답고 멋진 바다가 아니지만, 내가 하려던 바다 이야기에 딱 맞아떨어지는 사진이다. 저 곳은 여수, 사진 위에 보이는 건물들 바로 뒤 어딘가에 우리 친정집이 있다. 내가 자란 사택도, 지금은 허물어졌지만 그 근처 어디이다.
서울로 대학을 와서 내가 우리집이 바닷가에 있다고 하면, 친구들의 머리 속에는 저절로 클레멘타인이 울려퍼지면서 나를 새삼스럽게 <어촌 소녀>로 보곤 했다. 어촌이라니...쩝. 우리 집에서는 10분만 걸어나가면 바다가 있지만, 어촌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당연히 우리 아빠도 어부가 아니고 회사원이었다.
바다를 끼고 자라서인지, 내게는 사람들이 갖는 바다에 대한 환상이 없다. 드라마에서 사람들이 실연을 당하거나 사랑을 시작하면 차 조수석에서 '바다에 가고 싶어....'라고 되뇌이고, 그 날 밤 만사 젖혀두고 바다로 달리는 모습이 빈번하게 나오는데, 사실 난 그 심리를 이해할 수가 없다. 어찌보면 내가 끼고 자란 바다가 남해라는 탓도 있겠다. 남해는 동해나 서해와는 사뭇 다르다. 바다 위에 옹기종기 섬이 얹혀 있어서 시원하고 탁 트인 정경은 기대하기 힘들다. 각종 어패류, 해산물도 많이 잡혀 시내와 바다 사이에 아무렇지도 않게 어시장이 버티고 있기도 하다. 한 마디로, 남해는 사람 냄새가 많이 나는 바다다.
고등학생이었을 때, 10분만 걸으면 되는 바닷가 방파제 길로 자주 땡땡이를 치곤 했다.(수업은 아니고, 야간자율학습^^) 내려다 보는 밤바다는 아름답지도, 투명하지도 않았다. 제 몸 위로 던져진 불빛을 느끼하게 반사시키는 시커먼 그것은, 마치 물을 모조리 퍼 내고 정제되지 않은 원유를 채워 놓은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금새라도 그 불투명하고 음험한 수면이 갈라지고 난생 처음 보는 괴물이 솟아 올라 나를 품고 들어가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런데 난, 그 응큼한 바다가 좋았다. 어시장에서 불어오는 독한 냄새도 좋았다. 각종 생선이 얽혀 썩어가는 냄새는, 이미 비릿함을 넘어선 것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 냄새를 맡으려 심호흡을 하곤 했다. 그 썩은 냄새가 내 가슴 속의 썩어가는 부분과 닮은꼴인 것 같아서. 그 냄새를 폐에 가득 채우면, 숨을 내뱉으면서 썩었던 부분도 정화될 것 같아서. 당시의 나는 상당히 시니컬한 상상력의 소유자였던가 보다.
그런 바다. 마음에 드는 부분도 있었지만, 자라면서는 구질구질하다고, 동해같이 탁 트이지 못하고 왜 저리 답답한거냐며 투덜댔던 바다. 그렇지만 이미 나의 일부인 바다. 요즘은 그립다. 마치, 지지리 못난 말썽꾼 식구처럼. 감추고 싶고, 구박을 퍼붓지만 끈끈하게 피가 당기는. 함께 자라면서, 저 바다는 내 혈육이 되어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