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중)에콜로지카 - 덜 일하고 덜 소비하는 삶
(재고소진)12월 이것만은 꼭 읽겠닷!!
3. 자동차의 사회적 이데올로기
그 어떤 대중선동가도 지금까지 "휴가를 누릴 권리를 민주화하는 것은 '프랑스인 한 가족 당 사유 해변이 딸린 별장 한채'라는 원칙을 적용하는 것이다."라는 주장을 감히 한적이 없다. (중략)만약 각자에게 자기 몫의 해변을 나눠준다면, 해변을 아주 작은 띠처럼 토막토막 끊어서, 아니면 별장을 다닥다닥 붙게 촘촘하게 지어서 그 땅이나 집의 사용가치가 제로가 되어버리고 호텔 단지에 비해 나을 것이 하나 없게 되어버린다는 얘기다. 요컨대 해변 사용의 민주화에는 단 하나의 해법밖에 없다. 집단으로 사용하는 해법이다. 그리고 이 해법은 반드시 사유해변이라는 사치-극소수 층이 모든 이를 희생시키며 누리는 특권-와 대적하는 전쟁을 거치게 된다.
그런데 해변의 경우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을 왜 운송수단의 경우에는 누구나 받아들이지 못할까? 자동차도 해변 딸린 별장이나 마찬가지로 '희귀한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가? 자동차는 다른 도로이용자들(보행자, 자전거 타는 사람, 전차나 버스 탑승자)의 권리를 빼앗는 것 아닌가? 모든 사람이 자기 차를 타게 되면 사용가치를 다 잃어버리는 것 아닌가?
(76~77쪽)
자동차는 처음으로 계층 간의 차이를 속도, 운동수단의 차이로 확대했다.
(79쪽)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교통수단의 옛날 주인들과는 달리 자동차 주인은 형식상으로는 자기 소유인 차에 대해 소유자 즉 주인으로서의 관계가 아니라 사용자, 소비자로서의 관계를 갖게 된다. 다시 말해 차는 차 주인에게 오직 제3자만이 공급할 수 있는 수많은 유료 서비스와 산업제품들을 소비하고 사용하지 않을 수 없도록 강요하게 된다.
(80쪽)
전형적인 미국사람이라면 일 년에 1,500시간 이상(주당 30시간, 일요일 포함하여 하루에 네 시간)을 차에 할애한다. 여기에는 차가 달리는 동안 혹은 서 있는 동안 운전대를 잡고 보내는 시간, 자동차 값을 지불하고 휘발유, 타이어, 통행료, 보험, 범칙금, 세금.... 등을 낼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시간도 포함된다. 그러니까 이 미국인은 (일 년에) 10,000킬로미터를 달리는 데 1,500시간이 필요하다. 6킬로미터에 한시간이 드는 셈이다. 운송산업이 전무한 나라의 사람들이 걸어 다닐 때 걸음 속도가 정확히 이와 같은데, 게다가 그들은 어디든 갈 수 있고, 아스팔트 포장한 도로가 아니라도 다 갈 수 있다는 이점까지 갖는다.
(84쪽)
하지만 자동차의 대안은 전 지구적이 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자기 자동차를 단념할 수 있으려면 그들에게 좀 더 편한 집단 대중교통수단을 제공하는 것만으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전혀 교통기관에 의지해 이동하지 않을 수 있게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자기가 사는 동네나 마을이나 도시에 있어서 있어도 아주 편하게 느낄테니까. (중략)
동네나 마을이 다시 예전처럼 모든 인간활동에 의해, 인간활동을 위해 설계된 소우주가 되어 거기서 사람들이 일하고 거주하고 긴장을 풀고 학습하고 소통하고 움직이고 모듬살이의 환경을 다 함께 관리해가야 한다.
(91쪽)
4. 파괴적 성장과 생산적 탈성장
현재의 에너지 소비수준이 줄일 도리가 없는 특수한 필요가 낳은 결과라기보다는 '풍요로운' 자본주의 특유의 어떤 발전유형을 택했기 때문임을 보여준다. '풍요로운' 자본주의에서는, 가능한 한 최대치의 필요를 창출해낸 뒤 가능한 한 최대치의 상품을 생산하여 그 필요를 충족시켜주는데, 그 방식은 한시적이어야 한다.
(97~98쪽)
파괴는 이리하여 부의 원천으로 나타나는데, 부서지고 폐기되고 내다버린 모든 것은 대체되어야 하고, 따라서 생산과 상품 판매, 화폐 유통, 이윤을 불러올 것이기 때문이다. 물건들이 깨지고 닳고 구식이 되고 폐기되는 속도가 빠를수록 국민총생산은 증대할 것이고, 국가회계 상으로는 우리가 부유한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103쪽)
자율적 제한, 안정화, 공평함, 무상성이라는 생각들의 구체적 예시가 있어야만 공산주의는 지배적 시스템의 긍정적 부정으로 구현될 것이다. 그러니까 노동을 덜 하고, 소비를 덜 하면서 보다 잘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제부터 이렇게 욕구의 영역을 의지적으로, 집단적으로 제한함으로써, 그럼으로써만이 자율의 영역을, 즉 자유를 확장할 수 있어야만 한다.
(106쪽)
필수품 생산의 사회화와 분배 및 교환을 중앙에서 조절하는 것이 여전히 필요하다. 필요의 영역, 그러니까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의 영역을 최소로 줄이자면 유통과 재고를 효율적인 동시에 가능한 방식으로 조직하고 조절해야만 한다. 그러니까 계획경제를 확대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저마다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노동시간대를 조절하고, 노동을 연속적인 방식으로 혹은 불연속적인 방식으로 할지 자유롭게 정하고, 하나의 활동영역에서만 노동을 할지 혹은 여러 활동영역에서 노동을 할지를 자유롭게 정하여 사회적으로 유용한 노동을 2만 시간 하는 대신에 평생 사회수당을 보장받는 것, 이 모든 것은 조절과 '전반적 균형'을 담당하는 중앙기구, 즉 국가가 존재해야만 가능하다.
(중략)
필요의 영역과 자유의 영역은 서로 겹쳐지지 않는다. 마르크스 자신도 이 사실을 [자본론] 제3권 말미에서 거듭 천명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자유의 영역의 확장은 필요의 영역이 확실하게 제한되어야 함을 가정한다. 공산주의 국가의 유일한 기능은 필요의 영역이 계속 줄어들고 자율의 공간이 커지도록 필요의 영역을 관리하는 것이다.
(110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