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반양장) - 하나님께 가는 가장 쉽고도 가장 어려운 길
필립 얀시 지음, 최종훈 옮김 / 청림출판 / 2008년 1월
절판


인간은 삶 속에서 만난 멋지고 아름다운 순간에 대해 누군가에게, 또는 무엇인가에 감사하고 싶을 때 기도를 드린다. 자신이 너무나도 왜소하고 무기력하다는 사실을 절감할 때, 그리하여 깊은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순간에도 기도가 나온다. 용서를 받고 힘을 얻기 위해, '스스로 존재하는 분'을 만나기 위해, 세상에 홀로 버려진 게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받기 위해서도 기도한다.-15쪽

토머스 머튼의 말처럼 "기도는 인간이란 존재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행위다. 인간은 불완전성 그 자체다. 반드시 무언가로 채워져야 할 간격이나 공간과 같다."-15쪽

세상은 날이 갈수록 빨리 돌아가고 있으며 느긋하게 앉아서 기도할 여유는 그만큼 줄어들고 있다. 커뮤니케이션은 점점 짧아지고 더 비밀스러워졌다. 편지 한 장도 버거워서 이메일이나 문자 메시지로 처리해버리고 만다. 대화는 줄어들고 혼자 지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없어"가 붙는 말들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시간이 없고, 쉴 틈이 없고, 운동할 여유가 없고, 놀 짬이 없다. 이렇게 온갖 스케줄이 꽉 들어차 있는 삶에 무슨 여백이 있어 하나님이 끼어드실 수 있겠는가?-19-20쪽

기도는 마음의 근시를 바로잡게 해준다. 잊어버리기 쉬운 하나님 관점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우리는 시시때때로 역할을 뒤집어버린다. 내가 하나님을 섬기는 게 아니라 주님이 나를 위해 봉사한다고 착각하기 일쑤다.-29쪽

손튼 와일더의 연극 <우리 읍내our town>에 재미있는 대목이 있다. 어느 날 제인에게 편지 한 통이 배달된다. 그런데 겉봉에 적힌 주소가 특이하다. 주소는 농장의 이름과 읍, 면, 군의 명칭을 적는 데서 끝나지 않고 길게 이어진다. "미국, 북아메리카 대륙, 북반구, 지구, 태양계, 우주, 하나님 마음." 그리스도인은 순서를 거꾸로 바꿔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토대를 두고 삶을 바라본다면 그 밖에 잡다한 일들은 저절로 제자리를 찾게 마련이다. 설령 그렇게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최소한 과거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상황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32-33쪽

은혜는 물처럼 높은 곳에서 낮은 데로 흐른다. 사랑도 시냇물처럼 흘러내린다.-34쪽

기도, 오직 기도만이 하나님과 같은 관점을 갖도록 시력을 회복시켜 준다. 눈을 가렸던 비늘이 떨어지면서 부의 이면에 무서운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며 그것이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인간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은 인종이나 지위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내재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진리가 새롭게 다가온다.-35쪽

"근본적으로 기도는 자세, 즉 자신을 어디에 놓느냐의 문제다. 초점을 맞추는 기도란 시야를 제한한다는 뜻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실체에 주의를 집중하는 습관이 기도라는 말이다."-37쪽

"하나님은 조금 쉬자고, 잠시 농땡이를 치자고 부르신다. 하나님의 자리를 차고앉아서 제 힘으로 중요한 일들을 처리하려 들지 말고 그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되시도록 모든 일을 맡겨버리자." 기도는 인간의 연약함을 한없는 사랑으로 채워주시는 주님 앞에 온갖 실수와 약점, 한계 따위를 인정할 힘을 주는 것이다.-38쪽

기도는 질서를 재조정하는 과정이다. 우주를 아우르는 진리를 회복시켜주시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과 자신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44-45쪽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는 순간부터 우주는 질서를 회복한다. 고백이란 피조물이 창조주를 바라보면서 자기 자리를 제대로 잡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일 뿐이다.-49쪽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는 척도다.-49쪽

헨리 나우웬은 이렇게 말한다. "기도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온전한 빛 속을 걸어가며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저는 인간이고 당신은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일이다. 바로 그 순간 변화가 일어난다. 관계가 정상적으로 회복된다. 인간은 가끔 실수를 저지르는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 역시 가끔씩 용서를 베푸는 창조주가 아니다. 인간과 하나님의 정의가 잘못됐다. 인류는 총체적으로 죄인이며 하나님은 총체적으로 사랑이시다."-53-57쪽

도움을 청하는 자세야말로 기도의 뿌리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만 봐도 온갖 요청이 줄줄이 이어진다. 하나님께 의지한다는 선언, 그것이 기도다.-57쪽

성공을 으뜸으로 떠받드는 세상에서 스스로 약점을 인정하는 태도는 교만한 마음을 무장해제시키는 동시에 은혜 입을 준비를 갖추어 준다. 연약함을 기도를 부른다. 긍휼과 권능으로 응답해주시도록 하나님을 초청하는 것이다. "여호와의 그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시 105:4) 누구와도 비할 수 없을 만큼 탁월한 의사 앞에서, 인간이 취해야할 가장 적절한 행동은 상처를 보여드리는 것뿐이다.-57쪽

모든 행동 뒤에 감춰진 이기적인 동기나 독사처럼 똬리를 틀고 있는 욕망과 야심, 완벽해 보이려고 안간힘을 쓰게 만드는 치유되지 않은 상처 따위는 오직 하나님만이 알고 계신다. 기도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삶 전체를 들고 나와서 정결하게 씻어내고 제 모습을 되찾으라고 초청하는 안내장이다.-70쪽

관계가 아니라 거래로서의 기도는 기쁨이기보다 정해진 규정을 지키는 관습으로 변질된다. 생명과는 별 관계가 없는 순간적이고 임시변통적인 숙제로 전락하는 것이다.-76쪽

그리스도인은 한 손으로는 창조주의 광대하심을 선포하는 진리를 붙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싶어 하시는 주님의 마음에 매달리는 것이다.-81쪽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혀 지내면서도 일기 쓰기를 잊지 않았던 에티 힐레숨은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하나님과의 대화"라는 글을 남겼다. 도덕의 불모지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힐레숨은 진리를 꿰뚤어보고 있었다. "가끔 수용소 한 모퉁이에 서서 두 다리로 주님의 땅을 딛고 눈을 들어 하늘나라를 우러러보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립니다. 깊은 감동과 감사의 눈물입니다."-85쪽

글을 맺으며 힐레숨은 말한다. "일단 하나님과 동행하기 시작했다면 꾸준히 그분과 더불어 걸어가야 합니다. 삶이란 긴 산책과도 같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85쪽

기도란 하나님을 가까이 불러오는 도구가 아니라 거룩한 임재에 반응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기도하는 쪽에서 실감하든 못하든 주님은 엄연히 그 자리에 계신다.-86쪽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마음이 평온할수록 기도는 더 강렬해지고, 더 소중해지고, 더 깊어지고, 더 풍성해지고, 더 완전해진다"고 했다. -91쪽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묵상하는 기도를 드리다보면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상태에 이른다. 개중에는 이런 형태를 '무심한' 기도라고 부른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매달리는 게 아니라 어린아이처럼 사심 없이 자연스럽게 간구한다는 뜻이다. 주님과 더불어 충분한 시간을 가진 뒤에는 여태까지 너무나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긴급하게 구하던 일들을 새로운 관점에서 다시 보게 되었다.-93쪽

거래가 아니라 관계에 토대를 둔 기도야말로 하나님께 다가서는 가장 자율적인 방식일 것이다.-93-94쪽

기도의 주목적은 생활을 더 편하게 만들거나 기적적인 능력을 얻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데 있다.-95쪽

하늘 아버지는 진즉부터 자녀들을 돌보고 계시며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깊이 관여하신다. 기도는 하나님께 새로운 정보를 드리는 의식이 아니다.-99쪽

앨런 에클스턴은 "기도한다는 것은 인식의 기회들을 최대한 활용하는 일"이라고 했다. 하나님과 나란히 "사건이 일어난 상황에 멈춰서서, 선물을 뜯어보듯 차근차근 살펴보고, 과거와 미래의 맥락에 넣어보고, 마음속으로 가능성을 진단해본 다음에 그 안에 담긴 것들을 끄집어낸다." 게다가 하나님은 시종일관 현장에 계신다.-107쪽

테레사 수녀는 이렇게 말한다. "비결은 아주 단순합니다. 그저 기도할 따름입니다. 기도는 꾸밈없이 하나님께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듣습니다. 우리가 말씀드립니다. 그분은 듣습니다. 양방향의 교감, 말하고 듣는 것입니다."-1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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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신약 - 일상의 언어로 쓰여진 성경 옆의 성경 The Message 시리즈
유진 피터슨 지음, 김순현 외 옮김, 김영봉 감수 / 복있는사람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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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읽혀야 책이다. 누군가의 손때가 묻고, 밑줄이 그어져야 비로소 책이다. 성서라고 다르겠는가? 책장의 무게만 더하는 성서는 이미 성서가 아니다. 손이 닿고, 눈이 머물고, 침이 고여야 진짜 살아있는 글이다. 살아있는 글이라야 ‘거룩한 말씀’(聖書)이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손으로 펄펄히 살아 움직여 읽는 이를 거룩의 지평으로 인도할 때, 바야흐로 성서는 성서가 된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선사하신 최고의 선물은 ‘하늘의 언어’였다. 하늘의 언어는 천상에 갇힌 언어가 아니다. 두루 막힘이 없이 통通하는, 자유의 언어다. 땅과 만나고, 사람과 만나고, 모둠살이(日常)와 만나는 언어다. 하느님은 그런 언어를 통해 세상과 관계 맺고 싶으셨던 게다. 하지만 말이 문제였다. 사람의 말이라는 게 원래 그러해서 하늘의 언어를 옮겨 적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괜스레 복잡한 단어와 개념들이 동원되기도 했다. 그 배후를 탐색하고 번안하는 일에 성서학자들이 애를 썼지만, 범상한 이들은 ‘그 말씀’ 앞에서 늘 속수무책이었다. 답답함을 느낀 사람들은 더 쉽고 평이한 말씀을 원했다. 그래서 각종 번역판이 등장했지만, 그마저도 살갑지는 않았던가 보다.  

줄탁동시(啐啄同時)! 알 속의 병아리와 알 밖의 어미닭이 동시에 껍질을 쪼는 순간, 새로운 생명이 탄생한다. 말씀 앞에서라면 까막눈 신세를 면치 못했던 이들의 곤란과, 그러한 이들을 바라보던 연민의 마음이 감응感應하여 새로운 말씀이 우리 앞에 놓이게 되었다. ‘메시지’-전언傳言이다. 하늘이 우리에게 전하는 말씀이다. 유진 피터슨이 그 통로가 되었다.(그의 노고는 두고두고 감사해도 모자라겠다.) 그리고 번역자들은 기꺼이 징검다리가 되어주었다. 참으로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슬그머니 산상수훈(예수께서 산에 올라 하신 말씀, 마태복음 5-7장) 말씀의 한 자락을 펼쳐 본다. 기가 막히다. 내친 김에 적어본다. 

“거울 앞에서 설친다고 해서 키가 단 1센티미터라도 커진 사람이 있더냐? 유행을 따르느라 버린 돈과 시간이 그토록 많지만, 그렇다고 크게 달라지는 것 같더냐? 옷을 볼 것이 아니라 들판에 나가 들꽃을 보아라. 들꽃은 절대로 치장하거나 옷을 사들이는 법이 없지만, 너희는 여태 그런 색깔이나 디자인을 본 적이 있느냐? 이 나라의 남녀 베스트드레서 열 명이라도 그 옆에 서면 초라해 보인다. 

아무도 보아 주지 않는 들꽃의 겉모습에도 그토록 정성을 들이시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너희를 돌보시고 자랑스러워하시며, 너희를 위해 최선을 다하시지 않겠느냐? 나는 지금 너희로 여유를 갖게 하려는 것이며, 손에 넣는 데 온통 정신을 빼앗기지 않게 해서, 베푸시는 하나님께 반응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분의 일하시는 방식을 모르는 사람은 그런 일로 안달하지만, 너희는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일하시는 방식도 안다. 너희는 하나님이 실체가 되시고, 하나님이 주도하시며,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삶에 흠뻑 젖어 살아라. 뭔가 놓칠까 봐 걱정하지 마라. 너희 매일의 삶에 필요한 것은 모두 채워주실 것이다.”(메시지, 58. <마태복음6:27-33>) 

하늘의 언어가 이렇게 촉촉할 수 있다니! 우리의 삶도 그 속에 흠뻑 적실 일이다. 다만 욕심내서 읽을 필요는 없지 싶다. 손닿는 가까운 곳에 두어 조금씩이라도 자주 자주 펼쳐보는 일이 마냥 즐거울 것 같다. 그렇게 그 분의 메시지에 잇대어 살면서, 매일 매일의 일상이 한 편의 시가 되고, 한 장의 편지가 된다면 참으로 더할 나위 없겠다. 

“여러분의 참된 삶이야말로 누구나 보고 읽을 수 있는 편지입니다.”(메시지, 486. <고린도후서 3:1-3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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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초기 수도원 운동사
남성현 지음 / 엠애드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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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 들어가는 말

 

 지난해 한국교회에서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100주년을 즈음하여 각성과 갱신, 그리고 부흥의 재가(再加)를 외치는 소리들로 들끓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러한 분위기 속에는 그간의 한국 기독교(회)가 걸어왔던 길을 발본적으로 성찰하고, 반성하여 ‘새술’을 담아낼 ‘새부대’로 거듭나려는 시도와 모색이 감지되지 않았고, 때문에 각성과 갱신, 부흥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거칠게 말하자면, 오히려 한국 교회는 참된 각성을 통한 영적 성숙을 고려하기 보다는 양적 부흥을 위한 ‘자폐증적 축제’를 벌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때문에 일단의 신학자들은 (당시의 혼탁한 대선 정국 속에서 대형 교회와 그 목회자들이 주도한 소위 ‘뉴라이트 운동’과 결부하여) “한국교회가 성장과 성공의 신화에 매달려 크고 화려하고 풍요로운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주하면서 물신주의에 빠져 세상에 대하여 대안적 가치를 제시하고 추구해야 할 사명을 저버렸다”(길희성)고 성토하였다. 또한 그러한 문제의 원인은 다름 아닌 ‘기독교 영성의 기반’이 제대로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으로 입을 모았다.

  그렇다면 기독교 영성의 기반이 부재하게 된 작금의 현실을 타개하고, 새 천년을 맞이한 (한국) 기독교가 걸어가야 할 ‘새길’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그 길을 오랜 전거로부터 찾을 수 있다. 바로 기독교 초기 수도원 운동인 ‘수도주의’를 통해서 말이다.

 

■ 몸 말

 

  본 책, 『기독교 초기 수도원 운동사』에서 저자가 밝히고 있는 것처럼 “영성이란(......) 간단히 ‘예수를 따르는 삶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_36쪽) 그러므로 영성적 삶이란 결국 ‘예수를 모방하는 삶’에 다름 아니다. 그러한 삶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이상’(完德)에 도달코자 했던 이들이 있었다. 바로 사막의 수도자들이다.

  특별히 이 책은 사막의 수도자들 중에서도 파코미우스(290-346)와 바실리우스(329-378)를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이 둘의 삶은 분명 각기 다른 궤적을 그리고 있다. 태생이나 성장배경, 활동무대, 그리고 삶의 방식과 성격까지도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인다. 가령, “파코미우스는 관용의 미덕을 알고 있었던 자인 반면, 바실리우스는 엄격한 지성적 태도로부터 출발했다. 동료 수도자들이나 제자들에 대한 관용의 정신은 테바이드의 공주 수도원을 대규모의 수도원 조직으로 확장시키는 데에 일조한다. 반면 바실리우스의 문자적 엄격성은 수도원 확장이나 양적 성장에 별다른 가치를 두지 않는 영적 순수함을 보여준다.”(_191쪽) 이러한 차이에서일까? 파코미우스의 공동체 규칙의 성격은 육체에 대해 비교적 완화된 형태의 금욕을 보여주는 반면, 바실리우스의 수도서에는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내적인 덕목은 절제”(_158쪽)라는 표현과 더불어 육체성에 대한 부정적 경향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둘을 대조하거나 그 차이를 부각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오히려 책은 두 명의 위대한 수도자, 파코미우스와 바실리우스의 삶과 기독교적 이상을 통하여 옹골찬 영성의 길을 보여주고 있다. 이 영성의 길은 그들 모두 이른바 공주수도주의, 즉 공동생활을 통해 치열한 수덕(修德)으로 일관하였다는 사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들이 이러한 삶의 방식을 채택하였던 데에는 “공동생활이야말로 인간을 그리스도의 완전으로 이끌어 줄 최선의 삶의 형식”(192)이라고 보았던 이상이 있었던 때문이었다. 물론 각자가 공주수도를 추구하는 방식은 달랐지만 분명한 것은 그 공동생활의 요체가 성서적 원리에 입각하였다는 점이었다.

  완전에 이르기 위해서는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주어야 한다는 예수의 말씀은 그들을 사로잡았고, 그리하여 무소유한 가운데 하나님께로 집중하는 삶을 살도록 인도하였다. 이 원리를 고수하는 가운데 그들은 물질적인 속세의 염려들로부터 해방된 삶을 살고자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은 독수(獨修)의 길보다는 공동체, 곧 작은 교회를 이루어 다양한 규칙들을 마련한 가운데 ‘여럿이 함께’ 걷는 영적 여정이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분명한 것은 바코미우스와 바실리우스, 두 영적 스승들이 걸어온 발자취는 분명 성서로부터 출원한 것이었고, 철저한 영적 훈련의 세월이었다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다소 엄격하고 철학적이었으며, 탈속(脫俗)적이었던 바실리우스의 공주수도나, 사막의 혹독함을 극복하고 현실의 삶 속에서 복음을 실현하여 하나님을 체험하고자 했던 파코미우스의 그것이나 결국은 다르나 같은, ‘순수한 복음적 시도’의 길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나가는 말 

 

 

  결국 오늘날 제기되고 있는 한국교회의 영성 고갈 문제는 과거 치열한 구도의 길을 걸었던 수도자들의 각고를 간과하고 망각하였던 데서 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소중한 영적 유산들을 물려받고 당대의 현실 속에서 그 정신을 구현코자 애쓰고 노력하였다면 지금의 한국 기독교(와 교회)의 영성적 기반은 제법 온당한 꼴을 갖추게 되었을 터이다. 그러나 오랜 영적 전통들과 단절하고, 영성적 기반을 망실한 채 외적․양적 성장에만 골몰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모습은 참으로 가련하다. 
  그러한 차원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향한 파코미우스와 바실리우스, 이 두 영적 스승들의 삶과 사상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무엇보다 치열한 구도의 길을 걸었던 그들의 삶 자체가 주는 메시지, 그리고 성서적 원리에 입각하여 청빈과 절제, 나눔을 공동생활 속에서 실천하였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이와 같은 삶의 자세와 법식은 타성에 젖은 개개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질타이자, 외피에 마음을 빼앗긴 한국교회를 향한 준엄한 꾸짖음으로 들린다. 
  이처럼 우리 그리고 현금의 한국교회는 초기 기독교의 ‘수도주의’, 그 중에서도 특별히 ‘공주수도주의’를 통해 참된 신앙적 이상과 실천의 길을 배울 수 있다. 그 길은 비록 오래지만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영성의 기반을 마련토록 인도할 것임에 틀림없다. 바코미우스와 바실리우스의 공주수도의 삶은 ‘예수를 따르는 삶의 방법’(영성)이 과연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이정표이자, ‘오래된 새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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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종교를 만날 때
이언 바버 지음, 이철우 옮김 / 김영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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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신학자들이 어떤 전문 지식이 있기에 과학자들이 할 수 없는 
심오한 우주론적 질문들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인가?1)

 - 리처드 도킨스  

■ 들어가는 말

  지난 해 여름, 출판계를 강타한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하 만신)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뜨거웠다. 종교(기독교)에 대한 일종의 인식론적 반향을 일으켰던 이 책은 수 주간 베스트셀러의 수위를 다투면서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었고, 특히 평소 기독교에 대한 모종의 반감을 가지고 있던 이들에게는 마치 ‘성서’와도 같은 권위를 수여받게 되었다. 물론 지난날 종교에 대한 비판서들이 꾸준히 출간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선교를 목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했던 20여명의 한국인들이 피랍된 사건-그리고 그로인해 촉발된 논쟁들-과 맞물려 <만신>에 대한 이목의 집중은 급속도로 파급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신> 열풍의 내밀한 의미를 궁구(窮究)하기 위해서는 당시 대중들에게 확산되어 있던 반기독교 정서에 대한 고려도 동반되어야 할 바임이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만신> 열풍을 반기독교적 정서의 지대한 영향 탓으로만 분석한다면 그 또한 타당치 않을 것이다. 이 타당치 않음은 다원화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의 기독교인으로서 지녀야할 책임 의식의 부재를 염려하는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오히려 기독교인들은 상황에 대한 일단의 고려를 차치하고서라도 <만신>에서 나타난 반종교관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바로 종교와 과학, 과학과 종교의 이해 결핍, 그로인한 오해를 불식시키고, 양 학문간 적극적인 긴장 속에 학제적 공존을 모색하는 차원에서 비롯된다.

  그러한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종교와 과학의 관계성을 어떻게 설정하고, 검토할 것이냐는 문제가 선행적으로 규명되어야 한다. 어쩌면 그보다 먼저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다름 아닌 경청과 관용의 태도가 아닐까 생각해보는 것이다. ‘신학자들은 가치 있는 말은 전혀 하지 않는다’라는 식의 도킨스의 입장에 선다면 과학과 종교 간 답보, 혹은 대립 상태는 해소될 리 없을뿐더러 아득한 간극만을 만들어놓게 될 뿐이다. 이러한 상황들, 그리고 이로 인한 대립들을 이안 바버(Ian G.Barbour)는 과학과 신학의 주제별로 묶어서 정리하였다. 그의 책 <과학이 종교를 만날 때>의 내용을 짧게나마 정리하면서 과학과 종교의 온당한 관계성에 대하여 생각해보도록 한다.

 

■ 몸 말 

 - 과학과 신학의 관계에 관한 네 가지 이론 유형 

  이안 바버는 본 책, <과학이 종교를 만날 때>에서 과학과 신학과의 관계를 네거티브 유형, 즉 갈등이론과 독립이론, 그리고 포지티브 유형인 대화이론과 통합이론의 네 가지 형태로 구분한다. 간략하게나마 각 유형들에 대해서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다.

  먼저 갈등 이론은 종교와 과학 둘 중 하나만을 진리로 선택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진 교조주의의 형태를 가리킨다. 과학적 유물론(환원주의)과 성서 문자주의(근본주의)와 같은 입장들이 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두 입장 모두 ‘자연의 역사라는 똑같은 영역에 대해 정반대의 주장을 펼치면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2) 이외에도 유물론, 범신론 등과 같은 극단적인 입장들 또한 갈등 이론에 속하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갈등 이론에서는 과학적․종교적 입장에서 극단에 처함으로써 진화와 하느님을 동시에 믿을 수 없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고 할 수 있다.

  둘째로 독립이론은 ‘과학과 종교가 방법론 및 다루는 영역, 그리고 인간 생활에서 수행하는 기능 등이 상이한 완전히 독립적인 분야’3)라는 인식에 기초한 일종의 ‘독신 선언’(이정배)이다. 이와 같이 두 분야를 철저히 분리시켜 따로따로 생각하는 것은 과학과 종교 간의 갈등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로써 각각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확보한다는 이점을 지니고 있다. 때문에 이안 바버는 “독립이론은 과학과 종교 각각의 독특한 성격을 인정한다. 그리고 과학과 종교의 갈등을 불가피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상대할 수 있는 유용한 전략”4)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과학과 종교를 완전히 독립적인 것으로 볼 때, 갈등을 피할 수는 있지만 건설적인 대화를 통한 상호 발전의 기회를 잃게 된다고 저자는 경고하고 있다.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 삶 전체의 주님이시라는 성서적 근거로 볼 때에도 이는 신학적으로 타당한 입장이라고 할 수 없다. 언어분석철학(과학)과 신정통주의(신학)의 개별 노선이 바로 독립이론 유형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셋째로 대화이론은 과학과 종교의 전제와 방법과 개념의 유사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과학과 종교의 차이점을 강조하는 독립 이론과는 그 성격상 차이를 지니는 공명론적 입장에 속한다. 따라서 대화이론에서 과학과 종교 간의 관계는 좀 더 건설적인 형태를 띠지만 통합 이론에서처럼 개념적 통일성을 확보하지 못한다고 바버는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성과를 포함한 새로운 식견을 받아들일 만큼 자기 비판적이며, 또한 외부의 비판을 수용할 수 있는 체계의 신학을 구성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지는 만큼 대화이론에서의 과학, 종교 간 교류는 자못 활발한 형태를 띠게 된다. 자연신학5)과 같은 경우가 바로 이 유형에 속하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통합이론은 대화이론 그 이상으로 특별한 종교적 신념과 개별적인 과학 이론들 간의 밀접한 연관성을 모색할뿐더러 더 나아가 종교와 과학의 일치와 통합까지도 꾀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6) 여기에서는 생화학자이자 신학자인 아서 피코크의 “하느님은 우연과 법칙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에 개입함으로써 창조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법칙과 우연으로 이루어진 전 과정을 통하여 창조하신다”7)는 주장의 궤와 잇닿아있는 자연의 신학이 포함되며 진화적 사유를 통한 상호의존성을 표한 과정 사상적 견해들도 마찬가지로 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바버의 지적대로 통합이론에서는 ‘예상된 종합화’8)를 경계하며 실재에 대한 일관성 있는 관점의 꼴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각각의 과학적․종교적 주제들은 이와 같은 네 가지 유형에 따라 각각 어떻게 논의되고 있는가? 본 자는 과학과 신학의 관계에 관한 네 가지 유형들에 대해 다룬 1장은 위에서 언급했기에 생략토록 하고, 2장부터 6장까지의 내용들을 가능한대로 정리하여 네 가지 유형에 따른 논의의 추이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단 6장의 경우 전 장에서 논의된 주제가 반복되는 내용이 많으므로 생략하도록 한다.

 

 - 일련의 과학범주들과 신학적 대응, 혹은 만남의 이력

  2장 <천문학과 창조론>에서 과학과 종교 간의 갈등은 초기 우주에서의 힘의 균형이 생명과 지능을 출현 시킬 만한 조건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우연의 결과라고 주장하는 무신론자들로부터 야기된다고 이안 바버는 말한다. 반면에 성서 문자주의자들은 상대성 이론이 창세기의 설명을 빅뱅이론과 조화할 수 있게 해준다고 주장하면서 무신론자들의 대척점에 위치한다.9) 한편 독립이론에서는 성서는 문자 그대로 아니라 신중하게 해석되어야 한다는 신정통주의 신조를 토대로 한 신학자들의 주장, 즉 <창세기> 집필 당시의 전(前) 과학적 우주론에 대한 고려를 통해 창세기의 상징적이고, 시적인 설화 이해로부터 과학과의 갈등 가능성을 예단한다.

  대화이론의 입장에서는 아인슈타인의 일언, “이 세계에 관해 이해할 수 없는 단 한 가지 사실은 이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라는 명제 아래 우주의 우발성과 하느님의 자유의지에 의한 창조 행위를 상관(相觀)하고자 시도한다. 이를테면 빅뱅을 통해 풀려 나온 힘에 대해 신비감과 외경심을 느낀다고 말하는 천문학자들의 입장이 과학과 종교의 대화 가능성을 방증해주는 예라 할 수 있다. 나아가 통합이론의 지지자들은 빅뱅이론과 같은 새로운 우주이론들이 예측한 물리학적 상수들의 정밀함에 따라 인간주의 원리를 정립한다. 예컨대 호킹과 같은 물리학자는 “우리 우주가 출현한 것에는 분명 종교적 의미가 들어 있다”라고 말하면서 창조론 또는 우주론적 관점에 있어서 신적인 의지가 개입되어 있음을 인정함으로써 과학과 종교의 통합적 관점에 가담한다.

  3장 <양자 물리학의 신학적 의미>에서 저자는 양자 물리학으로부터 발견-출원한 생명 이해의 입장에서 나타난 개별 논의들을 다루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특히 불확정성의 원리가 논의의 주 쟁점이 되고 있다. 먼저 갈등이론에 서있는 과학자들은 유물론의 입장에서 확정 불능성의 문제를 ‘우연’으로 귀결시키면서 우연적 법칙들이 우주의 목적 없음을 반증한다고 보았다. 반면 신학자들은 하느님께서 자연 법칙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과학적 탐지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확정 불능한 사건들을 만들어내신다고 보았다. 그리고 독립이론에서 도구주의자들은 양자이론과 종교적 믿음에 대한 설명을 결부시켜 과학과 종교는 인간 생활에서 아무런 관련이 없는 기능을 수행하는 다른 언어들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한편으로는 양자물리학에서 파동과 입자 모델들의 상보성에 대한 개념을 확장함으로써 과학과 종교는 서로 독립적이고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실재에 관한 상보적인 모델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10)

  반면에 대화이론자들과 통합이론자들은 유사한 입장에서 양자물리학에서의 관찰자, 양자계의 전일론적 특징 등을 통해 과학과 종교의 공명을 주장한다. 특히 “과학은 하느님의 존재를 이해하는 믿을 만한 방법에 대한 기초를 제공해 왔다.”는 진 스톤의 주장은 이를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다. 또한 바버는 확정 불능성에 대해 ‘대안적 잠재 가능성’이라는 말로 유물론적 환원주의의 입장을 일축함으로써 양자물리학과 신학적 의미의 대화와 통합이 가능함을 분명히 하고 있다.

  4장 <진화와 연속창조>에서 갈등이론에 속한 과학자들-리처드 도킨스 등을 위시한 진화유물론자들, 또는 신다원주의자들-은 진화가 의도와 목적이 없는 과정의 산물임을 주장한 반면 신학자들은 목적성이 담지된 하느님의 지적 설계를 주장하였다. 독립이론에서는 일부 생물학자, 신정통주의 신학자, 언어분석학자들의 주장대로 과학과 종교의 영역과 기능을 분리하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으며, 대화이론에서는 다윈식 진화의 복잡성, 그리고 그 복잡계의 자기조직화, DNA와 같은 정보들의 지각 등의 문제를 다룬 과학자들과 이에 대한 응답으로 “하느님은 하위 수준에서의 사건을 설명하는 법칙들에 어긋나지 않으면서 상위 수준에서의 하향식 인과관계의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신학자들의 주장이 대화의 여지를 주는 것으로 저자는 설명하고 있다.

  한편 이안 바버는 통합이론에 제일 공감하면서 자연의 신학과 과정철학을 심도있게 다룬다. 앞서 기술했듯이 자연의 신학은 진화를 통한 하느님의 연속창조에 관한 개념으로 대변되는데, 여기에서는 피코크의 말대로 ‘사건들의 자연적 인과관계에 의한 창조적 유대 자체’를 하느님의 창조적 행위로 보면서 지속적인 관계를 통한 연속 창조사상을 옹호한다. 또한 과정철학에서는 결정론과 절대 기준을 부정하면서 모든 실체의 관계를 하나의 네트워크로 보고, 그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일어나는 잠재적인 진화의 가능성들을 인정한다. 이러한 과정 사상의 입장은 결국 질서(네트워크)와 새로움(진화적 변화)의 원천으로서 하느님을 이해한다.

  5장 <유전학, 신경과학 그리고 인간의 본질> 편에서 바버는 인간 행동의 모든 면모가 물질의 운동을 지배하는 법칙들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는 환원주의적 유물론과 인간의 도덕성이 초기 인류의 생존에 기여했던 먼 초기 조상들의 행동으로부터 발전되어 왔다는 사회생물학, 우리가 유전자에 의해 통제되며 자유란 착각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행동유전학의 연구 각각을 전제한다. 이에 신학자들은 인간 의식의 신비성, 도덕성에 관한 신학과 철학의 필요성, 하느님의 창조에 대한 위배 등을 주장하면서 과학과 갈등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독립이론에서는 육체와 영혼의 문제에 관하여 그 둘의 대조적인 수행 기능, 상보적 관점 등으로 독립된 형태를 취하였다. 물론 죄와 구속의 문제에 관해서도 과학의 영향은 거의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대화이론에 대해서 바버는 신경과학, 인류학에 의해서 발전된 감정의 중요성, 정신의 신체적 구현, 그리고 인간의 생리학적 시스템이 종교와 별다른 장애 없이 흡수-수용되는 것으로 본다. 한편, 생물학적 유기체인 동시에 책임지는 자아, 여러 수준에 걸친 심신 통일체라는 견해는 종교와 통합될 뿐만 아니라 과정 철학에서의 유기체적 이해, 전일적 사고방식 등은 이와 무리 없이 통(通)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 나가는 말 

  그간 과학과 종교의 관계는 -바버의 분류대로- 갈등과 독립의 형태로 별리상태를 고집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과학과 종교는 크나큰 간극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군의 과학자들, 그리고 신학자들은 끊임없이 과학과 종교 간 대화를 시도해왔으며 이러한 시도들은 어쩌면 시대의 요구와 부름에 대한 응당의 책임, 혹은 그동안의 반목과 대립으로부터의 부채의식을 탕감하기 위한 도전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안 바버는 본 책에서 네 가지 유형의 분류를 통해 과학과 종교 간 관계에서 나타난 부정의 길과 긍정의 길을 종합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아서 피코크로 대표되는 자연의 신학과 화이트헤드의 과정 철학을 지지하면서 과학과 신학의 통합을 바라고 있다. 그의 주장처럼 다원화된 오늘날의 문명 속에서 과학, 그리고 종교의 관계에 있어서 “갈등이론이나 독립이론보다는 대화이론과 통합이론이 과학적 통찰과 종교적 성찰을 결합시키는 훨씬 유망한 방안이 될 것이다.”11)

  그러므로 서론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리처드 도킨스가 주장한 유물론적 과학주의의 가차 없음에 대한 나름의 고민은 이안 바버의 본 책, <과학이 종교를 만날 때>를 만나면서 많은 부분 해소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역설적이게도 과학과 영성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책임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써 앞으로도 끊임없이 연구하고 고민하여야 할 주제로 생각한다. 이안 바버의 말대로 “종교의 목적은 삶의 방식에 있으며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므로 종교는 단순한 지적 체계 이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12) 때문에 종교와 과학의 긍정의 길을 묻고, 사유하는 일은 놓쳐서는 아니 될 숙명적 과제이다. 도킨스의 비아냥거림과는 반대로 신학자들이, 혹은 신학도들이 심오한 우주론적 질문들을 다뤄야만 한다는 것이다. 다만 그것은 분명 “어떠한 사고 체계의 주장과 하느님의 신비를 예배 속에서만 인정할 수 있다”는 겸비(謙卑)의 자세를 겸비(兼備)하는데서 비롯되어야 할 것이다.

 

 

1) Richard Dawkins, 이한음 역,『만들어진 신』, 김영사, 90. 

2) Ian Barbour, 이철우 역,『과학이 종교를 만날 때』, 김영사, 33.

3) Ibid., 174.

4) Ibid., 50.

5) “하느님의 존재가 자연에 내재한 설계의 증거에 의해 유추되거나 뒷받침될 수 있으며 과학은 우리로 하여금 설계의 증거를 깨닫게 한다는 주장”, Ibid., 59.

6) 이정배, 『켄 윌버와 신학』, 시와 진실, 24-26쪽 참고.

7) Ibid., 66. 

8) “과학이나 종교 그 어느 것도 형이상학적 체계와 동일시 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형이상학처럼 모든 실재를 포괄하려는 예상된 종합화를 시도하면 과학적 또는 종교적 개념이 왜곡될 위험이 따”른다. Ibid., 75.

9) 피터 애트킨스와 앨런 구스와 같은 무신론자들은 양자요동이론을 지지하면서 정밀하게 조율된 상수들의 존재는 우주들 가운데서 일어난 우연이라는 입장을 고수한다. 한편 슈뢰더와 로스는 하느님의 ‘특별 차원성’(인간은 부여된 시간틀 속에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지만, 그 선택은 모두 하나님께 포함된다는 이론), 초끈 이론 등을 동원하여 성서의 과학적 전거를 구성하고자 시도한다. Ibid., 82-90 참조.

10) Ibid., 132. 

11) Ibid., 304.  
12) Ibid.,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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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내려놓음 -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은혜 이용규 저서 시리즈
이용규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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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로 가는 호젓한 오솔길. 내려놓고, 또 내려놓으며 가는 그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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