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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하느님과 한국적 생명신학
이정배 지음 / 도서출판 새길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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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 인류문명의 위기가 ‘생명’의 문제로 집약되면서, 인문학과 사회과학, 그리고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생명담론’은 일종의 학문적 화두가 되었다. 많은 이들은 인간과 인간의 문제로부터 자연과 인간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억조창생이 진통하고 있는 전 우주적 ‘죽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나름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신학’에도 마찬가지여서 일군의 신학자들은 이미 ‘생명’의 문제를 신학적 화두로 삼아 인류문명의 위기에 대한 응답을 시도하여 왔다. 

 이 책의 저자 이정배는 서두에서 밝히고 있듯이 지난 10여 년 간 ‘생명’을 화두로 하여 신학적으로 사유해 왔던 조직신학자이다. 그가 지난 2002년 새길 기독사회문화원이 주관하는 <일요신학강좌>에서 ‘기독교 생명신학’이라는 주제 하에 진행한 10차례의 강연을 묶은 이 책은 역시 그의 신학적 방침이라고 할 수 있는 ‘생명’을 신학적 화두로 삼고 있으며, 그러한 하에 ‘생명신학’의 얼개를 구성하여 나름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특별히 그는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 자체에만 몰두하기보다는 철학, 과학과 같은 제반 학문과의 간(間)학문적 대화를 통해서 자신의 논지를 강화하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우선 오늘날의 신학이 우리 시대에 사실 적합한 학문이 되기 위하여 끊임없이 구성되어져야한다는 구성신학의 기제에 그 연원을 두고 있으며, 이와 같은 신학적 방침을 고수하면서 자신의 성서 해석원칙을 ‘자기 발견적 해석학’(heuristic hermeneutics)으로 설정한다. 그는 이러한 원칙하에 ‘생명신학’의 신학적 거점을 전통신학의 ‘하나님’ 개념이나 ‘예수’중심적 모델에서 벗어나 루아흐(Ruach), 즉 하나님의 영에 두고 있다. 이는 그간의 전통 신학적 교리를 벗어난, 다소 진취적인 신학적 도전으로 보인다. 나아가 ‘한국적’ 생명신학의 임계점을 ‘동학’의 주요 개념인 ‘지기’에서 찾으려고 한다는 것은 저자의 신학적 진보성을 방증할 뿐 아니라 그가 신학의 토착화 문제에 관하여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지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무엇보다 저자가 ‘한국적 생명신학’의 기틀을 다지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생명신학의 교회적 실천담론을 제시하는 대목은 눈길을 끈다. 그는 속도 늦추기, 침묵하기, 몸 비우기, ‘녹색은총’의 감각 회복, 마음 다하기, 일하기의 영성으로 제시되는 6가지의 제안을 통해 신학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의 생명문화 창출을 위한 실천적 과제에도 관심의 끈을 놓치지 않고 있다. 이는 오늘날의 반생명적, 생태학적 위기를 극복해 나갈 종교적 수행의 다름 아니며, 이를 통해서 진정한 기독교 참여 영성이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 내에서의 이러한 신학적 논의들이 결론적으로는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예언자적 외침이며, 참으로 아름답고, 살맛나는 하나님 나라를 열어가는 새 지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신학의 생명화, 신앙의 녹색화를 통해서만 이율배반에 빠진 오늘의 한국 사회와 온 지구 공동체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 믿기 때문”(166쪽)이라는 저자의 주장이 허황되지 않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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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학문으로서의 동학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113
김용휘 지음 / 책세상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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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믿음은 교회를 열심히 나가고 안 나가고의 문제는 아니다. 그리고 어떤 사실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는 앎의 차원이나 신념의 차원 역시 아니라고 본다. 진정한 믿음은 다른 모든 가치에 우선해서 예수로 상징되는 진리와 생명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자기 삶의 중심적 가치로 수용해서 살아가는 마음의 태도라고 본다. (9쪽)

 
   

 이 책의 머리말을 읽으며 나는 전율했다. 진정한 믿음은 신념의 차원이 아니라 삶의 방식에 있다는 단순하고도 어려운 진리가 눈앞에 펼쳐졌다. 더구나 서른아홉의 나이에 이르도록 ‘구원’이라는 문제와 씨름하며 방랑했던 그의 생의 여정들은 이 말이 얼마나 치열한 고투 속에서 비롯되었는지를 가늠케 하고 있었다. 결국 지난한 속에서 그가 발견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란 바로 삶의 문제이며, 어떠한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느냐에 의해 판단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번민하며 여러 종교를 방황하던 그에게 있어서 종착점은 바로 ‘동학’이었다.   

저자 김용휘는 그가 도달한 ‘동학’이라는 종교가 바로 오늘날의 세계현실인 ‘죽임’(죽임은 인위적인 생명 파괴를 지칭하는 표현이며 생명과 생태계 파괴가 지속되고 있는 현 문명에 대한 비판과 관련된 용어이다.)을 극복할 ‘생명의 길’임을 밝히면서 동학의 내용과 의미를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특히 그는 그동안 ‘동학’이 종교가 아니라 일종의 사상적 성격으로 이해되어왔던 것을 비판하면서 동학이 학문이자 동시에 종교였음을 주장한다. 사실 동양에서는 언제나 학문과 종교 또는 도를 따로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오강남 교수의 <세계종교 둘러보기>라는 책에서도 ‘동학’은 한국의 민족종교로서 인정되고 있다.) 그리고 수행이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춰 ‘사회적 성화’라는 동학적 생활양식을 설명하는데 역점을 두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날 동학은 단지 ‘동학농민운동’이라는 역사적 사건 속에서 일종의 운동적 이념이나 사상으로 이해되었을 뿐더러 종교적 수행과 같은 성격을 일체 배제된 듯 인식되어왔기 때문이다. 

 그는 ‘동학’의 ‘불연기연(不然其然),’ 즉 ‘아니다, 그렇다’의 논리를 주목하면서 새로운 학문적 방법론으로 본다. 왜냐하면 불연기연이라는 ‘반대일치의 논리’는 양극단, 곧 동양과 서양, 과학과 종교, 이성과 직관, 이론과 실천, 타력적 신앙과 자력적 수행 등과 같은 상호 모순의 원리들을 통합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러한 학문적 방법론의 토대 위에 ‘시천주侍天主’로 대표되는 동학사상을 생명론적 얼개 속에서 그려 넣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을 통해 결론적으로 ‘동학’이 바로 실천적 수행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 실천적 수행이 자신의 삶을 성화시키고, 사회를 성화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한 차원에서 동학은 결코 정치운동이나 혁명이론이 아니라 인간의 궁극적 변화와 구원을 갈망한다는 차원에서 한나의 온전한 종교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결론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지난날 ‘동학’에 대한 오해들에서 비롯된 왜곡에 답하는 방식으로 친절하고, 상세하고 기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간 진행되었던 ‘동학’ 연구들을 모두 섭렵하여 161번에 이르는 방대한 각주를 동원하여 이해를 돕는다. 

 예수를 믿고 따르는 기독교 신자로서, 그리고 한국적 기독교라는 토착화 문제에 대해 고민을 안고 있는 한 신학도로서 이 책을 통해 ‘동학’과 만나게 된 건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특별히 동학을 토착적 기독교의 원형으로 삼아 기독교와의 조우 가능성을 타진해볼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죽임’의 세계 현실 속에서 종교가 지향해야 할 바는 과연 무엇인지를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땅의 모든 종교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이미 19세기에 등장한 동학이 말하고자 했던 것처럼 모든 이들을 한울님으로 모시며, 모든 만물을 한울님 대하듯 한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워질까? 그렇게 살려고 애쓰는 수행의 노력들을 또 얼마나 아름다울까? 오늘 나는 그 ‘후천개벽’의 세상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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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튼의 평화론
토마스 머튼 지음, 조효제 옮김 / 분도출판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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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해 시월, 북한의 핵무기 실험 성공에 대한 전가(傳家)의 보도가 잇따르면서 국제사회는 심각한 고민에 처하게 되었다. 국제사회의 이단아라고 할 수 있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에 대한 일단의 조처들이 지속적으로 이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급기야 핵무기 실험에 성공한 북한의 행보는 이미 위협의 수순을 넘어선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부랴부랴 이에 대한 대책이 강구되었고, 이어서 대북 제재를 필두로 한 일단의 조처들이 발표되기에 이른다. 한편 국내의 정치적 공방 속에서는 대북 압박론과 지속적 협상론이라는 두 정치적 입장들이 충돌하면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정치적 논의들이 복잡한 형국을 띠고 있었다. 물론 흡수통일론을 주장하는 일각의 수구주의자들은 전쟁 불사론을 주장하는 등의 극단적 대응책들을 내놓았고, 이처럼 각기 다른 입장들로 인해 남한 내의 정치적 갈등 또한 고조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들이 ‘평화’를 지향해야한다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궁극적인 관심을 근본으로 한 것이라 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단지 북한의 핵실험 성공에 대한 우려 속에서 파생된 한정적이고 국소적인 고육지책이었을 뿐 ‘평화’ 자체에 대한 근본 담론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물론 한반도 내에서의 생존 문제라는 급박한 현실인식과 관련하여서는 ‘평화’에 대한 근본 담론 운운하는 것이 한가한 얘기로 들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본 문제에 대한 관심이 결여된 여하한의 현실적 해결책들은 단지 미봉책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는 혐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예컨대 어찌어찌 북핵 위기를 타계해 나간다고 해서 미국을 위시한 강대국들의 핵무기와 대량살상무기들이 지구상에서 사라질 리 없으며, 점령과 지배, 착취의 오만한 전쟁이 만무할 리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북핵 위기를 극복한다고 해서 한반도에 평화가 올 수 있다는 식의 피상적인 사고는 오히려 더 한가롭다. 그것은 단지 눈에 찬 현실의 난관을 극복하고자 하는 정치적 수순에 다름 아니다. 여기에서의 ‘평화’는 모든 인류를 위해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다만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형태의 비평화의 상태를 연기하는 선에서만 유효할 뿐이다. 

 이처럼 참된 평화의 성취와 또 이를 위한 정치적 노력들이 답보된 상황 속에서 평화에 관한 토마스 머튼의 글을 만나게 된 것은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그는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20세기 최고의 그리스도교 영성가이다. 이러한 그가 쓴 이 책은 그가 추구하였던 ‘참여영성’, 즉 ‘명상과 활동의 통일’이라는 대명제가 과연 무엇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이 책의 전편에서 펼쳐지는 그의 사상은 세상을 초월하는 식의 종교적 나르시시즘을 뛰어넘어 세상 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는 참 종교 영성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현세와 현세의 문제와는 완전히 담을 쌓고 인간 사회에 대해서는 관심을 저버린 채 하느님과 관계된 일에만 온전히 자신을 바치겠다고 하는 사이비 관상적 영성은 오늘날 분명 필요치 않”(236쪽)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1960년대 미국의 현실 속에서 집필되었다. 토마스 머튼은 이 책의 탈고 당시(1962년)가 ‘포스트 그리스도교’적 세상, 즉 현대 세계에서 그리스도교적 이상과 태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상황임을 직시하면서 국내외적으로 고조되고 있는 핵무기 개발 등의 무기증강과 전쟁 준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이는 구체적으로 핵무기의 사용, 즉 전쟁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입장은 어느 지점에 정위되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해 머튼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단연코 전쟁에 대해 찬성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평화의 군왕’으로 오셨던 예수가 그러했던 것처럼 ‘평화를 가꾸는 사람’이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의 미국사회 속에서 많은 신학자들과 성직자들은 ‘정당한 전쟁론’을 통해 미국의 전쟁 준비를 공공연히 옹호하고 있던 터였고, 대다수의 인민들은 ‘정당한 전쟁’이 필요불가결하다는 주장에 이론을 달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 정당한 전쟁론에서 제안하는 원칙들은 머릿속에서나 가능할 뿐 실제의 전쟁 에서는 적용될 수 없는 이론이었다. 특히 현대전의 맥락에 있어서는 정교하고 제한적인 방어 전쟁이 성립될 수 없을 정도로 무차별적인 공격이 벌어지고 있다고 판단되는바 정당한 전쟁론이란 결국 허위적 수사에 불과하다고 머튼은 지적한다. 그러나 그는 정당한 전쟁론의 원칙들마저도 부인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것들이 잘 지켜질 수 없다는 확신을 갖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적극적인, 비폭력 평화주의에 투신해야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평화를 구체적인 삶 속에서 성취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머튼의 주장이 자신의 종교적 이상과 그 가르침으로부터 나온 것임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의 주장이 ‘오직’ 자신이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교적 가르침에서만 부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평화가 모든 종교(인)의 책임임을 분명히 한다. 나아가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인용한 대목-“모든 사회의 핵심은 인류 공통의 목표를 위해 보편적 사랑 속에서 일치하는 것”(91쪽)-에서 보여 지듯이 모든 사회를 이루는 개별적 인간 하나 하나는 ‘평화’를 지향해야하는 윤리적, 도덕적 책임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전 인류는 핵무기와 대량살상무기들이 끊임없이 개발되고 생산되는 현실에 대해 무관심할 수가 없다. 다만 전 인류를 파멸로 이끄는 이 자살행위에 반대하고, 지금 당장 자신의 행동 방향을 오직 양심의 법대로 결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야만 모든 인간이 보편적 사랑 속에서 일치하는 ‘역사’가 일어난다. 

 오늘날, 이러한 ‘평화주의자’들이 도처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큰 위안거리가 아닐 수 없다. 반면에 그 보다 더 많은 이들이 ‘평화’보다는-폭력과 전쟁이라는-‘죽임’의 문화에 길들여져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우울하다. 이 책의 발간 당시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러왔지만 전쟁은 그치지 않았고, 현실은 더욱 더 깊은 수렁 속에 빠져들었다. 때문에 이미 40여 년 전에 쓰여진 이 책의 중요성은 그만큼 부각된다. 대니얼 엘스버그의 평처럼 말 그대로 “내일 신문 헤드라인보다 더 시의적절하다!” 이 땅에 발 딛고 살아가는 한 명의 인간으로서, 그리고 모든 인류의 구원을 갈망하는 한 명의 종교인으로서 머튼의 빛나는 예지에 경의를 표한다. 더불어 진작에 ‘평화’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가 바로 “오래된 미래”이며, 모든 인류가 걸어가야 할 거의 유일한 길임을 보여준 이 책에 이 못난 글을 헌사로 바친다.

(추기: 최근 핵무기를 포기할 수도 있다는 북한의 입장 표명은 그나마 큰 위안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본질적인 문제의 해결이 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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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무개 목사의 로마서 읽기
이아무개 (이현주) 지음 / 삼인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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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에게 가장 널리 읽혀져 왔고, 또 지금 현재도 가장 많이 읽혀지고 있는 책 중에 하나가 ‘성서’임에도 불구하고, 성서에 대한 올바른 해석과 온당한 이해는 찾아보기 힘든 실정입니다. 성서를 경전으로 삼고 있는 기독교의 경우, 성서를 해석하고 전하는 이의 취향에 따라 구미에 맞게 변용(變用)되어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지금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구요. 그렇기 때문에 성서가 담고 있는 ‘참 뜻’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란은 가장 오랜 담론이자, 미결 과제이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 성서학자들은 성서를 구조적으로, 혹은 역사적으로 검증하면서 쪼개고 또 쪼개왔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일단의 성과 또한 있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합리적인 성서 해석을 위한 기초를 마련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지요. 그렇지만 물론 성서학자들 또한 그 연구에 있어서 어떤 객관적인 지표에 의거했다기 보다는 개인의 주관적인 잣대를 바탕으로 하였기 때문에 개인마다 차이를 보입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전제없는 텍스트 해석은 불가능하다고 말한 것일 겝니다. 가다머도 똑같은 주장을 반복했구요.) 따라서 성서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과연 가능할까라는 회의적인 물음 또한 존재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를 해석하는데 있어서의 원칙은 아마도 렉티오 디비나(lectio divina)라는 대 원제에 그 기초를 두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성스럽게 읽기. 그것은 곧 성서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데 중점을 두어야만 한다는 말일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전적으로 내가 배제된 상태, 곧 나의 에고(ego)가 사라진 자리에서의 성서읽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나의 에고가 사라져야만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을만한 바탈이 형성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읽기는 여전히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일체의 에고를 배제한다는 것도 그렇지만, 애당초 웬만한 ‘마음모음’(mindfulness)없이는 그 말씀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곧잘 성서읽기의 좋은 길잡이가 될 만한 것들을 찾아보게 되곤 합니다.

 

 일반의 주석서들에서 차용되는 그 어려운 개념어들은 결코 좋은 길잡이가 될 수 없겠지요. 오히려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씌여진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책들의 ‘경박스러움’은 성서의 깊이를 경험하게끔 인도해주지도 못할뿐더러 성서의 본뜻을 가리우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때문에 좋은 길잡이를 만나는 것 또한 쉽지 않은 노릇이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좋은 길잡이가 없다는 것은 아니겠지요. 이 책의 저자인 이현주 목사님의 경우는 아마도 좋은 길잡이에 속하리라고 생각됩니다. 그것도 아주 좋은 길잡이라고 할 수 있지요.

 본래 <로마서>는 바울이라고 하는 사도의 서신중에서도 가장 난해한 것으로 알려져 있을 뿐 아니라 성서의 “다이아몬드”라고 일컬어 질 정도로 신학적으로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겨지는 책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평가가 되건 간에 분명한 사실은 그것이 바울이라는 한 사람에 의해 자신의 신앙고백적 차원에서 집필된 책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이라는 사람의 삶과 사상이 고스란히 그 책 속에 나타나고 있는 바, 그것이 신학적으로 얼마나 중요하건 중요하지 않건 간에 그의 삶의 현장에서 구성된 것이며, 오늘날 그것을 읽는 우리에게 있어서도 구체적 삶의 현장 속으로 들어오고, 또 그 속에서 읽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로마서 뿐 아니라 모든 성서는 추상이 아니라 구체 속에서 읽고, 관념이 아니라 삶 속에서 적용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이와 같은 근본 토대 위에 이현주 목사는 성서 한 구절 한 구절 읽어나가면서 그 뜻을 자기 ‘나름대로’ 풀이해봅니다. 그 속에서 (서구문명의 산물 혹은 고안물인) 성서는 동양을 횡단하고, 불가(佛家)를 가로지르면서 하나님의 자유로운 영을 살아 숨쉬게 합니다. 그러한 속에는 배타나 분리가 떠나있고, 하나님의 뜻이 총체적 하나로서 내재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로소 성서(로마서)는 기독자들의 것만이 아니라 모든 이들의 것이 됩니다.

 

 이 책에서는 저자의 진면목, 즉 심원하고도 깊은 종교적 사유의 방대함이 확연하게 나타나고 있지만, 저자는 바울이라는 한 영혼과 대면하는 심정으로 겸손하게 성서를 읽어 나갑니다. 그리하여 결국은 바울의 깊은 믿음의 경지에 ‘나’를 위치시켜보도록 인도합니다. 그러니까 인간 이현주는 쏙 빠지고 본디 로마서를 썼던 바울과 ‘나’는 인간적으로 대면해보게 된다 이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서를 경전으로 삼고 예수를 따른다고 하는 오늘날의 교회들과 지도자들의 작태에 대한 지적 또한 예리합니다. 그런데 이것 또한 자신의 견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로마서 말씀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 의미에 철저히 따름 속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교회나 지도자들의 모습이 성서와 얼마나 별리되어 있는가도 잘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

 

 개인적으로 지난 18주에 걸쳐서 매주 일요일마다 교회 청년부와 더불어 한 장씩 로마서를 읽어나가는 와중에(참고로 로마서는 총 16장입니다) 이 책은 좋은 길잡이가 되어 주었습니다. 성서를 읽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답답한 이들, 성서를 읽고 싶지만 그 어려움에 압도되어 시작조차 힘겨워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좋은 도반이자, 스승으로서 깊은 성서의 세계로 인도하는 좋은 길잡이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 책을 읽는 동안에도 계속되었던 생각입니다만 역시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뜻(만)을 구해야한다는 그 단순한 진리를 재삼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리고 말씀 속에서 발견된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길이라는 사실 또한 잊어서는 아니되겠지요. 왜냐하면 주님의 말씀은 결국 우리네 삶의 구체 속에서 성취되어야 하기 때문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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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하이벨스의 섬김 - 평신도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
빌 하이벨스 지음, 서원희 옮김 / 두란노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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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김’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본질적인 요소들 가운데 하나이다. 하지만 실제로 교회에서 섬김의 미덕은 별로 환영을 받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물론 최근 들어 일부 교회에서는 사회적 나눔 등의 교회 외적 섬김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교회의 섬김의 지표는 턱없이 부족하게만 느껴진다. 한국갤럽의 한 조사에 의하면 한국 개신교회가 평균적으로 전체 재정 가운데 3.88%만을 불우 이웃돕기 등 교회 밖의 사회봉사비로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를 기반으로 현재 한국 개신교회가 오직 성장제일주의에만 몰두해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우려의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 섬기는 자로 사셨고 스스로 자신을 사랑의 법으로 얽어매셨다.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시며 자신의 생명으로 우리를 섬기셨다. 그것은 어떠한 대가가 요구된 것이 아니었고,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그 섬김의 본은 오늘날 우리가 믿고, 따라야할 정면교사이며, 다른 이들을 위해 대가 없이, 거저 내어주는 것이 진정한 섬김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됨을 증명하는 제자도의 본질적인 요소는 바로 ‘섬김’이며,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예수님을 통해 섬김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대접 받기 좋아하고 올라가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면 결코 건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과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섬기 줄 아는 건강한 그리스도인인가? 섬길 줄 모르는 건강치 못한 그리스도인인가? 진정으로 섬기는 삶을 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처럼 섬김이 그 설자리를 잃어버린 시대에 빌 하이벨스는 이 책『섬김』에서 섬김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상 명령임을 상기시키면서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를 이루는 각 지체들을 통해서 ‘섬김의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권면은 본 책의 전면에서 성경적 근거와 더불어 자신의 목회 사역을 통해 경험한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쉽지만 깊이 있게 기술되고 있다. 

 

 그는 먼저 주체의 문제, 즉 섬김을 행하는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하는 문제에 천착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그는 섬김을 행하는 주체란 목사나 전도사 등의 전문적인 사역자로 한정될 수 없으며, 교회를 이루는 모든 지체들, 즉 평신도들이 섬김을 실천하도록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에베소서 4장 11절~13절 말씀-‘이는 성도를 온전케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에 나타난 것처럼 봉사의 일, 곧 섬김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들에게 평신도 사역자들이 봉사할 수 있도록 준비하게 하셨고, 평신도 사역자들은 그 준비에 순종하는 대상”이다.

 

 구약 종교체제에서는 제사장과 같은 소수의 선택받은 이들에게 사역의 몫이 전적으로 할당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이제 모든 이들에게 사역의 몫이 확대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이들이 곧 제사장이 되는, 이른바 만인 제사장의 새 시대가 열린 것이다. 모두가 하나님의 사역에 쓰이도록 부르심을 받은 존재들인 것이다. 빌 하이벨스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체가 되려는 바람의 씨(소망의 씨)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심겨 있다. 바로 하나님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25쪽)

 이제 평신도는 더 이상 관람석에 앉아 있는 구경꾼이 아니라 경기장 안에서 함께 뛰는 선수가 되도록 요청받았다. 이는 곧 갖고 있는 은사에 따라 기쁨으로 섬길 수 있도록 기회가 주어졌다는 뜻이다. 때문에 목회자는 평신도가 필요한 곳에, 적절한 일에 쓰임 받도록 섬김을 권면해야만 한다. 하나님과 평신도를 연결하는 일종의 중개인으로써 말이다. 그러므로 사역자는 평신도들이 하나님의 일에 동참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식을 통해 그들을 섬김에 초대해야 한다.

 

 먼저 해야 할 것은 ‘실험’이다. 자신의 은사에 합당한 사역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실험하는 자세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시행착오를 통해 자신의 은사를 발견하게 되면 무엇보다 ‘기쁨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사역을 잘 감당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실험’이 결여되어 있다면 자신의 은사를 발견하지 못할뿐더러 믿음의 체계가 흔들리는 위기를 겪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현장에서 벌어지는 무수히 다양한 일들에서 상처입고 좌초하게 되는 경우가 벌어질 수도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본 책에서 소개되는 윌로우크릭 교회의 ‘네트워크 사역’은 주목할 만하다. 책에선 다양한 임상 사례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에 소개된 대부분의 평신도들은 얼마간의 시행착오를 통해서 결국 자신의 목적에 합당한 부르심의 자리를 찾게 된다. 이것은 개인의 노력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교회와 그들을 이끄는 전문 사역자들의 끊임없는 노력이 병행될 때에만 가능한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사역자들은 구체적이고, 다양한 봉사의 영역들을 창출해내고, 평신도들이 사랑으로 섬길 수 있도록 그들을 권면하고 격려해야한다고 빌 하이벨스 목사는 말하고 있다. 그러할 때 비로소 교회 내적 봉사든 외적 봉사든 모든 섬김의 사역들이 활성화되고, 주님께서 주신 목적이 달성되는 역사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섬김의 사역에 동참하고자 하는 이들의 마음가짐은 어떠해야 하는가? 빌 하이벨스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남을 사랑하고, 섬기고, 돌봐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 영에 이끌림을 받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크리스천이고, 그리스도께서는 궁극적으로 종의 삶을 사셨다. 우리가 남을 섬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 안에 종의 영이 거하기 때문이다. 남을 섬기는 일은,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길이다.”(101쪽)


 곧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말이다. 팔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다 씻기신 주님의 본처럼, 우리의 마음가짐은 스스로 낮아지는 종의 마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비로소 정직하고, 아름다운 섬김이 가능한 것이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 2장에서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고 권면하면서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예수의 마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곧 섬김이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셨던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데서 시작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섬김이 전적인 희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섬김은 놀라운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봉사의 길은 항상 보답이 있기 마련인 ‘쌍방향 도로’라고 빌 하이벨스 목사는 말한다. 여기에서 그는 몇 가지 사례들을 소개하면서 어떤 사람은 섬김을 통해 부부관계가 원만하게 되는 치유를, 어떤 사람은 나른한 삶에서 자신의 삶의 목적을 찾게 되어 적극적인 삶으로 변화하게 된 치유를, 어떤 사람은 내면의 아픔에서 회복되고, 어떤 이는 노숙자로서의 삶에서 해방되어 치유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을 섬김을 통하여 자신도 치유되는 역사를 경험하며, 이른바 ‘봉사자 황홀상태’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섬김의 삶은 한 순간의 황홀 경험에 아니라 지속 가능한 형태로 발전되어야만 한다. 종으로서의 삶은 결코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마라톤이기 때문에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해선 철저한 자기 관리와 성령 충만이 요구된다.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 사랑을 줄 수 없다는 말처럼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사랑을 날마다 경험해야만 진실하고 활기찬 종의 삶을 지속적으로 살아낼 수 있는 것이다.

 빌 하이벨스 목사는 이처럼 책 전편을 통해서 ‘섬김’이라는 주제에 집중하여 우리가 섬김을 삶을 살아야함으로 설득력있게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 섬김의 혁명이 지금-여기에서 성취되기 위해서 우리가 ‘과감하게 공동의 목표를 위해 봉사하는’ 그 길의 동참자가 될 것을 강력히 요청하고 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이미 우리에게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 섬김에 굉장히 인색한 것처럼 보인다. 낮은 자리에 처하기 보다는 높은 자리에 처하고 싶어 하고, 다른 사람을 위하기보다는 나의 유익을 먼저 구하는 것이 습관처럼 우리의 마음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 사도의 말처럼 우리는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일을 돌보아 주고, 자기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는 심정으로 돕고, 봉사해야한다. 섬김이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명령이기 때문이다. 그 명령이 성취될 때 세상은 변화될 것이다. 책의 말미에 적혀있는 빌 하이벨스 목사의 비전을 옮기며 마친다. 이에 대한 대답은 바로 우리들의 몫이다.


“모든 교회와 모든 자선단체가 의욕 넘치고, 사랑 가득한 재능 있는 봉사자들로 넘쳐난다고 상상해 보자. 이 땅에 하늘나라를 실현하려는 봉사자들이 서로 줄을 서서 봉사하려고 달려드는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라. 아, 이 세상은 어떤 모습이 될까?”(1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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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숙 2007-10-27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교회의 열방을섬기는 사역에 대해
CBS TV '수호천사' 프로그램이 방영됩니다.

방영은 10월 30일(화) 낮12시, 31일(수) 밤 12시, 11월4일(주일) 오후4시입니다.

이 일을 계기로 열방을섬기는 선교센터가 세워지고
열방을 향하여 나아가는 귀한 출발점이
되게 하실 줄 믿습니다.

많은 관심과 기도 부탁 드립니다.

http://town.nate.com/iyonsei

바람결 2007-10-27 19:15   좋아요 0 | URL
네,,기억하고 챙겨보도록 하겠습니다.^^
그저 '하나님 은혜로'라면 못할 것 없겠습니다.
늘 가시는 길에 주님 축복 함께 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