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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초기 수도원 운동사
남성현 지음 / 엠애드 / 2006년 2월
평점 :
품절
■ 들어가는 말
지난해 한국교회에서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100주년을 즈음하여 각성과 갱신, 그리고 부흥의 재가(再加)를 외치는 소리들로 들끓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러한 분위기 속에는 그간의 한국 기독교(회)가 걸어왔던 길을 발본적으로 성찰하고, 반성하여 ‘새술’을 담아낼 ‘새부대’로 거듭나려는 시도와 모색이 감지되지 않았고, 때문에 각성과 갱신, 부흥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거칠게 말하자면, 오히려 한국 교회는 참된 각성을 통한 영적 성숙을 고려하기 보다는 양적 부흥을 위한 ‘자폐증적 축제’를 벌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때문에 일단의 신학자들은 (당시의 혼탁한 대선 정국 속에서 대형 교회와 그 목회자들이 주도한 소위 ‘뉴라이트 운동’과 결부하여) “한국교회가 성장과 성공의 신화에 매달려 크고 화려하고 풍요로운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주하면서 물신주의에 빠져 세상에 대하여 대안적 가치를 제시하고 추구해야 할 사명을 저버렸다”(길희성)고 성토하였다. 또한 그러한 문제의 원인은 다름 아닌 ‘기독교 영성의 기반’이 제대로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으로 입을 모았다.
그렇다면 기독교 영성의 기반이 부재하게 된 작금의 현실을 타개하고, 새 천년을 맞이한 (한국) 기독교가 걸어가야 할 ‘새길’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그 길을 오랜 전거로부터 찾을 수 있다. 바로 기독교 초기 수도원 운동인 ‘수도주의’를 통해서 말이다.
■ 몸 말
본 책, 『기독교 초기 수도원 운동사』에서 저자가 밝히고 있는 것처럼 “영성이란(......) 간단히 ‘예수를 따르는 삶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_36쪽) 그러므로 영성적 삶이란 결국 ‘예수를 모방하는 삶’에 다름 아니다. 그러한 삶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이상’(完德)에 도달코자 했던 이들이 있었다. 바로 사막의 수도자들이다.
특별히 이 책은 사막의 수도자들 중에서도 파코미우스(290-346)와 바실리우스(329-378)를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이 둘의 삶은 분명 각기 다른 궤적을 그리고 있다. 태생이나 성장배경, 활동무대, 그리고 삶의 방식과 성격까지도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인다. 가령, “파코미우스는 관용의 미덕을 알고 있었던 자인 반면, 바실리우스는 엄격한 지성적 태도로부터 출발했다. 동료 수도자들이나 제자들에 대한 관용의 정신은 테바이드의 공주 수도원을 대규모의 수도원 조직으로 확장시키는 데에 일조한다. 반면 바실리우스의 문자적 엄격성은 수도원 확장이나 양적 성장에 별다른 가치를 두지 않는 영적 순수함을 보여준다.”(_191쪽) 이러한 차이에서일까? 파코미우스의 공동체 규칙의 성격은 육체에 대해 비교적 완화된 형태의 금욕을 보여주는 반면, 바실리우스의 수도서에는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내적인 덕목은 절제”(_158쪽)라는 표현과 더불어 육체성에 대한 부정적 경향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둘을 대조하거나 그 차이를 부각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오히려 책은 두 명의 위대한 수도자, 파코미우스와 바실리우스의 삶과 기독교적 이상을 통하여 옹골찬 영성의 길을 보여주고 있다. 이 영성의 길은 그들 모두 이른바 공주수도주의, 즉 공동생활을 통해 치열한 수덕(修德)으로 일관하였다는 사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들이 이러한 삶의 방식을 채택하였던 데에는 “공동생활이야말로 인간을 그리스도의 완전으로 이끌어 줄 최선의 삶의 형식”(192)이라고 보았던 이상이 있었던 때문이었다. 물론 각자가 공주수도를 추구하는 방식은 달랐지만 분명한 것은 그 공동생활의 요체가 성서적 원리에 입각하였다는 점이었다.
완전에 이르기 위해서는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주어야 한다는 예수의 말씀은 그들을 사로잡았고, 그리하여 무소유한 가운데 하나님께로 집중하는 삶을 살도록 인도하였다. 이 원리를 고수하는 가운데 그들은 물질적인 속세의 염려들로부터 해방된 삶을 살고자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은 독수(獨修)의 길보다는 공동체, 곧 작은 교회를 이루어 다양한 규칙들을 마련한 가운데 ‘여럿이 함께’ 걷는 영적 여정이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분명한 것은 바코미우스와 바실리우스, 두 영적 스승들이 걸어온 발자취는 분명 성서로부터 출원한 것이었고, 철저한 영적 훈련의 세월이었다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다소 엄격하고 철학적이었으며, 탈속(脫俗)적이었던 바실리우스의 공주수도나, 사막의 혹독함을 극복하고 현실의 삶 속에서 복음을 실현하여 하나님을 체험하고자 했던 파코미우스의 그것이나 결국은 다르나 같은, ‘순수한 복음적 시도’의 길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나가는 말
결국 오늘날 제기되고 있는 한국교회의 영성 고갈 문제는 과거 치열한 구도의 길을 걸었던 수도자들의 각고를 간과하고 망각하였던 데서 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소중한 영적 유산들을 물려받고 당대의 현실 속에서 그 정신을 구현코자 애쓰고 노력하였다면 지금의 한국 기독교(와 교회)의 영성적 기반은 제법 온당한 꼴을 갖추게 되었을 터이다. 그러나 오랜 영적 전통들과 단절하고, 영성적 기반을 망실한 채 외적․양적 성장에만 골몰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모습은 참으로 가련하다.
그러한 차원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향한 파코미우스와 바실리우스, 이 두 영적 스승들의 삶과 사상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무엇보다 치열한 구도의 길을 걸었던 그들의 삶 자체가 주는 메시지, 그리고 성서적 원리에 입각하여 청빈과 절제, 나눔을 공동생활 속에서 실천하였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이와 같은 삶의 자세와 법식은 타성에 젖은 개개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질타이자, 외피에 마음을 빼앗긴 한국교회를 향한 준엄한 꾸짖음으로 들린다.
이처럼 우리 그리고 현금의 한국교회는 초기 기독교의 ‘수도주의’, 그 중에서도 특별히 ‘공주수도주의’를 통해 참된 신앙적 이상과 실천의 길을 배울 수 있다. 그 길은 비록 오래지만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영성의 기반을 마련토록 인도할 것임에 틀림없다. 바코미우스와 바실리우스의 공주수도의 삶은 ‘예수를 따르는 삶의 방법’(영성)이 과연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이정표이자, ‘오래된 새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