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 - 현대인이 잃어버린 안식의 참 의미를 말하다
아브라함 J. 헤셸 지음, 김순현 옮김 / 복있는사람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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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없는 종교의 안식 찾기. 필경 안식은 공간을 넘어선 자리, 즉 시간에 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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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침과 깨달음 - 박성배 교수의 불교 철학 강의, 카르마총서 6
박성배 지음, 윤원철 옮김 / 예문서원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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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자꾸 '너'와 '나'를 일치시키려고 한다만,
그 둘이 '하나'를 어둡게 하는 것이 보이잖느냐?
_<루미 지혜-위대한 수피 스승의 사계>, “10월 4일” 전문

 13세기 수피 시인인 루미(Mevlana Jelaluddin Rumi)의 글이다. 나는 이 글을 너와 내가 따로 있다는 그 그릇된 논리부터 집어치우라는 말씀으로 읽는다. 이미 그 분(The One, 한님)과 나는 옹근 하나인데, 그걸 일치시키겠다고 하니 그건 분명 그 분이, 혹은 그로부터 내가 외따로운 존재라는 망상을 진작부터 상정해놓고 가는 형국이라 하겠다. 그로인해 본디 ‘하나’인 신과 인간의 불이적(不二性) 관계엔 균열이 생기고, 암운이 드리운다.

『깨침과 깨달음』을 읽으면서 700년 전 루미의 지혜가 오늘날에도 비교적 적확하게 읽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갈수록 신과 인간(과 온갖 피조물들)의 거리가 아득해지는 종교적 통속성을 두고 보면 무릇 앞으로의 종교적 미래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는 비교적 루미와 동시대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중세 신비주의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에 대한 현대 신학계의 주목과도 일견 맥을 같이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더 꼼꼼한 연구와 고찰이 필요하겠지만, 어쨌거나 ‘범재신론’으로 규명되는 에크하르트류의 신관이나, ‘신과의 합일’에 몰두하였던 루미 등과 같은 수피들이 걸었던 그 길이 오늘의 21세기 문명에 있어서 (종교 안팎의) ‘해방과 구원’의 새 영성적 지평을 열어갈 가능태임은 자못 분명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쯤에서 잠깐 멈추고, 다소 사적인 이야기로 넘어가도록 하자. 위에서도 언급했던 루미나 에크하르트에 대한 개인적 관심의 궤와 같이 하여 ‘신과 세계의 동일성’, 혹은 ‘신과 인간의 합일’이라는 주제는 몇 해 전부터 나의 신앙(학)적 입장이 되었던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시때때로 갈마드는 기존의 신앙 양태는 꽤나 뿌리 깊은 것이었던지 나의 신앙이 일쑤 보편과 통속의 범주 속에서 표류하곤 하였다.(예컨대, 때때로 기도의 언어 속에서, 그리고 그 발화의 심층 속에서 나는 철저히 타자화 되었거나, 대상화된 하나님께 빌고 있었다.) 어찌 보면 보다 깊은 직관에 의해서가 아닌 단지 이성의 의지적 작용을 통해서 구성된 신앙이기에 또한 그럴 수밖에 없음을 자인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제 나름의 지난한 신학 여정 속에서 알음알음 부수고, 갈았고, 엎었던, 그리하여 그 토대 위에 세우고 싶어 했던 신앙의 결실이 때때로 무참히 허물어지는 모습을 보며 서글픈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고보면 이 비애의 반복 속에서 가까스로 부여잡으려 했던 것은 결국 신앙의 토대를 재구성하는 일이기보다는, ‘살이’의 차원이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수행’을 화두 삼아 부족한대로 공부하며, 참 살이를 궁리하여왔다.

 이러던 중에 마주하게 된『깨침과 깨달음』은 불교의 오랜 논쟁의 주제인 ‘돈오점수(頓悟漸修)’론에 대한 전면적 검토의 성격을 지니는 글이다. 여기에서 저자는 특별히 ‘돈오’, 즉 ‘몰록 깨침’이 불교적 신앙의 온당한 토대임을 주장하면서 ‘점오’를 통한 깨침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그는 조신(祖神)과 교신(敎信)-‘나는 부처가 될 수 있다’-이라는 믿음의 존재론적인 두 측면을 대비하여 참다운 불교적 믿음의 형태가 전자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가 보기에 조신, 즉 ‘나는 이미 부처’라는 믿음은 결국, 닦음과 깨침의 출발이자, 정점이며, 그것들이 아울러 본디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조신의 믿음 없이는, 그 여하한의 깨침과 닦음 또한 존재할리 없다. 말하자면 온갖 깨달음과 수행이 하나의 몸짓(用)이라면, 믿음은 바로 그 몸(體)이라는 것이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체용불이(體用不二)’인 것이다.

 이와 같은 저자의 주장은 마치 내게 죽비를 후려치듯 했다. 조금 더 간결하게 말하자면, 믿음의 문제에서 오는 온갖 혼동과 갈등에 대해 애써 외면했고, 간단하게도 ‘살이’(行)의 문제로 성급하게 이연(異緣)하고자 했던 나의 못난 시도들과 정직하게 대면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는 물론 내 안의 그 분과 오롯이 마주하고, 이미 하나임을 확신함으로부터 내 신앙의 벼리를 다지는 일이 선행되어야 할 것임을 깨닫게 된 데에 의미가 있다. 한편 ‘의심 덩어리 명상’이라 할 수 있는 간화선의 경우를 통해 흔들리는 믿음, 회의하고, 의심하는 믿음의 역동성을 기술한 대목은 마찬가지로 더 치열하거나, 더 고뇌하지 못한 자의 부끄러움을 상기시켜주었다.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진정 없을 터인데, 오히려 그 ‘바람으로 인하여 뿌리는 더욱 단단해지고’야 말텐데, 나는 그동안 흔들림을 두려워했고, 서둘러 보편과 통속의 신앙으로 유야무야 귀환하였던 듯싶었다. 그야말로 퇴신(退信)이었다. 그러나 조신을 통한 믿음에서는 오직 불퇴전(不退轉)을 고집해야한다는 주장에 나는 다시금 내 믿음의 유약함을 쓰라리게 응시하였다.

 하지만 책은 나에게 그저 하나의 질정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죽비를 얻어맞고, 정신이 번쩍 든 어느 선 수행자의 토끼눈처럼 사실 나의 마음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 수행이란 것도 결국 온전한 믿음의 확신이 전제되지 않을 때, 무릇 진리와 멀어질 수 있음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그 불퇴전의 믿음을 곱씹으며, 참 찾아 가는 길에는 유보가 없음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참 찾아 예는 길에 한 참 두 참 쉬지 마라
참참이 참아가서 영원한 참 갈 것이니
참든 맘 참 참을 보면 가득 참을 얻으리.
_함석헌 선생님의 시, “참”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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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10-09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종교는 다 '참'으로 통하는 길이라 볼 수 있을까요.
참,참, 생각해보니, '참나'는 무언지.. 저도 바람결님도 '한님'과 하나되어
있는건지요. 제가 너무 오래 유보하고 있는건지요. 생각이 또 겹쳐 옵니다.

바람결 2007-10-10 23:28   좋아요 0 | URL
그래요, 혜경님.
종교는 '참'으로 가기 위한 인간의 지혜이며,
조물주의 크나큰 은총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그 조물주를 역사의 뒤안으로 유배시킬 때,
무릇 '만물 안에', 그리고 '만물을 통하여'계신
그 분은 설자리를 잃어버리시겠지요?

혜경님, 그런데 저도 마찬가지에요.
여전히 저 또한 그 '참'의 길을 유보하면서 살고 있답니다.
언젠가 내 안의 그 분이 눈뜰 때,
그리하여 그 분과 내가 옹근 하나가 될 때를 기대합니다.
다만 지금-여기에서 그 분 뜻대로 살고자 애쓸 뿐입니다...

여전히, 혜경님의 속깊은 마음이 절절히 다가옵니다.
 
나무명상
고진하 지음 / KMC(기독교대한감리회)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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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 등굣길에 차창 밖을 바라보니 거리의 풍경이 여간 복잡하고, 분주한 게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거의 한 명도 빠짐없이 달리기에 가까운 걸음으로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고, 비오는 거리는 그네들의 발걸음에 질퍽거리고 있었습니다. 가뭇없이 사라져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들의 영혼의 무게에 대하여 잠깐 생각하였습니다. 얼마나 가볍기에 저토록 빠르게들 떠나시는가? 사실 이러한 생각을 해본 것이 처음은 아니라서 저는 또 속수무책으로 우울해졌습니다. 사람들이 저토록 날래게 움직거리는 것은 기실 그 영혼이 가벼워서가 아니라 오히려 무거울 대로 무거워진 마음 탓인 듯 싶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짓누르는 저 무거운 바위를, 그야말로- 오로지 ‘살기 위해’ 밀어 올려야만 했던 시지포스가 중첩되어 자꾸만 눈앞이 흐려졌습니다. 비루함은, 인간의 비루함은 거리 도처에 잔상처럼 남아서 배회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분주하게 살아가는 ‘날랜 인생’들에게 일상의 틈은, 마음의 여백은, 창조의 포란(抱卵)은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자신을 성찰하는 비움의 시간, 즉 참된 쉼이 없고서는 일쑤 팍팍한 인생이 되고 말지요. 그래서 지친 영혼들은 제 삶이 ‘마른 코딱지 같은 생활’(안도현)일 때, 어디론가 떠나서 쉬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 작은 바람도 현실의 분주 속에서 유야무야되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그렇게 세상의 불행한 인생들은 틈을 잊은 채 살고 있습니다. 저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요즘처럼 마음이 산란할 때, 제 마음 속에 일체의 여백이 존재할만한 틈이란 없습니다. 그저 일상의 순간들을 ‘닥치는 대로’ 살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지요. 그러던 중에 <나무명상>이라는 책이 문득 눈에 띄어 손에 들었습니다. 

 

 이 책은 시인 고진하 목사가 숲을 거닐며, 나무와 속삭이며 마음을 주고받았던 교감의 기록입니다. 그는 숲을 이루고 있는 그 수많은 나무들을 바라보며, 고요 속에 찾아오는 참된 안식을 누립니다. ‘모든 피조물은 안식을 주는 것에 끌린다’는 중세 신비주의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진언(眞言)처럼 그는 나무에 끌려, 더불어 교감을 나누기 시작합니다. 나뭇잎마다 새겨져 있는 하나님의 지문과 말씀에 오롯이 마주하며, 묵묵히 적어내려 간 이 명상록에는 그가 체험한 안식의 산문들이 정직하게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 산문들이 증언하는 것은 속도와 효율을 정점에 두는 시대정신에 있지 않고, 나무의 너른 품에 기대어 쉬는, ‘시간보다 더 느슨한’ 여유와 관조였습니다. 

 

 시인은 “나무와 생명의 교감과 신비를 나누는 마음은 곧 신성한 공간으로 변합니다. 이런 신성한 공간이 생길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여백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158쪽)라고 하였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나무는 단순한 미물(微物)에 그치지 않고 함께 더부는 벗이며, 동시에 교사(敎師)이기도 합니다. 시인에게 저 묵묵하고, 고요한 나무는 마치 ‘나+無’, 즉 ‘나’가 없는, 에고가 사라진, 완전한 비움에 이른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나무는 사람인 나보다 한참은 더 높고, 숭고하게 느껴지게 되지요. 그래서 나무는 마치 하나님께 잇댄 존재처럼 보입니다. 그 앞에서 시인은 하릴없이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합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대자대비하신 하나님이 나무 같은 분이 아닐까 생각하곤 했습니다.”(181쪽)라는 고백처럼. 

 

 온통 바쁘고 분주한 세상. 이 세상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나누는 말들이 우리의 영혼을 풍요롭게 하는 소통의 도구로써 작용하지 못할 때, 그 숱한 말들은 우리를 지치게 만듭니다. 신령과 진정을 담아야 할 기도의 언어조차 내적인 절제와 정화를 거치지 않은 채 저잣거리의 소음처럼 드릴 때, 그런 말들 역시 우리의 영혼을 메마르게 할 뿐입니다.”(81쪽) 그래서 소설가 이청준 선생은 ‘말은 없고, 떠도는 말들만 가득하다’고 하였나 봅니다. 자신의 마음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한 번 더 곱씹고 되 뇌일 시간도 없이 내뱉고 마는 것이 인간의 말이기 때문이지요. 정말이지 갈수록 소통은 없고, 불통만 가득한 세상처럼 여겨집니다. 때문에 메마른 영혼의 갈증은 억수 같은 빗방울에도 쉬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결단할 때, 자신의 허상(虛像)같은 현실을 내려놓고, 나무와 정직하게 마주하기 시작할 때, 그 고요와 침묵의 시간들은 우리의 영혼을 진정한 ‘안식’의 성소(聖所)로 인도할 것입니다. 

 

 무거운 짐진 자들이여, 지금 당장 나무의 품에 기대어 생명의 숨결을 나누고, 참된 평안과 안식의 거처로 들어가십시오. 그곳에서 당신들의 내면에 감추어진 보화들이 빛을 발하고, 생수의 강이 넘쳐흐를 것입니다. (마태복음11장 28절과 요한복음 7장 38절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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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9-19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결님, 며칠간 마음의 폭풍이 조금 가라앉아가고 있는데, 어제 저녁 제 스터디 관련 카페에서 또 '떠도는 말들'을 읽었습니다. 전 꾹 참았습니다. 거기에 제가 또 더할 필요가 없다, 말에 휘둘리지 않고 내 중심만 갖고 있자,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님의 리뷰가 제겐 한 그루의 나무처럼 읽혔습니다. 시간보다 느슨한,, 그 안에서 무한한 사랑을 깨닫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감사한 마음으로 시작하라, 하시는군요. 고맙습니다.^^

바람결 2007-09-19 12:41   좋아요 0 | URL
음...그러셨군요, 혜경님.
'말에 휘둘리지 않고 내 중심만 갖고 있자'는 님의 다짐,
참말로 맞습니다. 말, 말, 말...

그나저나 늘 좋은 댓글로 깨우쳐주시니 감사, 또 감사합니다.^^
 
길을 걷는 자, 너는 누구냐
장휘옥.김사업 지음 / 더북컴퍼니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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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宗敎), 소위 ‘큰(높은) 가르침’을 따르며 살겠노라고 자처하는 내게,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갈수록 절감하게 되는 결핍은 바로 ‘수행(修行)’에 있다. 20대 초반에 내가 전통적 기독교와 결별하고, 사회적 실천에 내 신앙의 중점을 두었다고 한다면, 20대의 후반에 접어든 지금, 나의 온 관심은 이처럼 수행의 문제에 가닿아 있지 싶다. 

 사실 이러한 관심의 전이(轉移)는 사회나 제도를 변화시키겠다는 열망 뒤에 찾아오는 내적 불안에서 비롯되었다. 종교적 책임이라는 미명 하에 주위를 둘러보고 불의(不義)에 저항할 줄은 알았지만 정작 나의 내면을 들여다볼 틈은 없었고, 때문에 ‘나’는 여전히 불의에 방임된 인생을 살고 있었다. 이와 같은 자가당착적 인생은 의당 불안과 초조, 불만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다.

 

 세상과 수많은 타인들에게 변화를 요구하면서도 나는 변화된 인생을 살고 있지 못했고, 단지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 예언자적 소명을 담당한다는 만족감에 자위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거의 거덜 나 있는 나의 내면을 바라보기 시작하였고, 세상의 모든 변화라는 것이 결국 나로부터 정초되어야 할 것임을 절감하게 되었다.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서 먼저 변화되어야 할 곳은 바로 나의 내면이었다. 그 내면이 아름답지 않고서는 결코 그 어떤 세상의 아름다움을 논할 자격이 없었다. 

 

 이처럼 수행이라는 개인적 화두를 놓고 고민하던 차에 한 교수님의 추천을 받아 책을 들었다. <길을 걷는 자, 너는 누구냐>라는, 마치 선문답과 같은 제목의 이 책은 오롯이 수행을 위해 정진했던 두 영혼의 기록이다. 장휘옥과 김사업, 이 두 사람은 본래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만나 동국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였던 길벗이다. 그러나 이들은 불교학자와 교수라는 자리에 머물지 않고, ‘모든 얽매임으로부터의 자유’를 위해 모든 ‘자리’로부터 떠난다. 이제 그들은 경남 통영의 오곡도라는 작은 섬으로 들어가 수련원을 짓고, 그곳을 수행처로 삼는다. 그러고는 온전히 수행에만 전념하기 위해, 그리고 수행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해 세계 유수의 명상 수행처를 방문하기로 작정한다. 이 책은 바로 그 3년간에 걸친 선방 수행의 기록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이토록 수행에 매진하려 하는가?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을 이렇게 적어놓고 있었다.

 

“수행을 하면 보잘것없는 일도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고, 툭하면 다투던 주변 사람들과도 웃고 지낼 수 있으며, 비록 가진 것이 없어도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좀 더 거창하게 말하면, 살아가면서 겪는 숱한 고통과 괴로움에서 벗어나 어디에도 걸림 없는 대자유를 얻게 된다.”(207쪽)

 

 그렇다. 그들의 수행의 목적은 바로 대자유를 얻어 옹근 해방의 길을 걸어가는데 있었다. 이는 세속의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기에 그들은 과감히 자신의 삶을 수행에만 전념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고보면 자신을 둘러싼 세속의 모든 안위들을 내려놓고 오롯이 수행의 길로 접어든 것은 실로 지난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욱 어렵고 힘든 것은 그들이 겪어낸 수행의 여정 속에 있었다. 특히 하루에 단 한 시간 밖에 수면을 취하지 못하면서도 오직 ‘무(無)’에 이르기 위해 며칠을-그야말로-‘죽을 각오로’ 임했다는 일본 임제종에서의 화두 수행은 차라리 처절할 정도였다. 동상에 걸린 발도 무릅쓰고 한기(寒氣)를 감내하며 수행에 정진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경외심마저 느껴질 정도였으니 그들의 수행이 오죽 애면글면했겠는가? 

 뿐만 아니라 ‘알아차림’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2-3시간에 이르는 좌선 수행을 ‘죽을 고통을’ 다해 감내했던 미얀마의 위빠사나 수행, 그리고 참된 쉼과 평화로움의 길을 발견했던 틱낫한의 플럼빌리지 수행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걸었던 수행의 길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들의 이러한 삶이 혹여 비종교인들에게는 우둔하게 비추어질 수도 있겠다. 어쩌면 같은 종교에 속해 있으면서도 기독교라는 다른 배를 탄 이들에게조차 가차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 수행은 종교인들만의 것이 아니다. 기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살아내야 할 화두이기도 하다. 특히 온갖 생명들의 ‘죽음’으로 ‘주검’화된 21세기 지구문명에 있어서 수행의 역할을 재차 강조하여도 지나침이 없을 듯싶다. 왜냐하면 수행이란 결국 거짓과 탐욕, 이기(利己)로 대변되는 자아를 버리고, 무아(無我), 즉 ‘모든 것과 분리된 나(separate self)란 없다’는 사실을 자각(自刻)하는 길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 자각의 바탕 위에서 모든 개별 생명들은 ‘온생명global life’(장회익)으로 화(和)하게 되는 것이다. 

  

 자못 거창하게 설명했지만 사실 수행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다만 “순간순간 맑은 마음으로 행하는 우리의 모든 활동이 곧 참선이다. 볼 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맛볼 때, 만질 때, 그 모든 것이 참선이 된다.”(196쪽) 또한 틱낫한 스님의 플럼빌리지의 아름다운 노래말처럼, “타인에 대한 판단을 멈추고 사랑이 듬뿍 담긴 말을 하라. 긴장을 풀고 들어보라. 몸과 마음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라. 듣는 것은 예술이다.”(153쪽)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수행의 ‘때’이며, 머무는 바로 그곳이 수행의 ‘처(處)’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그곳에서의 일상이 수행의 순간이 된다면, 그 삶은 비로소 예술이다! 그리고 삶이 예술이 될 때, 온 세상 또한 예술이 될 것이다.

 

 

(추기: 나는 오늘, 지난 몇 달간 동고동락했던 오토바이를 팔아치우고 걷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떼어가며, 온전히 단 하나의 사실을 알아차렸다. ‘내가 걷고 있다!’ 그 단순한 현재에 마음을 모아 알아차리고, 나의 모든 행동에 귀를 기울일 때, 판단은 없어지고 모든 분별은 사라진다. 아직은 온갖 산란한 마음들 때문에 퍽 어렵다. 하지만 언젠가는 판단과 분별을 여읜 마음의 자리에 아름다움이 그윽하게 들어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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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9-04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결님, 글맛에 제가 녹아듭니다. 오늘하루도 아리따이 보내신 듯해요.
오토바이와 이별하고 발걸음을 느끼셨군요. 저도 자꾸 차에 의존하고 내 발걸음을
느끼는 일을 소홀히 하게 되는데.. 걷기명상을 중요시한 틱낫한의 글이 떠오릅니다.

바람결 2007-09-04 20:57   좋아요 0 | URL
아이고...과찬을 그렇게...;; 항상, 못난 글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오토바이와의 이별은 참 가슴 아프더군요. 애지중지하며 몇 달간을 함께 했었는데 말이죠. 그렇게되니 걸을 수 밖에 없더군요. 이왕 걸을 바에는 틱낫한 스님이 권면했던 걷기명상을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더라구요. 그런데 아직은...멀었어요. 좀처럼 마음 모으기가 잘 되지 않아요. 무튼 혜경님도 슬슬 발걸음을 느끼는 일에 시간을 할애해보세요. 차는 지구에 해롭답니다.ㅎㅎ
 
예수에게 도를 묻다 - 이현주 목사의 마르코 복음서 읽기
이현주 지음 / 삼인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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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간에 누구나 한번쯤은 성서를 접해 보았을 것이다. 몇 대목을 직접 읽어보았거나, 다른 이들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나마 전해 들어본 이도 있을 것이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라는 수식어답게 아마도 많은 이들이 성서에 대해서 한 마디씩은 할 수 있을 만큼 성서는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는 듯싶다. 하지만 성서만큼 어려운 책이 또 있을까? 비기독교인들은 차치하고서라도 성서가 기독교인들에게조차 까다롭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 차원에서 사실 성서는 ‘널리’알려져 있을지는 몰라도 ‘깊이’ 이해되고 있지는 않은 형편이다. 

 이에 대해서 논하자면 많은 지면이 할애되니 짧게나마 원인을 짚어보자. 아마도 성서 자체가 갖고 있는 난해함이 근본 원인일 테고, 그러다보니 많은 이들이 주눅이 들어 웬만해선 읽으려 들지 않는다는 것이 다음 원인일 테고, 정작 그에 대해 설명해준다고 하는 신학자들의 사변적인 개념들에 또 한 번 주눅이 드는 것 또한 원인일 테고, 목사들에 의해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들이 자꾸만 말씀 자체의 내용과는 동떨어진 것 같아 헷갈리다보니 그게 또 원인이 되어 성서가 그렇게도 따분하고, 지루할 뿐만 아니라 어렵고 딱딱한 것으로 간주되기에 이른 것 같다. 뭐 사실 나도 성서를 마주할 때마다 독해의 어려움을 느끼지만;;;

 어쨌거나 이처럼 성서는 어렵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신약성서의 복음서들은 단연 어렵다. 예수의 온갖 비유들과 행적들, 그리고 복음서 기자들이 갖고 있는 문체상의 특징과 그를 이루고 있는 구조들 때문에 사실 복음서는 진짜 까다롭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읽어도 그 뜻을 헤아리거나 이해하지 못하기 일쑤다. 그러다보니 자꾸만 성서는 ‘성서로써’ 고립된다. 더 이상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읽는 기쁨’을 주지 못하고, 책장 한켠에 한가롭게 전시될 뿐이다. 그래도 조금 성의 있는 이들은 시중의 주석서들을 통해서 본문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가상함을 보인다. 하지만 예의 주석책들이 남발하는 따분한 어휘들이 금새 질리고, 지치게 만든다. 그런데 이 따분하고 어려운 성서를 ‘새롭게’ 마주한 이가 있다. 이현주 목사다.

 <예수에게 도를 묻다>는 말 그대로 ‘자기 나름대로’ 풀어서 마치 소설처럼 쓴 주석서이다. 그는 (자기 안의) 선생님과 오롯이 마주하고 앉아서 대화를 나눈다. 마르코복음(마가복음)을 한 구절 한 구절 읽어가면서 제자는 묻고 스승은 답하는 식으로 말이다. 철없는 제자의 물음에 스승은 호통을 치기도 하고, 조곤조곤 타이르기도 한다. 때론 제자의 적실한 한 마디에 맞장구를 쳐주기도 한다. 그리고 제자인 이현주 목사는 마르코복음을 한 절 한 절을 읽어 내려가며 궁금했던 것들을 스승께 여쭌다. 물론 그 제자의 모습에는 삿됨이 없으며, 무리도 없다. 그저 선생께서 일러주시는 말씀들을 겸손하게 듣고, 받들 뿐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선생님은 성서의 예수님과 같은 분은 아니다. 그저 이 대화가 한 인간의 내면에서 ‘자연 발생한 혼잣말’인 것처럼 자기 내면에 계신 ‘스승님’일 따름이다. 그러니까 결코 일반적인 예수상(像)으로 이해하려들지 않는 것이 좋다.

 아무튼 ‘소설같은 주석서’인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어느덧 내가 제자의 입장이 되어 스승의 말씀을 구하고 있는 모양새처럼 착각하게 될 때가 없지 않았다. 게다가 구차한 물음이나 궁금증에 얽매이지 않고, 말씀의 본뜻을 전해주려는 스승의 마음이 전달되는 듯한 느낌 또한 받았다. 늘 이성의 잣대로 성서를 분석하거나 독해하려던 시도를 내려놓고, 말씀 자체에 천착하라는 음성이 들리는 것도 같아 놀랍고, 신비로웠다. 그리고 말씀이 온갖 현자들의 말씀(노자, 장자, 석가, 루미 등등의)과 더불어 교차되고, 이해되니 한결 더 새롭고, 옹글게 감응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모든 성서의 말씀들이 ‘사랑’에 가닿아 ‘사랑’과 한 몸이신 ‘그 분’과 잇닿게 하니 영적으로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한 시간이었다. 스승의 당부처럼 ‘사랑’으로 깨어있음이 모든 것(everything), 즉 전부임을 깨달아, 깨달음대로 살아야겠다는 깨달음이 진하게 여운을 남겼다. 

언제 어디서나, 어떻게 하면 지금 네 눈 앞에 있는 대상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인지 그것만을 생각해라. 그리고, 떠오르는 게 있으면 겁내지 말고 그대로 하여라. 사람들 눈치 보지 말고, 결과를 계산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사랑'만을 생각하고 그렇게 움직여라. 때가 되면 나와 아버지를 네 눈으로 보게 될 것이다. 사랑이 모든 것이다! – 198쪽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간에) 많은 이들도 충분히 공감하고, 감응할만한 책이거니와, 이처럼 정직하게 써내려간 스승과의 대화록을 나는 오래고 곁에 쟁여두고 읽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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