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와 소통하기 - 완벽한 부모는 없다
크리스텔 프티콜랭 지음, 배영란 옮김 / 나무생각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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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친구같은 부모가 되는 것, 아마 현대 부모들이 가장 꿈꾸는 부모상일 것이다.

나 역시 임신한 아내와 함께 주말에 공원을 산책할 때면 아이와 함께 자전거를 타거나 함께 야구와 같은 운동을 하는 아빠들을 보게 된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도 저렇게 아이와 스스럼 없이 어울리며 대화하는 아빠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내 또래의 대부분의 아빠가 그렇듯이 나 역시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자랗기에 그런 아빠가 어떻게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뜻깊게 읽게 되었다.

 

이 책은 아이와 소통하는 법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알고 있는 소통하는 부모의 이미지와는 다른 부분을 이야기 하고 있다.

우리는 흔히 아이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부모가 아이와 동등한 입장에서 친구처럼 대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그런 대화방법이나 양육방법은 오히려 아이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부모가 아이에게 선택권을 주고 부모와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할 때 아이는 혼란을 느낀다고 말한다.

이 부분을 저자는 부모의 역할을 등산 가이드에 비유에서 설명한다.

 

여전히 함께 산을 오르고 있는데, 그가 산에 대해 나보다 더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우쳤다면, 그리고 이 사람도 나와 마찬가지로 겁을 먹고 있으며 길을 잃고 헤매는 증이라는 점을 알았다면, 그때 내 기분으 어떨까? 상당히 당혹스럽지 않을까?

반대로 산에 대해 정통한 전문가에게 모든 것을 내맡기고 그의 안내에 따라 산에 오를 수 있다면 보호받고 있다는 안정감을 느끼며 마음 편히 산행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바도 정확히 이와 같다. 자신의 부모가 자신보다 더 강하고 능력 있는 존재라 느끼면서 자신의 성장 과정에서 동반자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부모로서 우리는 자녀의 성장에 있어서 안내자 같은 존재이다. 만일 아이를 나와 동등한 위치에서 대하거나 아이에게 무한 봉사하는 역할만 계속한다면, 삶의 안내자로서 부모의 위치는 무너진다. 하지만 우리의 아이들에게 안내자가 필요하고, 또 아이들은 응당 그런 아내자를 가질 권리가 있다. (P72)

 

프랑스인인 저자는 이렇게 부모의 양육방법이 왜곡된 것을 프랑스의 아동 정신분석 전문가인 프랑수아즈 돌토(1908-1988)의 사상의 영향으로 본다.

돌토는 '아이도 한 명의 어른이다.'라는 말을 통해 아이를 하나의 인격체로 보고 아이와 대화해야 한다고 보았다.

저자는 돌토의 의도는 좋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의도를 오해해서 아이와 친구처럼 대하고 아이에게 무한애정을 쏟음으로서 오히려 아이의 바른 인격적 성장을 방해한다고 본다.

저자는 오히려 아이에게 분명한 한계를 정해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심지어는 아이가 좌절도 경험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한계선 안에서 아이가 부모와 대화하며 양육되어야 바른 인격적 성장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행동의 한계선을 찾으려는 이유는 그 선이 그어져야 있어야 그 안에서 안심하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해진 한계선은 아이의 정체성 구축에도 도움이 된다. 한계선은 심리적 울타리처럼 아이들을 둘러싸주며, 지표가 되어 아이들의 영역을 설정해 준다.

불안감과 두려움은 대개 그 자신의 한계를 인지하지 못했을 때 생겨나는데, 아이의 정체성이 제대로 확립되지 못했을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우리가 야자수나 오아시스 하나 없이 온통 모래 언덕으로만 두러싸인 사막 한가운데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찾지 못했을 때의 느낌과도 비슷한다.(P98-9)

 

부모가 아이의 한계선을 정해주지 못하고 아이의 욕구에 좌지우지되는 원인은 부모가 가지고 있는 죄책감과 완벽주의이다.

죄책감은 부모가 아이에게 더 좋은 것을 해 주지 못했다는 심리이다.

특히 현대처럼 직장인 어머니가 많은 경우 엄마는 하루 종일 밖에 일하다가 와서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인해 아이의 요구를 무조건 들어 주게 된다.

또한 완벽한 부모가 되고 싶은 마음에 아이의 필요를 완벽하게 채워주려고 하게 된다.

그러다보면 한계선이 무너지고 아이의 요구에 끌려다니는 부모가 되게 된다.

 

결국 이 책에서 저자는 현대의 친구같은 부모가 되라는 메시지 대신 아이보다 아이의 인생과 삶을 인도해 주는 안내자가 되라고 말한다.

이 말은 강합적인 부모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아이와 대화하지만 아이에게 무엇이 되고, 무엇이 안 되는 것인지를 가르쳐 주라는 것이다.

 

 

 

이 책을 읽어가면서 자칫 친구같은 부모가 되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부모서의 중심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아이를 바르게 키우기 위해서는 먼저 부모가 바른 양육관을 통해 바른 중심으로 서 있을 때 아이가 흔들림 없이 자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 양육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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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거 게임 헝거 게임 시리즈 1
수잔 콜린스 지음, 이원열 옮김 / 북폴리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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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사는 것이 영화와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루 하루 숨쉬는 것이, 내가 살아남기 위해 남을 넘어서야 하는 현실이, 그리고 그 현실 속에서 쓰러져 사람들의 모습을 볼 때면, 이것이 마치 현실이 아닌 영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장르소설, 특히 SF소설을 즐겨 읽지만 장르소설들은 분명히 한계가 있다.

가장 큰 한계는 현실과의 괴리감이다.

현실는 소설에서 등장하는 스파이나, 총기난사, 미래적 무기나 유전자적 괴물 등이 없다.

반면 이런 것을 제거하고 현실과 비슷하게 장르소설을 쓴 다면 아마 그 소설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현실과는 다른 미래적 세계를 그리면서도 현실에서 느끼는 그 잔혹감을 그대로 소설에 담고 있는 작품이 바로 [헝거게임]이라는 책이다.

 

사실 영화나 드라마를 본 후에 그 원작을 거이 보지 않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일단 영화나 드라마도 스토리를 알게 되면 원작을 읽을 때 몰입감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오래 전에 헝거게임 세트를 구입하고도 읽기를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얼마전 비밀독서단이란 프로그램에서 이 책을 다루는 것을 보고 문뜩 이 책이 읽고 싶어졌다.

 

 

 

이 소설은 줄거리를 알고 있어도 읽는데 전혀 지루하지가 않았다.

소설은 영화에서 담고 있지 못한 주인공의 심리묘사와 저자의 메시지가 더 분명히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은 철저하게 주인공 캣니스의 1인칭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되어 간다.

그러기에 헝거게임이란 자인한 세계 속에 처한 주인공의 심리가 확연히 드러난다.

먼저 소설은 추첨 날 눈을 뜬 캣니스의 시점에서 자신이 처한 가난함과 헝거게임의 잔혹함을 보여주고 있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침대 옆자리가 싸늘하다. 프림의 체온을 찾아 손을 뻗어보지만, 내 손가락에 와 닿은 것은 거친 무명 침대보뿐이다. 프림은 악몽을 꾸고 엄마 옆으로 기어든 모양이다. 그럴 수밖에, 오늘은 '추첨'하는 날이니까. (P6)

 

캣니스는 미래사회의 판엠이라는 독재 국가에 살고 있다.

판엠은 캣피톨이라는 도시가 12개의 구역을 무력으로 다스리고 있는 독재국가이다.

캣피톨 외의 대부분의 도시는 가난하고 특히 캣니스가 살고 있는 탄광이 대부분인 12구역은 특히 가난하다.

오래 전 구역들이 연합해 캣피톨에 반란을 일으켰고, 그 판란은 캣피톨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리고 캣피톨은 다른 구역들에게 복종과 두려움을 주기 위해 매 년 각 구역에서 남녀 두 명씩을 추첨해서 '헝거게임'이라는 잔혹한 게임을 연다.

헝거게임은 24명의 남녀가 단 한 명만 살아남을 때까지 싸우는 것이다.

12살은 청소년들은 헝거게임의 추첨 대상이 되고, 한 살이 늘어날 때마다 자신의 추첨 표를 한 장씩 더 넣는다.

그러나 캣니스처럼 가난한 집의 아이들은 배급표를 받기 위해 한 장씩을 더 추가하게 된다.

결국 공정한 확률게임 같지만 사실은 가난한 자에게 불리한 확률게임이다.

마치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캣니스는 아버지가 탄광사고로 죽은 후부터 숲에서 불법으로 사냥을 하면서 어머니와 동생 프림을 부양하고 있다.

사냥을 하며 숲 속에서 만난 게일이라는 남자와는 사랑하는 사이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미래란 없다.

하루 하루 현실을 버텨내는 것만이 지금 할 수 있는 전부이다.

 

추첨날 동생 프림이 뽑히고, 캣니스는 프림 대신 자원한다.

그리고 남자로는 오래 전 굶주린 캣니스에 빵을 주었던 피타라는 아이가 뽑힌다.

캣니스는 피타와 함께 헝거게임을 준비하면서 끊임없는 갈등을 느낀다.

그녀는 피타가 헝거게임에서 오직 승리만을 바라며, 타인을 죽이기 위해 계획을 세우는 사람이기를 은근히 바란다.

그것이 그녀가 그를 죽이기 편할테니까......

 

그런 생각에 나는 갑자기 걸음을 멈춘다. 착한 피타 멜라크는 나에게 못된 피타 멜라크보다 훨씬 위험한 존재다. 착한 사람들은 내 마음속으로 들어와 뿌리를 내리는 성향이 있따. 피타가 내게 그런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가는 곳에서는, 그래서는 안 돼.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순간부터 빵집 아들과 엮이는 일을 최소화해야겠다고 결심한다.(P53)

 

하지만 피타는 계속해서 캣니스를 도와주고, 심지어는 사랑까지 배푼다.

또한 피타는 자신히 단순히 헝거게임에서 살기 위해 버둥치는 남과 똑같은 존재가 되기를 거부한다.

헝거게임 전 날 피터는 캣니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니, 때가 되면,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죽일 거라는 걸 의심하지는 않아. 싸우지 않고 죽어 버리리지는 않을 거야. 그저 내가 계속 바라고 있는 것은....... 캣피톨이 나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줄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뿐이다. 나는 그저 헝거에임의 작은 한 부분이 아니고, 그 이상의 존재라는 것을.(P148)

 

현실이 버겁고, 살아남아 엄마와 동생을 돌보는 것이 전부인 캣니스에게 이런 것들은 모두 허상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넌 그냥 한 부분이잖아. 우리 모두 마찬가지지. 헝거 게임은 그렇게 굴러가는 거잖아.

 

 

헝거게임이 시작되고, 잔혹한 게임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죽여간다.

우승을 위해 헝거게임에 자원한 프로들은 한 패가 되어서 약한 자들은 사냥한다.

그리고 그 속에 피타도 들어가 있다.

캣니스는 처음에는 피타가 자신을 죽이기 위해 그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피타는 캣니스를 구하고, 심각한 부상을 입는다.

피타의 부상은 점점 더 심해지고, 먹을 것은 떨어지고, 진행자들은 조작으로 추위와 더위의 극단적인 환경이 만들어진다.

이런 환경에서 캣니스와 피타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후원자들로 인해 식량과 약품을 지원받는 것이다.

헝거게임은 모든 과정이 생중계되고 있고, 사람들은 그 게임에 배팅을 하며, 후원자들은 각자가 후원하는 사람에게 거금을 내고 약품이나 식량을 지원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후원자들과 시청자들이 원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고 시청자들이 캣니스와 피타에게서 원하는 모습은 로맨스이다.

결국 캣니스는 피타를 살리기 위해 그에게 키스를 하며 연인과 같은 모습을 보인다.

그러다가 캣니스는 자신의 마음과 사랑이 진짜인지 보여주기 위한 것인지 스스로 알지 못하게 된다.

 

이 부분을 보며 마치 요즘 유행하고 있는 가상 결혼 프로그램을 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런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연예인들 역시 대중이 원하는 모습으로 거짓으로 연애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 역시 어떤 것이 자신의 모습인지 헛갈려 하고 있을 것이다.

단지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모든 개인은 살아남기 위해 결국 타인이 원하는 모습대로 연기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는 사이에 자신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잃어가고 있을지도....

 

1편에서 결국 캣니스와 피터는 공동우승을 한다.

그러나 그 우승 역시 캐피톨이 만든 헝거게임이라는 잔혹한 현실 속의 한 부분밖에 되지 못한다.

 

 

이 책을 읽으며 우리가 사는 사회 역시 하나의 헝거게임이라는 생각이 든다.

화살이니 칼로 상대를 죽이는 게임은 아니지만......

어쩌면 더 잔혹한 방법으로 내가 살아남기 위해 상대방을 죽여야 하는......

그리고 그 게임의 승자나 패자 모두 사회가 만든 잔혹한 게임 속에서 하나의 부속품으로 사라져 가고 있다는 생각이든다.

그 속에서 캣니스와 피터처럼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찾기 위해 몸부림치는 처절함이 필요할 것이다.

과연 우리 청소년들에게 이런 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미국보다도 더 잔혹한 헝거게임 속에 빠져 있는 그들에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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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메시스 - 복수의 여신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4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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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융이라는 심리학자는 우리 인격이 '페르소나'와 '섀도우'로 나누어진다고 말했다.

페르소나란 외적으로 보여지는 '나'이다.

자신의 사회적인 지위나 사람과의 관계에 걸맞게 보여지도록 만들어진 '나'이다.

섀도우란 페르소나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페르소나 속에 숨겨져 있는 인간의 어두운 자아를 의미한다.

융은 사람들은 누구나 페르소나 속에 어두운 섀도우적인 자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문제는 이 페르소나와 섀도우가 너무나 커다란 격차를 보일 때이다.

이 경우 한 인격 안에 서로 다른 자아를 격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고 말한다.

 

요네스뵈가 창조한 해리 홀레라는 형사를 접하면서 오랜 전에 읽어 이제는 정확한 개념도 떠오르지 않는 융의 페르소나와 섀도우가 생각이 났다.

2미터의 장신에 비교적 미남이며, 경찰에서도 뛰어난 수사관으로 인정받은 해리 홀레 반장, 이제 라켈이라는 아름다운 여성과 행복한 가정까지 가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자신 안에 존재하는 어둠에 끌려 다닌다.

알콜중독에 시달리며, 옛 애인을 만나고, 범죄자와 손을 잡고 다른 범죄자를 쫓는다.

안타깝게도 해리홀레 시리즈는 이 책이 처음이다.

그래서 해리 안에 있는 그 어둠의 실체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아직 감을 잡지 못하고 있다.

 

원래 형사 시리즈물을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어떤 시리즈물을 읽을 때는 1권부터 정독하는 어설픈 완벽주의적 기질을 가지고 있어서 섯불리 형사 시리즈물에 손을 대지 않는다.

그러나 디자인에 끌려서 해리홀레 시리즈 중 몇 권을 구입하고 말았다.

(개인적으로 아직도 책을 구입할 때 고려 조건에 디자인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거이 일 년 가까이 해리 홀레 시리즈 몇 권을 묵혀 두었다가 연말에 드디어 책장을 열게 되었다.

 

 

이 책은 두 가지 사건을 동시에 다루고 있다.

하나는 오슬로에서 일어난 은행강도 사건이다.

은행강도는 거이 완벽에 가까운 범죄를 저지른다.

다만 '스티네'라는 점원을 망설힘 없이 총으로 쏴서 죽이고 간다.

이유는 지점장이 25초 안에 돈을 꺼내지 않았다는 이유뿐이었다.

 

이 사건을 해결하던 홀래는 우연히 오래 전 애인이었던 '안나'라는 여성을 만난다.

그녀의 집까지 찾아간 그는 그녀의 방 안에서 '네메시스'라는 복수의 여신의 이름을 가진 세 명의 이미지가 그려진 작품을 보게 된다.

어느 날 저녁 홀래는 안나의 집에 초대받는다.

그 다음날 아침 지독한 숙취에서 깨어난 그는 전 날 저녁의 기억이 없다.

그리고 곧 안나는 오른 손에 총을 들고 자살한 시체로 발견된다.

그녀가 왼손잡이라는 것은 그만이 알고 있지만 그는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숨기고 범인을 쫓는다.

 

이 과정에서 '라스콜'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전설적인 은행강도이지만 스스로 경찰에 잡혀서 형무소에서 복역 중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가 지금도 형무소 안에서 모든 은행강도를 설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죽은 안나의 작은 아버지이다.

홀래는 라스콜에게 은행강도가 누구인지 알려 주는 조건으로 안나의 진짜 살인범을 잡아 주겠다는 제안을 한다.

 

하지만 이미 안나의 집에 갔을 때 해리 안에 있는 어두운 자아는 자극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라스콜이라는 인물을 만나면서 그는 점점 그 어두운 자아에 끌려 무리한 수사를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완벽한 덧에 걸리게 된다.

 

 

 

네메시스라는 책은 홀래 시리즈의 첫 권도 아니고, 흔히 이야기하는 오슬로 시리즈 3권 중에 가운데에 해당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해리 홀레 시리즈의 처음을 단지 표지와 제목에 이끌려 네메시스라는 작품으로 시작했으니 당연히 앞의 내용을 모르는 상태이다.

또한 6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으로 인해 내용의 전체를 한 눈에 보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이 책을 다 읽고 난 느낌은 마치 격력한 격투기 경기를 본 느낌이었다.

초반 탐색전은 조금 지루한 느낌이 들었다.

단지 지루함이 생길 정도가 되면 몇 번의 펀치를 주고 받으며 몇 라운드를 넘겼다.

그러나 책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격렬한 난타전이 이어진다.

보통 훌륭한 스릴러는 마지막에 멋진 반전이 한 번 나타난다.

그 훌륭한 반전을 만들기 위해 갑작스러운 비약이 사용되기도 한다.

이 책은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몇 번의 반전이 연속해서 나타난다.

그런데 그 반전들이 모두 앞에서 언급한 암시들을 바탕으로 완벽한 조합을 이룬다.

스릴러로서는 거이 완벽에 가까운 플롯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다만 그 플롯이 너무나 방대하고, 정교해서 나같이 처음 홀래 시리즈를 접하는 사람에게 조금 어리둥절하다.

이 책을 다 읽은 후 서둘러 해리홀레 시리즈의 첫 권인 [박쥐]를 구입했다.

처음부터 해리홀레를 읽어가며 해리 홀레 라는 인물을 탐구해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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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인간
캐롤 K. 트루먼 지음, 신소영 옮김 / 레디셋고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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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었을 때 군대 훈련소 시절과 이등병 시절에 두드러기 증상으로 많이 고생을 한 적이 있었다.

갑자기 몸에 열이 오르고, 온 몸이 따끔거리는 증상이었다.

다행히 그 시절 이후 같은 증상으로 고생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올 봄에 다시 이런 증상이 찾아왔다.

운동을 하거나, 긴장을 하면 어김없이 같은 증상이 찾아왔다.

병원에 가니 '콜린성 두드러기'라라며 항히스타민이라는 약제를 처방했지만 거이 효과가 없었다.

이로인해 올 한 해 무척 고생을 했다.

다행히 얼마전부터는 증상이 호전되고 있다.

인터넷에 검색하보니 콜린성 두드러기가 생기는 원인이나 치료법은 여전히 불투명하다고 한다.

그래서 곰곰히 군대시절과 올 해의 상황을 비교를 해 보니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두 시기 모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시기였다는 것이다.

전부는 아니겠지만 스트레스가 육체의 질병에 커다란 영향이 있음을 깨닫는다.

그 후로 스트레스를 다스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이 책은 우리 내부의 감정에 대해서 다루는 책이다.

저자는 많은 사람들이 감정의 부분을 소홀히 다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불쾌한 감정이나 상처받은 감정도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거나 사라질 것으로 생각하고 참고 인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우리 안의 감정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비록 감정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우리 내부에 숨어서 우리의 건강과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저자는 감정을 원인으로, 그리고 질병을 현상으로 본다.

결국 저자는 감정을 잘 다스림을 통해 육체적 질병이 치료되고, 삶의 질도 변화된다고 본다.

 

저자는 우리의 감정도 하나의 에너지로 본다.

이 책에서는 그 증거로 죽음을 앞 둔 두 명의 감정을 주파수로 측정한 결과를 제시하고 있다.

한 명은 신앙을 가진 한 여성으로 그녀는 죽음 앞에서 감사의 기도를 했다.

그리고 그녀가 죽어갈 때 그 근처에는 +500의 강한 주파수가 흘렀다.

반대로 사망직적은 성병환자와 간호사의 부정적인 대화를 측정했을 때는 -500의 강한 주파수가 흘렀다.

결국 인간의 감정은 에너지형태로도 측정될 수 있으며, 그것은 사라지지 않고 인간의 내부에 심겨진다.

저자는 우리의 감정이 세포와 DNA에 새겨지고 그로 인해 우리의 육체와 삶의 방향을 결정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런 감정들은 떠나지 않았다. 우리가 산 채로 붇어버렸다고 해서 그것은 죽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런 감정들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한, 해결되지 않은 '갈등의 원천'으로 남게 된다. 잠재의식 속에서 그것들은 잊히지 않았거나 앞으로도 잊히지 않을 것이다. 오래전부터 계속 이어져 온 감정들은 우리 몸의 세포에 지속적으로 새겨졌거나 새겨지고 있다. 그것들은 생각의 패턴, 신념, 태도 등을 통치할 뿐 아니라 우리의 감정적인 반응과 삶의 경험까지도 결정한다.(P23)

 

저자는 부정적인 감정이 어떻게 육체와 삶의 영향을 미치는지를 샤론이라는 여성의 이야기를 통해 들려준다.

그녀의 가정은 경제적으로 매우 복잡한 소송에 얽혀 있었고, 스스로 법적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극도의 분노를 퍼부었고, 얼마 후부터 하열 증상이 생겼다.

결국 그녀는 암과 종양이 생겼고,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리고 그 암과 종양을 만들어 낸 것이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임을 깨달았다.

 

 

저자는 이런 부정적인 감정이 어머니의 모태에서부터 형성된다고 말한다.

그러기에 어머니의 태교가 중요하며, 특히 출산의 시점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잉태과정이나 출산과정에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거나 거절의 경험을 당한 아이는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게 되고, 그 감정은 계속해서 그 아이의 내부에 남아서 그 아이의 삶의 결정하게 된다고 말한다.

물론 이런 감정은 성장기와 성인기에도 계속 형성된다.

 

그렇다면 이런 부정적인 감정은 영원히 바꿀 수 없는 것일까?

저자는 이런 부정적인 감정을 바꾸기 위한 방법을 제시한다.

저자가 제시하는 방법은 '감정노트'를 쓰는 것이다.

자신의 불쾌한 감정을 느꼈을 때 그것을 외면하지 말고, 그 당시의 감정을 솔직하게 직면하라고 말한다.

자신이 느꼈던 불쾌한 감정, 그리고 그 감정이 생기게 된 원인을 발견하라고 말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그동안 자신의 감정을 억눌르고 있던 부정적인 생각들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의 감정을 발견했다면, 이제 그 감정을 선한 방향으로 다스리라고 말한다.

저자는 우리 안의 부정적인 감정들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지 말고 내부에서 찾으라고 말한다.

우리는 흔히 자신이 화가 나거나 마음이 상하면 그렇게 만든 상대방, 즉 가족이나 직장 상사 등에게서 원인을 찾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저자는 결국 자신의 감정이 생긴 것은 자신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면, 가장 해를 입는 사람도 자신이라로 말한다.

따라서 저자는 자신의 감정의 정체를 알고, 그 감정을 선한 방향으로 다스리라고 말한다.

저자는 말하는 선한 방향은 미움과 불평의 원망의 감정 대신 감사와 사랑의 감정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내부에서는 충분히 그것을 바꿀 힘이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의 뒷 부분에는 온갖 질병들을 목록을 나열하고, 그 질병들이 어떤 감정과 연관이 있는지를 적어 놓고 있다.

물론 조금 신비적(?)인 측면이 있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감정과 육체의 질병의 연관성을 제시하는 부분은 매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참고로 앞에서 언급한 개인적인 질병인 '피부병'의 원인이 되는 감정을 이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1) 해소되지 않는 짜증과 비판적인 의견

2) 사소한 것에 쓰이는 신경

3) 안정감 결여

4) 조급함, 지루함, 불안정함

 

맞는 부분도 있고, 맞지 않는 부분도 있는 것 같다.

자신의 감정과 질병과의 문제는 개인이 읽고 판단해야 할 몫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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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여자 2015-12-24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싶어지는 책이네요
 
롱 워크 밀리언셀러 클럽 143
스티븐 킹 지음, 송경아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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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미래소설이나 환타지소설들의 특징은 작가가 만든 독특한 세계관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수잔 콜린스의 [헝거게임]의 경우는 핵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에 판엠이라는 독재국가가 건설된다. 그리고 그 중심부에는 캐피톨이라는 도시가 있고, 주변에는 12개의 구역이 있다. 조지 마틴의 [얼음과 불의 노래]에는 더 정교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두 개의 커다란 대륙의 역사와 7개의 가문의 대결 등이 마치 실제처럼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다.

 

이에 비하면 스티븐 킹이 '리처드 바크만'이라는 가명으로 10대에 쓴 [롱워크]라는 소설에는 독특한 세계관이 없다. 소설의 배경은 '통령'이라 부르는 독재자가 미국을 지배하고 있고, 그가 100명의 소년을 뽑아 '롱워크'라는 대회를 개최한다는 것이 전부이다. 미국이 어떻게 독재국가가 되었는지, 심지어 그 독재국가가 미국만 지배하고 있는지 등에 대한 여부는 이 소설에 나와 있지 않다. 그 외에는 전부 이 소설이 쓰여진 당시 미국사회의 배경과 전부 똑같다.

 

그런데 이런 너무나도 현실과 같은 배경이 이 소설의 몰입감을 더 하게 해 준다. 이 소설은 100여명의 청소년이 롱워크에 참가해서 죽어가는 것이 올림픽경기나 월드컵경기처럼 당연한 것처럼 묘사한다. 참가자나 구경꾼들도 이 경기에 대한 반발감이 없다. 오히려 그들은 모두 자원자이다. 이런 배경을 통해 이 책은 우리가 현실에서 맞딱뜨리는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도저히 10대의 작가가 섰다고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깊이로 삶의 깊숙한 부분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 소설은 '개러티'를 비롯한 100명의 소년들이 참여한 '롱워크'라는 경기의 시작부터 끝까지의 이야기이다. '롱워크'의 규칙은 간단하다. 자원하는 청소년 100명을 뽑아 롱워크라는 경기에 참여하게 한다. 참가자들은 일정한 기간까지 경기참여를 취소 할 수 있게 한다. (물론 취소를 할 때 스퀴드라는 수용소 비슷한 곳으로 끌려 가는 불이익이 있기도 한 것 같다.) 그러나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취소는 불가능하고 강제적으로 롱워크에 참여해야 한다. 롱워크 경기에 참여하면 참가자들은 일정한 속도 이상으로 한 명이 남을 때까지 걸어야 한다. 일정한 속도 이하로 걷거나, 주저 앉거나, 정해진 길을 벗어나면 3번의 경고가 주어지고, 4번째에는 그 자리에서 총살을 한다. 경기는 마지막 한 명이 남을 때까지 계속하고, 승자에게는 모든 소원을 들어 주게 된다.

 

소설은 개러티라는 소년이 엄마와 함께 차를 타고 롱워크 경기장에 진입하면서 시작한다. 엄마는 개러티에 지금이라도 경기를 포기하라고 말하지만, 게러티는 이미 시간이 지났다면 담담히 경기에 참여한다. 게러티는 그곳에서 맥브라이스나 베이커와 같은 사람들과 만나고 함께 걷기를 시작한다.

 

처음 롱워크의 시작은 마라톤이나 크로스컨트리경기 처럼 여유롭다. 참가자들은 서로 잡담을 하고 주변에서는 사람들은 환호한다, 특히 자신의 고향지역을 걷고 있는 개러티는 '메인주의 아들'이라는 피켓들로 환호를 받기도한다. 특히 여자아이들은 더 기대감으로 소년들을 바라본다. 모든 것이 마치 축제같다. 그러나 경기는 금새 본색을 드러낸다. 제일 먼저 컬리라는 소년이 다리에 쥐가 나면서 어이없게 총에 마져 죽는다. 그는 죽기 전에 "이건 공정하지 않다. 절대로 공정하지 않아!"라고 소리 지르며 죽어간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저크라는 소년은 철길에 넘어져 다리에 피를 흘리다가 주저 앉고 총살당한다.

 

이렇게 죽음과 걷기가 반복되면서 소년들 사이의 농담과 성적인 대화들은 사라지고, 점차 죽음이나 죽음 이후의 세계, 신의 존재 등과 같은 철학적인 대화로 변해간다. 멀리 있다고만 생각하던 죽음이 바로 자신들의 삶의 목적지라는 것을 소년들은 점점 깨닫게 된다. 그리고 죽음을 의식하면서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은 여전히 경고 세 개를 받은 채 걷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생각했던 것만큼 무섭지는 않았따. 이 유기체 레이 개러티는 죽을 수 없다는 맹목적인 확신은 여전히 흔들리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죽을 수 있었다. 그들은 그의 인생의 엑스트라들이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상영되는 히트 영화 '레이 개러티 이야기'의 주인공인 레이 게러티는 아니다. 그는 결국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지성적으로뿐만 아니라 감정적으로 결국 이해하게 될 것이다.(P232)

 

"이 모든 것이 그렇게 무시무시한 이유는 그저 사소하기 때문이야. 알겠어? 우리는 사소한 것에 우리를 팔고 우리 영혼을 거래햇어.(P300)"

 

"그게 어둡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게 내가 바라는 전부야. 만약...... 만약 내세가 있다면, 내가 누군지 거기서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심지어 내가 다른 것을 가진 적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어둠 속에서 영원히 헤매는 건 정말 싫어.(P386)"

 

 

 

이런 잔혹한 경기 속에서도 개러티는 맥브라이스나 베이커와 같은 친구들과 도우며, 서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그들은 서로에게 왜 이 경기에 참여했는지를 묻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한다. 그들 대부분은 젊은 패기로 경기에 참여했을 뿐, 진정한 목적은 없다. 예외가 있다면 스크램이란 소년뿐이다. 그는 어린 나이에 학교를 중퇴하고 캐시라는 여성과 동거한다. 캐시는 임신했고 스크램은 자신의 아들을 훌륭히 키우기 위해 이 경기에 참여한다. 그는 자신이 우승할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도중에 패렴이 걸리고, 결국은 죽게 된다.

 

참가자들은 서로를 경쟁자로 여긴다. 바코비치의 경우 상대에게 도발하여 상대가 규칙을 어기고 죽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경기가 계속될 수록 그들 안에는 묘한 연대감이 형성된다. 그리고 스크램의 죽음이 확실시 되자 모두들 우승하는 사람이 스크램 대신 캐시를 돌봐주기로 약속을 하기도 한다.

 

 

 

소설은 최종 우승자 한 명이 남을 때까지 계속된다. 그러나 이 소설은 승리나 생존의 기쁨을 향해서 가고 있지는 않다. 소설은 시종일관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한 명만 살아남는다는 것은 결국 나머지는 모두 죽는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경기가 계속될수록 죽음은 일상이 되고, 삶의 아득한 소망이 되어간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마치 내가 계속 죽음을 향해 걸어야 하는 '롱워크'의 참가자가 된듯한 느낌을 받았다. 멈출 수도 없고, 다른 길도 없다. 계속 걷고 걸음이 멈추면서 죽어간다. 이 소설을 다 읽고 났을 때 비로서 죽음의 경기에서 빠져나온듯한 느낌이었다. 살아있음이 무엇인지를 느끼게 하는 소설이었다. 어쩌면 작가가 의도한 것이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일상에 너무 빠져서 삶을 당연히 여기거나, 그 삶이 계속될 것 같은 우리들의 허상을 깨는 것이...... 그래서 살아있음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하는 것이 작가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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