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 워크 밀리언셀러 클럽 143
스티븐 킹 지음, 송경아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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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미래소설이나 환타지소설들의 특징은 작가가 만든 독특한 세계관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수잔 콜린스의 [헝거게임]의 경우는 핵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에 판엠이라는 독재국가가 건설된다. 그리고 그 중심부에는 캐피톨이라는 도시가 있고, 주변에는 12개의 구역이 있다. 조지 마틴의 [얼음과 불의 노래]에는 더 정교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두 개의 커다란 대륙의 역사와 7개의 가문의 대결 등이 마치 실제처럼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다.

 

이에 비하면 스티븐 킹이 '리처드 바크만'이라는 가명으로 10대에 쓴 [롱워크]라는 소설에는 독특한 세계관이 없다. 소설의 배경은 '통령'이라 부르는 독재자가 미국을 지배하고 있고, 그가 100명의 소년을 뽑아 '롱워크'라는 대회를 개최한다는 것이 전부이다. 미국이 어떻게 독재국가가 되었는지, 심지어 그 독재국가가 미국만 지배하고 있는지 등에 대한 여부는 이 소설에 나와 있지 않다. 그 외에는 전부 이 소설이 쓰여진 당시 미국사회의 배경과 전부 똑같다.

 

그런데 이런 너무나도 현실과 같은 배경이 이 소설의 몰입감을 더 하게 해 준다. 이 소설은 100여명의 청소년이 롱워크에 참가해서 죽어가는 것이 올림픽경기나 월드컵경기처럼 당연한 것처럼 묘사한다. 참가자나 구경꾼들도 이 경기에 대한 반발감이 없다. 오히려 그들은 모두 자원자이다. 이런 배경을 통해 이 책은 우리가 현실에서 맞딱뜨리는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도저히 10대의 작가가 섰다고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깊이로 삶의 깊숙한 부분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 소설은 '개러티'를 비롯한 100명의 소년들이 참여한 '롱워크'라는 경기의 시작부터 끝까지의 이야기이다. '롱워크'의 규칙은 간단하다. 자원하는 청소년 100명을 뽑아 롱워크라는 경기에 참여하게 한다. 참가자들은 일정한 기간까지 경기참여를 취소 할 수 있게 한다. (물론 취소를 할 때 스퀴드라는 수용소 비슷한 곳으로 끌려 가는 불이익이 있기도 한 것 같다.) 그러나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취소는 불가능하고 강제적으로 롱워크에 참여해야 한다. 롱워크 경기에 참여하면 참가자들은 일정한 속도 이상으로 한 명이 남을 때까지 걸어야 한다. 일정한 속도 이하로 걷거나, 주저 앉거나, 정해진 길을 벗어나면 3번의 경고가 주어지고, 4번째에는 그 자리에서 총살을 한다. 경기는 마지막 한 명이 남을 때까지 계속하고, 승자에게는 모든 소원을 들어 주게 된다.

 

소설은 개러티라는 소년이 엄마와 함께 차를 타고 롱워크 경기장에 진입하면서 시작한다. 엄마는 개러티에 지금이라도 경기를 포기하라고 말하지만, 게러티는 이미 시간이 지났다면 담담히 경기에 참여한다. 게러티는 그곳에서 맥브라이스나 베이커와 같은 사람들과 만나고 함께 걷기를 시작한다.

 

처음 롱워크의 시작은 마라톤이나 크로스컨트리경기 처럼 여유롭다. 참가자들은 서로 잡담을 하고 주변에서는 사람들은 환호한다, 특히 자신의 고향지역을 걷고 있는 개러티는 '메인주의 아들'이라는 피켓들로 환호를 받기도한다. 특히 여자아이들은 더 기대감으로 소년들을 바라본다. 모든 것이 마치 축제같다. 그러나 경기는 금새 본색을 드러낸다. 제일 먼저 컬리라는 소년이 다리에 쥐가 나면서 어이없게 총에 마져 죽는다. 그는 죽기 전에 "이건 공정하지 않다. 절대로 공정하지 않아!"라고 소리 지르며 죽어간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저크라는 소년은 철길에 넘어져 다리에 피를 흘리다가 주저 앉고 총살당한다.

 

이렇게 죽음과 걷기가 반복되면서 소년들 사이의 농담과 성적인 대화들은 사라지고, 점차 죽음이나 죽음 이후의 세계, 신의 존재 등과 같은 철학적인 대화로 변해간다. 멀리 있다고만 생각하던 죽음이 바로 자신들의 삶의 목적지라는 것을 소년들은 점점 깨닫게 된다. 그리고 죽음을 의식하면서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은 여전히 경고 세 개를 받은 채 걷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생각했던 것만큼 무섭지는 않았따. 이 유기체 레이 개러티는 죽을 수 없다는 맹목적인 확신은 여전히 흔들리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죽을 수 있었다. 그들은 그의 인생의 엑스트라들이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상영되는 히트 영화 '레이 개러티 이야기'의 주인공인 레이 게러티는 아니다. 그는 결국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지성적으로뿐만 아니라 감정적으로 결국 이해하게 될 것이다.(P232)

 

"이 모든 것이 그렇게 무시무시한 이유는 그저 사소하기 때문이야. 알겠어? 우리는 사소한 것에 우리를 팔고 우리 영혼을 거래햇어.(P300)"

 

"그게 어둡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게 내가 바라는 전부야. 만약...... 만약 내세가 있다면, 내가 누군지 거기서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심지어 내가 다른 것을 가진 적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어둠 속에서 영원히 헤매는 건 정말 싫어.(P386)"

 

 

 

이런 잔혹한 경기 속에서도 개러티는 맥브라이스나 베이커와 같은 친구들과 도우며, 서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그들은 서로에게 왜 이 경기에 참여했는지를 묻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한다. 그들 대부분은 젊은 패기로 경기에 참여했을 뿐, 진정한 목적은 없다. 예외가 있다면 스크램이란 소년뿐이다. 그는 어린 나이에 학교를 중퇴하고 캐시라는 여성과 동거한다. 캐시는 임신했고 스크램은 자신의 아들을 훌륭히 키우기 위해 이 경기에 참여한다. 그는 자신이 우승할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도중에 패렴이 걸리고, 결국은 죽게 된다.

 

참가자들은 서로를 경쟁자로 여긴다. 바코비치의 경우 상대에게 도발하여 상대가 규칙을 어기고 죽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경기가 계속될 수록 그들 안에는 묘한 연대감이 형성된다. 그리고 스크램의 죽음이 확실시 되자 모두들 우승하는 사람이 스크램 대신 캐시를 돌봐주기로 약속을 하기도 한다.

 

 

 

소설은 최종 우승자 한 명이 남을 때까지 계속된다. 그러나 이 소설은 승리나 생존의 기쁨을 향해서 가고 있지는 않다. 소설은 시종일관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한 명만 살아남는다는 것은 결국 나머지는 모두 죽는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경기가 계속될수록 죽음은 일상이 되고, 삶의 아득한 소망이 되어간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마치 내가 계속 죽음을 향해 걸어야 하는 '롱워크'의 참가자가 된듯한 느낌을 받았다. 멈출 수도 없고, 다른 길도 없다. 계속 걷고 걸음이 멈추면서 죽어간다. 이 소설을 다 읽고 났을 때 비로서 죽음의 경기에서 빠져나온듯한 느낌이었다. 살아있음이 무엇인지를 느끼게 하는 소설이었다. 어쩌면 작가가 의도한 것이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일상에 너무 빠져서 삶을 당연히 여기거나, 그 삶이 계속될 것 같은 우리들의 허상을 깨는 것이...... 그래서 살아있음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하는 것이 작가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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