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타기리 주류점의 부업일지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8
도쿠나가 케이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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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동물의 왕국과 같은 다큐멘터리를 보면 가끔은 상처 입은 맹수가 나온다. 다른 짐승을 사냥하며 자신의 배를 채우던 사자가 어느 날 우연한 사고로 다리를 다친다. 그로인해 무리에서 떨어져 나오고 사냥을 하지 못해 힘을 잃어간다. 그럼에도 살기 위해 다리를 절뚝거리며 걸어간다. 그럼 어김없이 그 뒤에 늑대나 하이에나 같은 무리들이 사자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뒤를 따라온다. 사자가 조금이라도 상처입은 기색이나 지친 기색을 보이면 어김없이 뒤에서 달려든다. 그러기에 사자는 절뚝거리면서도 뒤를 돌아보며 아무렇지 않은듯 포효한다. 그러다가 다시금 주저않으면 기회를 누리던 사냥꾼들은 다시금 달려든다. 그러기를 몇 번 반복한 후 결국 사자는 늑대나 하이에나 무리에게 잡혀 먹는다.


어쩌면 우리 인간의 모습도 상처입은 사자와 같을지도 모르겠다. 세상을 살면서 이런 저런 이유에 마음 깊은 곳까지 찢기고 상처를 입었지만, 그 상처를 보여주는 순간 사람들은 그 약점을 물고 늘어지기 위해 달려든다. 그러기에 상처를 입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간다. 오히려 자신의 상처를 보고 달려드는 사람들을 향해 '나 아무렇지도 않다!' '나 아직 건장하다!'라는 메세지를 던져주기 위해 더 날카롭게 소리친다.



이 소설을 처음 접했을 땐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다. 책 제목이 말하듯이 가볍고 재미있는 소설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작가 역시 [이중생활 소녀와 생활밀착형 스파이의 은밀한 업무일지]란 소설로 데뷔한 전직 만화가 출신의 일본 작가이다. 이 소설 역시 만화적 상상력으로 풍부한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배달한다는 '가타기리 주유점'이란 이미지를 처음 접할 때, 무언가 판타지적 요소를 기대했다. 사랑이나 미움같은 추상적인 요소를 배달한다거나, 시공간을 뛰어넘어 필요한 것을 배달하는 그런 것을 기대했었다.


그러나 소설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아주 오래된 낡은 주류점, 그리고 그 주류점을 어쩔 수 없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가타기리, 주류점의 오랜 직원이자 짱아치 매니아인 후사에, 마작으로 돈을 다 날려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러 왔던 후사에의 짱아치에 중독된 마루카와... 이것이 소설의 배경와 인물 전부이다.


가타기리 주류점은 술만 팔아서는 유지할 수 없는 작은 상점이기에 아버지 대에서부터 배달을 해 왔다. 가게의 모토는 '무엇이든 배달합니다!'이다. 항상 검은 양복을 입고 저혈압으로 인해 아침부터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는 주인공 기타기리는 이 모토에 충실히 배달을 하려 한다. 그래서 위협을 무릅쓰고 아이돌에게 선물을 배달을 하기도 하고, 조폭같은 아버지의 위협에도 아이의 어머니를 찾아 아이의 의뢰품을 배달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배달을 의뢰하는 사람이나 배달을 받는 사람들은 대부분 상처입은 사람들이다. 화려해 보이는 아이돌의 가면 속에서 어머니의 임종을 앞두고 괴로워 하는 소녀, 불륜으로 이혼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신혼기념품을 바다에 뭍으려는 남성, 회사에서 궁지에 몰려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중년여성, 모든 기억을 잃은 엄마, 자신을 돌보아 준 아버지를 불구로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빠진 소녀... 이들에게 의뢰품을 배달하면서 가타기리 안에 숨겨져 있던 상처들이 들추어진다.


청색 유리잔 너머로 풀현듯 낮에 봤던 바다 빛이 되살아났다. 바닥이 없을 것 같던 깊고 깊은 감청색 바다. 그때 친절한 남자가 제지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치자 한기가 들었다. 만물의 소음을 남김없이 삼키는 세찬 바닷바람은 때때로 정상적인 사고까지 휘감아 데려가는 것이까. 마음을 흘리는 감청색 바다 앞에 섰던 순간 그는 분명 저쪽으로 가고 싶은 충동에 쉽싸여 있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저 맑은 바다 너머를 한 번 보고 싶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내가 이렇게 술잔을 비우는 사이에도 이 세상 어디서가, 누군가는 절벽에서 몸을 던지겠지. 저마다의 무거운 이유를 등에 지고 절벽 끝에서 바다를 내려다볼 남자들과 여자들. 거기까지 와야 했을 그네들의 심정은 알길이 없지만, 어쩌면 눈 밑에서 일렁거리는 아름다운 빛깔에 홀려 몸을 던지는 사람이 있을지 누구 알랴 (P208)


천천히 고개를 들자 거울 속에 창백한 얼굴이 있었다. 축축한 머리가 한 움큼 관자놀이에 달라붙어 있다. 침을 삼키자 목울대가 커다랗게 출렁였다. 초췌한 그 얼굴 너머에 가타기리는 마침내 이물감의 정체를 깨닫는다. 그것은 지극히 미세한 틈새로 흘러나온 죄의 기억이었다. 우물 속처럼 깊이 가라앉아 있던, 결코 지울 수 없는 죄의 기원. 기타리기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때였나? 낮에 그 절벽 끝에 섰을 때? 거기서 나도 모르게 뚜껑이 열었을까? 아니, 아니다. 기억의 뚜껑은 이미 오래전부터 헐거워졌 있었다. 그리고 그 기묘한 의뢰를 계기로 열렸던 것이리라, 그 의뢰인을 대신해 누군가에게 '악의'를 배달한 날, 그날부터 뚜껑은 밀려나기 시작했고 오늘은 끝내 꿈이 되어 밖으로 흘러넘친 것이리라. (P217)


소설은 기타기리의 배달로 파국을 맞던 인생이 갑자기 좋아지거나, 자살을 하려던 소녀가 갑자기 소망을 찾는다는 극적인 반전은 없다. 기타리기 역시 배달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극적으로 회복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런 배달을 통해 그들은 자신 안에 감추어 두었던 상처를 서로에게 보여 준다. 나의 상처를 이용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잠시 접어 둔채... 그리고 자신의 상황에서 줄 수 있는 조금의 위로를 서로에게 던질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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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6-02-22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물의 세계나 인간의 세계나 상처 입은 자들이 온전히 자신을 유지하고 살 수 있는 곳이 찾아보기가 힘들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가을벚꽃 2016-03-05 11:29   좋아요 0 | URL
그러기에 더욱 더 상처입고 약한 사람에 대한 보살핌이 절실하다고 느껴지네요. 이 책처럼 작은 위로라도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가끔 책을 읽는 사람들끼리 만나는 자리에서 좋아하는 한국작가가 누구냐고 물으면 은희경 작가를 이야기 한다. 그럼 대답은 두 가지로 돌아온다. 나 역시 은희경 작가를 좋아한다. 반대로 나는 그 작가를 싫어한다. 그리고 왜 이 작가가를 좋아하느냐는 질문들이 이어진다. 그럼 무어라고 말하기가 참 힘들다. 은희경 작가를 좋아하는 이유는 내 내면적인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은희경 작가의 책들을 읽다보면 어린 시절 우리집 강아지가 생각난다. '예삐'라고 부르는 이 강아지는 주인인 우리 식구들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참 잘 따랐다. 어느날 예삐가 대문 밖을 나가서 놀다가 지나가던 차에 치혀 다리가 크게 다쳐서 돌아왔다. 피뭍은 다리를 쩔뚝거리고 돌아온 강아지는 마루 밑으로 들어가 나오지를 않았다. 상처를 보기 위해 아무리 손을 내밀어도 으르렁 소리를 내면 우리의 손을 물고는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가끔 세상을 살다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상처를 입게 되면 어린시절의 예삐를 떠올려 본다. 나도 상처를 입었구나! 그래서 나에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들의 손을 무는 구나! 그리고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려 하는구나! 은희경 작가의 소설 주인공들에게서 나는 이렇게 상처입은 인간의 연약함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들을 향한 한없는 연민을 느끼게 된다.

 

 

은희경 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98년도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통해서였다. 시 나는 한국소설을 좋아했고,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을 매 년 구입해서 읽고 있었다. 이전의 대부분의 수상작들을 읽으면서 납득이 갔다. 아! 이래서 수상을 했구나!' 그런데 은희경 작가의 [아내의 상자]라는 작품을 읽으면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이 작품은 뭐지?'라는 생각이 났다. 읽으면서 무언가 알 수 없는 화도 났다. '왜 아내는 스스로를 파괴하고, 남편에게 상처를 주고, 가정을 파괴했을까?'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작품의 글과 이미지가 계속해서 마음에 남아 있었다. 특히 그녀가 병든 이웃집 개에 대해서 남편에게 했던 이야기의 문장들이 기억이 났다.  

 

"그게 아니구요, 나 같은 사람은 선택 이론에 의해서 도태되게 되어 있어요, 책에서 본 적이 있어요, 우성만 유전되고 열성음 도태되는 게 진화잖아요. -중략- 옆집 개 말이예요, 그 더러운 개새끼는 곧 굶어죽을 거예요. 죽는 날까지 토실토실한 개한테 가까이 달라붙겠죠. 뻔뻔스럽게도 그 개가 크는 것까지 가로막으면서 말이죠. 빨리 죽어 주면 좀 좋아. 개들은 왜 자살 같은 걸 안 하나 몰라." - [아내의 상자] 중에서 -

 

 당시에는 내가 도저히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왜 그렇게 삶에 대해서 비관적이었을까? 왜 그렇게 자신에 대해 냉소적이었을까?

 

 

그 후 같은 해에 출간된 은희경 작가의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소설에는 사랑에 대해 지극히 냉소적인 '강진희'라는 여성이 등장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사랑에 대한 냉소를 이야기 한다.  

 

"셋은 좋은 숫자이다. 오직 하나뿐이라는 것? 이 어리석은 은유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당연히 비극이 예정되어 있다. 둘이라는 숫자는 불안하다. 일단 둘 중 하나를 선택하고 나면 그때부터는 자유롭지 못하다. 결국은 첫 선택에 대한 체념을 강요당하거나 기껏 잘해봤자 덜 나쁜 것을 선택한 정도가 되어버린다. 셋 정도면 조금 느긋한 마음으로 일이 잘 안 될 때를 대비할 수가 있다. 가능성이 셋이면 그 일의 무게도 셋으로 나누어 가지게 된다. 진지한 환상에서도 벗어나게 되며, 산에 오를 때와 마찬가지로 체중을 양다리에 나눠 싣고 아랫배로도 좀 덜어왔으므로 몸가짐이 가뿐하고 균형 잡기가 쉽다. 혹 넘어지더라도 덜 다칠 게 틀림없다. 실제로도 내게는 언제나 세번째 선택이란 것이 그리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어쨌든 애인이 셋 전도는 되어야 사랑에 대한 냉소를 유지할 수 있다는 얘기다." -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중에서 -

 

왜 그녀는 이렇게 사랑에 냉소를 보일까? 아니, 그렇게 사랑에 냉소를 보여야 한다고 집착할까? 사랑하며 받는 상처가 두려워서일까? 아니면 사랑은 상처로 이어진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이미 알았기 때문일까?

 

 

그 다음 해에 은희경 작가의 [새의 선물]이란 책을 일게 되었다. 이 작품은 앞의 작품들보다 먼저 출간되었지만, 나는 가장 늦게 읽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은 후에야 은희경 작가의 주인공들이 조금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또 다른 이름의 '진희'는 12살의 소녀이다. 그녀는 아버지와 어머니없이 할머니와 이모와 삼촌과 산다. 그녀는 어린 아이의 눈으로 주변 사람들의 사랑을 바라보고, 그 사랑 안에 있는 불신과 배신을 본다. 그리고 그녀는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로 살기로 결심한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보여지는 나'로 살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성년이 된 진희는 이렇게 독백한다.

 

"하긴 사랑이나 존재라는 말 못지않게 배신이란 말의 뜻도 가볍다. -중략- 그러므로 누구 누구를 배신한 것이며 누구의 배신이 더 심각한가 따위

 

, 배신의 진앙과 진도를 따지는 일은 무의미하다. 그런 것을 따지다 보면 결국 우리는 스스로 의도하진 않았따 할지라도 누군가를 배신하지 않고 살기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를지도 모른다. 마치 서로에게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처럼 심상하게 얽혀 짜여져 있지만 이 삶 속에서 누군가의 적이 되지 않고 살기란 불가능한 것처럼, 삶 속에는 타의가 있는 법이니까" - [새의 선물] 중에서 -

 

 

세상을 살면서 주변에 상처입은 사람들을 본다. 상처로 인해 자신을 가두고, 남의 배려에도 으르렁 거리는 사람들을 본다. 처음에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점점 그들 안의 상처를 본다. 그리고 그런 아픔들을 이야기할 수 있는 글들이 느껴진다. 더 나이가 들면, 더 많은 사람들을 이해하고, 더 많은 상처를 보듬어주고, 더 많은 책들을 이해하게 될까? 아직까직은 은희경 작가의 상처입은 주인공들을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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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6-02-22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가의 적이 되지 않고 살기란 불가능한 것처럼, 삶 속에는 타의가 있는 법이니까˝ ; 우리가 가진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더 우리의 삶은 타의에 지배받는 것 같습니다.

가을벚꽃 2016-02-22 11:08   좋아요 0 | URL
저도 이 구절이 오랫동안 마음에 기억이 남더라구요^^
 
근시사회 - 내일을 팔아 오늘을 사는 충동인류의 미래
폴 로버츠 지음, 김선영 옮김 / 민음사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많은 사람들이 휴일도 없이 매일 쉬지 않고 일을 한다. 그렇게 한달이 지나면 쉬지 않고 번 돈으로 주거비와 공과금등을 지불하고, 기타 소비를 한다. 그리고 다시 한 달을 쉬지 않고 일을 한다. 그렇게 또 한 달이 지나면... 가끔은 어쩌다가 현대문화가 이렇게 인간을 챗바퀴 돌리듯이 돌리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왜 우리는 이런 문화 속에서 쉴틈없이 달려가고 있을까 생각을 한다. 달리는 것을 멈추면 안될까? 아니, 멈추지 않더라도 잠시라도 앉아서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생각이라고 하면 안될까?


그럼에도 사회는 점점 더 극단으로 향해가고 있다. 흔히 이야기하는 보수층들은 이런 경쟁 사회가 자유주의의 이상이라며 찬미한다. 그들은 몇 가지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가 최고의 이상적인 사회라고 생각하고, 혹여나 이런 사회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은 다른 색깔?을 가진 사람으로 생각하고 배척한다. 그럴수록 진보층들은 더욱 더 이 사회의 운영방식에 불만을 품고, 그 불만을 극단적으로 표출하게 된다. 그럼에도 그들 역시 극단적인 개인주의에 사로잡혀 정치적 운동이나 사회 운동으로 이런 사회의 모순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결국 사회에는 내부적인 불만과 극단적인 대립만이 넘치게 된다. 어느 사회든 내부에서 이런 불만들과 극단적인 대립이 쌓이면 파국으로 가게 된다는 것이 역사적인 진실이지만, 지금은 누구도 이런 진실을 바라보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당장 하루를 먹고 살기 위해 달려야 하는 우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의 현실이다. 결국 우리는 모두 근시안적인 눈을 가지고 있는 근시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이런 근시안적인 모습은 단순히 우리만의 문제가 아닌다. 폴 로버츠가 쓴 [근시사회]라는 책에서는 현재 미국의 근시안적인 사회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먼저 이 책은 어떻게 미국사회가 이렇게 근시안적인 소비사회가 되게 되었는지를 언급한다. 저자는 미국사회가 근시안적인 소비사회가 되게 된 것을 '헨리 포드'와 '앨프리드 슬론'의 영향으로 본다. 헨리 포드는 포드자동차를 통해 처음으로 생산성 혁명을 일으켰다. 그는 기존의 수작업으로 생산하던 자동차를 벨트식 공정을 통해 더 많은 양을 떠 빨리 생산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자동차 단가가 낮아지고, 사람들은 더 많은 자동차를 구입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다시 생산라인이 확장되고, 또 가격이 낮아지게 된다. 결국 소비의 확대와 생산력의 증가는 계속 순환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자동차가 무한대로 생산되자,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소비할 여력이 없어지게 되었다. 이미 자동차를 구입할 여력이 있는 사람들은 다 구입하게 되었기에 생산력이 확대될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한 사람이 제너럴모터스의 사장 '앨프리드 슬론'이다. 그는 소비자들에게 낮은 금리로 돈을 빌릴 수 있게 해서 구입할 여력이 없는 사람들까지 자동차를 구입하게 만들었다. 또한 자동차의 겉모습을 화려하게 만들어 자동차를 단순히 운송수단이 아닌, 계급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만들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매 번 자동차 모델을 바꾸어 가며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미국의 소비사회는 단순한 필요에 의해 물건을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물건을 구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기업들은 이런 소비자의 욕구를 교묘히 조정하며 자신들을 성장시켰다.


연구자들이 알아낸 바에 따르면 우리는 단지 새로움이나 지위 향상 때문만이 아니라 상처 받은 자존심을 달래기 위해서도 물건을 산다. 평범한 결혼 생활에 대한 실망감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사무실 업무에 대한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지겹고 숨 막히는 순응적인 교외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이 들고 병약해서 받은 모욕감을 잊기 위해 우리는 무언가를 구입했다. 컬럼비아 대학교의 사회학 교수이자 소비자 문화 초창기 비평가인 로버트 린드는 현재 소비재가 시장에 나와 소비되는 형태가 마치 약물치료와 유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소비재가 약물처럼 온갖 종유의 정서적 문제와 사회적 문제를 '조절'하도록 돕기 때문이다.(P42)


그럼에도 미국사회는 여전히 중산층들에 의한 소비형태로 성장을 계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자 이런 중상층들까지 무너지며 사회가 양 극단으로 향하게 되었다. 1970년대부터 미국 기업들은 주주중심의 경영과 디지털 경영이라는 새로운 경영형태를 띄게 되었다. 기존의 기업들은 기업에 이익이 나면 그것을 생산력 확대를 위해 노동력을 위해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업이 주가로 이익을 평가하게 되면서, 기업들은 이익이 날수록 더욱더 효율성을 극대화 하며 주가를 올리는 것에 초점을 두게 되었다. 그리고 기업의 효율성을 위한 최고의 방법은 디지털 경영과 노동자 해고를 통해 지출을 줄이는 것이었다. 결국 미국에서는 고용없는 성장들이 이어지고, 중산층들이 붕괴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붕괴된 중산층들은 다시 중산층의 자리로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 점점 계층간의 사다리가 무너지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억압적인 것은 다수를 이루는 하위 50퍼센트의 경제적 조건일 것이다. 코웬은 현재 상위 15퍼센트가 지금보다 훨씬 더 부우해지면, 나머지 대다수는 훨씬 더 가난해진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현재 아는 의미에서의 중산층이 사라지는 것이다. 즉 중간 소득은 지금보다 훨씬 더 낮아지고, 다수의 빈곤층은 기본적인 공공서비스에도 접근하기 힘들어 지는 것으로, 그 부분적 이유는 부유층이 세금 인상에 저항할 것이기 때문이다. 코웬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예산에 맞춰 세금을 인상하거나 혜택을 중리기보다, 다수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을 떨어뜨려서 새로운 하위계급을 양산하게 될 것입니다."(P221)


저자는 이런 암울한 미국사회의 디스토피아적 전망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치인들과 유권자들이 움직이지 않는 이유를 제시한다. 미국 사회가 점점 개인중심적, 자아중심적이 되면서 이런 사회 문제에 자신의 열정을 소비하려 하지 않는다. 특히 미국 사회가 보수와 진보의 양극단으로 나뉘면서 이런 문제들이 정치적 대립으로 비화되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극단적인 정치싸움을 통해 아무런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결국 현재 미국사회에는 당장 자기 이익에 눈이 멀어 사회 전체가 무너져가는 것을 외면하고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단지 현대문화의 자기중심적 성향이나 정치적 양극단의 문제 뿐만 아니라, 인간의 유전적 특성을 제시한다. 인간 뇌에는 먼 미래를 내다보는 영역과 근시안적인 것만을 바라보는 뇌의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소비사회와 디지털문화는 점점 이 뇌의 근시안적인 영역만을 자극하게 되고, 사람들은 점점 근시안적인 시각만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에 대한 대안으로 보수와 진보의 정치 세력이 자신의 당파의 이익만을 대변하지 말고, 공공 이익을 위해서 함께 타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공동체성의 회복을 통해 개인중심의 문화를 바꾸고, 공동체의 이익을 함께 고민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오래 전에 내가 대학을 다닐 때 처음으로 '세계화'라는 단어를 접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세계화와 글로벌스탠다드를 이야기 하며, 이것이 우리의 장미빛 미래인 것처럼 이야기를 했다. 그 후 효율성만이 진리인 것처럼 이 사회가 움직이게 되고, 효율성에 벗어나는 모든 사람들은 도태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저자가 이야기하고 있는 미국의 문제를 우리가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과연 어떤 것이 옳은 것일까? 무엇이 해결책일까? 해결책을 제시하기에 앞서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서로 공감하며 이야기만이라도 할 수 있다면 희망이 있지 않을까? 그러나 아무도 미래에 대해서 고민하거나 계획을 세우려 하지 않는다. 이 책의 표지어처럼 '내일을 팔아 오늘을 사는 총동 인류'의 모습만을 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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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6-02-22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시사회`, 오랜만에 보는 좋은 책이네요.

가을벚꽃 2016-02-22 11:12   좋아요 0 | URL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책인데 리뷰로 그 생각과 느낌을 담기는 부족하네요. 리뷰를 쓰면서 글쓰는 한계를 느끼게 하는 책입니다.
 

 

니체를 읽는다 1부의 후반부에서는 니체가 초인사상을 예술과 사회에 적용하고 있는지를 이야기 하고 있다. 니체는 예술 역시 인간을 건강하게 만드는 예술과 그렇지 않은 예술로 나눈다. 인간을 건강하게 만드는 예술은 삶을 긍정하는 예술이다. 심지어 삶의 비극적이 요소까지도 긍정으로 받아들인다. 반대로 인간을 건강하지 못하게 하는 예술은 현실세계를 부정하고 이상세계를 추구하는 것이다. 즉 니체에게 있어서 예술은 세상의 비극을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것을 긍정하는 것이다.


인간을 건강하게 만드는 예술은 현실세계에서 보이는 끔찍한 현성들조차도 이 세계가 갖는 무궁한 힘을 보여주는 것으로 긍정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승화시킨다. 또한 세계가 갖는 그러한 무궁한 힘을 흔쾌히 긍정하고 자신을 강화시키는 계기로 삼는 건강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인간의 삶을 승화시킨다.(P64)


니체의 이런 예술관은 [비극의 탄생]이란 책에서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나눈다. 아폴론적인 것은 이상적인 것이고,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다. 즉 디오니소스적이라는 것은 현실의 비극을 받아들이고, 그 현실을 긍정하며, 현실을 춤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세계는 자신의 무궁무진함에 기쁨을 느끼면서 삶의 최고의 전형인 비극적 영웅까지도 아낌없이 희생한다.그러나 비극적 영웅은 이러한 희생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긍정한다. 아니 그는 오히려 고통을 찾아다니고 그것과 대결하면서 자신의 힘을 시험해 본다. 비극은 이러한 인간에 대한 찬양이며 이러한 인간이 갖는 힘의 충일 상태 속으로 관객들을 끌어들이려고 한다. 이러한 인간에게는 고통조차도 삶을 보다 충실하게 만드는 자극제로 작용한다. 비극적 영웅은 창조와 파괴를 거듭하는 세계의 현실을 흔쾌이 받아들이면서 세계의 충일함을 반복한다. 니체는 이런 의미에서 세계와 비극적인 영웅을 '디오니소스적이 인것'이라고 부르며 진정한 예술은 이러한 디오니소스적인 정신으로 충만해 있다고 본다.(P68)


나는 니체의 '디오니소스적인 인간'이란 단어를 접할 때마다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다. 과연 니체의 이런 생각은 그의 생애의 어느 부분에서부터 시작했을까? 약한 것을 경멸하고, 강한 것에 대한 무한한 긍정은 어떤 연유로 그의 사상에서 싹트기 시작했을까?


철학자의 사상과 그의 삶을 연관시키는 것은 올바른 철학적인 탐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학문적인 탐구가 아닌, 니체라는 한 인간에 대해 알고싶다. 그는 왜 그렇게 약함을 경멸했을까? 그리고 왜 그렇게 힘을 추구했을까? 무엇이 그렇게 자신의 약함을 부정하게 하고, 무엇이 그렇게 자신이 갖지 못한 힘을 추구하게 했을까? 내가 니체라는 사람을 철학자가 아닌, 인간으로 알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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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대학교 신입생 때였다. 우리 과에서 유난히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따로 지내는 동기가 한 명 있었다. 그 친구와 우연히 대화를 하면서 친해지게 되었다. 당시 나는 기독교 동아리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그 친구는 기독교에 대한 철저한 거부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우리는 신의 존재나 종교의 문제에서는 일치점을 찾지 못했지만, 대부분의 대화에서는 서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 친구가 내게 추천한 책이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였다. 그 때 구입한 낡은 니체의 책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내가 처음 니체의 책을 접하면서 가졌던 감정은 니체를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이 가졌던 경탄이나 환희의 감정이 아니었다. 반대로 니체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가졌던 증오나 비판의 감정도 아니었다. 니체의 책은 나에게 한 인간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주었다. 니체를 좋아해서 그 사상에 심취한 사람들이 들으면 거부감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나는 니체를 읽으며 세상을 향해서 홀로 몸부림 치는 한 인간의 처절한 투쟁을 보았다. 마치 거친 풍랑 위에서 커다른 배를 이끌고 혼자 항해하는 사람의 집념과 열정, 황량한 사막 위를 혼자 걷는 사람이 느끼는 고독과 좌절을 보았다. 그 후 니체의 책들을 좋아하고, 그 책들을 읽으며 니체에 대해 더 친숙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니체는 내게 어려운 존재였고, 그의 사상은 마치 안개 속의 사물처럼 모호하게 보이는 대상이었다.


거이 10년 가까이 정신없이 사느라 니체의 책들을 접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번에 우연히 아카넷 출판사에서 나온 [니체를 읽는다]라는 책을 통해 다시금 니체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이 책이 흥미를 끄는 이유는 그동안 나온 많은 니체의 해설서와는 다르게, 니체의 사상의 형성과정과 니체의 철학을 해석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니체의 사상이 어떻게 현대 사상의 영향을 미쳤는지를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책은 크게 3부로 나누어져 있는데, 1부에서는 니체의 핵심사상을, 2부에서는 니체와 그 시대의 사상가들에 대해서, 3부는 니체사상의 해석을 다루고 있다.


1부의 초반부에서는 주로 니체의 형성과정을 다루고 있는데, 가장 많이 언급하는 것은 니체의 '초인'사상과 '영원회귀' 사상이다.


니체의 초인사상은 기존의 서양철학의 뿌리와 같은 플라톤과 기독교 사상에 대한 반발이다. 플라톤은 현실세계를 초월한 이데아를 주장했고, 기독교는 그 플라톤의 이데아를 신의 개념과 동일시했다. 그로 인해 서양철학은 현실세계를 부정하고, 이상세계를 강조했다. 그러다보니 현실의 어려움을 직시하기 보다는 현실 너머의 세계에서 위안을 받으려 했다. 니체는 이에 대해 부정하며 짜라투스트라라는 인물을 통해 '신은 죽었다!'라고 말하며, 신에 의존하는 삶이 아닌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 세상과 맞서는 삶을 주장한다. 그렇게 세상이 만든 가치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가치를 만들어 가는 사람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초인'이다.


'영원회귀'사상은 니체의 초인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어쩌면 초인사상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세계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니체는 세상을 영원히 반복하는 세상이라고 말한다. 모든 것이 똑같이 반복되는 삶이라면 그 삶은 얼마나 고통일까? 그런데 니체는 바로 그 반복되는 삶을 긍정할 수 있는 사람, 내 삶이 계속해서 반복되더라도 그 삶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을 초인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런 니체의 초인사상과 영원회귀 사상을 설명하면서, 니체의 사상을 건강한 사상이라는 부분을 강조한다. 즉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세상과의 싸움을 피하지 않기에 그의 사상은 강인하고 건강한 사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약한 인간이 히말리야 같은 험한 산을 올라가야만 할 때 그 산은 그들을 힘들게 할 뿐인 저주의 산으로 나타나는 반면에,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강한 인간에게는 오히려 험하기 때문에 더욱 숭고하고 아름다운 산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자에게 투쟁과 갈등이 지배하는, 생성 소멸하는 이 세계는 그 자체로 완전한 세계다. 이 세계에는 강한 동물과 약한 동물이 존재하듯이 탁월한 인간뿐이 아니라, 열등한 인간이 존재하지만, 서로를 필요로 하고 보완한다는 점에서 이 세계는 완전한 세계다. (P26-27)


니체의 철학은 모든 것을 병적이냐 건강하냐 혹은 우리를 병적으로 만드냐 건강하게 만드냐라는 관점에서 평가하다는 점에서 생리학적인 철학이다. 물론 그러한 생리학은 신체적인 차원의 건강과 병을 진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실존 전체의 건강과 병을 진단하는 점에서 통상적인 생리학과는 다르다. (P49)


예를 들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허약한 자는 강한 바람을 두려워하고 혐오할 것이며 또한 그렇게 바람을 두려워하는 자신에 대해서 혐오감을 느낄 것이지만,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강한 자는 강한 바람을 오히려 즐기고 또한 이를 통해서 자신의 힘을 느끼고 자신이 고양된다고 느낄 것이다. 이 경우 바람은 혐오스러운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아름다운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자신과 바람은 언뜻 보기에는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사실은 상호대립을 토한 상호 간의 고양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양자 간의 투쟁은 사랑의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P54-55)


이 부분을 읽으며 오랫 동안 가졌던 니체의 사상에 대한 의문이 다시 고개를 든다. 과연 니체가 주장하는 '신은 죽었다'는 말이나, '인생이 영원히 반복된다'고 말들이 과연 그가 실제로 그렇게 믿고 있었던 것이었는지, 아니면 아포리즘적인 격언이었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니체의 무신론은 버트란트 러셀과 같은 과학적인 사고를 가진 사상가들의 무신론들과 다르다. 그들은 신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부정하는 것에 자신의 에너지를 모두 쓰고 있다. 그러나 니체의 사상은 논리적이라기 보다는 선언적이다. 그는 인간이 신의 존재를 믿음으로, 삶을 일회적이라고 생각함으로 우리 인생이 건강하지 않다고 믿었던 것은 아닐까? 아니면 자신이 그런 삶을 살았기에, 자신의 삶이 불행했었다고 믿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기에 신을 믿기보다 자신을 믿음으로, 무한이 반복되는 삶을 긍정함으로서 더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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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6-02-21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체에 대한 탐구를 많이 하셨네요. 니체가 발견한 것은 쇼펜하우어의 맹목적인 의지를 넘어서는 초월적인 의지인 것 같아요. 맹목적인 의지는 원인이 외부에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힘을 강화하려는 초월적인 힘에의 의지는 행위나 목적의 원인이 자신 안에 있는 것이죠. 그래서 니체의 초인은 스스로 자기극복을 시도하는 자신의 힘을 강화하려는 자기 초월적 의지의 소유자라는 것이죠. 그래서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 무한히 반복되는 세계를 긍정하는 자기 초월적 의지를 가짐으로써 세계는 무한히 긍정되고 의미와 가치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죠. 아뭏든 건필하세요. *^

가을벚꽃 2016-02-22 11:12   좋아요 0 | URL
니체를 좋아하지만 그의 사상은 아직도 어렵기만 하네요. 나름 정리를 허고 있는데... 아직도 모호허네요. 좋은 답글 감사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