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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타기리 주류점의 부업일지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8
도쿠나가 케이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16년 2월
평점 :
품절
동물의 왕국과 같은 다큐멘터리를 보면 가끔은 상처 입은 맹수가 나온다. 다른 짐승을 사냥하며 자신의 배를 채우던 사자가 어느 날 우연한 사고로 다리를 다친다. 그로인해 무리에서 떨어져 나오고 사냥을 하지 못해 힘을 잃어간다. 그럼에도 살기 위해 다리를 절뚝거리며 걸어간다. 그럼 어김없이 그 뒤에 늑대나 하이에나 같은 무리들이 사자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뒤를 따라온다. 사자가 조금이라도 상처입은 기색이나 지친 기색을 보이면 어김없이 뒤에서 달려든다. 그러기에 사자는 절뚝거리면서도 뒤를 돌아보며 아무렇지 않은듯 포효한다. 그러다가 다시금 주저않으면 기회를 누리던 사냥꾼들은 다시금 달려든다. 그러기를 몇 번 반복한 후 결국 사자는 늑대나 하이에나 무리에게 잡혀 먹는다.
어쩌면 우리 인간의 모습도 상처입은 사자와 같을지도 모르겠다. 세상을 살면서 이런 저런 이유에 마음 깊은 곳까지 찢기고 상처를 입었지만, 그 상처를 보여주는 순간 사람들은 그 약점을 물고 늘어지기 위해 달려든다. 그러기에 상처를 입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간다. 오히려 자신의 상처를 보고 달려드는 사람들을 향해 '나 아무렇지도 않다!' '나 아직 건장하다!'라는 메세지를 던져주기 위해 더 날카롭게 소리친다.
이 소설을 처음 접했을 땐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다. 책 제목이 말하듯이 가볍고 재미있는 소설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작가 역시 [이중생활 소녀와 생활밀착형 스파이의 은밀한 업무일지]란 소설로 데뷔한 전직 만화가 출신의 일본 작가이다. 이 소설 역시 만화적 상상력으로 풍부한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배달한다는 '가타기리 주유점'이란 이미지를 처음 접할 때, 무언가 판타지적 요소를 기대했다. 사랑이나 미움같은 추상적인 요소를 배달한다거나, 시공간을 뛰어넘어 필요한 것을 배달하는 그런 것을 기대했었다.
그러나 소설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아주 오래된 낡은 주류점, 그리고 그 주류점을 어쩔 수 없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가타기리, 주류점의 오랜 직원이자 짱아치 매니아인 후사에, 마작으로 돈을 다 날려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러 왔던 후사에의 짱아치에 중독된 마루카와... 이것이 소설의 배경와 인물 전부이다.
가타기리 주류점은 술만 팔아서는 유지할 수 없는 작은 상점이기에 아버지 대에서부터 배달을 해 왔다. 가게의 모토는 '무엇이든 배달합니다!'이다. 항상 검은 양복을 입고 저혈압으로 인해 아침부터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는 주인공 기타기리는 이 모토에 충실히 배달을 하려 한다. 그래서 위협을 무릅쓰고 아이돌에게 선물을 배달을 하기도 하고, 조폭같은 아버지의 위협에도 아이의 어머니를 찾아 아이의 의뢰품을 배달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배달을 의뢰하는 사람이나 배달을 받는 사람들은 대부분 상처입은 사람들이다. 화려해 보이는 아이돌의 가면 속에서 어머니의 임종을 앞두고 괴로워 하는 소녀, 불륜으로 이혼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신혼기념품을 바다에 뭍으려는 남성, 회사에서 궁지에 몰려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중년여성, 모든 기억을 잃은 엄마, 자신을 돌보아 준 아버지를 불구로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빠진 소녀... 이들에게 의뢰품을 배달하면서 가타기리 안에 숨겨져 있던 상처들이 들추어진다.
청색 유리잔 너머로 풀현듯 낮에 봤던 바다 빛이 되살아났다. 바닥이 없을 것 같던 깊고 깊은 감청색 바다. 그때 친절한 남자가 제지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치자 한기가 들었다. 만물의 소음을 남김없이 삼키는 세찬 바닷바람은 때때로 정상적인 사고까지 휘감아 데려가는 것이까. 마음을 흘리는 감청색 바다 앞에 섰던 순간 그는 분명 저쪽으로 가고 싶은 충동에 쉽싸여 있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저 맑은 바다 너머를 한 번 보고 싶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내가 이렇게 술잔을 비우는 사이에도 이 세상 어디서가, 누군가는 절벽에서 몸을 던지겠지. 저마다의 무거운 이유를 등에 지고 절벽 끝에서 바다를 내려다볼 남자들과 여자들. 거기까지 와야 했을 그네들의 심정은 알길이 없지만, 어쩌면 눈 밑에서 일렁거리는 아름다운 빛깔에 홀려 몸을 던지는 사람이 있을지 누구 알랴 (P208)
천천히 고개를 들자 거울 속에 창백한 얼굴이 있었다. 축축한 머리가 한 움큼 관자놀이에 달라붙어 있다. 침을 삼키자 목울대가 커다랗게 출렁였다. 초췌한 그 얼굴 너머에 가타기리는 마침내 이물감의 정체를 깨닫는다. 그것은 지극히 미세한 틈새로 흘러나온 죄의 기억이었다. 우물 속처럼 깊이 가라앉아 있던, 결코 지울 수 없는 죄의 기원. 기타리기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때였나? 낮에 그 절벽 끝에 섰을 때? 거기서 나도 모르게 뚜껑이 열었을까? 아니, 아니다. 기억의 뚜껑은 이미 오래전부터 헐거워졌 있었다. 그리고 그 기묘한 의뢰를 계기로 열렸던 것이리라, 그 의뢰인을 대신해 누군가에게 '악의'를 배달한 날, 그날부터 뚜껑은 밀려나기 시작했고 오늘은 끝내 꿈이 되어 밖으로 흘러넘친 것이리라. (P217)
소설은 기타기리의 배달로 파국을 맞던 인생이 갑자기 좋아지거나, 자살을 하려던 소녀가 갑자기 소망을 찾는다는 극적인 반전은 없다. 기타리기 역시 배달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극적으로 회복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런 배달을 통해 그들은 자신 안에 감추어 두었던 상처를 서로에게 보여 준다. 나의 상처를 이용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잠시 접어 둔채... 그리고 자신의 상황에서 줄 수 있는 조금의 위로를 서로에게 던질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