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일인자 1 - 1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1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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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일인자]는 콜린메켈로가 쓴 7부작 [마스터오브로마]의 1부에 해당된다. 소설의 전반적인 내용은 로마공화정 말기로 부터 케이사르의 통치기간을 다루고 있다. 요즘 유행하는 '역사가 곧 스포'라는 말로 짐작건대  마리우스, 술라,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같은 인물들의 이야기가 펼쳐질 것으로 예상된다.


소설의 시작은 기원전 110년부터 시작된다. 로마가 3차례에 걸쳐 카르타고와의 포에니 전쟁 (기원전 264-146)에서 승리한 후 로마공화정 안에서 내부의 갈등이 극대화되는 시점이다. 이런 로마 공화정의 갈등을 해결하려고 노력한 사람이 역사상 유명한 '그라쿠스 형제'이다. 소설은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 보수적인 원로원에 의해서 파멸되고, 로마가 보수적인 지배체제가 더욱 더 곤고해진 시점에서 시작된다.


1권에서의 이야기는 주로 '가이우스 마리우스''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이야기로 전개된다. 역사상 로마공화정의 독재자이자, 서로 상대방의 정치동료들을 잔혹하게 학살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이와 함께 '카이사르'의 할아버지이자, 마리우스의 장인이 되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로마의 영향력 아래 있는 누미디아 왕국의 '유그라타 왕'이 주 인물로 등장한다.


소설의 시작은 집정관 취임식 축제 날 '카이사르'와 '마리우스', '술라', '유그라타'라는 네 명의 인물의 암담한 현실을 묘사하면서 시작된다. 소설의 첫 시작은 집정관 취임을 바라보는 '카이사르'의 시점에서 시작된다. 카이사르의 가문은 로마의 건국부터 이어진 정통 귀족인 '파트리키' 가문이었다. 그러나 로마 공화정의 특성상 모든 선거는 돈과 연관되어 있었다. 그는 원로원에 속해 있었지만 그의 두 아들에게는 원로원직을 이어받게 할 물질이 없었다. 결국 그에게는 두 아들 중 하나를 부잣집에 입양을 보내거나 두 딸들을 부잣집으로 시집 보내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그때 그의 눈에 '마리우스'라는 인물이 들어온다. 그는 계시처럼 마리우스를 보게 되고, 마리우스와 자신의 딸들을 결혼시킬 방법을 떠올리게 된다.




'마리우스'역시 상황은 암담하다. 그는 로마에서 가까운 이탈리아의 아르피눔 출신이다. 물론 그의 집안의 지역의 대농장을 가지고 있었고, 로마시민권까지 있었지만 평생 이탈리아 촌놈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어야 했다. 그는 천재적인 지위관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유명한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장군 밑에서 복무하며 히스파이나(지금의 스페인)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그곳에서 그는 같은 원로원 동료인 '루프스'와 로마의 속국으로 참여한 당시 왕자였던 '유그레타'와 친구가 된다. 그러나 또한 로마귀족 가문이며 원로원의 핵심 인물인 '마텔루스'와의 악연으로 원수가 된다. 마텔루스는 그의 막강한 영향력으로 그의 비천한 출신을 부각시킴으로서 그의 정계 진출을 막는다. 결국 그는 법무관까지 지냈지만 집정관으로서의 가능성은 거이 포기하게 되었다. 그런 그에게 '카이사르'가 다가와 자신의 딸과 결혼을 하라고 한다. 그는 그의 아들들에게 돈을 주어 원로원으로 진출할 길을 열어주고, 자신은 카이사르 가문과 결혼함으로서 출생의 꼬리표를 뗄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었다.




'술라'의 상황은 더욱 더 비참하다. 그 역시 '카이사르'와 같이 로마의 정통 귀족인 '파트리키' 출신이지만, 술주정뱅이 아버지로 인해 아무런 재산도 물려 받지 못한다. 그로 인해 지금은 자신의 의붓어머니인 클리툼나와 애인인 니코폴리스와 문란한 성생활을 하며 자포자기의 삶을 살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언젠가 자기의 고귀한 혈통을 회복하고 뛰어난 인물이 될 것이라는 야망에 사로잡혀 있다.


마지막으로 '유그르타 왕' 역시 코너에 몰려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는 조카와 왕권경쟁을 하고 있기에 로마의 사절단으로 와 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돈을 쏟아 부어도 그의 로비는 계속해서 좌절이 된다. 결국 그는 세월만 보내며 로마에 발이 묶여 있는 상황이다.





1권의 내용은 로마 공화정이라는 보수적 체제로 인해 암담한 상황에 빠져 있는 네 사람이 각자의 방법으로 자신의 처지를 바꾸기 위해 몸부림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카이사르와 마리우스는 서로 정략결혼을 통해서 이 상황을 빠져나가려 한다. 술라는 자신의 의붓어머니와 애인을 암살하고, 그들의 재산을 가로채면서 상황을 타계해 나간다. 유그르타 역시 자신의 정적을 암살하고 누미디아로 돌아가 나름대로 힘을 키우며 로마와 맞써 싸울 준비를 한다. 결국 소설의 후반부에 이르러 누미디아의 유그라타와 로마가 전쟁을 벌이게 되고, 마리우스는 자신의 원수인 마텔루스의 부관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소설은 로마의 역사와 공화정이라는 거대한 줄기를 묘사하면서도, 마리우스와 술라라는 인물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특히 술라와 술라와 결혼하게 되는 카이사르의 딸 율릴라에 대한 묘사는 섬뜩하리만큼 어둡게 묘사된다. 이 묘사들이 후에 어떤 복선으로 펼쳐질지를 기대하게 된다.


"아아! 저기 주목해야 할 자가 있구나. 젊지만 완연한 성인의 모습을 갖춘 그자는 기사 대열 가장 자리에 서 있었지만, 토가 아래 튜닉의 오른쪽 어깨에 기사계급을 상징하는 좁은 띠조차 없었다. 젊은이는 자리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이내 포룸 로마눔을 향해 카리톨리누스 언덕길을 내려갔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마리우스는 젊은이의 비범한 연회색 눈동자가 반짝 빛나더니 이내 불꽃처럼 타오르며 시뻘건 피투성이 광경을 탐욕스럽게 빨아들이는 모습을 보았다. 전에 본 적이 없는 자였다. 마리우스는 그가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분명 범상한 자가 아니다. 여성미와 남성미를 동시에 갖춘 양성적인 외모, 그리고 아름다운 색체의 조화, 피부는 우유같이 희고 머리칼은 떠오르는 태양빛이었다. 마치 아폴로의 현신인 듯했다. 진정 아폴로가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내려 온 것인가? 아니, 신은 결코 방금 이자리를 떠난 인간과 같은 눈빛을 띠지 않는다. 그의 눈빛은 고통받는 자의 눈빛이었다. 신이 되어서도 고통을 받아야 한다면 신이 될 이유는 무엇이겠는가?(P35-6)" 


"동생 율릴라는 장난꾸러기였다. 유쾌하긴 했지만 분명 다루기 힘들 것이라고 마리우스는 생각했다. 제멋대로에 고집도 아주 세고 자기 방식을 관철시키기 위해 식구들을 어떻게 구워삶아야 하는지 잘 알 것이다. 하지만 율릴라에게 보는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구석은 따로 있었다. 젊은 청년을 보는 눈이 있는 자는 그만큼 젊은 여성을 보는 눈도 갖추고 있기 마련이다. 율릴라는 어딘가 마리우스의 신경을 거스르는 데가 있었다.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율리라에게는 분명 뭔가 결함이 있다고 마리우스는 확신했다. 언니나 오빠들에 비해 독서량이 적은 듯했지만, 그렇다고 지식 부족이 결합은 아니었다. 율리라의 무지가 남들을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하지는 않았으니까, 자신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잘 알고 미모를 보물처럼 여기긴 했지만, 그렇다고 허영심이 문제도 아니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쳤을 때 마리우스는 내심 어깨를 으쓱하며 율리라의 문제에 관한 상념을 털어버렸다. 어차피 그에게는 언제까지나 관심 밖의 일일 테니까.(P109-10)"


역사적으로는 마리우스가 카이사르의 딸 율리라와 결혼했다는 기록만 있을 뿐, 술라가 카이사르의 딸과 결혼했다는 기록은 없다. 아마 콜린맥컬로는 한 때 마리우스의 전적인 도움으로 군사적인 성공을 이룬 술라가 뒤에 마리우스를 배신하는 과정을 개연성 있게 풀어나가기 위해 둘의 관계를 동서지간으로 설정한 것 같다. 역사적 진실 속에 작가만의 창작이 들어가는 것이 역사소설의 매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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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 - 제21회 전격 소설대상 수상작
기타가와 에미 지음, 추지나 옮김 / 놀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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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인생이 마치 어린시절 운동회에서 있었던 오래 달리기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친구들과 함께 운동장을 달리고, 부모님들과 주변 사람들이 응원을 한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체력을 아끼며 달려간다. 그러다 어느 순간 지치고, 더 이상 달릴 수 없을 것 같은 시간이 온다. 그러나 멈출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단순히 옆 친구에게 지기 싫다는 생각때문만은 아니다. 나를 보고 있는 부모님과 주변사람들의 기대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서 포기하면 1년 내내 친구들에게 패배자로 놀림을 당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를 악물고 달린다.




이 소설에서도 이렇게 열심히 달리고 있는 한 남자가 등장한다. 이름은 '아오야마', 일본에서 꽤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힘겹게 회사에 취직을 했다. 그도 회사에 취직을 하기 전에는 자신만만해 했다. 직장생활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우울증을 겪고 있는 선배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은 그러지 않을 자신감이 있다고 말했었다.


"진짜로 잘난 사람이란 어떤 환경에서나 잘나게 돼 있어. 사회에 나가서 가장 중요한 건 체력도 참을성도 아니야, 머리가 얼마나 잘 돌아가는가 하는 점이지. 어떤 사람과도 일해 나갈 수 있는 적응력이랑. 말하자면 '생존 능력'이 있는 사람이 가장 강한 거야. (P15)"


그러나 막상 힘겹게 직장생활을 시작한 후 그의 삶은 매일같이 쫓기는 시간의 연속이다. 아침 6시에 기상을 해 전철을 타고 회사에 출근하고, 저녁 9시가 넘어서 퇴근을 하는 생활을 일주일간 반복을 한다. 그리고 일요일이면 그저 쓰러져 잠만 잔다. 그럼에도 상사의 잔소리와 일의 압박은 점점 커져가고, 심지어는 퇴근 시간이나 일요일 휴식시간까지 일에 대한 제촉전화가 걸려 온다.


하지만 아오야마에게 사직이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여기까지 너무나 힘들게 왔기에, 그리고 여기서 관두면 다시는 직장을 못 잡을 것 같다는 압박감에 그는 계속해서 달려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모든 것을 놓고 싶다는 유혹에 지하철에서 난간을 바라본다. 그 때 그를 아는채 하는 '야마모토'를 만난다.


자신의 초등학교 친구라고 말하는 야마모토는 아오야마를 만나 너무 반가워하지만, 아오야마는 그런 야마모토가 기억에 없다. 간신히 초등학교 친구에게 연락을 해 오사카로 전학을 간 친구 중에 야마모토라는 친구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아오야마는 자주 야마모토를 만나 회사생활에 대한 고충을 이야기하고 그를 통해 위안을 받는다.


조금 나아질 것 같던 회사생활은 그의 실수로 인해 거래처를 잃을 뻔한 위기에 처한 이후부터 점점 더 최악을 향해 나간다. 직장 상사의 호통은 더 거세지고, 주변의 따돌림도 심해진다. 더 결정적인 것 자신의 실수로 알았던 것이 사실은 자신의 거래처를 빼앗기 위한 직장선배의 속임수였다는 것이다. 막다른 골목까지 이른 아오야마는 힘들게 어머니에게 전화를 해서 힘겹게 이야기를 꺼낸다.


"만약에...... 만약에 말인데, 내가 회사를 그만둔다고 하면 어떡할 거야?"


어머니는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어머나, 뭐 어떠냐?"


그러면서 힘들면 돌아오라고 말한다.


어머니와 야마모토의 위로와 도움으로 그는 결국 과감한 결단을 내린다. 물론 책의 후반에는 야마모토의 정체?가 밝혀지지만 스포가 될 수 있으니 여기서는 생략한다.




나 역시 젊은 시절에 아오야마처럼 주변에서 압박감으로 인해 무너지는 사람들을 보면 정신력이 약하다고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요사이는 점점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한계에 직접적으로 대면할 때가 많다. 예전에는 몸을 혹사하고 정신적으로 압박을 당해도 하룻밤 자고 나면 아무렇지도 않게 회복되었다. 그러나 요사이는 점점 정신적인 압박에 몸이 반응을 한다. 아마 그 때도 몸에 표시만 나지 않을 뿐 이미 속에서는 압박을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자주 인간의 '한계'라는 것을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한계'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개인적으로 훈련이나 노력을 통해 어느 정도 조절을 할 수 있지만, 누구나 결국 한계라는 것은 있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한계까지 자신과 타인을 몰아붙인다.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면서 몸과 마음이 병들어간다. 어리시절은 꿈과 희망을 잃어버리고, 그저 살기 위해 달리는 무의미한 삶을 살게 된다. 모두들 다 그렇게 사는 것이라고 자조하면서...


이 책을 읽으며 가족과 친구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았다. 아오야마는 한계에 몰린 상황에서 어머니에게 전화를 한다. 더 이상 달릴 수 없다거나 한계에 이르렀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아오야마가 한계에 이르렀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내려 오라고 말한다.


나 역시 가끔 사회 생활에 힘들 때거나 일을 쉴 때면 오랫동안 고향집에서 쉬고 온 적이 있었다. 남들은 비난을 해도 어머니만은 항상 반겨주시며 쉬고 싶을 만큼 쉬고 가라고 말한다. 만약 우리에게 그런 어머니나 가족, 친구가 한 명만 있어도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은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아오야마에게는 그런 어머니와 야마모토라는 친구가 있었다.


가끔 자신이나 타인을 한계상황까지 몰아 붙이는 사람들을 본다. 그들은 충분히 인간은 그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그렇게 자신과 남을 몰아 붙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있는 인간은 없다. 만약 내가 그 한계를 뛰었다면,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닐 것이다. 예전의 나를 버리면서까지 과연 그 한계를 뛰어넘을만한 가치가 있을까? 그러기보다는 잠시 내려놓고 쉬면서 예전의 나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 아닐까? 결정은 어차피 자신의 몫일 것이다. 아오야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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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3 - 승자의 혼미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3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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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는 워낙 오랫동안 그 명성을 듣고 있었기에 항상 읽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15권이라는 방대한 분량과 저자의 역사시각에 대한 비판들이 워낙 많아서 읽기가 망설여졌다. 최근에 콜린 멕킬로가 쓴 [마스터스 오브 로마]를 읽으며 다시금 [로마인 이야기]가 생각났다. 과연 시오노 나나미는 마리우스와 술라, 그리고 폼페이우스를 거쳐 시저로 이어지는 로마 공화정 말기를 어떤 시각에서 보고 있는지 무척 궁금했다. 그로인해서 [로마인 이야기]를 3권부터 읽기 시작했다.




저자는 3권의 제목을 '승자의 혼미'이다. 로마가 카르타고와의 3차 전투를 치룬 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정권을 잡기 전까지의 혼란한 상황을 다루고 있다. 로마가 카르타고와의 전쟁 후 혼란을 겪게 된 것 가장 큰 이유 두 가지는 빈부의 격차와 로마와 이탈리아인의 갈등이다.


첫 번째의 빈부격차는 카르타고 전쟁 이후 극대화되기 시작했다. 로마는 보통 상비군보다는 유사시 일반 평민들이 지원을 하는 징집제였다. 일정한 이상의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 스스로 군장비를 준비해서 군대에 복무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카르타고 전쟁 이후 귀족과 기사계급들의 부의 확대로 평민들이 재산이 줄어들고, 결국에는 군대에 복무할 수 있는 일정한 재산 이상을 가진 평민들이 사라지게 되었다. 로마는 계속해서 이 재산의 기준을 낮추었지만, 결국에는 감당할 수 없어서 무산계급들까지 군인으로 징집해야 했다. 이런 상황은 로마 군대의 질적인 수준 저하로 나타났다. 카르타고 전쟁 이후에도 에스파냐와 시리아에서 계속해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진압을 해야 할 로마 군대가 오히려 패배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그리고 이것은 사회 혼란으로 이어진다.


두 번째의 로마와 이탈리아인의 갈등은 로마 시민권의 문제에서 시작되었다. 보통 로마는 로마사람들에게는 로마시민권을, 그리고 주변 이탈리아 도시국가에게는 라티움시민권을 주었다. (콜린 맥컬로의 책들에서는 라티움시민권 조차도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준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로마시민권에게는 투표권과 세금 면제를 비롯한 여러 가지 권한이 있었고, 라티움 시민권자들은 병역과 세금의 의무를 지면서도 해택은 누리지 못했다. 그리고 인해 로마의 도시 국가들의 불만이 커지고 로마연합의 붕괴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두 가지 문제점을 파악하고 처음 개혁을 시도한 사람이 그라쿠스 형제이다. 그들은 형제가 차례로 호민권에 당선이 되면서 빈부격차 해소와 로마시민권의 확대를 주장했었다. 그러나 보수집단인 원로원의 반대로 결국 두 명 모두 다 암살 당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로마는 더 큰 혼란을 맞게 되었다.

 


 

이런 혼란기에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등장한다. 이탈리아 출신이었던 그는 천재적인 군사 지략가로서 서쪽 에스파냐의 반란, 남쪽 북아프리카에 있는 누미디아 왕국과의 전쟁, 북쪽에서 내려오는 게르만 민족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막아낸다. 로마는 보수층인 원로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군사적인 위협에 처할 때마다 마리우스를 찾고, 그 결과 마리우스는 로마 역사상 누구도 불가능했던 7번의 집정관을 역임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개혁을 단행에, 무산자들에게도 군대의 의무를 지게 하는 대신 토지를 나누어 줌으로 빈부의 격차를 해소하는 법률을 만든다. 하지만 그는 로마와 이탈리아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그 결과 이탈리아의 반란이 일어난다.


이 때 등장한 사람이 루키우스 코넬리우스 술라이다. 그는 원래 마리우스의 부관이였으나 마리우스와는 태생적으로 반대인 사람이었다. 마리우스가 이탈리아인으로 평민 출신이었다면 술라는 뼈속 깊이까지 '파트라키(로마의 정통 귀족)'였다. 카리스마와 지략에서 남달랐던 술라는 이탈리아 남부 전선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친다.(북쪽에서는 마리우스가 있었지만, 이미 노쇄했기에 별 활약을 펼치지 못한다. )


이탈리아 반란이 평정된 후 로마시민권의 확대문제와 서거권 문제로 마리우스와 술라가 갈등을 하게 된다. 마리우스는 이탈리아 사람이기에 로마시민권 확대와 서거권 확대에 긍정적이었지만, 술라는 귀족출신의 보수층이었기에 이에 반대한다. 그 결과 마리우스가 술라를 축출하고, 이에 반대하여 술라는 처음으로 로마 안으로 군대를 들여보내 마리우스 일파를 학살한다.(개인적으로 그동안 루비콘 강을 건너 처음 로마로 군대를 들여보낸 사람을 울리우스 케이사르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술라가 소아시아의 폰토스 왕국을 정벌하러 간 사이 국외로 도망갔던 마리우스가 칸나오 다시 정권을 잡고, 똑같은 방식으로 술라 일파를 학살한다. 그럼에도 술라는 흔들림없이 천재적인 전략으로 2만 5천 정도의 병력으로 10만이 넘는 폰투스의 대군을 격파하고, 다시 로마로 돌아와 마리우스와 칸나를 제거한다.(이 때 이미 마리우스는 죽은 이후였다.) 그 후 술라의 독재가 이루어진다. 저자는 술라를 독재자로 묘사하기보다는 그가 로마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인물로 본다. 그 증거로 그가 로마의 원로원의 권한을 확실히 한 후 독재자의 권한을 내려 놓은 것을 든다.


술라가 죽은 후 그의 부장인 루클루스와 폼페이우스가 대립하지만, 결국 젊은 폼페이우스의 승리로 끝난다. 폼페이우스는 젊은 나이에 군대로 원로원을 압박해 집정관이 되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 저자는 원로원 체제를 공고히 하려고 했던 술라체제는 술라의 후계자들로 인해 막을 내렸다고 말한다.



이 책을 읽으며 어느 사회든 보수층과 진보층의 대립이 있음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대립은 대부분 부의 분배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부의 균형이 너무나 깨어지고, 그로 인해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 극대화되면 어느 사회이건 결국의 파국에 이를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당시 로마의 원로원을 비롯한 귀족계급들은 "세계는 이탈리아가 지배하고, 이탈리아는 로마가 지배하고, 로마는 원로원이 지배한다!"는 계층적 지배사상이 강했다. 로마제국의 확대로 더 이상 이 체제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사방에서 문제점이 드러나고 반란이 일어났지만, 보수층들은 수많은 개혁요구에도 이를 반대하며 끝내 체제를 지키려 했다. 그리고 그 체제의 옹호자가 바로 술라이다. 저자가 술라를 독재자로 보지 않는 이유도 이와같다. 그는 독재를 위해 독재를 한 것이 아니라, 체제를 지키기 위해 독재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술라 이후 이런 체제는 급속히 붕괴되고, 다시금 폼페이스나 카이사르같은 군사 독재자가 등장하게 하며, 결국은 역사상 보기 드문 고대 공화정정치가 막을 내리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저자가 이런 체제를 꼭 옹호하는 것만은 아니다. 저자는 체제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체제가 갖는 강점은 누가 실행자가 되더라도 그럭저럭 괜찮은 성과가 보장된다는 데 있다. 반대로 체제가 갖는 단점은, 그럭저럭 괜찮은 정도의 성과밖에 거둘 수 없는 현실이 패배로 이어지게 되는 경우, 공동체가 입을 수밖에 없는 실질적인 피해가 너무 크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체제에 충실할 수 있는 것은 평상시뿐이고, 비상시에는 아무리 체제에 충실하고 싶어도 현실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 사태가 벌어지기 쉽다. 그렇기 대문에 유연성을 갖는 체제 확립이 요구되는 것이지만, 이것처럼 어려운 일도 드물다. 예외는 또 다른 에외를 부르는 숙명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P238)


군국주의를 옹호하고, 힘의 논리를 지지한다는 비판으로 인해 시오노 나나미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3권만 읽어보았을 때는 로마 역사와 사회 문제를 정확히 꿰뚫고 있는 시각에는 놀라울 뿐이다. 또한 개인적으로 콜린 메컬로의 [마스터 오브 로마]와 비교했을 때 로마 체제의 찬양과 힘과 권력의 지배를 당연시 여기는 분위기는 콜린 메컬로가 더 강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둘 다 이런 부분에서 비판을 당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런 비판해도 불구하고 로마공화정의 붕괴과정을 보면서, 지금 세계화를 통해 극단적인 빈부격차로 홍역을 앓고 있는 우리사회가 깨달아야 할 부분이 분명히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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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를 읽는다 2부는 니체가 영향을 받았지만 대부분 후기에 들어 비판하거나 대립관계로 넘어간 당대의 학자들을 언급한다. 부르크하르트와 쇼펜하우어, 바그너, 다윈이다. 이 중 부르크하르트는 당대 그리스문화에 가장 정통한 학자였다는 것 외에는 개인적으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니체는 그리스 문화가 생명력이 넘치는 문화였으며, 그리스 신화의 비극적인 영웅들이 근대의 상처받는 약한 인간들이 아닌 고통에 맞서서 싸우는 강한 인간상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런 시각을 부르크하르트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니체에게 부르크하르트가 준 것 보다 더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니체가 주장하는 '디오니소스적인 것', 즉 생을 긍정하고 욕망하는 것은 쇼펜하우어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사실 쇼펜하우어의 세계관은 플라톤으로부터 칸트로 내려오는 정통적인 서양의 관념철학에 이어져 있다. 플라톤은 세계를 보여지는 현상계와 보여지지 않지만 이성으로 인식할 수 있는 '이데아'로 나누었다. 그리고 현상계는 허상일 뿐이고, 참다운 실재는 '이데아'의 세계라고 주장했다. 칸트에 이르러서는 현상계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인간의 인식 능력으로 보았다. 즉 칸트에게 있어서 현상계란 인간의 타고난 인식 능력(선천적 인식능력)인 시간과 공간 개념으로 인식되는 세계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계 너머에 시간과 공간으로 인식 되지 않는 근원적인 세계인 '물자체'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쇼펜하우어는 이런 시간과 공간으로 인식되는 세계를 '표상으로서의 세계'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표상으로서의 세계 너머에 시간과 공간으로 인식되지 않는 '의지로서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의지로서의 세계가 발현된 것로 그 발현된 객체 중 하나가 인간이다. 그리고 그 객체화된 인간은 의지의 발현인 '생의 의지'에 사로잡혀 있다고 보았다.


니체는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의 세계가 표상화된 객체에 부여해 준 '생의 의지'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이며, 이것이 예술로 발현된 것이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것은 부정해야 할 것이 아니라 긍정해야 할 것으로 본다. 반면 쇼펜하우어는 인간이 표상의 세계에 갇혀 자신만의 '생의 의지'에 사로 잡혀 있는 것이 고통의 근원으로 보고,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생의 의지'를 초월해 '의지로서의 세계'로 다가가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그에게 있어서 '의지으로서의 세계'는 플라톤으로부터 내려온 이데아의 세계와 같은 맥락을 가진다. 그러기에 니체는 초기에는 쇼펜하우어의 생의 의지를 찬양하다가, 후기에 이르러서는 이것을  비판한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니체는 쇼펜하우어가 인격신 따위의 허구적 관념을 끌어들이지 않고, 우리가 내면에서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생존에의 의지라는 원리에 입각하여 모든 현상을 설명하려고 하는 지적인 성실성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 니체는 무엇보다도 삶의 본질을 논리적으로 해명될 수 없고 도덕적인 것으로도 이해될 수 없는 의지로 보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받아들인다. (P108)


후기 니체에 있어서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악의에 찬 '천재적인 시도'다. 쇼펜하우어가 예술, 영웅주의, 아름다움, 인식비극에 대해서 '의지'를 부정하고 삶의 체념을 가르치는 것들로 보았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특히 예술이 사람들을 관조적인 인식의 상태에 빠지게 하면서 맹목적인 생존의지와 욕망에 의해서 내몰리는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위로수단이라고 본다. 쇼페하우어는 이러한 예술관을 니체는 '그리스도교를 제외하고 역사상 가장 엄청난 심리학적 날조'라고 평한다. (P110)


더 나아가 니체는 쇼펜하우어가 그리스도교적 해석의 상속자에 불과할 뿐이라고 평가한다. 쇼펜하우어는 그리스도교가 속된 것으로 거부했던 영웅주의, 천재, 아름다움, 인식, 비극을 받아들이면서도 그것들을 그리스도교적인 의미로, 다시 말해 대지와 삶을 부정하는 염세주의의 관점에서 시인한다. 즉 예술을 현실과 고통 그리고 생에서 벗어나 죽음과 같은 평안에 이르게 하는 구원의 길로서 시인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쇼펜하우어에게 예술은 일시적인 구원을 가져다 줄 뿐이다. 예술은 우리가 예술을 통해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순간에만 맹목적인 의지와 욕망으로부터 구원을 가져다 줄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욕망으로부터의 영원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금욕적인 행위를 통해서 욕망을 완전히 근절하고 부정해야만 한다고 본다. (P110-1)


개인적으로는 니체가 처음부터 쇼펜하우어의 '생의 의지'와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든다. 아니면 그의 사상이 발전되어 가면서 쇼펜하우와의 차이점을 발견하고 그와 결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건 둘의 사상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에게는 현실세계를 뛰어넘어 존재하는 '의지로서의 세계'가 있었고, 니체에게 그런 것을 주장하는 사람은 삶의 건강치 못하게 만드는 허상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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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외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지음 / 집문당 / 200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나라에서 쇼펜하우어처럼 오해받고 있는 철학자도 드물 것이다. 가장 흔한 오해가 염세주의자이며, 자살을 미화한 철학자라는 오해이다. 더불어 여성혐오주의자라는 비난도 받고 있다. 가끔 대화를 하다보면(특히 남자들이 심하다) 자신이 조금 아는 단편전인 지식으로 그 사람의 사상이나 인생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을 본다. 그로 인해 많은 사상가들이 오해와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쇼펜하우어도 그 중 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쇼펜하우어처럼 삶을 치열하게 살고, 인생에 대해서 진진하게 고민한 철학자는 드물 것이다. 그의 글 속에는 인생이란 비관하고, 자살로 끝낼 정도로 하찮은 것이 아니라, 무언가 목적을 발견하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야 하는 그 무엇이었다.  


안타까운 사실이 하나 더 있다. 비교적 이름이 많이 알려진 철학자이지만, 우리나라에 쇼펜하우어의 책들은 거이 번역이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책만 해도 내가 구입한지가 20년이 넘은 책이다. 요사이 니체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쇼펜하우어와의 관련성이 궁금해 책장 속 구석에서 찾아낸 책이다. 다행히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을 해 보니 아직까지도 출간되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은 한 권의 책이라기보다는 쇼펜하우어의 여러 글들을 묶어 놓은 책이다. 그의 저서나 논문의 글들을 주제적으로 발췌했기에 일관된 한 권의 책을 읽는 느낌은 가질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사상의 흐름을 주제별로 잘 묶어 놓아서, 그의 사상을 이해하기에는 매우 좋은 책이다. 번역자가 이렇게 편집한 것인지, 아니면 이렇게 편집된 또 다른 원서를 번역한 것인지는 알지 못하겠다.


우선 이 책은 쇼펜하우어의 대표적인 세계관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글들이 등장한다. 쇼펜하우어는 세상을 표상으로서의 세계와 의지로서의 세계로 나누었다. 이것은 플라톤으로부터 칸트까지 이어져 오는 세계관을 계승한 것이다. 플라톤은 눈에 보이는 '현실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성으로 볼 수 있는 '이데아의 세계'를 주장했다. 이런 플라톤의 사상은 서양철학에서 계속 발전되어 오다가 칸트에 이르러 '현상계'와 '물자체(Ding an sich)'로 이어진다. 특이한 것은 칸트는 현상계를 인식할 수 있는 도구로 선천적 인식능력인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과율 같은 것을 제시한다. 이것은 시간과 공간이 실제로 존재하기 보다는 인간의 타고난 인식능력이고, 이 시간과 공간으로 세상을 세상을 인식한다는 것이다.(이것을 인식의 전환이라고 해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시간과 공간 밖에 존재하는 것을 '물자체'라고 부른다. 따라서 물자체는 인간의 감각으로는 인식할 수 없는 대상이다.


쇼펜하우어는 칸트가 시간과 공간으로 인식될 수 있는 현상계와 물자체의 개념을 그대로 가지고 왔다. 그러나 현상계를 표상의 세계라고 부르고, 물자체를 의지의 세계라고 부른다. 표상의 세계란 시간과 공간으로 인식될 수 있는 세계이며, 의지의 세계는 물자체와 마찬가지로 시간과 공간 밖에 있어서 인간의 감각으로는 인식할 수 없는 세계이다. 그러나 이데아나 물자체가 현상계의 원인인 것처럼 의지의 세계가 표상의 세계의 원인이다. 따라서 인간 역시 표상의 세계의 일부분이며, 의지의 세계가 구현된 하나의 객체이다.


쇼편하우어가 말하는 인생의 고뇌와 고통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인생이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갇혀있기에 그 세계에서 욕망과 권태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눈에 보이는 표상의 세계 속에만 갇혀 있어 자신이 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오직 자신의 생존 욕구에만 메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생존과 그와 관련된 욕망에 고통 당하다가도 생존이 보장되면 다시금 권태에 고통당하게 된다. 결국 쇼펜하우어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인간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보았다.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모든 단계에 있어서 의지는 개인으로서 나타난다. 무한한 공간과 시간 속에서 인간은 유한한 존재에 불과하며, 따라서 자기가 투입된 저 어머어마하게 거대한 것과 대립되는 존재이다.

이 거대한 것은 끝이 없다. 인간은 단지 상대적인 존재라 그 존재가 언제부터 있으며 또 어디에 있는지 절대로 분명히 빌힐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장소나 존속되는 시간은 무한한 것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P51)


인간은 욕구가 구체화된 존재이며 몇 천을 헤아리는 욕망덩어리다. 이런 욕망을 걸머진 인간은 지상에 살면서 자기 욕망과 고통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확실성이 없다. 그리하여 날마다 봉착하는 어려운 일들을 걸머지고 그럭저럭 자기를 꾸려 나가기 위해 걱정에 싸여 있는 것이 대체로 인간의 생활내용이다. (P53)


살아 있는 모든 인간들이 힘쓰며, 그들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생존의 추구이다. 일단 생존이 확보되면 그들은 자기의 생존을 어떻게 다루어 나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들을 움직이는 제2의 것은 생존에의 쾌락에서 탈출하자, 여기에 무감각하게 되자, 시간을 죽이자, 즉 권태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한다. (P55)


쇼펜하우어는 아무리 큰 고통을 당하는 사람도, 아무리 큰 기쁨을 당하는 사람도, 모든 사람은 인생에서 일정한 양의 고통과 기쁨을 당할 뿐이라고 말한다. 개인의 노력으로 자신이 당하는 고통을 줄일 수도 없고, 자신이 당하는 기쁨을 증가시킬 수도 없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고통스러운 것도 나중에는 그 고통이 무뎌지고, 처음에는 기쁜 것도 나중이 되면 그 기쁨이 사라진다고 말한다. 결국 상황이 다르더라도 누리는 고통과 기쁨의 양은 비슷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쇼펜하우어가 염세주의자이며, 자살을 방관한다는 오해를 받는다. 삶을 이렇게 비관하고, 이런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살을 이야기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표상으로 세계에 갇혀 있는 인간이 그 세계 속에 순응하며 살거나, 좌절하는 삶을 바람직한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리고 그 표상 세계의 근원이 되는 의지의 세계에 발견하고 표상의 세계를 뛰어넘기를 원했다.


사실 이 부분부터가 개인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그는 의지의 세계로 가기 위해 표상을 뛰어넘는 예술의 세계와 개인의 생존의지를 뛰어넘는 도덕과 종교를 제시한다. 마치 초반의 화끈한 블랙버스터 영화가 후반에서는 너무 뻔한 결말을 내는 양상이다. 과연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의 세계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의지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 개인의 의지를 부정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 책만으로는 아직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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