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외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지음 / 집문당 / 200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나라에서 쇼펜하우어처럼 오해받고 있는 철학자도 드물 것이다. 가장 흔한 오해가 염세주의자이며, 자살을 미화한 철학자라는 오해이다. 더불어 여성혐오주의자라는 비난도 받고 있다. 가끔 대화를 하다보면(특히 남자들이 심하다) 자신이 조금 아는 단편전인 지식으로 그 사람의 사상이나 인생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을 본다. 그로 인해 많은 사상가들이 오해와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쇼펜하우어도 그 중 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쇼펜하우어처럼 삶을 치열하게 살고, 인생에 대해서 진진하게 고민한 철학자는 드물 것이다. 그의 글 속에는 인생이란 비관하고, 자살로 끝낼 정도로 하찮은 것이 아니라, 무언가 목적을 발견하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야 하는 그 무엇이었다.  


안타까운 사실이 하나 더 있다. 비교적 이름이 많이 알려진 철학자이지만, 우리나라에 쇼펜하우어의 책들은 거이 번역이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책만 해도 내가 구입한지가 20년이 넘은 책이다. 요사이 니체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쇼펜하우어와의 관련성이 궁금해 책장 속 구석에서 찾아낸 책이다. 다행히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을 해 보니 아직까지도 출간되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은 한 권의 책이라기보다는 쇼펜하우어의 여러 글들을 묶어 놓은 책이다. 그의 저서나 논문의 글들을 주제적으로 발췌했기에 일관된 한 권의 책을 읽는 느낌은 가질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사상의 흐름을 주제별로 잘 묶어 놓아서, 그의 사상을 이해하기에는 매우 좋은 책이다. 번역자가 이렇게 편집한 것인지, 아니면 이렇게 편집된 또 다른 원서를 번역한 것인지는 알지 못하겠다.


우선 이 책은 쇼펜하우어의 대표적인 세계관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글들이 등장한다. 쇼펜하우어는 세상을 표상으로서의 세계와 의지로서의 세계로 나누었다. 이것은 플라톤으로부터 칸트까지 이어져 오는 세계관을 계승한 것이다. 플라톤은 눈에 보이는 '현실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성으로 볼 수 있는 '이데아의 세계'를 주장했다. 이런 플라톤의 사상은 서양철학에서 계속 발전되어 오다가 칸트에 이르러 '현상계'와 '물자체(Ding an sich)'로 이어진다. 특이한 것은 칸트는 현상계를 인식할 수 있는 도구로 선천적 인식능력인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과율 같은 것을 제시한다. 이것은 시간과 공간이 실제로 존재하기 보다는 인간의 타고난 인식능력이고, 이 시간과 공간으로 세상을 세상을 인식한다는 것이다.(이것을 인식의 전환이라고 해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시간과 공간 밖에 존재하는 것을 '물자체'라고 부른다. 따라서 물자체는 인간의 감각으로는 인식할 수 없는 대상이다.


쇼펜하우어는 칸트가 시간과 공간으로 인식될 수 있는 현상계와 물자체의 개념을 그대로 가지고 왔다. 그러나 현상계를 표상의 세계라고 부르고, 물자체를 의지의 세계라고 부른다. 표상의 세계란 시간과 공간으로 인식될 수 있는 세계이며, 의지의 세계는 물자체와 마찬가지로 시간과 공간 밖에 있어서 인간의 감각으로는 인식할 수 없는 세계이다. 그러나 이데아나 물자체가 현상계의 원인인 것처럼 의지의 세계가 표상의 세계의 원인이다. 따라서 인간 역시 표상의 세계의 일부분이며, 의지의 세계가 구현된 하나의 객체이다.


쇼편하우어가 말하는 인생의 고뇌와 고통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인생이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갇혀있기에 그 세계에서 욕망과 권태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눈에 보이는 표상의 세계 속에만 갇혀 있어 자신이 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오직 자신의 생존 욕구에만 메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생존과 그와 관련된 욕망에 고통 당하다가도 생존이 보장되면 다시금 권태에 고통당하게 된다. 결국 쇼펜하우어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인간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보았다.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모든 단계에 있어서 의지는 개인으로서 나타난다. 무한한 공간과 시간 속에서 인간은 유한한 존재에 불과하며, 따라서 자기가 투입된 저 어머어마하게 거대한 것과 대립되는 존재이다.

이 거대한 것은 끝이 없다. 인간은 단지 상대적인 존재라 그 존재가 언제부터 있으며 또 어디에 있는지 절대로 분명히 빌힐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장소나 존속되는 시간은 무한한 것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P51)


인간은 욕구가 구체화된 존재이며 몇 천을 헤아리는 욕망덩어리다. 이런 욕망을 걸머진 인간은 지상에 살면서 자기 욕망과 고통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확실성이 없다. 그리하여 날마다 봉착하는 어려운 일들을 걸머지고 그럭저럭 자기를 꾸려 나가기 위해 걱정에 싸여 있는 것이 대체로 인간의 생활내용이다. (P53)


살아 있는 모든 인간들이 힘쓰며, 그들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생존의 추구이다. 일단 생존이 확보되면 그들은 자기의 생존을 어떻게 다루어 나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들을 움직이는 제2의 것은 생존에의 쾌락에서 탈출하자, 여기에 무감각하게 되자, 시간을 죽이자, 즉 권태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한다. (P55)


쇼펜하우어는 아무리 큰 고통을 당하는 사람도, 아무리 큰 기쁨을 당하는 사람도, 모든 사람은 인생에서 일정한 양의 고통과 기쁨을 당할 뿐이라고 말한다. 개인의 노력으로 자신이 당하는 고통을 줄일 수도 없고, 자신이 당하는 기쁨을 증가시킬 수도 없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고통스러운 것도 나중에는 그 고통이 무뎌지고, 처음에는 기쁜 것도 나중이 되면 그 기쁨이 사라진다고 말한다. 결국 상황이 다르더라도 누리는 고통과 기쁨의 양은 비슷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쇼펜하우어가 염세주의자이며, 자살을 방관한다는 오해를 받는다. 삶을 이렇게 비관하고, 이런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살을 이야기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표상으로 세계에 갇혀 있는 인간이 그 세계 속에 순응하며 살거나, 좌절하는 삶을 바람직한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리고 그 표상 세계의 근원이 되는 의지의 세계에 발견하고 표상의 세계를 뛰어넘기를 원했다.


사실 이 부분부터가 개인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그는 의지의 세계로 가기 위해 표상을 뛰어넘는 예술의 세계와 개인의 생존의지를 뛰어넘는 도덕과 종교를 제시한다. 마치 초반의 화끈한 블랙버스터 영화가 후반에서는 너무 뻔한 결말을 내는 양상이다. 과연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의 세계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의지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 개인의 의지를 부정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 책만으로는 아직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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