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지식]의 시작은 데리다 특유의 아름답지만 조금은 모호한 아포리즘적인 문장으로 시작한다.


어떻게 '종교를 말할 것인가?' 종교에 대해서? 오늘날, 특별히 종교에 대해서? 이날 어떻게 두려움이나 떨림없이 그것에 대해 감히 단수로 말할 것인가? 게다가 그토록 적게, 그리고 그토록 빨리? 과연 누가 대담하게 그것이 식별 가능한 동시에 새로운 주제라고 호언할 수 있을까? 과연 누가 오만하게 거기에다 몇몇 아포리즘을 맞춰 넣을 수 있을까? 이에 필요한 대담함, 오만함 혹은 공평무사함을 갖추기 위해서는 어쩌면 잠시 동안 어떤 특정한 추상을 행하는 척해야만 한다. 추상화하는, 모든 것을 추상화하는, 혹은 거의 모든 것을 추상화 하는 추상, 어쩌면 추상들 가운데 가장 구체적이고 가장 손쉬운 것에, 하지만 동시에 가장 황량한 것에 내기를 걸어야 한다. - [신앙과 지식] 중에서


여기서 데리다가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는 것은 '추상'이나 '추상화'라는 단어이다. 한 마디로 추상화 하는 방법으로 종교에 대해서 사유하겠다는 것이다. 결국 어렵고 난해한 데리다의 이 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추상화 하기'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안타깝게도 개인적으로는 데리다와 같은 해체 철학자들이 비판하는 플라톤식 사고에 집착하기에 데리다의 글을 이해하기도 쉽지않고, 그의 언어를 마구 해체하는 손놀림을 따라가기도 버겁다. 다만 개인적으로 이해한 '추상하기'는 다른 말로 하면 '칸트의 이성 안에서의 사유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앞에서 데리다는 종교에 대한 헤겔의 사변적 방법보다는 칸트의 도덕적 방법을 택했다고 말을 햇다. 그리고 칸트의 도덕적 방법이란 종교를 이성의 한계 안에서 사유하는 것이다. 칸트 이전에는 이성과 신앙은 서로 대립하는 개념이었다. 그러나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인간은 감성과 오성이라는 선천적 인식능력을 가지고 태어났고, 신앙적인 것은 인간의 인식능력 밖에 있다고 말을 한다. 다만 인간의 이성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인간 안에 있는 '도덕능력'뿐이다. 이 책의 번역자는 이것을 '칸트식 선긋기'라고 말한다. 결국 칸트에게 있어서 신앙적인 것은 말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순수이성의 명령) 그리고 말해질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실천이성의 명령) 결국 우리는 이성의 범위 안에서만 말을 하고 사유할 수 있다. 이것을 추상적으로 사유한다고 한다. 이 추상적으로 사유하기의 반대는 구체적이 아닌, 전체적이라고 말한다.(P36) 결국 추상적인 사유는 부분적으로 사유하는 것이다. 전체에서 부분을 떼어내어 사유하는 것이 추상적 사유이다. 그리고 이것이 데리다식의 해체적인 사유이다.


그렇다면 추상적인 사유로 종교를 사유한다는 것, 데리다식의 해체식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선은 데리다의 말을 통해 그 방법의 대략만을 짐작할 뿐이다. 


 

 

오늘날 종교를 추상적으로 사유하기 위해 우리는 이러한 추상의 힘에서 출발하여 위험을 무릎쓰고 다음과 같은 가설을 제시하고자 한다. 즉 이 모든 추상과 분리의 힘들 (뿌리뽑기, 탈지역화, 탈육화, 형식화, 보편화하는 도식화, 객관화, 원거리 커뮤니케이션 등)의 견지에서 보자면, '종교'는 그것에 반하는 적대와 동시에 그것을 재인정하려는 경쟁적 부추김 가운데 존재한다. 거기는 지식과 신앙이, 말하자면 한편으로(자본주의적이고 신탁적인) 과학기술과 다른 한편의 믿음, 신용, 신뢰성, 신앙 행위가 항상 그 장소 안에서 그들의 적과 동맹을 결성하고 이해관계를 같이 하게 될 바로 그런 곳이다. 거기서 아포리아 - 길, 방도, 출구, 구원의 어떤 부재 - 와 두 가지 원천이 유래한다. - [신앙과 지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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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넷에서 출간한 데리다의 신앙과 지식이라는 책의 앞 부분에는 이 책의 역자인 쓴 해제가 실려있다. 이 해제의 제목은 '데리다의 오늘, 오늘의 데리다'이다. 역자는 이 해제에서 데리다가 [신앙과 지식]에서 언급한 기존 사상가의 책의 내용과 데리다의 사상을 비교하고 있다. 사실상 데리다의 [신앙과 지식]이라는 책을 이해하는데에 필수적인 요소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제일 먼저 언급된 책은 헤겔의 [믿음과 지식]이다. (역자의 글에서는 이 책을 '신앙과 지식'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데리다의 책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한국에서 번역된 제목인 '믿음과 지식'이라고 나름대로 바꾸어 부르기로 햇다.) 헤겔이 [믿음과 지식]에서 추구한 종교는 '사변성'이다. 그는 칸트 이후의 계몽주의 사상이 종교를 해석함에 있어 이성으로만 해석하려는 경향을 비판하고, 이성의 안에 가두는 종교는 제대로 된 종교가 아니라고 말하며, 경험적인 종교를 사변적인 종교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두 번째 언급된 책은 칸트의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이다. 칸트가 추구한 종교는 '도덕성'이다. 사실 칸트가 헤겔 이전의 철학자이고, 헤겔의 종교에 대한 사상은 주로 칸트의 종교에 대한 사상에 대한 비판이다. 그럼에도 역자는 헤겔의 사상을 먼저 언급한 후에 칸트의 사상을 언급한다. 그것은 데리다가 헤겔의 사상 보다는 이성의 한계 안에서 종교를 해석하려 한 칸트의 사상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칸트는 신의 존재나 초월적인 것에 대한 탐구는 이성 밖으 것으로 보고, 이성 안에서 종교를 탐구하려고 했다. 그리고 이성 안에 있는 것은 신의 존재에 대한 것이 아니라. 칸트가 주로 선의지나 정언명령 등으로 언급한 인간 안에 있는 도덕성이었다.


세 번째 언급된 책은 베그르송의 [도덕과 종교의 원천]이다. 베르그송의 추구한 종교는 '신비성'이다. 베르그송은 종교의 두 가지 원천을 닫힌것과 열린것, 동적인 것과 정적인 것으로 구분하고, 기독교를 전자에서 후자로 나가는 과정으로 보았다.


데리다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도 어급한다. 데리다는 이 세가지 사상가 모두 기독교적인 종교에만 갇혀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세 사상가를 뛰어넘은 사상가를 하이데거로 보았다.


기독교는 한계의 철학자 칸트에게는 유일한 도덕적 종교였고, 전체성의 철학자 헤겔에게는 사변적으로 재건되야 할 수난의 종교였으며, 생명의 철학자 베르그송에게는 정적 종교에서 동적 종교로의 도약에 성공한 유일한 신비의 종교였다. 데리다 텍스트의 제목에 기입된 세 명의 저자 모두에게 기독교는 범례이자 예외였던 것이다. - 중략 - 그렇다면 기독교적 예외에서 벗어나 종교를 사유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ㄹ일까? 데리다가 보기에 마르크스에서 니체, 프로이트로 이어지는 계열에서 가장 멀리 나간 사상가는 하이데거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기독교적 모티브를 제거함으로써 존재신학 너머의 길을 제시하고자 한다. - 본문 중에서-


해제를 읽으면서 데리다가 [신앙과 지식]에서 언급하려는 방향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다. 데리다는 그동안 플라톤적 사고로 지배했던 형이상학적이고 이분법적인 시각에서 종교를 바라보는 것 대신, 칸트의 이성과 신앙의 선긋기의 시각에서 종교를 바라보고자 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즉 신비적이고 사변적인 것을 제거하고 현상 안에서 종교를 보려는 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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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와후와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10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 비채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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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와 하루키의 에세이에서 대부분의 삽화를 담당한 안자이 미즈마루가 쓴 고양이에 관한 책이다. 하루키의 고양이 사랑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하루키의 소설 속의 공간은 대부분 두 개의 세계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현실의 세계이다. 이 세계는 가혹하고 냉철하며, 인간성을 말살해 가는 세계이다. 또 하나는 상실의 세계이다. 이 세계는 잃어버린 세계이다. 그러나 후자의 세계는 항상 하루티의 소설 속에서 모호하게 그려진다. 그럼에도 하루키의 소설에서는 진하게 그 세계를 그리워한다. 하루키의 소설 속에서는 이런 현실의 세계와 상실의 세계를 이어주는 해 주는 것이 고양이이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태엽갑는 새]라는 작품이다.


그만큼 하루키의 소설에서 고양이는 절대적인 존재이다. 이 책을 읽다보며 하루키의 고양이에 대한 추억을 읽을 수가 있다.



"나는 온 세상의 고양이를 다 좋아하지만,

지상에 사는 모든 종류의 고양이 중에서도

늙고 커다란 암고양이를

가장 좋아한다." - [후와 후와] 중에서



"고양이털은 이미 해의 온기를 잔뜩

머금은 채, 생명이란 것의

(아마도) 가장 아름다운 부분에 관해

내게 가르쳐준다." - [후와후와] 중에서



"그 고양이는 폭신폭신하고 완벽하게 아름다운

털을 가졌다. 그 털은 아주 옛날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하늘에 떠 있는)

해의 온기를 한껏 빨아들이고,

반짝반짝 눈부시게 빛났다."- [후와후와] 중에서

 


 


예전의 하루키의 에세이집처럼 글이 많거나 그림이 많은 것은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마치 어린이 동화책과 같은 분위기를 내는 책이다. 마치 한 편의 긴 시와 함께 그림이 곁들인 책과 같은 분위기도 낸다. 하루키와 안자이 미즈마루의 조합은 그동안 계속 되어 왔었다. 무언가 초등학생 분위기가 나면서도 심오함이 담겨있는 안자이 미즈마루의 그림들을 좋아한다. 우리 나라 '이말년 작가'가 생각나기도 한다. 아래는 전에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무라카미 하루키와 '안자이 미즈마루'의 조합이 담김 에세이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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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에 나는 근대와 현대의 서양철학을 신의 존재를 배제한 도덕을 세우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생각했다. 신의 존재를 믿으면 도덕에 대한 논의는 매우 간단하다.


"신이 존재한다. 그리고 신의 뜻대로 사는 자에게는 죽은 후에 보상을 받는다. 따라서 이 땅에 사는 동안 신의 뜻대로 도덕적으로 살아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신의 존재를 빼면 그동안 쌓았던 도덕의 틀은 다 무너지고 만다. 그리고 나타나는 것은 혼돈과 공황상태이다. 19세기말 유럽은 이런 정신적인 혼란이 세계를 지배하게 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까라마조프가네형제들]의 이반의 말처럼 "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모든 것은 허용된다!'는 생각이 당시 유럽의 지성인들의 생각이었다. 결국 철학자들은 이런 혼돈에서 도덕을 세워야 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칸트와 헤겔이다.(이 책에서는 베르그송까지 같은 범주에 넣고 있는데, 안타깝게도 아직 베르그송의 책은 접해보지 못했다.) 그들은 신의 존재 대신 절대이성이나, 선의지같은 개념을 통해 인간이 도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했다.


젊은 시절 나는 이들의 사상에 매료되었다. 특히 칸트의 사상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인간 감성과 오성 너머에 있는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대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의지를 통한 도덕적인 삶을 추구하는 그의 사랑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이 책에서 역자가 쓴 '독서카드'라고 이름 붙은 서문에는 칸트가 계몽(이성)과 종교 간에 선 긋기를 했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말 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해야 한다'는 것은 순수이성의 명령이다. '말해서는 안 되는 것에 대해 침묵해야 한다'는 것은 실천이성의 명령이다. 칸트의 계몽은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는 정식이 부여한 한계 안에서만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계몽의 이러한 한계가 궁극적으로 칸트가 옹오화고자 했던 한계로서의, 한계 긋기로서의 계몽이 아니겠는가? - [데리다의 오늘, 오늘의 데리다] 중에서 P25


그러나 칸트의 사상은 마치 출구를 찾지 못하는 고성과 같았다. 일단 멋지게 보여서 한 번 들어가면 너무나 복잡한 내부의 구조때문에 출구를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그 복잡한 고성에서 출구를 찾는 것을 포기했다. 아니면 어렴풋이 먼 곳에서 출구를 보고, 그 출구가 내가 생각했던 화려한 출구가 아닌 너무나 초라한 출구여서 무시햇는지도 모르겠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데리다의 [신앙과 지식]이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다. 이 책은 1994년 이스라엘의 헤브론시의 사원에서 이스라엘 극우 단체 소속의 의사가 팔레스카인 40명을 학살하는 '헤브론 사건' 이후 자크 데리다와 잔니 바티모가 카프리 섬에서 공동 주관한 세미나를 정리하여 출간한 것이다. 그는 극단적인 종교의 대립에서 출구를 찾고자 세 권의 고전을 해석한다. 헤겔의 [신앙과 지식], 칸트의 [순전한 이성의 한계 안에서 종교], 베르그송의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이다. 데리다는 이 세 명의 철학자를 어떻게 해석했을까? 그리고 그들의 저서에서 어떤 답을 찾았을까? 이제부터 읽을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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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우리나라에 '질 들뢰즤'의 철학이 한참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들뢰즈이 [천개의 고원]이 출간되고, 그 후 한국 학자가 들뢰즤의 책을 해석한 [노마디즘]이란 책이 출간되었다. 철학책을 완독하기보다는 소장하기를 더 좋아하는 개인적 성향으로 인해 얼른 이 책들을 구입했었고, 여러 차례 읽기를 시도했지만 끝내 포기했다. 내용도 어렵거니와 방대한 분량, 그리고 마침 그 시기에 밀어닥치는 일들로 인해 집중해서 읽을 수가 없었다. 그 후 이 책들은 내 책꽃이 맨 위에 꽃인 채로 나의 오래된 숙제가 되었다.


[니체를 읽는다]라는 책의 부제는 '막스 셸러에서 들뢰즈까지'이다. 니체에 대한 여러 해석자의 사상을 제시하며 '들뢰즈'의 사상을 맨 마지막에 놓고 있다. 들뢰즈의 이름을 발견하는 순간부터 니체의 사상이 여러 철학가들에게 해석되고, 들뢰즈까지 이르는 과정이 매우 기대가 되었다. 그러나 들뢰즈에 이르는 순간, 역시 들뢰즈의 사상은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시금 들뢰즈에 대한 숙제가 생각나게 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 책에서는 니체에 대한 들뢰즈의 해석을 '힘에의 의지'와 '영원회귀' 부분에 초점을 두고 설명하고 있다. 들뢰즈는 힘을 '능동적인 힘'과 '수동적인 힘'으로 나눈다. 능동적인 힘은 스스로 가치를 만들어 가고 세워가는 힘이라면, 수동적인 힘은 타인의 힘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로 인해 능동적인 힘이 생의 다양성을 긍정한다면, 수동적인 힘은 이것을 부정한다.


능동적인 힘과 반동적인 힘의 차이는 양적인 것만이 아니라 질적인 차이이며 유형론적인 차이에 해당한다. 그것은 생과 세계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다른 태도를 취하는 힘에의 의지에 입각한다. 능동적인 힘은 생의 고통과 즐거움 그리고 다양성을 긍정하는 힘에의 의지에서 비롯되는 반면에, 반동적인 힘은 생의 고통과 즐거움 그리고 당야서을 부정하는 힘에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생의 고통과 즐거움 그리고 다양성을 긍정하는 힘에의 의지는 건강하고 진정한 것임에 반해서, 생의 고통과 즐거움 그리고 다양성을 부정하는 힘에의 의지는 병약하고 왜곡된 것이다. - [니체를 읽는다] 중에서 P272-3


영원회귀 역시 마찬가지이다. 들뢰즈가 해석한 니체의 영원회귀는 똑같은 삶의 반복이 아니다. 들뢰즈에게 있어서 영원회귀는 매 순간 다른 삶이며, 능동적인 힘을 가진 사람은 매 순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다. 그에게 세상은 다양성과 우연성들로 넘쳐나며, 우주는 목적성이 없다. 그에게 삶이란 게임이며, 세상이란 놀이터이다.


이에 대해 우주가 아무런 목적도 없다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우주 안에서 잘 놀기 위해서 필요한 확실성이다. 모든 놀이는 그때그때 주어지는 사건을 우연적인 것으로 보는 것과 동시에 예측할 수 없고 소망되는 것으로 보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숙명적이고 필연적인 것으로 보면서 긍정하고 사랑할 때 진정으로 행해질 수 있다. 우연적인 것들은 필연적인 것으로서 모두 서로 연결되 있다. 따라서 진정한 놀이꾼은 개연적이 아니라 숙명적이고 필연적인 수를 긍정하기 위하여 바로 우연의 전체를 긍정하는 것이 필연적이라는 것을 안다. - [니체를 읽는다] 중에서 P284-5


사실 이 책에 나온 들뢰즈의 니체에 대한 해석에 대한 분량은 16페이지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이 짧은 분량으로는 들뢰즈가 니체를 어떻게 해석했는지 완전히 이해하는 것을 불가능하고, 들뢰즈의 사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더군다나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 들뢰즈를 비롯한 많은 현대학자들이 니체의 철학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대해 접하면서 니체를 바라보는 다양성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는 어떤 철학을 접할 때 자신이 가지고 있는 틀과 경험으로 그 철학을 해석한다. 그러기에 일단 철학은 개인의 영역으로 들어가 해석이라는 과정을 거치면 왜곡되고 뒤틀릴 수밖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런 왜곡되고 뒤틀리는 과정을 최소화하는 것은 다른 사상가들의 글들을 접하면서 다양한 해석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니체를 읽는다]라는 작은 책을 통해 니체를 향한 나의 생각이 넓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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