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브레스트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3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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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남들에게 말하기 꺼려하는 크고 작은 아픔들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 아픔들이 들어나지 않게 가슴 깊은 곳에 꼭꼭 싸메어 두지만, 그 아픔들은 때로는 예기치 못하게 튀어나온다.

사람과의 대화에서, 일상적인 삶에서, 꿈에서, 그리고 때로는 가학적인 행동이나 범죄같은 최악의 상황으로...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이런 어두운 아픔들을 대면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아픔들은 단순히 개인의 가슴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에도 골짜기, 골짜기마다 이런 아픔들이 있다.

어느 민족이든지 그들의 역사 골짜기에는 타국인들이 모르는 어두운 아픔들이 숨겨져 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이 아픔들이 튀어 나올 때가 있다.

그때 우리는 이 역사의 아픔들과 어떻게 대면해야 할까?

 

이제는 한국에서도 유명인이 된 노르웨이의 '해리 홀레' 시리즈의 작가 '요네스뵈'가 이번에는 노르웨이의 어두운 역사를 드러내고 있다.

그동안 읽은 해리홀레 시리즈는 알콜중독자이자, 사고로 동료를 죽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해리의 어두운 내면을 잘 묘사하고 있었다.

해리 홀레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이자, 오슬로 삼부작의 첫 번째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 [레드브레스트]는 다른 작품과는 달리 해리의 어두운 내면 대신 노르웨이의 어두운 역사를 이야기 한다.

 

 

이 소설은 다른 두 시간대와 장소에서 번걸아가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첫 번째는 새로운 밀레니엄을 앞두고 있는 20세기의 마지막 해인 1999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시작된다.

새로운 세기를 앞두고 노르웨이는 어수선하고, 신나치주의자들의 폭행과 위협이 증가하고 있다.

형사 홀래는 새로 파트너가 된 엘렌이라는 여성 형사의 보살핌?을 받으며 형사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해 가고 있다.

그는 미국 대통령 경호에 배치되었다가 미국 경호원을 쏘는 실수를 저지르고, 그 실수를 덮으려는 윗선의 배려로 국가정보국에 근무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매르클린 라이플'이라는 소총이 암거래상을 통해 노르웨이로 반입된 정보를 입수한다.

'매르클린 라이플'은 사냥용으로 개발되었으나, 왠만한 방탕복 정도는 그냥 통과해 버리는 놀라운 파괴력으로 인해 300정만 생산되고 판매가 금지 되었다.

그리고 생산된 대부분의 총은 고가에 살인청부업자나 테러단체들에게 거래되고 있었다.

해리는 이 총이 무언가 불순한 의도로 구입된 정황을 파악하고, 이 총을 누가 구입했는지에 쫒는다.

해리는 이 총을 판매한 무기상을 만나 한 노인이 자신도 한 때 독일의 '젠하임'이란 곳에 거주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젠하임'은 2차 세계대전때 독일군에 입대한 노르웨이 병사들이 훈련을 받던 장소였다.

해리는 과거의 '젠하임'에서 훈련 받은 과거 노르웨이 병사들을 조사하며 범인을 추적한다.

 

 

두 번째는 2차 세계 대전이 한참인 1942년 치열한 소련의 동부 전선에서 소련군과 대치하고 있는 노르웨이 진지에서 시작된다.

이들은 독일군에 자원입대한 노르웨이 병사로서 히틀러가 스탈린과 공산주의를 물리쳐 줄 것으로 기대하고 전쟁에 임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은 점점 불리하게 전개되고, 노르웨이 병사들은 참혹하게 죽어만 간다.

그 곳에서 '다니엘 구데손'이란 인물은 명사격 실력과 대담함으로 노르웨이 군대에서 영웅 취급을 받는다.

그리고 그를 존경하는 '구드브란 요한센'과 그를 시샘하는 '신드레 피우케'도 함께 근무하고 있다.

전쟁 중 소련군의 저격으로 다니엘은 죽고, 그 후 진영에 떨어진 수류탄으로 나머지는 부상을 당하고 후송된다.

그리고 이야기는 오스트리아의 한 병원에서 '우리야'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한 남자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결국 이야기는 우리야가 유력한 범죄자이며, 그가 다니엘인지, 구드브란인지, 신드레인지를 계속해서 묻는다.

그리고 계속되는 반전으로 그가 누구인지는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밝혀진다.

 

소설이 전개되면서 노르웨이의 어두운 역사가 드러난다.

당시 독일의 군국주의와 소련의 공산주의에 동시에 위협을 받던 노르웨이는, 독일에 점령을 당하자 이 것이 오히려 소련의 침공을 물리치는 기회로 여긴다.

그로인해 1만명 이상의 많은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독일 군대에 입대해 소련과 싸우게 된다.

전쟁이 끝난 후 노르웨이 왕가와 정치자가들, 그리고 대부분의 국민들은 자신들이 끝까지 독일의 제국주의와 맞서 싸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이들을 매국노로 몰아 재판을 받게 한다.

요네스뵈는 소설을 통해 당시 대부분의 노르웨이의 사람들이 독일을 지지했고, 소련과 맞서 싸워야 한다는 대의에 동참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노르웨이의 역사는 소련의 동부전선에서 싸웠던 노르웨이의 병사들을 어두운 역사의 계곡 속에 묻었다.

그리고 그 계곡 속에 묻힌 한 노병이 죽기 전에 마지막 대의를 위해 메르클린 소총을 들고 나타난다.

 

 

개인의 어두운 내면만을 그리던 작가가 노르웨이 역사의 어두운 면을 그려내는 솜씨 또한 일품이다.

대부분의 스릴러는 읽는 순간 무척 흥미를 가지고 읽지만, 읽은 후에는 기억에 남는 것이 별로 없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요네스뵈의 소설은 읽은 후에도 계속 무언가를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주인공 해리뿐만 아니라 범죄자에 대해서도 연민을 가지게 한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소설은 더 범죄자에게 연민을 느끼게 한다.

그 시대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그것이 나라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다고...

어쩌면 변명처럼 들리는 이야기일수 있지만, 그래도 그들의 아픔을 끝까지 들어줘야 하지 않을까?

자신의 어두운 내면 역시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듯이, 아픈 역사 역시 자신의 역사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역사'라는 주제로 인해 뒤숭숭한 시점에서 매우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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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눈이 내려 눈 구경하러 뒷산에 올랐네요.
기대만큼 눈이 없어서 실망했네요.
아이젠도 거추장스러워 중간에 벗어 버렸습니다.
올 해는 눈 밟고 등산하기가 쉽지 않네요.
마지막 사진은 등산 후 책 읽으러 자주 가는 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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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16-01-15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등산 후 독서, 신선한 조합이군요.
가을남자 님께 경외심이 생깁니다.

가을벚꽃 2016-01-15 23: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경외심까지는ㅎㅎ 따스한 때는 등산로 주변의 벤치에 앉아서 책을 읽곤 했는데 요즘엔 커피숍에 들어가야 할 날씨네요... 오늘은 옆자리 아줌마들 수다에 별로 많이 읽지는 못했네요^^
 
박쥐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1
요 네스뵈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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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란 과거의 충격인 사건이 현실에서 계속해서 반복해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트라우마는 주로 죽음이나 성적인 것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그 죽음과 성적인 것은 밑낯을 보기를 꺼려해서 그것을 덮어둔다.

그런 일이 없었던듯이 기억에서 잊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트라우마는 불청객처럼 밤에 꿈으로, 또는 갑작스러운 이미지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트라우마는 우리 안에서 자신의 자아와 끊임없는 싸움을 걸어온다.

계속해서 우리의 자아를 침범해 자신의 영역 속으로 넣고 싶어한다.

결국 트라우마와의 싸움에서 지는 사람은 그 트라우마에 잠식되어, 평생을 그 트라우마의 노예로 살게된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은 모두 크고 작은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고, 그 트라우마와 외면하거나 싸우는 사람이다.

 

 

해리 홀레.......

얼마 전 [네메시스]라는 작품을 2미터 장신의 매력적인 노르웨이의 형사를 만났다.

겉보기와 달리 그는 알콜중독에 시달리며 끊임없이 자신 안의 어둠과 싸우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사건의 해결을 위해 몸부림치며 달려간다.

이 매력적인 주인공에 대해 더 알고 싶어 그의 탄생을 다루고 있는 해리 홀레 시리즈의 첫 작품인 [박쥐]를 읽게 되었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게 이 책에는 해리 홀레를 잡고 놔주지 않는 그의 어두운 과거를 이야기 해 주고 있다.

그는 한 때 알콜 중독에 빠져있었고, 동료들의 비호 속에 형사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술에 취해 자동차로 범인을 쫒던 중 사고로 인해 옆의 동료를 죽게 한다.

경찰서에서는 해리를 보호하기 위해 죽은 동료가 운전한 것으로 사건을 포장한다.

결국 해리는 동료를 죽이고서도 표창까지 받고 경찰로 복귀한다.

그러나 그의 안의 어두운 과거는 끊임없이 그를 괴롭히고, 알콜이라는 이미지로 그를 놔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그 어두운 과거와 싸우기를 결정한다.

 

그 후로 몇칠간 해리는 모든 감정과 한꺼번에 맞붙어 싸우는 건 결코 좋은 전략이 아니라는 걸 깨우쳤다. 첫째, 그는 스스로 어떤 감정인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어쨌든 전체적인 그림을 모르는 상태였으므로 생전 본 적이 없는 괴물과 맞붙어 싸우는 기분이었다. 둘째, 이길 가능성을 높이려면 소규모 전투로 쪼개서 어느 정도 적을 파악하고 적의 약점을 알아낸 다음 서서히 무너뜨려야 했다. 파쇄기에 종이를 넣는 것과 같았다. 한꺼번에 너무 많이 집어 넣으면 기계가 공황상태에 빠져 기침을 하고 쾅쾅거리다 먹퉁이 된다. 결국, 다시 시작해야 했다. P 388

 

 

이 책에서는 이런 어둠을 간직한 노르웨이 형사가 조금은 엉성한 모습으로 시드니 공항에 내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얼마전 '잉게르 홀테르'라는 금발의 노르웨이 여성이 목에 졸린채 변사채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호주 수사국과 공조수사를 하기 위해 시드니에 파견된 것이다.

그를 맞는 사람은 또 하나의 어두운 과거를 가지고 있는 애버리진이라 불리는 호주 원주민 출신의 형사 '앤드류 켄싱턴'이다.

 

호주는 계속해서 원주민들을 학대했고, 그에 대한 나름대로 보상책으로 1950년대부터는 원주민 아이들을 강제로 입양시키거나 고아원에 보내 현대식 교육을 시켰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대부분 정체성을 찾지 못해 자기 파멸의 길로 접어 들었다.

앤드류는 그 파멸의 과정을 극복하고 훌륭한 형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둘은 수사를 하면서 죽은 잉게르의 사진 속에 남자 친구이자, 마약상인 '에반스 화이트'를 범인으로 지목한다.

그런데 수사를 하는 과정에서 앤드류는 애버리진 친구인 '오토'와 '투움바'를 소개한다.

오토는 동성애자로 서커스 무대 연극을 하고, 투움바는 앤드류를 아버지처럼 따르는 촉망받는 권투선수이다.

그냥 지나가는 인물로만 생각하던 두 사람이 나중에 사건을 푸는 결정적인 열쇠가 된다. (그 이상은 스포가 됨으로 생략.)

 

또한 수사의 과정에서 죽은 잉게르의 친구인 빨간머리의 아름다운 스웨덴 여성인 비르키타를 만난다.

해리와 비르키타는 곧 사랑하는 사이가 되고, 비르키타는 해리의 어두운 과거를 들어주며 그의 상처를 어루만져 준다.

그럼에도 해리는 끊임없이 과거의 트라우마에 시달리거나, 헤어진 여인인 환영에 시달린다.

 

단순한 강간 살인으로 알았던 사건은 결국 금발의 여인만을 노리는 연쇄살인범 사건으로 확대되고, 그 과정에서 범인으로 지목했던 에반스는 완벽한 알리바이를 제시한다.

또한 오토가 살해를 당하고, 앤드류까지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해리를 앤드류가 범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 빠지게 된다.

결국 무리한 수사로 비르키타까지 해리를 떠나게 되자, 해리는 다시금 알콜에 빠져서 바닥으로 떨어지게 된다.

 

 

처음 이 소설을 읽을 때는 호주의 환경과 관광지, 그리고 호주 원주민의 전설이나 과거 등을 소개하는 글이 많아서 스토리에 몰입할 수가 없었다.

이것이 작가의 처녀작의 한계인가?라는 생각이 들무렵, 소설은 조금씩 속도를 내어가고, 중간부분부터는 주체할 수 없는 몰입감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그렇지만, 이 책도 끝까지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져지 않고, 몇 번의 반전이 계속된다.

호주의 주변 환경과 원주민의 전설, 해리의 어두운 심리 등을 완벽하게 엮어서 스토리를 만들어 내는 작가의 솜씨에 감탄을 했다.

첫 소설을 이렇게 섰다는 건 작가가 천재라는 말로 밖에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 소설은 단순히 스토리뿐만 아니라 주변 환경이나 상황, 인물의 심리까지 완벽히 묘사를 해 나간다.

소설에서 해리가 자신의 연인인 비르키타를 상자 해파리에 비유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얼마 후 죽은 비르키타의 모습을 해파리의 모습으로 묘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두 묘사가 하나의 연결점을 이루며 섬뜩한 미학으로 다가올 때, 작가의 묘사력에 혀를 내둘렀다.

 

 

"넌 무슨 해파리처럼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흩날려...... 내 얼굴까지 (P353)"

 

지금 해리는 달리는 찬 안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눈을 감자 그가 바닷속을 들여다보면서 물속에서 대형 해파리를 닮은 무언가가 밧줄에 매달려서 밧줄을 끌어당길 때마다 빨간 촉수를 오므리고 멈추었다가 촉수를 다시 쫙 펼쳐서 새로운 영법을 선보이는 모습을 지켜보는 장면이 선명했다. 수면에 이르자 촉수가 부채꼴로 퍼지면서 물속의 벌거벗은 하얀 몸뚱이를 가리려 했다. 밧줄이 그녀의 목을 휘감았고 생명이 빠져나간 육체는 이상할 정도로 낯설고 해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P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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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 이후의 삶 - 잠든 상처를 찾아가는 정신분석 이야기 프로이트 커넥션 2
맹정현 지음 / 책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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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화산이 폭발하는 재난영화를 본 적이 있다.

도시 주변의 화산이 폭발해 용암이 도시로 흘러 내리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주인공을 비롯한 사람들은 도시를 구하기 위해 방법을 간구하다가 도로차단 콘크리트 벽으로 용암의 방향을 바꾸어 놓는다.

영화 전반의 압권적인 화면에 비해서 결말이 너무나 싱거웠다.

인간이 만든 조잡한 콘크리트 벽이 용암의 흐름을 바꾸는 부분에서 현실성이 떨어졌다.  

 

세월호 사건때도 마찬가지였다.

거대한 배가 침몰하고 그 안에 300여명의 사람이 생매장 되자 국민들의 분노는 마치 화산의 용암처럼 폭발했다.

사회가 극도의 공포와 분노 가운데 휩쌓이고, 서로에 대한 증오와 원망이 넘쳐났다.

그런데 어느 순간 부터인가 이 분노의 흐름이 방향성을 가지게 되었다.

세월호를 버린 선장이나 선원, 구조대, 정부, 세모그룹, 유병언... 그리고 어느 순간 그 분노는 정치라는 벽에 막히고 소멸되어 버렸다.

어떻게 그 거대한 분노가 누군가의 조정으로 방향성을 가지고 흐르고, 결국에는 콘크리트 벽과 같은 상황에 막혀 사라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금 생각해 보면 물질적인 용암이나 감정적인 분노도 사람이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그 자체로 생명력을 가지고 일정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람이 그것을 조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 흐름의 물고를 터주는 것일뿐, 원래부터 그것들은 그렇게 방향성을 가지고 한 곳으로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어느 정도 자리잡게 되었다.

 

 

 

이 책은 세월호 사건에 대한 트라우마를 정신분석학 학자가 프로이드적인 입장에서 정리한 것이다.

이 책은 150페이지 정도의 얇은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을 잡았을 때 한 나절이면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세월호와 트라우마 같은 단어들은 익숙한 단어이기에, 또한 평소에 프로이드의 책을 즐겨 읽었기에, 이 정도면 간단히 해치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과 다르게 이 책을 읽는데 무려 나흘이나 걸렸다.

그럼에도 아직 이 책을 다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군더더기 없는 글이 이런 글이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저자는 짧은 문장 속에 온갖 심리학 이론과 사회적 현상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세월호 참사가 가져오는 트라우마와 그 트라우마의 속성, 그리고 극복방법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저자는 트라우마의 원인을 '죽음'과 '성(性)'으로 본다.

사람은 죽음과 성적 현실과 직면할 때 트라우마를 겪는다고 말한다.

트라우마란 죽음과 성을 현실에서 직접적으로 대면했을 때 생긴다.

그러기에 우리는 죽음과 성을 직면하기를 싫어하고 환상을 만들어 내어, 그 환상 속에 살고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죽으면 제일 먼저 그 눈을 가린다.

죽음 사람의 눈과 마주치어, 그 죽음과 직면하기를 외면하는 것이다.

대신 장래식과 그 사람에 대한 기억 등을 말로 전달하면서 죽음을 덮는 하나의 환상을 만들어 낸다.

성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모두 성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성의 실체에 직면했을 때 사람들은 충격을 받는다.

(여기서는 프로이드적이 생각이 많이 반영된듯 하다. 포로이드적 견해는 성의 근원에는 인간의 원초적인 본성, 광기 등이 있고, 그것이 근친상간이나 동성애, 또는 가학적인 모습으로 발현된다. 그리고 그것이 발현되었을 때는 우리는 그것으로 인한 충격을 받는다.)

그 결과 사람들은 언어나 환상을 만들어 내어 그 충격을 완화한다.

 

세월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세월호라는 거대한 배나 국가에 대해 우리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세월호라는 거대한 배는 침몰하지 않을 것이라는 환상, 침몰하더라도 국가나 구조시스템이 무사히 사람들을 건져 낼 것이라는 환상, 우리가 위기에 처하면 국가나 타인이 우리를 도와 줄 거라는 환산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또는 텔레비젼 영상을 통해 거대한 세월호가 침몰하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을 보았다.

환상이 아닌 현실과 직면하고 그 현실은 우리에게 트라우마로 남게 된 것이다.

국민적인 집단 트라우마에 빠지게 된 것이다.

일단 트라우마에 빠지게 되면 그 트라우마는 계속해서 사람들을 괴롭힌다.

 

우리는 현실이 착각 위에 딛고 서 있다면, 트라우마적인 순간은 우리가 믿었던 것들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믿었던 것들, 타자에 대한 믿음, 우리가 혼자가 아닐 거라는 믿음, 가족에 대한 믿음, 생명에 대한 믿음, 심지어는 육체에 대한 믿음..., 트라우마는 이 모든 믿음이 단번에 날아가는 순간이며, 믿음 속에 전제된 관계들을 원점으로 돌리는 순간이ㅏㄷ. 가령 부모와 자식 간에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 그 무기력한 순간에 부모로서, 혹은 가족으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것, 우리가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 우리의 육체가 힘없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만큼 정신에 충격일 수밖에 없다. - P125-6

 

트라우마에 빠져 나오기 위해서는 다시금 환상을 만들어야 한다.

그 환상이란 '언어'이다.

일단 어떠한 사건이 언어로 정의되거나 전달되면 그것은 더 이상 그 사건의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환상이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수많은 단어들을 만들어 내고, 타인들에게 사건을 전달하면서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행위화라는 증상을 통해 자신이라는 주체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트라우마가 발생하는 것은 라깡적인 용어로 '현실적인 것'에 의해 우리의 현실이, 우리의 심리적 현실이 찢겨 나가는 것을 함축한다. 현실이 찢겨 나갔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다시 상징적인 것이나 상상적인 것으로, 표상으로 그 찢긴 부분을 꿰맬 수 있을 것이다. 전이신경증적인 증상이 바로 그런 실밥에 해당한다. 강박증자는 강방증적인 증상으로 반응할 것이고, 히스테리 환자는 히스테리 증상으로 반응할 것이다. - P128

 

우리가 실재, 현실적인 것과의 만남을 피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바로 말을 하는 것이다. 말을 하는 동안 주체는 그 경험으로부터 운신할 수 있는 작음 틈새를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트라우마적인 경험이 지닌 본성상, 트라우마가 상징적인 믹서에 의해 분쇄될 수 있는 트라우마가 아니라면 말하기가 작동하지 않을 수도 있다. 트라우마적인 장면에 대해서 더 이상 주체가 말할 수 없을 때, 주체의 말하기는 생략되고 행위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말하기에서 튕겨져 나와서 행위로 도약할 수밖에 없다. 이것을 위는 '행위화'라고 부른다. -중략- 행위화는 상징적인 무대를 가로질러 현실적인 것 속에 뛰어드는 것이다. 충동을 만족시키기 위해, 혹은 긴장을 해속하기 위해 모든 상징적인 관계를 단번에 가로질러 맨땅에 해딩하는 것, 그것이 바로 행위화이다. 이러한 행위화 속에 당연히 주체는 사라지게 된다. 주체가 행위를 하겠다고 결정해서 행위가 나타난 것이 아니다. 행위를 하는 순간에는 주체가 더 이상 주체가 아니다. 내가 내가 아니라 '그것'이 되는 순간이다. 마치 내가 충동의 요구에 굴복했을 때처럼 말이다. -P 134

 

결국 극단적인 행위화에 빠지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말과 환상을 통해 현실을 외면하고, 현실과 직면하면서 얻는 증오를 타인에게 돌리게 된다.

비겁한 행동이지만 어쩌면 이것이 살기 위해 몸부림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것이 세월호에 대한 분노가 용암처럼 굽이치며 대상을 향해 흘러가는 이유가 아니었을까?

결국 그 분노를 사람들이 조정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분노는 스스로 방향성을 가지고 흘러가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사람들은 살기위해 그 분노에 순응하며 자신을 맡겼던 것이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면서 평범한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세계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었다.

트라우마를 겪지 않는 많은 사람들은(물론 저자에 의하면 누구든 조금씩의 트라우마는 겪고 있지만...) 세상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세상은 안전하고, 죽음은 멀리 있고, 불행은 나에게 닥치지 않는다는 믿음.....

저자는 이것을 환상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환상이 깨어지고 현실에 접할 때 우리는 트라우마를 겪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평범한 사람들이 믿는 세상이란 결국 환상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현실과 직면하는 트라우마를 피하기 위해 세상이 말하는 환상 속에 자신을 맡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치 매트릭스라는 영화의 주인공 레오처럼, 우리는 현실을 접하기 싫어 환상의 세계 속에 안주하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환상을 깨려는 모든 사람들을 적으로 돌리고, 그 환상 속에서 평안한 잠을 자려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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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빛 자오선 민음사 모던 클래식 6
코맥 매카시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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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코맥 매카시라는 작가를 알게 된 것은 그의 작품 [로드]가 영화로 개봉되던 시기에 원작을 읽게 되면서였다.

핵전쟁 이후 멸망한 잿빛 세상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걸어간다.

아무런 희망도 없고, 신도 없다.

오직 끔찍한 살육과 약탈, 그리고 불탄 잿빛 세상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은 잿빛 세상을 오직 살기 위해서만 걸어간다.

이 소설을 읽고 암울한 묵시록적인 분위기를 너무도 담담히 그려내는 작가의 기교에 반했다.

그리고 코맥 매카시라는 작가에 대해서, 그의 작품에 대해서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핏빛자오선]은 코맥 매카시가 1985년도에 발표한 소설이다.

이 작품을 통해서 코맥 매카시가 비로서 대중작가로서의 발을 내딛었다고 평가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로드]에 비해서는 상당히 읽기 어려운 편에 속했다.

[로드]를 거이 하루만에 읽은 반면, [핏빛자오선]은 거이 나흘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그만큼 분량이 방대하기도 하고, 문체가 읽기 쉬운 편은 아니다.

또 그의 특유의 배경과 상황을 설명하지 않는 담담한 사실적인 문체로 인해 이야기의 진행 방향을 잡아가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 소설은 후에 발표되는 [국경을 넘어서]와 [평원의 도시] [모두 다 이쁜 말들]과 같이 서부시대의 국경을 배경으로 한다.

이 소설의 배경인 1840년대는 미국의 서부 켈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되던 시기여서 미국의 영토가 서부로 팽창되던 시기였다.

하지만 미국 서부에는 대부분 인디어들이 있었고, 남부의 텍사스의 방대한 영토는 멕시코 소유였다.

텍사스에 미국인들이 정착하면서 멕시코와 국경 분쟁이 생겼고, 멕시코와의 전쟁 이후 텍사스는 자치국가가 되었다가 후에 미국으로 편입된다.

그러나 그 후에서 미국과 멕시코와의 작은 분쟁들은 계속되고, 일부의 약탈자들은 애국주의라는 이름 아래 멕시코까지 넘어가 약탈을 한다.

또한 멕시코에서도 인디언들을 학살하기 위해 미국 사냥꾼들을 불러 인디어의 머리 가죽을 벗겨오게 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소년'은 미국 동부 테네시에서 가출을 한 후 텍사스까지 흘러 들어간다.

그는 그 곳에서 '판사'라 불리는 '홀든'이라는 인물과 '토드빈'이라 불리는 인물을 만난다.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일 수도 있는 '판사'라는 인물은 신의 존재나 도덕 등을 믿지 않고, 살육과 피만이 진리라고 믿는 사람이다.

후에 소년은 멕시코를 약탈 하는 군대에 들어갔다가 인디언의 습격으로 겨우 목숨만 건져서 멕시코 치와와 감옥에 갇힌다.

그는 그 곳에서 다시 토드빈을 만나고, 토드빈의 주선으로 글랜턴과 판사가 이끄는 인디어 사냥꾼 무리에 함류하게 된다.

그 후 이 소설은 대부분은 소년이 함류한 글래턴의 군대가 멕시코 북부 지역을 휩쓸고 다니면서 인디언이나 일반 멕시코인들을 학살한 잔혹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 가운데서도 저자의 특유의 매혹적인 문체로 주변의 배경이나 상황을 묘사한다.

 

그들이 나아가는 동안 동녘 태양이 창백한 빛줄기를 뿜어내다 느닷없이 핏빛을 뚝뚝 흘리며 평원을 불태웠다. 땅이 하늘로 빨려드는 삼라만상의 끝에서 태양은 미지의 테두리가 걷힐 때까지 불은 남근처럼 불쑥 솟구쳐 단호히 버티고 앉아 그들 뒤에서 악의로 약동했다. 자잘한 돌의 그림자가 연필처럼 가느다랗게 모래 위로 늘어지고, 사람과 말의 형체가 지난밤이 떨구고 간 가닥인 양 혹은 다가올 밤으로 이끌 촉가인 양 앞으로 길게 서렸다. 모자 아래 얼굴을 지우고 고개 숙인 채 나아가는 모습은 행군 도중 깜빡 잠든 군대 같았다. 아침나절 또 한 사람이 죽었다. 마차의 식량 자루를 더럽히며 누워 있던 그를 묻고서 부대는 다시 길을 나섰다.(P 67)

 

글랜턴의 부대는 인디언의 머리 가죽을 팔기 위해 전투적인 아파치뿐만 아니라, 선량한 인디언들, 심지어 노인과 여자, 아이까지 학살하고 그들의 머리가죽을 벗긴다.

또한 술집마다 들어가 멕시코인과 싸움을 하고, 그들을 학살해 그들의 머리가죽도 인디어 머리가죽처럼 벗겨서 팔아버린다.

이런 잔인한 과정을 저자는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고 마치 남일인듯 사실적으로 담담히 묘사할 뿐이다.

 

셋째 날 밤 그들은 1.6킬로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사막에서 타오르는 적의 모닥불을 바라보며 폐허의 벽 속에 웅크렸다. 판사는 모닥불가에 그 아파치 아이와 같이 앉아 있었다. 아이는 검은 딸기 같은 눈으로 모든 것을 지켜 보았다. 몇몇은 아이를 놀리며 웃어 땠고, 육포를 주기도 했다. 아이는 고기를 질겅질겅 씹으며 진지한 눈으로 사람들을 주시했다. 그들은 아이에게 담요를 덮어 주었다. 아침에 군인들이 말에 안장을 얹는 동안 판사는 아이를 한쪽 무릎에 앉히고 얼러 댔다. 토드빈은 안장을 들고 지나가며 그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10분 후 말을 끌고 그 자리에 오니 아니는 머리 가죽이 벗겨진 채 죽어 있었다. (P219)

 

글래턴의 군대는 점점 더 잔혹해지고, 글래턴을 비롯한 군인들은 점점 살육의 광기에 사로잡혀 간다.

마치 지옥으로 향하는 묵시록의 군대처럼 저자는 그들의 암울한 미래를 암시적으로 그린다.

 

그들은 밤새 사와로 선인장 숲을 통과해 서쪽 구릉지로 향했다. 하늘이 온통 구름으로 뒤덮이고, 세로로 홈이 팬 선인장 기둥이 마치 폐허가 되어 버린 광대한 신진처럼 엄숙하고도 질서정연하게 어둠을 수놓았다. 나직이 울리는 올빼미 울음소리 말고는 덩벗이 고요했다. 촐라 선인장이 빽빽한 지대에서는 선인장 가시가 말에게 들러 붙어 말발굽을 뚫고 뼈까지 침투하기도 했다. 바람이 언덕을 타고 불어오고, 끝도 없이 이어진 능선을 따라 야생 독사의 노래가 번져 갔다. 행군을 계속해 나가면서 분위기는 점점 황량해졌고, 급기야 물도 떨어졌다.(P316)

 

결국 부대는 켈리포니아 경계의 콜로라도 강에 이르러 나룻배를 약탈하고 버려진 요새에 머문다.

글랜턴과 판사, 부대원들은 주변 인디언과 멕시코인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여인들을 성적 노리게로 삼으며 광기를 이어간다.

그러나 어느날 밤 보복에 나서 유마 인디언의 습격으로 글랜턴과 대부분의 부대원들이 죽고, 판사와 소년, 토드빈과 전진 신부인 토빈만이 살아남는다.

마지막 생존을 위해 판사와 소년은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소년은 겨우 판사의 손에서 빠져나온다.

오랜 시절이 지나 소년은 어느 술집에서 우연히 판사를 만난다.

그때 판사는 자신의 니체적 인간관을 이야기 한다.

그는 인생을 춤으로 보고, 그 춤에 몰입하기 위해서는 인생의 잔혹함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 하나는 알지. 전쟁이 불명예가 되고 전쟁의 고귀함이 의문시 된다면 피의 신성함을 아는 명예로운 이들은 무도회에서 쫓겨날 거네. 춤이야말로 전사의 권리기이게 결국 무도회는 가짜 무도회가 되고, 춤을 추는 이도 가짜가 되는 거지. 하지만 언제나 진정한 춤을 추능 니가 한 명 정도는 있다네. 누군지 아나? - 중략 - 전쟁에 피에 자기 자신을 오롯이 바친 사람만이, 저 밑바닥으로 내려가 생생한 공포를 맛보고 급기야 참된 영혼으로 공포와 이야기 나누는 법을 배운 자만이 진정한 춤을  출 수 있다네.(P427)

 

 

비록 두 편밖에 코맥 매카시의 작품을 읽지 않았지만, 두 번째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 그의 작품세계가 조금씩 보이는 것 같다.

코맥 매카시는 사람들이 종교나 신앙이 없어지고, 도덕이 없어지고, 오로지 생존만이 존재하는 세상을 그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세상이 세상과 인간의 실체라고 말하려고 한다.

아마 그것이 그가 살아왔고, 느꼈던 세상이었을 것이다.

10살짜리 아들을 바라보며 썼다는 [로드]와 비교를 해 보니, 그나마 [로드]를 쓸 당시의 저자의 심경이 예전보다는 부드러워졌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코맥 매카시의 작품은 점점 생존경쟁이 치열해 지는 현대인의 가슴을 잔혹하게 위로해 주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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