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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 이후의 삶 - 잠든 상처를 찾아가는 정신분석 이야기 ㅣ 프로이트 커넥션 2
맹정현 지음 / 책담 / 2015년 11월
평점 :
오래 전 화산이 폭발하는 재난영화를 본 적이 있다.
도시 주변의 화산이 폭발해 용암이 도시로 흘러 내리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주인공을 비롯한 사람들은 도시를 구하기 위해 방법을 간구하다가 도로차단 콘크리트 벽으로 용암의 방향을 바꾸어 놓는다.
영화 전반의 압권적인 화면에 비해서 결말이 너무나 싱거웠다.
인간이 만든 조잡한 콘크리트 벽이 용암의 흐름을 바꾸는 부분에서 현실성이 떨어졌다.
세월호 사건때도 마찬가지였다.
거대한 배가 침몰하고 그 안에 300여명의 사람이 생매장 되자 국민들의 분노는 마치 화산의 용암처럼 폭발했다.
사회가 극도의 공포와 분노 가운데 휩쌓이고, 서로에 대한 증오와 원망이 넘쳐났다.
그런데 어느 순간 부터인가 이 분노의 흐름이 방향성을 가지게 되었다.
세월호를 버린 선장이나 선원, 구조대, 정부, 세모그룹, 유병언... 그리고 어느 순간 그 분노는 정치라는 벽에 막히고 소멸되어
버렸다.
어떻게 그 거대한 분노가 누군가의 조정으로 방향성을 가지고 흐르고, 결국에는 콘크리트 벽과 같은 상황에 막혀 사라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금 생각해 보면 물질적인 용암이나 감정적인 분노도
사람이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그 자체로 생명력을 가지고
일정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람이 그것을 조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
흐름의 물고를 터주는 것일뿐, 원래부터 그것들은 그렇게 방향성을 가지고 한 곳으로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어느 정도 자리잡게 되었다.
이 책은 세월호 사건에 대한 트라우마를 정신분석학 학자가 프로이드적인 입장에서 정리한 것이다.
이 책은 150페이지 정도의 얇은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을 잡았을 때 한 나절이면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세월호와 트라우마 같은 단어들은 익숙한 단어이기에, 또한 평소에 프로이드의 책을 즐겨 읽었기에, 이 정도면 간단히 해치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과 다르게 이 책을 읽는데 무려 나흘이나 걸렸다.
그럼에도 아직 이 책을 다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군더더기 없는 글이 이런 글이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저자는 짧은 문장 속에 온갖 심리학 이론과 사회적 현상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세월호 참사가 가져오는 트라우마와 그 트라우마의 속성, 그리고 극복방법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저자는 트라우마의 원인을 '죽음'과 '성(性)'으로 본다.
사람은 죽음과 성적 현실과 직면할 때 트라우마를 겪는다고 말한다.
트라우마란 죽음과 성을 현실에서 직접적으로 대면했을 때 생긴다.
그러기에 우리는 죽음과 성을 직면하기를 싫어하고 환상을 만들어 내어, 그 환상 속에 살고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죽으면 제일 먼저 그 눈을 가린다.
죽음 사람의 눈과 마주치어, 그 죽음과 직면하기를 외면하는 것이다.
대신 장래식과 그 사람에 대한 기억 등을 말로 전달하면서 죽음을 덮는 하나의 환상을 만들어 낸다.
성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모두 성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성의 실체에 직면했을 때 사람들은 충격을 받는다.
(여기서는 프로이드적이 생각이 많이 반영된듯 하다. 포로이드적 견해는 성의 근원에는 인간의 원초적인 본성, 광기 등이 있고, 그것이
근친상간이나 동성애, 또는 가학적인 모습으로 발현된다. 그리고 그것이 발현되었을 때는 우리는 그것으로 인한 충격을 받는다.)
그 결과 사람들은 언어나 환상을 만들어 내어 그 충격을 완화한다.
세월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세월호라는 거대한 배나 국가에 대해 우리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세월호라는 거대한 배는 침몰하지 않을 것이라는 환상, 침몰하더라도 국가나 구조시스템이 무사히 사람들을 건져 낼 것이라는 환상, 우리가
위기에 처하면 국가나 타인이 우리를 도와 줄 거라는 환산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또는 텔레비젼 영상을 통해 거대한 세월호가 침몰하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을
보았다.
환상이 아닌 현실과 직면하고 그 현실은 우리에게 트라우마로 남게 된 것이다.
국민적인 집단 트라우마에 빠지게 된 것이다.
일단 트라우마에 빠지게 되면 그 트라우마는 계속해서 사람들을 괴롭힌다.
우리는 현실이 착각 위에 딛고 서 있다면, 트라우마적인 순간은 우리가 믿었던 것들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믿었던 것들, 타자에 대한 믿음, 우리가 혼자가 아닐 거라는 믿음, 가족에 대한 믿음, 생명에 대한 믿음,
심지어는 육체에 대한 믿음..., 트라우마는 이 모든 믿음이 단번에 날아가는 순간이며, 믿음 속에 전제된 관계들을 원점으로 돌리는 순간이ㅏㄷ.
가령 부모와 자식 간에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 그 무기력한 순간에 부모로서, 혹은 가족으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것, 우리가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 우리의 육체가 힘없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만큼 정신에 충격일 수밖에 없다. -
P125-6
트라우마에 빠져 나오기 위해서는 다시금 환상을 만들어야 한다.
그 환상이란 '언어'이다.
일단 어떠한 사건이 언어로 정의되거나 전달되면 그것은 더 이상 그 사건의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환상이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수많은 단어들을 만들어 내고, 타인들에게 사건을 전달하면서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행위화라는 증상을 통해 자신이라는 주체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트라우마가 발생하는 것은 라깡적인 용어로 '현실적인 것'에 의해 우리의 현실이, 우리의 심리적 현실이 찢겨 나가는 것을
함축한다. 현실이 찢겨 나갔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다시 상징적인 것이나 상상적인 것으로, 표상으로 그 찢긴 부분을 꿰맬 수 있을
것이다. 전이신경증적인 증상이 바로 그런 실밥에 해당한다. 강박증자는 강방증적인 증상으로 반응할 것이고, 히스테리 환자는 히스테리 증상으로
반응할 것이다. - P128
우리가 실재, 현실적인 것과의 만남을 피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바로 말을 하는 것이다. 말을 하는 동안 주체는 그
경험으로부터 운신할 수 있는 작음 틈새를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트라우마적인 경험이 지닌 본성상, 트라우마가 상징적인 믹서에 의해 분쇄될 수
있는 트라우마가 아니라면 말하기가 작동하지 않을 수도 있다. 트라우마적인 장면에 대해서 더 이상 주체가 말할 수 없을 때, 주체의 말하기는
생략되고 행위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말하기에서 튕겨져 나와서 행위로 도약할 수밖에 없다. 이것을 위는 '행위화'라고 부른다. -중략- 행위화는
상징적인 무대를 가로질러 현실적인 것 속에 뛰어드는 것이다. 충동을 만족시키기 위해, 혹은 긴장을 해속하기 위해 모든 상징적인 관계를 단번에
가로질러 맨땅에 해딩하는 것, 그것이 바로 행위화이다. 이러한 행위화 속에 당연히 주체는 사라지게 된다. 주체가 행위를 하겠다고 결정해서 행위가
나타난 것이 아니다. 행위를 하는 순간에는 주체가 더 이상 주체가 아니다. 내가 내가 아니라 '그것'이 되는 순간이다. 마치 내가 충동의 요구에
굴복했을 때처럼 말이다. -P 134
결국 극단적인 행위화에 빠지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말과 환상을 통해 현실을 외면하고, 현실과 직면하면서 얻는 증오를 타인에게 돌리게
된다.
비겁한 행동이지만 어쩌면 이것이 살기 위해 몸부림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것이 세월호에 대한 분노가 용암처럼 굽이치며 대상을 향해 흘러가는 이유가 아니었을까?
결국 그 분노를 사람들이 조정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분노는 스스로 방향성을 가지고 흘러가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사람들은 살기위해 그 분노에 순응하며 자신을 맡겼던 것이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면서 평범한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세계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었다.
트라우마를 겪지 않는 많은 사람들은(물론 저자에 의하면 누구든 조금씩의 트라우마는 겪고 있지만...) 세상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세상은 안전하고, 죽음은 멀리 있고, 불행은 나에게 닥치지 않는다는 믿음.....
저자는 이것을 환상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환상이 깨어지고 현실에 접할 때 우리는 트라우마를 겪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평범한 사람들이 믿는 세상이란 결국 환상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현실과 직면하는 트라우마를 피하기 위해 세상이 말하는
환상 속에 자신을 맡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치 매트릭스라는 영화의 주인공 레오처럼, 우리는 현실을 접하기 싫어 환상의 세계 속에 안주하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환상을 깨려는 모든 사람들을 적으로 돌리고, 그 환상 속에서 평안한 잠을 자려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