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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문 - 2016년 제40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경욱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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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천국의 문]이란 소설을 접하면서 떠오르는 이미지는 오래 전 영화로 보았던 [노킹 온 헤븐스 도어('Knockin' On Heaven's Door')]라는 영화였다. 이 영화를 생각하면 발딜런이 부르는 'Knock, knock, knocking on haven's door'라는 가사의 흥얼거림이 먼저 떠오른다. 죽음을 앞두고 신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두 명의 남자가 우연히 원에서 만난다. 한 남자가 말한다. 천국에서는 바다이야기 밖에 하지 않는다고... 그러자 한 남자가 말한다. 나는 평생 바다를 본적이 없다고.... 그러자 다른 남자가 말한다. 그럼 당장 바다를 보러 가자고.... 영화는 그렇게 시한부 인생을 사는 두 남자가 바다를 보러 가는 내용이다. 결국 삶과 죽음을 하나의 과정으로 보고 있는 영화이다.


한 때는 많은 문예지를 구독하고 그 곳에 실린 단편 소설들을 정독하며 읽었지만, 지금은 몇 권의 계간지만을 읽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 년 문학사상사에서 나오는 '이상문학상작품집'은 자주 구입하려 한다. 오랫 동안 문학사상사에서 나오는 월간지를 꾸준히 구독했지만 지금은 거이 일 년에 한 권도 구입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이 책 한권으로 보상받으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을 구입하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보통 문예지 한 권을 읽으면 그 곳에서 감동적인 단편 소설 1-2편을 발견하지만, 이 책에는 거이 대부분의 소설에서 그런 감동을 느끼기 때문이다. 요사이 한국소설이 그렇듯이 한동안 이상문학상 수상작들도 내가 이해 못하는 복작합 구성과 의미를 담은 작품들이 많아 공감을 가지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이해하지 못하는 내 개인적인 생각에는 경험이 아닌 환상 속에만 존재하는 세계를 그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올 해 수상작들은 한결같이 마치 자신의 인생을 쏟아 붓는 듯한 작품이 많았다. 비록 눈물은 흘리지 않았지만 가슴으로 울 수 있는 좋은 소설들이 너무 많았다. 개인적으로는 지금까지 내가 읽은 이상문학상의 소설들 중에 최고의 소설들이 모여 있는 이상문학작품집이라고 말하고 싶다.


대상인 [천국의 문]은 요양원에서 죽음을 앞두고 있는 아버지를 두고 있는 딸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주인공 여자는 어느 날 저녁 요양원에서 아버지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는다. 허겁지겁 찾아간 아버지는 아직 임종을 맞지 않았다. 아버지를 찾아가는 과정,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을 맞는 과정에서 딸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상한다. 어린시절 집을 나간 동생, 그리고 그 사건에 대한 가족의 침묵, 그 당시를 기억하지 못하는 동생, 두 딸이 장성하자마자 이혼을 한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의 병간호의 짐을 혼자 감당한 주인공... 작가는 주인공이 과연 아버지의 죽음을 기다린 것인지, 아니면 아버지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것이지, 시종일관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단지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여자는 오래 전 대학교 시절에 낭독한 영문시의 마지막 행을 떠올리며 끝난다.


"아빠, 아빠, 이 개자식, 나는 다 끝났어."




내가 이상문학상작품집을 좋아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 작품집에 등장하는 작가론이나 작품론, 작가의 수상소감등을 통해 소설로만으로는 알 수 없는 한 작가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해 준다는 것이다. 또한 비록 대상 한 작품뿐이지만 그 작품의 해설을 통해 단편소설을 깊게 보게 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 특히 이번 유준 평론가가 쓴 [천국의 문] 작품론은 그 정교함과 디테일이 마지 고전의 주석과 같았다.


"아버지가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것 같다는 기별을 들었을 때 여자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화장을 고치는 것이었다.(- 천국의 문 첫 문장 P12)"


작품은 [천국의 문] 첫 문장을 디테일하게 분석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아버지의 임종 소식을 들었을 때 여자는 왜 화장을 고쳤을까? 이런 질문으로 시작하는 작품론은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작품을 해석한다. 나는 동생의 실종과정과 마지막 주인공이 떠올리는 싯구를 통해 아버지가 자녀들을 성적으로 학대했거나 끔찍한 잘못을 저지른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를 부양할 수밖에 없는 주인공의 이중적 감정을 이 소설이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작품론에서는 이 소설을 분석하며 여자의 감정을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여자의 욕망과 아버지를 병간호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나오는 모순적 감정으로 이해한다. 또한 여자가 느끼는 혼란을 삶과 죽음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한다.


지금까지 주로 '여자'의 내면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했지만, 모든 좋은 작품이 그렇듯 [천국의 문] 역시 수다스런 해석에 자신의 속내를 전부 드러내지 않는 신묘함을 지닌다. 그 신묘함 사이로 언뜻 비치는 이야기 하나만을 덧붙여 본다.

여자의 직업은 어린이집 교사이다. 그런데 여자는 생명의 약동을 드러내는 아이들의 공간인 어린이집에서 나는 냄새와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진 요양병원에서 나는 냄새가 같다고 말한다.

이로부터 생과 사를 분리된 것이라기보다는 잇닿아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인식을 읽어낼 수 있으며, 죽음이나 사후세계에 대한 사내의 인식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새롭게 읽을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 티베트 불교의 관점을 입히면 '바르도'에 대한 사유를 담은 소설이라는 해석도 가능한다

바르도는 한 상황의 완성과 다른 상황의 시작 사이에 걸쳐 있는 '과도기' 또는 '틈'을 뜻하는 티베트어이다. '바르bar'sms '사이'를 뜻하며 '도do'는 '매달린' 또는 '던져진'을 뜻한다.

이 용어를 빌려 말해보면 [천국의 문]은 생과 사 사이의 바르도, 죽어감과 죽음 사이의 바르도에서 둘러보는 인간 존재에 대한 사유를 담은 작품이라는 말 역시 꼭 과언인 것만은 아니다. (- 작품론 P103-4)




 

이상문학상 작품집에는 대상 못지 않는 뛰어난 우수작들이 등장한다. 대상수상 작가들에게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매년 나는 이상문하상 작품집에서 대상다 더 감동을 받는 우수작들을 발견하곤 했다. 이번 년도의 수상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년도 수상작품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감동을 받은 두 작품은 김탁환 작가의 작품과 황정은 작가의 작품이었다.


김탁환 작가의 [앵두의 시간]이라는 소설은 '묵직함'이란 단어로 와닿는다. 마치 작가의 자전적 소설과 같이 어린 시절부터 이야기를 소설에 담겨 있다. 주인공은 어린시절 외갓집의 앵두나무가 열리는 가수원에 자주 갔었고, 그곳에서 '치숙'으로 불리는 외삼촌을 만났었다. 치숙은 한 때는 수제로 불렸으나 심장병으로 인해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지금은 외할아버지의 과수원을 혼자 돌보고 있다. 치숙은 과수원의 외딴집에 살며 수많은 책들을 보고, 글을 쓰고, 사색을 한다. 주인공은 그런 치숙의 치열한 삶과 글쓰기에 영향을 받아 작가가 된다. 그러나 주인공이 작가로 성장하면서 치숙의 치열한 글쓰기와는 다른 성공을 위한 글쓰기와 갈등이 일어난다. 그리고 결국 치숙은 죽는다. 죽기 전 치숙을 방문한 주인공에게 치숙은 마지막으로 한 번 앵두나무 농장에 가자고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앵두나무 하나 하나를 끓어안고 작별을 고한다. 이 작품을 통해 치숙이라는 한 인간이 얼마나 치열하게 인생을 살았고, 글을 섰는지를 보여 주고 있다. 작가는 치숙이라는 한 인간의 삶을 통해 글쓰기가 그렇게 인생을 쏟아붓는 치열한 작업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어찌 글쓰기 뿐이겠는가? 인생이란 그렇게 치열한 것이고, 그런 치열함 속에서 인생의 열매가 나오는 것 아닐까?


황정은 작가의 [누군도 가본 적 없는]이란 소설은 '먹먹함'이란 단어로 와닿는다. 자녀를 잃은 아픔을 간직한 중년부부의 유럽여행을 다루고 있는 소설은 시종일관 감정의 과잉을 보여주는 남편과는 달리 아내의 감정은 철저히 숨겨져 있다. 그러기에 남편은 계속해서 아내에게 무언의 분노를 뿜어낸다. 그리고 아내가 여권을 놓고 기차를 타던 날 아내에게 분노를 쏟아낸다.


내가 그걸 챙기라고 하지 않았어? 그는 말했다. 그 밖에 내가 뭘 더 부탁한 게 있어? 그거 챙기라고...... 가방에 넣으라고 말하지 않았나? 그거 잊지 말라고...... 그냥 그거 하나...... 가방에 다 있잖아. 당신 칫솔, 화장품, 사탕....... 다 있는데 왜 그건 없냐...... 우리 내일 비행기 타야 돼...... 그런데 여권도 영수증도 없어....... 내가 이걸 다 설명해야 해 사람들한테...... 그런데 괜찮을 거라니...... 당신은 괜찬지 걱정이 없지 내가 다 하니까....... 당신은 잘 먹고 잘 자고....... 어디서든....... 호텔에서든 ㅣㅂ행기에서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어떻게 그렇게 비위가 좋냐 그렇게 멀쩡하게...... 괜찮을 거라고?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쉬워 모든게.......(P306)


내 아픔이 너무 크기에 아내의 아픔을 감당할 수 없는 남편의 분노가 느껴졌다. 그와 함께 묵묵히 마음 속으로 더 깊게 아파하는 아내의 아픔이 느껴졌다. 소설을 놓고 한참을 그 먹먹함에 그냥 있었다.


이번 소설에는 유난히 자녀를 잃은 아픔을 이야기 하는 소설이 많았다. 아마 세월호 사건의 영향 때문인 거 같다. 자녀를 잃는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것, 그럼에도 남겨진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그것의 무게를 소설들이 이야기 하고 있다.


다른 사람에 아픔을 글로 공감할 수 있다는 것, 자신의 아픔을 글로 쏟아낼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소설의 위대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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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무진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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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오래 전에 종영된 방송이지만 '이것이 인생이다!'라는 제목의 방송이 기억이 난다.

흔히 이야기하는 기구하다는 삶을 산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재연하는 다큐식 방송이었다.

이미 아내가 있는 남편에게 속아서 결혼해 전처의 아내를 자기 자식처럼 키운 어머니의 이야기나 여러 남자에게 버림받은 기구한 여인의 이야기, 또는 고아로 힘든 삶을 살고 나이들어 번 돈을 남에게 기부하는 사람의 이야기 등이 방송이 되었다.

한 때는 그 방송을 보면서 '왜 저렇게 살까?'라는 생각도 했지만 곧 나의 교만을 후회했다.

말 그대로 이것이 인생인 것이다.

때로는 우리 눈에 기구해 보이고, 비루해 보여도 그것이 인생이고, 인생은 그 자체로 가치있고 아름다운 것이다.

김훈 작가의 단편소설집 [강산무진]을 읽으면서 오래 전에 본 이 방송이 생각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소설집에 나오는 인생들 역시 모두 비루하기 때문일까?

 

 

첫 소설에 [배웅]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IMF 이전에는 식품납품공장을 운영하며 그런저럭 사장 소리를 듣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회사가 부도난 후에는 택시를 운전하며 사납금 몇 만원을 채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산다.

그런 그에게 공장을 운영할 때 같이 경리로 일하면서 정을 나누었던 '윤애'라는 여인이 나타난다.

윤애를 만나는 과정, 헤어지는 과정, 그리고 다시 만나서 이별하는 모든 과정에 비루함이 뚝뚝 묻어난다.

몇 만원 사납금을 채우기 위해 안절부절하던 그가 일식집에서 윤애의 밥을 사주는 장면은 애처롭기까지 하다.

 

두 번째 소설 [화장]에 묻어 있는 비루함은 거이 압권이다.

(비루함과 압권이라는 말이 같이 쓰일 수 있을까?)

주인공은 꽤 잘나가는 화장품업체 상무이다.

그러나 그것은 것껍대기일 뿐이다.

그의 아내는 오랜 기간 뇌종양으로 투병한다.

음식을 토하고, 설사를 하고, 악취를 풍겨낸다.

그리고는 초라하고 말라 비틀어진 몸으로 세상을 떠난다.

주인공 역시 전립선염으로 하루에 한 번 꼴로 소변을 빼내야 한다.

병원에 가서 생식기에 호수를 연결하는 비루한 과정을 통해야 겨우 소변을 해결할 수 있다.

그럼에도 주인공은 자신의 회사 부하직원인 '추은주'라는 여인을 사랑한다.

그녀의 머리카락, 목선, 뒷모습을 보며 그녀의 젊음과 생명력을 사랑한다.

 

네 번째 소설 [뼈]라는 작품에서 주인공은 대학 교수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는 주인공보다 '오문수'라는 자신의 조교에 대한 묘사가 더 많이 등장한다.

오문수는 10년 가까이 조교로 있으면서도 아직 박사학위를 따지 못하고 학교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학교의 젊은 여성들과 동거하며 대책없는 뜬 구름 잡는 논문만을 쓰려 한다.

 

여섯 번째 소설 [언니의 폐경]의 주인공은 이혼 당한 50대 여인이다.

자신의 늙고 생명령이 사라져 가고 있을 때 출장 갔다 온 남편의 가방 안에서 생기있는 여성의 머리카락을 발견한다.

주인공은 패경을 경험하는 언니의 모습을 보며, 생명력이 빠져나가고 있는 여인으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바라 본다.

 

마지막 소설 [강산무진]에서 주인공은 간암판정을 받는다.

주인공은 담담히 자신의 마지막 생애를 준비한다.

그가 마지막 생애를 준비하는 것은 '노킹 온 헤븐스 도어'라는 영화에서처럼 죽기 전에 바다를 보러가는 것과 같은 드라마틱한 장면이 아니다.

조금의 퇴직금을 더 받기 위해 자신이 암이라는 것을 숨기고 퇴직하고, 손해를 보고 적금을 깨고, 이혼한 아내에게 아직 주지 못했던 위자료를 준다.

자신의 죽음에 대해 딸은 덤덤히 반응하고, 미국의 아들은 남은 재산을 욕심낸다.

주인공은 그렇게 비루하면서도, 또 담담하게 마지막을 준비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모두 이렇게 비루하게 살고, 비루하게 죽어가고 있다.

작가는 등장인물들의 삶을 비루하게 묘사하다가도 어느 순간 그 비루함을 아름다움으로 묘사한다.

사실 이 과정을 평론가도 아닌 일반 독자인 내가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비루함과 아름다움이 교차되는 그 작가의 묘사에 감탄을 느낀다.

 

[화장]에서 죽어가는 자신의 아내의 상태나, 전립선염으로 고생하는 자신의 모습, 그리고 접대와 로비로 얼룩져진 그의 일을 묘사하다가 추은추라는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을 아름답고 신비롭게 그리고 있다.

[강산무진]에서 자신의 마지막 생애를 돈과 거처를 정리하며 비루하게 보내는 주인공이 강산무진이라는 작품을 바라볼 때 작가는 그 비루한 인생을 장엄하게 묘사한다.

 

화가가 이 세상의 강산을 그린 것이지, 제 어미의 태 속에서 잠들 때 그 태어나지 않은 꿈속의 강산을 그린 것이지, 먹을 찍어서 그림을 그린 것이지 종이 위에 숨결을 뿜어낸 것인지 알 수 없는 거기가, 내가 혼자서 가야 할 가없는 세상과 시간의 풍경인 것처럼 보였다. - [강산무진] 중에서 -

 

 

이 소설을 읽으면서 왜 인생이 비루할까 생각해 보았다.

작가는 그것을 돈과 육체에서 찾는다.

돈은 인생을 비루하게 만든다.

돈 몇 만원을 채우려 무리하게 택시 운전을 해야 한다.

 

남편과 아내, 아버지와 자녀들이 돈으로 비루하게 묶여 있는 것이 인생이다.

육체의 생명이 사라지면서 인생이 초라해진다.

자신의 생리현상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구린내와 섞는 냄새 속에서 쪼그라 들어간다.

그런데 작가는 그 비루함 속에서 빛나는 찬란한 아름다움을 찾아낸다.

마치 해가 지는 석양의 아름다움을 그리듯이 인생의 아름다움을 그린다.

정말 비루한 인생 속에 아름다움이 있을까?

인생에 대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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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 무렵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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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정신없이 보내다가 어느덧 창밖을 보면 해가 지고 있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벌써 하루가 갔나?'하는 생각이 든다.

'오늘은 뭐하고 지냈는데 이렇게 빨리 하루가 갔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생사가 걸린 일도 아닌데 왜 그리 집착하며 일했는지 후회스러운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만 바라보다가 말이나 행동으로 상처 주었던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든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는 저녁무렵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한다.

 

아직 중년의 나이기에 인생의 황혼에는 어떤 생각이 드는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하루를 보내고 해가 지고 있을 때의 감정과 조금은 비슷하지 않을까?

인생 역시 하루의 해가 지는 듯한 느낌으로 저무는 것은 아닐까?

 

모두들 거장이라고 부르는 황석영 작가의 신작 [해질 무렵]은 바로 인생의 황혼에 살아 온 세월을 돌이켜 보는 소설이다.

오직 성공이라는 한 목표만을 향해 달려 온 남자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스스로에게 '나는 왜 여기 서 있나?'라고 묻는 소설이다.

 

 

이 소설은 노년에 접어든 박민아라는 건축가와 스물아홉인 정우희라는 여성의 시각에서 교차하며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다.

 

박민아는 성공한 사업가이자 건축가이다.

그는 경상도 영산이라는 시골 출신이었다.

아버지는 시골 면서기였으나 민원인에게 작은 해택을 받은 대가로 쫓기듯 고향을 떠나 서울의 달동네인 달골에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생선자판부터 시작해 어묵 가게로 생계를 이어간다.

박민아는 그 곳에서 재명이 형이라는 사람을 알게 되고, 그와 그의 동생들과 형제처럼 지낸다.

또 국수집 딸이 차순아를 좋아한다.

그러나 박민아에게 달골이란 어떻게든 벗어나야 할 곳이다.

그는 우리나라 최고대학교로 진학한 후 달골과 점점 멀어진다.

자연스럽게 재명이 형이나 차순아 역시 그의 인생에서 점점 사라져간다.

그리고 그는 주류사회에 편입해 오직 성공을 위해 달려간다.

이 소설에서 박민아가 이야기하는 시점에서 그는 성공한 사업가이며 건축가로서 과거를 회상한다.

 

반면 정우희는 흔희 이야기하는 삼포세대의 전형적인 여성이다.

극단에서 일하며 시나리오를 쓰고 있지만, 그것으로는 전혀 돈이 되지 않는다.

그녀는 반지하에서 살면서 밤새 아르바이트를 하고 낮에는 극단에서 일을 한다.

여러 번 비정규직과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온갖 설움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김민아라는 남자를 알게 된다.

그는 그런 그녀를 여러 가지로 보살펴 주었다.

그 역시 정우희와 비슷한 처지이면서....

그러던 그가 어느 날 자살을 한다.

 

소설은 사는 방식이나 연령이 전혀 상관이 없을 두 명의 삶이 결국은 연장선에 있음을 이야기 한다.

박민아의 과거의 삶이 정우희의 현재의 삶과 맞닿아 있음을 이야기 한다.

어쩌면 소설은 결국 정우희와 같은 젊은 세대를 벼랑 끝으로 몰고 있는 것이 박민아의 세대임을 이야기 한다.

그렇다고 박민아의 삶이 편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 역시 치열한 삶을 살아왔다.

 

작가는 박민아의 인생을 돌이켜 보며 과연 그가 무엇을 잃었는지를 이야기 한다.

그렇게 정신없이 달려 왔는데 그가 잃은 것은 과연 무엇일까?

 

책을 읽은 후에도 한참을 책에서 손을 땔 수가 없었다.

거장이 주는 그 쓸쓸하고도 황량한 적막감.......

비교적 젊은 세대에 속하는 나조차도 박민아라는 인물을 욕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 역시 자신의 인생을 선택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는 그렇게 밖에 살 수 없었을 것이다.

무언가가 자신을 몰아쳤을 것이다.

그럼에도 선택은 개인의 몫이었기에 그는 그 짐을 스스로 짊어진다.

 

가끔 윗자리에 계신 나이 드신 분들과 대화를 할 때가 있다.

경험을 통해 그 분들과 대화를 할 때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 분들의 과거를 업적을 훼손하는 것이다.

그 분들은 자신들이 멋진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부정하거나 훼손하려는 것을 마치 생명의 위협처럼 느낀다.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삶이 인정받고 싶은 것이 본성인가 보다.

그럼에도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반성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는 생각하는 사람일 것이다.

이것이 내가 인생의 황혼무렵에 회환과 아쉬움으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작가와 박민아라는 인물에게 존경을 표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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