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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남 오빠에게 - 페미니즘 소설 ㅣ 다산책방 테마소설
조남주 외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11월
평점 :
절판
윗사람과 대화하는 중에 때로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어야 할 때가 있다. 조선시대에 가까운 정치관이라든지, 가난하거나 약한 사람들에게 대해 비인격적으로 무시하는 말이라든지, 또는 여성에 대한 비하 등의 막말들을 할 때가 있다. 타인들에게 주로 평화주의자로 불리는 나는 대부분 가만히 듣고만 있는다.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기 싫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분위기가 평화스러워지는 것은 아니다. 윗사람의 생각과 말이 틀렸음을 당당히 말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하지 못하는 말을 대신해 주는 동료로 인해 대신 가슴이 뚫리는 듯한 기분을 느끼기도 하지만, 곧 싸늘해진 대화 분위기로 인해 마음이 불편해진다.
[현남 오빠에게]라는 책을 읽으면서 꼭 그런 기분이었다.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틀리다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기 싫어서 넘기고 있던 것들을 이 소설을 들춰낸다. 그리고 읽는 내내 분위기가 불편해진다. 우리 사회에 여전히 존재하는 가부장적인 문화를 너무도 예리하게 끄집어 내는 소설로 인해, 그리고 이런 것들에 침묵했던 나 자신에 대해, 아니, 어쩌면 그런 것에 동조했을지도 모를 나 자신으로 인해...
[현남 오빠에게는] 요즘 인기 있는 7인의 여성작가가 페미니즘 관점에서 쓴 소설이다. 그러나 딱히 페미니즘이라고 하기보다는 그냥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가부장적인 분위기를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는 소설이다.
이 소설집의 첫 번째 소설은 [82년생 김지영]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조남주 작가의 [현남 오빠에게]이다. 소설은 서른의 한 여성이 10년 동안 연애를 하고 자신에게 청혼을 한 '현남 오빠'라는 사람에게 쓴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다. 편지의 첫 내용은 현남 오빠의 청혼에 대한 거절이다. 현남 오빠는 타인이 볼 때는 자상한 오빠이다. 타지에서 올라와 강의실도 못 찾아 헤매던 주인공을 학교생활에 적응하게 해 준 학교 선배이기도 하다. 그 후 현남 오빠는 수강신청부터 학점관리, 심지어는 자취방 구하는 것까지 모든 것을 도와주고, 여러 면에서 배려해 준다. 주인공은 그 배려 속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그러나 점점 자신이 생각과 미래까지도 관여하는 현남 오빠에게 끌려다닌다. 계속해서 독단적이고 타인을 자기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현남 오빠에게 거부감을 느끼지만, 그럼에도 그는 현남 오빠를 떠난 삶을 생각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녀는 현 남 오빠의 틀린 주장에도 침묵한다.
"저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어요. 오빠가 헤어지자고 할까 봐 겁이 났거든요, 오빠의 도움 없이 학교생활을 잘할 수 있을까, 내 일상이 유지될 수 있을까 두려웠습니다. 게다가 저는 '강현남 여자친구'로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으니까요, 아시잖아요, 캠퍼스 커플이 헤어지면 어떤 소문이 도는지, 어떤 시선을 바다야 하는지요, 여자들은 특히 더하죠." (P 21)
결국 그녀는 10년 동안 현남 오빠와 사귀며, 그가 원하는 공부를 하고, 그가 원하는 취직을 하고, 그가 원하는 결혼을 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청혼을 받는 순간 그녀는 깨달았다. 자신이 현남 오빠에게 종속된 삶을 사고 있다는 것을...
"오빠가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나를 돌봐줬던 게 아니라 나를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만들었더라. 사람 하나 바보로 만들어 마음대로 휘두르니까 좋았니? 청혼해 줘서 고마워, 덕분에 이제라도 깨달았거든, 강현남, 이 개자식아!" (P 38)
소설을 읽는 내내 강현남이란 인물 속에서 한국 남성의 모습을 보게 딘다. 자신의 울타리를 만들고, 그 울타리 속에 여성을 넣어두고, 자신의 장식품으로 여성을 만들어가는 한국 남성들... 이것이 아마 한국의 가부장적 문화가 만든 남성들의 모습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가부장적인 폭력은 단지 여성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회사나 사회에서도 자신의 절대적인 지위를 이용해 자신이 무조건 맡고, 자신의 생각에 틀린 말과 행동을 하며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대학교때 남성으로서 여성학 수업을 청강한 적이 있는데, 그때 교수님이 가부장적인 문화의 피해자는 여성뿐만이 아니라, 남성들도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때는 이해를 못했는데. 오랫동안 사회에서 사람들을 경험해 보니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다.
그러나 또한 이런 가부장적인 문화에 순응하는 것은 단지 남성들뿐만이 아님을 느낀다. 여성들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남성이 만드는 울타리에 안주하기를 원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돌봐주기를 원하는 여성들이 많기 때문이다. 소설의 주인공처럼 남자 친구가 만들어준 울타리를 과감히 부수고 나오는 자신이 스스로 삶을 개척하는 여성들이 몇 명이나 될까? 그러기에 소설 속이지만 주인공의 선택에 응원을 보낸다.
결국 이 책을 읽으면서 적은 남성이나 여성 중 하나가 아니라, 잘못된 가치관을 가지게 하는 가부장적 문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가부장적인 문화의 피해자의 모습을 가장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는 두 편의 소설이 [당신의 평화]라는 소설과 [경년]이라는 소설이다.
최은영 작가의 [당신의 평화]라는 소설은 유진이라는 여성의 눈을 통해 자신의 어머니인 정선의 모습을 본다. 평생 시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 밑에서 굴종했으면서, 이제 며느리를 맡으면서 며느리에게 자신이 당한 것을 그대로 하기를 원하는 모습에서 유진은 어머니에 대한 연민을 넘어 분노를 느낀다.
"그녀가 보기에 정순은 사람들의 말에 세뇌되어 있었다. 파일럿 남편 둬서 팔자 좋게 산다는 시어머니 말에, 그렇게 능력 있으면서 때리지도, 바람피우지도 않는 남자가 흔하냐는 친정어머니의 말에, 정순은 자기 남편이나 시어머니가 아무리 자신에게 부당하게 대해서 제대로 맞서지 못했다. 유진이 정순을 대신해서 아빠와 할머니에게 대거리를 하면 정순은 당황하며 외려 유진을 흔했다. '할머니 말씀치고 틀린 것이 없다' 정순은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런 정순을 그녀는 이제 감당할 수가 없었다. 시어머니의 죽음과 남편의 퇴직 후 정순은 눈덩이 굴리듯 과거의 해결되지 않은 자기감정을 키워갔다. 정순은 살이 빠져 떼꾼해진 눈으로 세상을 바라봤다. 작은 일에 크게 화를 냈고 다른 여자들을 신랄하게 비난하기를 잘했다." (P 58)
김이설 작가의 [경년]이란 소설은 폐경기를 맞은 한 여성의 시각에서 가족과 세상을 다시 보고 있다. 중학생으로 항상 전교 상위권에 드는 아들이 또래 아이들과 성관계를 하고 다닌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듣게 된다. 이 사실을 남편에게 말하자 남편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이렇게 말한다.
"남자애니까 그런 건 허물도 아니고, 지들 사이에서는 난놈 된 거야. 자기 놀 거 다 해가면서 공부도 잘하는데 누가 뭐라 할 거냐고."
주변에서도 남자아이는 괜찮고, 오히려 꼬리를 친 여자아이들이 잘못된 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주인공은 그 말에 수긍하기가 힘들다. 자신도 딸을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 자신의 딸을 바라볼 세상의 시간이 두려워진다.
이미 작고했지만 오래전 신해철이라는 가수가 방송에서 했던 말들이 기억난다. "한국 엄마들은 페미니즘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 자녀들을 키우면 아들을 괜찮고, 딸은 안 된다는 말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한국의 엄마들도 그렇게 가부장적 문화에 세뇌당한 피해자는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며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가정과 결혼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다. 물론 가정과 결혼을 통해 여성들이 억압당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가정과 결혼이 모두 안 좋은 것만은 아닐 텐데... 한 사람의 일방적인 헌신과 희생만이 아닌, 함께 희생하면서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이루어 가는 것도 인생에서 매우 소중한 일일 텐데... 이렇게 말하면 나 역시 가부장적인 문화의 세뇌된 사람으로 받아들여 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