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함무라비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근에 언론의 뜨거운 감자였던, 삼성그룹 이재용 회장의 구속 적부심 판결이 오늘 기각되었다. 이로 인해 방송과 인터넷이 온통 난리이다. 서민들은 단 돈 몇 천원 때문에 감옥에 가는데, 몇 백억 원을 제공한 사람은 왜 멀쩡하느냐는 것이다. 얼마 전에는 판사가 자신의 판결에 불복해 행패를 부린 피고인에게 1년 징역에서 3년 징역을 선고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판사가 자신의 감정대로 피고를 판결한다는 비판이 뜨겁다. 이로 인해 법조계의 판결이 국민의 법감정과 거리가 있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럴 때면 가끔 영화에서 컴퓨터가 통제하는 미래사회를 생각해 본다. 영화에서는 인간이 하는 일은 사사로운 감정이 개입하고 실수가 있기 때문에, 미래에는 컴퓨터가 인간의 일을 대치하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컴퓨터가 인간의 모든 부분을 지배하고 재판까지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보다 더 공정한 판결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현직 판사인 문유석 작가가 지은 [미스 함무라비]라는 소설을 읽으면서 깨어졌다. 이 소설에는 신임 판사인 박차오름이라는 여판사가 44호 법정의 좌배석판사로 배정받으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루고 있다.


박 판사는 어린 시절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고, 과외 교사에서 성추행까지 당한 경험이 있다. 그래서 폭력적인 남성이나 성추행범을 보면 참지를 못한다. 객관적으로 판단을 해야 사건에서도 감정이 앞서기도 한다. 그로 인해 언론의 주목을 받고, '미스 함무라비'라는 별명을 얻기도 한다.

그러나 박 판사는 이런 좌충우돌의 경험을 통해 점점 판사의 역할을 배워간다. 겉으로 보기에는 죽일 놈이지만, 그 사람의 살아 온 환경과 상황을 보면 동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도 있다. 또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동정이 가는 피고인이지만, 속에는 매우 사악한 의도로 재판장과 주변 사람들을 속이는 경우도 있다. 박 판사는 동표 판사의 도움으로 이런 사건들을 접해가면서 판사로서의 시각을 키워간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이 객관적인 시각이 아닌, 감정으로 사람을 재판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자책하는 박 판사에서 선배 판사는 이렇게 말해 준다.

"박 판사님,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나요? 박 판사님은 상처가 많은 사람이어서 누구보다도 더 좋은 판사가 될 수 있을 거예요. 남의 상처를 누구보다 더 예민하게 느낄 줄 아니까요." (P 194)


 

 

 

어쩌면 우리는 판사가 컴퓨터와 같은 인간이 되기를 기대하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외부적인 환경에도 흔들리지 않고 온갖 데이터를 종합해 정확하고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판사를 기대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될 때만이 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어쩌면 감정이 있는 사람이 하는 판결이기에 그 판결이 더 정의로운 판결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무조건 정해진 잣대를 통해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컴퓨터보다는 그 다른 사람과 함께 아파하고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이기에 더 정의로운 판단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런 경우 판사가 자신의 감정에 이끌려 주관적인 판단을 할 위험도 있다. 그럼에도 이 부분까지도 판사가 극복해야 할 또 다른 시험이라고 생각한다. 소설 속의 박 판사처럼, 단순히 사법시험을 통과해서 판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과 싸워 정의를 추구하는 판사가 되는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단순히 판사뿐만 아니라, 우리가 기대하는 정치인, 종교인, 기업인 모두에게 해당될 것이다. 비록 지금 우리는 여러가지 사건으로 인해 사람에게 실망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마지막까지 희망을 가져야 할 대상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만이 타인의 아픔을 동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람만이 사람을 재판할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시의 시간 오늘의 젊은 작가 5
박솔뫼 지음 / 민음사 / 201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음사에서 출간된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를 좋아한다. 없는 시간을 쪼개서라도 한국소설을 많이 읽고, 응원을 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특히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처럼 한국 문단의 좋은 소설가과 작품들을 찾아내서 발굴하고 있는 시리즈들을 많이 구입하고 읽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 권의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를 구입해서 읽었고, 박솔뫼 작가의 [도시의 시간]도 읽게 되었다.

먼저 감상부터 이야기하자면, 읽는 과정이 많이 힘들었다. 이 소설은 스토리를 가지고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을 쫓아가는 과정이었다.  그 의식의 흐름이 대부분의 어둡고 침울해서 읽는내내 의미도 잘 파악이 되지 않고, 마음까지 무거워졌다. 중간에 포기할까도 생각해 봤지만, 그러기에는 책의 구입한 돈과 드린 시간이 아까웠다. 물론 작가가 책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겠지만, 그것을 발견하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소설의 ​주인공은 남들이 다니는 고등학교를 관두고 검정고시를 통해 대학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의 이름은 끝내 밝혀지지 않고 있고, 심지어 초반에는 주인공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헛걸렸다. 어느정도 읽다보니 여성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주인공에게는 일본에서 살다 온 ‘우나’라는 친구가 있다. 우나의 아버지는 우나가 어린 시절부터 ‘제니 준 스미스’의 ‘돌핀(Dolphin)’이라는 음반을 들려줬다. 그리고 우나가 어렸을 때 말도 없이 집을 나가 어느 공원에서 쓸쓸히 죽는다. 우나는 준의 음악을 듣는다. 그리고 준을 상상한다. 무명에 가까운 준은 어느 시기에 음반을 만들었고, 그 음반은 별로 인기를 얻지 못했다. 그 후 준이 음악을 계속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미국에서도 잘 알려지지도 않은 음반은 우연히 일본에서 우나의 아버지의 손에 들어온다. 그리고 우나의 아버지는 우나에게 그 음악을 들려준다. 우나는 아버지를 통해 준과 그의 음반 돌핀을 듣는다. 이제는 주인공이 우나를 통해 준과 그의 음악을 듣는다.

소설은 낯선 도시 대구를 배경으로 주인공과 우나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소설에서 대구는 도시로서 확장되어 가고 있었고, 변두리의 건물들은 무너져 검은색 콩크리트로 대치되고 있었다. 그렇게 변하고 사라지는 도시 가운데 주인공은 자신의 기억들도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얼마 후 우나의 가족은 미국으로 이민을 가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우나는 그 미국에서 죽었다. 그리고 도시는 변해서 예전의 장소들은 사라졌다. 주인공의 기억 속에 있는 우나에 대한 기억들, 도시에 대한 추억들도 조금씩 사라져간다. 그럼에도 준의 음악만은 기억에 남아 있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잊혀져 가고 있는 기억들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도시의 발전과 함께 사라져가는 우리들의 기억들... 그러기에 더욱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대로 소설을 이끈다. 하지만 제임스 조이스나 버지니아 울프같이 의식을 따라가는 소설가들의 소설들은 원래 난해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특히 유명한 소설들은 사전 지식을 통해 그 의식의 흐름이 무엇을 이야기하려 하는지를 어느 정도 짐작하고 소설을 접하지만, 이 소설은 그런 사전 지식이 없는 경우여서 더욱 읽기가 힘들었다. 읽는 과정에서 작가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궁금해 여러 인터넷 서점들의 서평을 읽었지만, 서평 역시 나와 같은 좌절과 푸념의 글들 뿐이었다. 그래도 이 소설을 마지막 장까지 읽었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최근 들어 김승옥 작가에 대한 글을 자주 읽게 되었다. 문학잡지에서, 수필에서, 때로는 서평들에서 여전히 김승옥의 소설들이 언급되고 있다. 그중 가장 인상 깊은 구절은 김훈 작가의 산문 [라면을 끓이며]에서 읽은 부분이다. 이 책에서 그는 작가였던 아버지와 친구들이 김승옥이라는 신예 작가를 접한 충격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70년대의 기라성 같은 청년작가 김승옥의 단편소설 [무진기행]을 발표했을 때, 아버지는 문인 친구들과 함께 우리집에 모여서 술을 마셨다. 그들은 모두 김승옥이라는 벼락에 맞아 넋이 빠진 상태였다.
"너 김승옥이라고 아니?"
"몰라, 본 적이 없어. 글만 읽었지."
그들은 "김승옥이라는 녀석"의 놀라움을 밤새 이야기하면서 혀를 내둘렀다. 새벽에 아버지는 "이제 우리들 시대는 갔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는 식은 안주를 연탄아궁이에 데워서 가져다 드렸다. 아침에 아버지의 친구들은 나에게 용돈을 몇 푼씩 주고 돌아갔다. - [라면을 끓이며] P45

 

 

 

 

 

갑자기 김승옥의 소설들이 읽고 싶어져서 오랫동안 묵혀 두었던 제3세대 한국문학 전집을 다시 뒤적여 보았다. 내가 대학을 입학하던 해에 헌책방에서 구입한 전집이니, 가지고 있은 지가 벌써 20년은 넘었다. 이사할 때마다 버리려고 생각했지만, 차마 버리지 못하고 이사 때마다 이 무거운 짐을 가지고 다니고 있다. [무진기행]을 펼쳐보니 뒷면에 내 글씨체로 감상이 적혀있고, 곳곳에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나는 기억이 없는데... 20년 전의 내가 적은 글들인가 보다.


소설의 시작은 주인공의 고향인 무진과 무진의 안개에 대한 기억으로 시작된다. 시작부터 분위기는 무겁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이다. 아침에 잠자리에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 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恨)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 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불어 가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아내와 장인 덕에 제약회사의 중역이 될 처지에 놓인 주인공은 자괴감을 느끼며 잠시 무진에 내려온다. 그리고 그 자괴감은 오래전 자신의 골방에 숨어 있던 기억과 겹친다.

 

 

 

내가 졸업한 무진의 중학교 상급반 학생들이 무명지에 붕대를 감고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을 부르며 읍 광장에 서 있는 트럭들에 올라타고 일선으로 떠날 때도 나는 골방 속에 쭈그리고 앉아서 그들의 행진이 집 앞을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전선이 북쪽으로 올라가고 대학이 강의를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도 나는 무진의 골방 속에 숨어 있었다. 모두가 나의 홀어머니 때문이었다. 모두가 전쟁터로 몰려갈 때 나는 내 어머니에게 몰려서 골방 속에 숨어서 수음을 하고 있었다. 이웃집 젊은이의 전사 통지가 오면 어머니는 내가 무사한 것을 기뻐했고, 이따금 일선의 친구에게서 군사 우편이 오기라도 하면 나 몰래 그것을 찢어 버리곤 하였다.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나는 부분이다. 고등학교 때 국어 문제집에서 읽었던 부분이라는 생각이 어렴풋이 난다. 이 글이 적혀 있고, '이 소설의 제목은?'이라는 질문이 있었던가...

소설의 내용은 잠시 무진이라는 고향을 찾은 주인공이 옛 선후배를 만나고, 그곳에 음악교사로 있는 인숙이라는 여인과 만나고 헤어지는 내용이 전부이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은 인숙을 사랑하지도, 책임지지도 않는다. 그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만을 다시금 경험할 뿐이다. 소설의 말미에서 아내에게서 돌아오라는 전보를 받고, 그는 다시금 부끄러운 자기 자신과 타협을 한다.

 

 

 

모든 것이 흔히 여행자에게 주어지는 그 자유 때문이라고 아내의 전보는 말하고 있었다. 나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것이 세월에 의하여 내 마음속에서 잊혀질 수 있다고 전보는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처는 남는다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랫동안 우리는 다투었다. 그래서 전보와 나는 타협을 만들었다. 한 번만, 마지막 한 번만, 이 무진을 , 안개를, 외롭게 미쳐 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다. 꼭 한번만, 그리고 나는 개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약속한다. 전보여, 새끼손가락을 내밀어라. 나는 거기에 내 새끼손가락을 걸어 약속한다. 우리는 약속했다.


그렇게 주인공은 무진을 떠나고, 다시금 심한 자괴감을 느낀다.


 

 

덜컹거리며 달리는 버스 속에서 나는, 어디쯤에선가 길가에 세워진 하얀 팻말을 보았다. 거기엔 선명한 검은 글씨로,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씌어 있었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아직 주인공이 느낀 그 부끄러움을, 그리고 무진이 상징하는 그 무력감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다. 솔직히 당시 이 소설이 왜 벼락을 맞은 충격을 주는 작품인지 온전히 공감을 할 수 없었다. 김승옥의 소설이 대부분 6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듯이, 당시 60년대를 살던 청년들의 무력감을 느끼기에는 세대가 너무나 다르다는 생각이든다. 그럼에도 소설 전반에서 풍기는 무진의 안개와 주인공의 무력감이 읽는 나를 누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릿터 Littor 2016.8.9 - 창간호 릿터 Littor
릿터 편집부 지음 / 민음사 / 2016년 8월
평점 :
품절


 

 

릿터 1호를 받은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호를 받았다. 1호를 읽고 리뷰를 쓰려고 미루고만 있다가, 2호를 받고 늦었지만 서둘러 1호 리뷰를 쓰게 되었다.

릿터는 [세계의 문학]이라는 문예지를 펴내던 민음사에서, 세계의 문학을 폐간하고 새롭게 출간한 문학잡지이다. 나 역시 오랫동안 세계의 문학을 구독하다가, 릿터의 출간 후 이 잡지를 구독하게 되었다.

요즘 새롭게 출간하는 문예지들은 예전의 고루?한 디자인과 내용에서 벗어나 무척 참신하고 현실참여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다. 릿터 역시 매달 새로운 주제로 현실과 문학을 접목시키려는 시도가 매우 신선했다.


 

 

릿터 1호의 커버스토리는 '뉴 노멀'이란 주제이다. '뉴 노멀'에 대해서는 인터넷이나 신문 기사에서 자주 접했지만, 막상 정확한 의미를 모르고 있었다. 이 기회에 뉴 노멀의 의미를 알아보니 '새로운 경제 상황'이라는 의미로 보통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의 경제상황을 이야기하는 용어였다.

'뉴 노멀'이라는 말은 이제 그야말로 '노멀'로 자리 잡은 듯하다. 저금리, 저성장, 저수익, 고위험, 국가 개입, 고실업, 정치 및 사회 불안 등을 이제는 우리 존재 조건의 '디폴트' 값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P24)

요즘 유행하는 '뉴 노멀'이라는 용어는 2008년 세계대공황 이후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자본주의 세계의 경제의 상태를 적절하게 표현해 준다. 뉴 노멀은 2008년 세계대공황 이후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상태를 적절하게 표현해 준다. 뉴 노멀은 2008년 세계대공황이 경미한 상처가 아니며, 따라서 쉽게 치유하기 어려운 세계졍제가 이전 상태와는 달라진 새로운 환경에 처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구체적으로는 저성장, 저금리, 저물가 상황에서 국가 채무와 가계 부채의 증가, 소득 및 부의 불평등으로 인해 수년간 세계경제의 불안이 지속될 수밖에 없벗다는 것이다. (P29)


 

 

이 잡지의 시작에는 '뉴 노멀'과 관련된 세 명의 소설가의 짦은 글을 담고 있다. 1998년의 IMF, 2008년 금융위기, 그리고 현재 2016년을 배경으로 한 세 인물의 이야기이다. 인간의 삶이 주변의 경제상황에 의해 어떻게 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시대와 청년의 역할을 점검하는 글도 실려져 있다. 20세기초 구한말의 시대부터, 한국전쟁, 군사독재, 그리고 현재까지 청년들이 시대에 어떤 역할을 해 왔는지를 이야기한다. 저자의 현대 시대의 청년들은 더 이상 저항하기를 멈추었다고 말한다. 대신 현실 순응이나 냉소가 전부라고 말을 한다.  

이들은 더 이상 아버지, 기성세대에 저항하지 않는다. 물려받을 것이있는 청년들은 부모세대에게 순종하면서 착실하고 예의 바르게 스펙을 쌓아가고 있는 중이다. 지주의 자식들이 독립운동에 나서고, 고관대작과 부르주아의 자녀들이 독재 타도를 외치던 시절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 청년들은 이 시절이 만족스럽다. 그렇다고 해서 물려받을 것 없는 청년들이 분노하고 싸우는 것도 아니다. 앞 세대가 상승의 사다리를 거뒀다고 생각하니 화는 나는데, 행동에 나서 봐야 자기 손해일 뿐이라고 여긴다. 기성세대의 '노오오오력'요구가 얼마나 기만적인 것이닞를 잘 알지만, "그래서 어쩌라는 겁니까? 우리에겐 들 짱돌이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대신 이들이 선택하는 전략은 냉소와 혐오다. (P21)

너무나도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작가의 분석이 예리하고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문예잡지에 경제학자의 글 두 편이 실려져 있다. 그 중 장시복 교수(목포 대학교)의 글이 마음에 와닿는다. 뉴 노멀 시대에는 더욱 더 승자독식의 경쟁체제와 국가가 경쟁체제에서의 패자보다는 승자만을 배려하는 시스템으로 변해 간다는 것이다.

더 암담한 것은 국가가 승자 독식의 위계화된 먹이사슬 구조를 더 견고하게 만드는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정부는 한마디로 승자만을 위한 정부다. 정부는 승자에게 유리한 법과 제도를 만들어 승자의 이익을 관철하는 데 골몰하고 있으며, 승자가 사회에 손실과 위험을 양산하더라도 이를 사회 전체에 부과하고 패자를 돌보는 일에는 관심조차 없다. (P30)

 

                 

 

 

 

응답하라 시리즈와 아다치 미츠루의 [H2]를 연관해서 쓴 기사도 있었다. 나 역시 응답하라 시리즈를 보면서 아다치 미츠루의 만화를 많이 떠올렸다. 내 또래 남자 아이들은 당시 아다치 미츠루의 만화를 보며 나름 감성을 키웠었다.

 

 

 

 

 

작가 인터뷰에는 평소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구경모 작가에 대한 인터뷰가 실려 있었다. KTX를 타면서 소설을 쓴다는 작가의 창작 방식이 매우 특이하면서도 인상적이었다.

 

 

소설 부분에는 조너선 사프란 포어와 김애란 작가의 소설이 실려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부대 - 2015년 제3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오래동안 들여다 볼 때, 심연 역시 우리를 들여다 본다!"


니체의 이야기이다. 많은 사람들은 니체가 이야기하는 '괴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논쟁을 했다. 종교인지, 권력인지, 사람인지. 그런데 최근에는 어쩌면 그 괴물은 인터넷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인터넷에서 우리는 매일 살아있는 괴물을 만나게 된다. 인터넷에서 형성된 여론이라는 괴물은 마치 거대한 포식자처럼 모든 것을 먹어 치운다. 우리의 생각, 배려심, 자유의지, 그리고 인간이라는 마지막 가치까지...


인터넷이 처음부터 이런 것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은 인터넷을 통한 정보의 교류와 의사소통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이 만들어질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어떠한 힘이 인터넷을 조작한 것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인터넷이라는 속성이 그런 것이지, 어느 순간 인터넷은 괴물로 변해 버렸고, 요즘에는 그 괴물과 싸우는 우리도 괴물로 변해가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인터넷을 통해 모든 것을 들여다 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인터넷도 우리를 들여다 보고 있다. 이제 인터넷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괴물로 변해가고 있다.




[댓글부대]라는 책을 읽기 전에 우연히 장강명 작가의 인터뷰 기사를 보았다. 그 기사에서 그는 자신의 작품을 이야기하면서, 그 중 댓글부대를 쓸 때 가장 힘들었다고 한다. [댓글부대]라는 책을 직접 읽어보니, 작가가 왜 그렇게 힘들어 했는지 조금이나마 이해가 간다. 작가나 배우나 모두 작품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사람들이다. 읽는 나까지 몸소리를 칠 정도의 거북한 소름이 돋게 하는 작품이니, 이 작품을 쓴 작가는 어떤 마음이었을지가 공감이 된다.


이 소설은 인터넷이라는 공간이 배경이다. 팀-알렙이라는 회사는 인터넷 여론 조작을 하는 회사이다. 사실 회사라는 이름도 거창하다. 단지 팀-알렙에는 삼궁과 차탓캇, 그리고 01査10이라고 불리는 세 명만이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일도 처음에는 작은 회사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제품이 인터넷검색 상위에 오르게 하는 비교적 단순한 인터넷 여론 조작의 일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이철수라는 인물을 만난다. 이철수는 삼궁에게 '가장 슬픈 약속'이라는 영화의 여론을 조작하는 일을 맡긴다. 이 영화는 전자회사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백혈병에 걸린 사건을 영화한 것이다. 삼궁은 기존의 다른 조직과는 다르게 전혀 다른 방법으로 여론을 조작한다. 그들은 영화회사에서 인금을 받지 못한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인터넷에 글을 올린다. 결국 여론은 자기 회사 노동자의 월급도 주지 않는 영화사가 다른 회사 노동자의 권익을 말한다며, 영화에 대한 사늘한 반응을 보인다. 그 후 팀-알렙은 여러 인터넷 게시판을 돌아다니며 진보성향의 사이트들을 무력화 시킨다. 그 방법이 너무나 치졸하지만, 또한 너무나도 잘 먹혀 들어가는 방법이었다.




이 소설의 제목을 처음 접할 때는 단지 정치권의 여론조작의 음모를 들춰 낸 소설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소설은 처음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단순하지가 않았다. 이 소설은 인터넷 여론을 조작하는 보수세력을 음모를 이야기 할 뿐 아니라, 그 음모에 너무나도 쉽게 놀아나는 진보세력의 허상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사실 우리는 누구나 인터넷에 여론을 조작하는 세력들에 대해 적대감을 가진다. 그러나 그런 여론에 쉽게 흔들리는 많은 사람들의 속성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인터넷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타인을 물고 뜯고, 무리를 쉽게 따라가려하는 짐승과 같은 우리의 본성을 이 소설을 너무나 잔인하게 파해치고 있다.

소설을 읽는 내내 인터넷이라는 공간 속에 드러난 인간의 추악한 본성이 느껴져서 마음이 좋지가 않았다.  그럼에도 소설은 도저히 외면할 수 없을만큼 너무나도 사실적이다. 정치적 성향을 떠나서, 우리가 외면해서는 안되는 인터넷의 민낯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