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권장도서로 인문고전 100선 읽기 2 - 『삼국유사』에서 『꿈의 해석』까지 서울대 권장도서로 인문고전 100선 읽기 2
최효찬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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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이 소설들을 읽으면서 현대 소설들의 뛰어난 구성에 감탄을 한다.

대부분 빠른 전개와 뛰어나 묘사력, 그리고 뛰어난 반전까지 갖추고 있는 소설이 대부분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수많은 책들이 쏟아지는 문학의 홍수시대에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예전과 다르게 고전을 읽을 때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때로는 지루한 전개와 시간을 끄는 세밀한 묘사나 설명으로 인해 읽기를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때마다 고전에 대한 쉬운 길잡이를 절실히 필요로하게 된다.




[서울대 권장도서로 인문고전 100선 읽기]라는 책은 서울대에서 정한 권장도서를 쉽게 설명한 책들이다.

2권은 시대로 보면 근대에 해당되는 책들을 모아 놓았다.

이 책의 장점이은 서양 고전뿐만 아니라 한국고전들까지 모여 있다는 것이다.

흔히 고전을 이야기 할 때 한국고전을 빼놓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에는 우리나라 고전문학이 두루 포함되어 있다.

[보조법어] [삼국유사] [성학십도] [구운몽] [춘양전] [연암집] [청구야담] 등과 같은 한국 고전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보조법어]나 [청구야담]같은 한국인이여도 경우는 쉽게 접하지 못하는 책들이다.

특히 이번에 [보조법어]에 관련된 부분을 읽으면서 이 책의 익숙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땅으로 해서 넘어진 사람은 땅을 의지해서 일어나라"


얼마전 표절 시비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힌 어느 여소설가의 말과 비슷하다.

이 말이 [보조법어]에 있는 글인지는 처음 알게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반가웠던 것은 오래 전 부터 내가 즐겨 읽었던 고전들을 소개되어 있다는 것이다.

마치 외국여행 도중에 한국 사람을 만난 것처럼 반갑다.

젊은 날에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던 프로이드의 [꿈의 분석]이나 어렵게 끝까지 읽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만났을 땐 뿌듯하기까지 했다.

특히 어릴 적부터 좋아했던 톨스토이와 도스트옙스키의 작품을 만났을 때가 가장 반가웠다.

이 책에는 톨스토이의 [안나카레리나]와 도스트옙스키의 [까라마조프가네 형제들]이 소개되어 있다.

단순히 소설의 줄거리만 소개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소설이 쓰여지게 된 시대적 배경과 작가의 상황, 그리고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담고 있는 사회상 등을 이야기 해 주고 있다.


안나 카레니나의 무대가 된 19세기 후반 페테르부르크는 두 부류의 인간들로 나뉘어 있었다. 톨스토이의 묘사에 의하면 하나는 "아비하고 우둔하며 특히 우스꽝스러운 인간들"이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역설적인 묘사를 하지만 이들이야말로 톨스토이가 지향하는 진실한 인간, 즉 '도덕군자'형 인간이다. 소설 속 레빈 같은 인물이 여기에 해당한다. 다른 부류는 톨스토이가 "진짜 인간"이라고 역설적으로 표현한 '정욕에 몸을 내맡긴' 사내들이다. 즉 '바람둥이'형으로. 브론스키와 스치바가 여기에 속한다. 이들의 세계에서 도덕 운운하는 것은 꼴사납고 촌스러운 일이다. '진짜남자'는 자질구레한 도덕 따위는 무시하고 용감하게 연애 사업에 정진해야 한다. (P430)

- 본문 중에서-

 

 

 



명작인 줄 알면서도 기회가 되지 않아 못 읽은 책을 만났을 땐 아쉬움과 함께 꼭 읽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찰스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이나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글자],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등은 많은 사람들이 읽는 명작임에도 개인적으로 아직 읽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다.


 

 

조금 더 일찍 이런 책을 만났다면 고전을 읽을 때 큰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특히 청소년들이 이 책을 통해 고전을 더 쉽게 접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만 염려스러운 것은 청소년들이 단지 입시 준비를 위해 이 책을 읽고나서 마치 고전을 다 읽은냥 수박 겉핥기식의 지식만을 채우지 않을까하는 것이다.

갈수록 고전의 깊이는 알지 못하고 얕은 지식만을 자랑하는 지적 허세만이 넘쳐나는 풍토로 인해 더욱 더 염려가 든다.

이 책이 얕은 지식을 얻기 위한 책이 아닌, 깊이 있는 고전 읽기의 도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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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어리 삼룡이 : 나도향 단편전집 한국문학을 권하다 27
나도향 지음, 노경실 추천 / 애플북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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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부터 읽고 싶어햇던 [한국문학을 권하다] 시리즈의 [나도향중단편전집]을 읽었다.

나도향작가와 그의 작품 [벙어리 삼룡이]나 [뽕], [물레방아] 등은 너무나도 유명한 작품이고, 나 역시 오래 전부터 그의 작품들을 접했었다.

[벙어리 삼룡이]이 마지막 장면은 내 생애의 중요한 시험에서 마지막 내용이 시험에 나왔던 기억이 난다.

삼룡이가 불길에서 주인집 아씨를 구해내고 죽는 장면을 제시하면서 '이 소설의 제목은?'이라고 묻는 문제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도향 작가의 작품은 직접 책으로 접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 책에는 나도향 작가의 초기 작품부터 24살의 짧은 나이로 단명할 때까지의 작품이 거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1922년 작품부터 순서대로 수록되어 있어서 나도향의 문학이 짧은 시간에 어떻게 성숙해졌는지를 한 번에 알 수 있었다.


이 책에 처음 실린 작품은 [젊은이의 시절]이라는 작품으로 작가가 1922년 백조라는 동인지를 창간하면서 실은 작품이다.

그리고 그 다음 작품은 백조 2호에 실린 [별을 안거든 우지나 말걸]이란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그의 초기작품부터 읽으면서 조금은 실망했다.

그의 명성에 비해서 작품의 완성도가 조금 떨어진다고 생각을 했다.

거이 젊은이의 사랑 이야기이거나, 가난으로 인해 힘들어 하는 지식인의 생활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런 소설들의 구성이 조금 엉성한 느낌이 나고, 인물 역시 영어 이니셜로 부르기도 하는 조금은 미숙한 묘사로 느껴졌다. 

그러다가 점점 그의 작품이 성숙 되어 가더니 중반부에 실린 작품부터는 천재작가의 면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주로 죽기 1년 전이 1925년에 쓴 작품들에서 작가의 완숙함이 드러나고 있다.


이 책에 실린 나도향 작가의 작품들에서는 제일 먼저 그의 뛰어난 묘사력이 눈에 띈다.

주변의 환경, 등장인물의 모습, 주인공의 심리, 식민지의 가난한 현실 등에 대한 묘사들이 자주 눈에 들어온다.


"아침 이슬이 겨우 풀 끝에서 사라지려 하는 봄날 아침이었다. 부드러운 공기는 온 우주의 향기를 다 모아다가 은하 같은 맑은 물에 씻어 그윽하고도 달콤한 내음새를 가는 바람에 실어다 주는 듯하였다. 꽃다운 풀 내음새는 사면에서 난다.

  작은 여신의 젖가슴 같은 부드러운 풀포기 위에 다리를 뻗고 사람의 혼을 최음제의 마약으로 마비시키는 듯한 봄날의 보이지 않는 기운에 취하여 멀거니 앉아 있는 조철하는 그의 핏기 있고 타는 듯한 청년다운 얼굴은 보이지 않고 어디인지 찾아낼 수 없는 우수의 빛이 보인다.

  그는 때때로 가슴이 꺼지는 듯한 한숨을 쉬었다. 그는 모을 일으켜 천천한 걸음으로 시내가 흐르는 구부러진 나무 밑으로 갔다. 흐르는 맑은 물은 재미있게 속살대며 흘러간다. 푸른 하늘에 높다랗게 떠가는 흰 구름이 맑은 시내 속으로 비치어 어롱어롱한다."

                                                                               -[젊은이의 시절] 중에서-

 

 

 

 


"그 집에는 삼룡이라는 벙어리 하인 하나가 있으니 키가 본시 크지 못하여 땅딸보로 되었고 고개가 빼지 못하여 몸뚱이에 대강이를 갖다가 붙인 것 같다. 거기다가 얼굴이 몹시 얽고 입이 크다. 머리는 전에 새 고랑지 같은 것을 주인의 명령으로 깍기는 깎았으나 불밤송이 모양으로 언제든지 푸 하고 일어섰다. 그래 걸어다니는 것을 보면 마치 옴뚜꺼비가 서서 다니는 것같이 숨차 보이고 더디어 보인다. 동일 사람들이 부르기를 삼룡이라고 부르는 법이 없고 언제든지 '벙어리' '벙어리'라고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앵모' '앵모'한다. 그렇지만 삼룡이는 그 소리를 알지 못한다.

- [벙어리 삼룡이] 중에서-

 

 

 

 

그러나 그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은 식민지 시대의 지식인의 모습이다.

아마 주인공 자신의 자아상이기도 지식인의 모습은 가난하고, 병약하며, 소심하기까지 하다.

한 때 누렸던 부와 지위로 인해 허세만 남았지만 가난한 현실 앞에서 작은 돈에 전전긍긍한다.

그럼에도 자존심으로 인해 조금 있는 돈을 친구들 술값으로 사용하거나 어려운 처지에 빠진 여성을 돕는데 사용한다. 

[여이발사]란 작품에서는 궁핍함으로 자신의 옷을 전당잡힌 일본 유학생이 여이발사에게 호기를 부리며 남은 돈을 모두 주는 허세를 부리는 장면이 나온다.

이런 주인공에 대한 묘사는 [피묻은 편지 몇 쪽]과 [지형근]이란 작품 속에서 가장 잘 나타나 있다고 생각한다.  


[피묻은 편지 몇 쪽]에서는 패병에 걸려 죽음의 그림자에 덮혀 있는 주인공이 한 여인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갈등하다가, 그 여인을 포기하는 마음의 변화를 잘 표현하고 있다.

마치 도스트옙스키의 소설의 주인공들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지형근]이란 소설의 주인공은 요즘 말로 하면 '찌질남'이다.

주인공은 한때는 도련님 소리를 듣는 지주의 아들이었으나 가나한 형편으로 인해 강원도의 한 마을로 막노동을 하러 온다.

그리고 그 곳에서 사귄 사람들에게 가진 모든 것을 빼앗기고, 이화라는 기생을 만나러 가기 위해 친구의 돈까지 훔친다.

마치 홍상수 감독의 영화의 찌질한 남자 주인공들을 떠오르게 한다.

그러면서도 연민의 모습과 자조의 모습으로 주인공을 묘사하는 것은 그 주인공의 모습에 나도향 작가 자신의 모습이 담겨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식민지 시대를 살았을 소심하고 나약한 우리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읽는 내내 기분이 씁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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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여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5
아베 코보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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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에는 삶에 매여 하루 하루를 사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조금 교만한 생각으로는 그들을 경멸했다.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먹고 사는 것이 삶에 전부인가?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뭔가 남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하지 않는가?

거이 매일같이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런 생각을 하는 시간이 점점 줄었다.

한 달에 가끔 한 번씩 정도...

그러다가 일 년에 한 번씩 정도...

어느덧 내 삶을 보니 젊은 시절 내가 그렇게 싫어하던 사람들의 삶을 살고 있었다.

평범한 일상에 매여, 가족과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하루 하루를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삶을 경멸하던 예전의 교만한 마음은 없어졌다.

그렇다고해서 이런 삶이 아름답거나 가치 있는 삶이라는고는 이야기 하지 못하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다시 꿈꾸어야 하나?

다시금 나만의 가치있는 삶을 찾아야 하나?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를 읽으며 오랫 동안 하지 않았던 이런 생각들을 다시 하게 되었다.

모래의 여자는 실존주의 소설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계속해서 카뮈나 카프카의 소설들이 오버랩되었다.

실존주의 소설에서 등장하는 초현실주의적인 배경과 상황들도 계속해서 반복된다.

 

주인공 남자는 평범한 학교 교사이다.

(책의 끝에서는 주인공의 이름인 니키 준페이라고 언급되지만 소설 속에서는 계속해서 한 남자로만 불린다.)

그는 평범한 삶을 견디지 못해 곤충수집을 시작한다.

그것도 자신만이 발견하고, 자신의 이름을 남길 수 있는 그런 곤충을 발견하고자 모래 속을 뒤진다.

그러던 어느 날 곤충을 수집하기 위해 어느 바닷가의 모래 마을을 방문하게 된다.

그리고 마을 노인의 호의?로 모래 구덩이 속에 있는 한 집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된다.

그 곳에는 30대의 여성 한 명만이 기거하고 있었고, 외부와는 사닥다리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

여자는 모래에 쌓여가는 구덩이 집에서 밤새 계속해서 모래를 퍼 담아 올리는 일을 했다.

다음 날 남자는 모래 구덩이를 나와서 집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아무도 사다리를 내려 주지 않았다.

남자는 그 곳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마을을 향해 고함도 치고..

여자를 윽박지르기도 하고...

여자를 묶어 놓고 탈출 방법을 묻기도 한다.

그러다가 결국 최후의 방법으로 자신의 옷과 헌 옷들을 묶어서 밧줄을 만들고...

여자가 자는 사이에 그 줄을 통해 모래 구덩이를 탈출한다.

그러나 마을 밖으로 달려 나갈 수록 길을 알지 못하고...

개에게 쫓기거나 깊은 모래 구덩이로 몸이 빠져간다.

결국 사람들에게 잡혀 다시 모래 구덩이로 돌아온다.

그리고 결국 체념하고 여자와 함께 모래를 퍼 나른다.

모든 소망을 잃어 갈 무렵 그는 모래 구덩이 속에서 물을 퍼올리는 유수장치를 만든다.

이제 이것이 그의 소망이 된다.

그 후 그는 탈출 할 기회가 생기지만 탈출하지 않는다.

오히려 망가진 유수시설을 고치며...

나중에 천천히 나가도 된다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소설을 읽으면서 오래 전에 읽었던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스 신화가 생각났다.

그리스 신화에서 시지프스는 인간으로서의 평범한 삶을 거부하고 신에게 맞선 대가로 언덕 위로 돌을 올리는 형벌을 받는다.

시지프스는 아침부터 힘들게 돌을 언덕 위로 올리면 그 돌은 저녁무렵 언덕 위에서 다시 떨어지게 되어 있다.

그러면 시지프스는 다시 언덕 아래로 내려가 다음 날부터 또 돌을 올린다.

이 모든 것들이 신들이 시지프스에게 내린 형벌이었다.

카뮈는 이것이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부조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카뮈는 그런 부조리를 증오하거나 거부하지 않는다.

그런 부조리의 삶에 오히려 행복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부조리와 행복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한다.

 

"행복과 부조리는 하나의 대지에서 나온 두 자식이다!"

 

소설 속의 남자는 이 부조리에 갇혀 있다.

모래 속의 세상은 그에게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세상이다.

왜 내가 모래 속에 갇혀 있어야 하는가?

이런 부조리한 삶이 어디있는가?

 

이런 부조리함은 단지 남자의 마음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모래 속의 삶이 바로 그런 삶이다.

모래는 하루만 퍼 올리지 않아도 쌓여서 집을 무너뜨리려 한다.

그러기에 계속해서 모래를 퍼 올려야 한다.

같이 있는 여자는 이런 삶은 자신의 삶으로 받아 들인다.

밤에는 모래를 퍼 올리고, 낮에는 잠을 잔다.

 

남자는 이런 일상을 거부한다.

여자에게 왜 어리석게 이런 곳에 갇혀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남자도 차츰 여자의 삶에 동화가 되어 간다.

그도 밤에 모래를 퍼 올리고, 낮에 잠을 잔다.

 

차이가 있다면 그는 계속해서 희망을 꿈꾼다.

마지막에는 유치하게 보이는 유수시설이 그의 희망이다.

그 유수시설이 모래 속의 작은 일상일뿐임에도...

 

 

저자가 말하는 모래란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이야기한다.

형제도 없고, 끝임없이 이동하는 신기루와 같은 것들...

하루라도 퍼올리지 않으면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들...

그 속에서 잠을 자고, 그 속에서 밥을 먹고, 그 속에서 삶을 꿈꾼다.

그럼에도 남자는 그 모래 속에서 계속해서 탈출을 꿈꾼다.

 

 

저자는 이런 모래 속의 삶에서 카뮈처럼 행복을 발견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삶이 행복한 삶이라고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모래 속의 삶을 긍정하는 건지, 부정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단지 우리 인간의 삶이 모래 속의 삶이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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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
윌리엄 골딩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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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끔찍한 것을 보기 싫어한다.

길을 가다가 동물의 사체같은 지저분한 것을 보면 인상을 찌뿌리고...

영화에서 잔인한 장면이 나오면 고개를 돌린다.

 

그런데 이런 끔찍한 것들은 단순히 우리의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간 안에는 동물의 사체나 영화의 잔인한 장면보다 더 끔찍한 것들이 들어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서 고개를 돌린다.

조용히 덮어 둔다.

그리고 말한다.

인간은 아릅답다고..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은 평화롭다고...

 

 

 

 

오랫만에 파리대왕을 읽었다.

내가 이 책을 처음 읽은 것은 중학생 때였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형이 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려왔다.

당시 15세기 표류기라는 만화가 한참 유행할 때여서 그런 종류의 모험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이 소설을 읽었다.

어린나이에 읽으면서 내내 '이건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왜 아이들이 변해가는지...

잭과 동료들은 왜 사이먼과 돼지(등장인물 중의 한 명의 별명, 실제 이름은 나오지 않음)를 죽이고, 랠프를 죽이려고 한느지...

그들은 왜 얼굴에 칠을 하고 미쳐서 춤을 추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소설이었다.

 

오랫만에 이 책을 다시 읽게 되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외면하고 싶은 인간의 내면의 끔찍한 모습과 마주하게 된다.

지금에서야 지난 이 소설이 이해가 된다.

이 소설이 이해가 간다는 것이 기쁘기보다는 슬프다. 

그동안 내가 끔찍한 인간의 내면을 이해할만큼의 경험을 했다는 이야기이니...

 

 

소설은 아무런 배경 설명없이 무인도에서 랠프와 돼지의 만남으로 시작된다.

그들은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외떤 섬에 불시착했다.

그들은 우연히 소라를 발견하고 랠프가 그것을 힘차게 분다.

그리고 흩어졌던 아이들이 모인다.

아이들은 소라의 권위에 복종하고 자연스럽게 랠프를 대장으로 뽑는다.

비교적 나이가 든 아이들의 모임인 성가대를 이끌던 잭만이 자신이 대장으로 뽑히지 않은 것에 불만을 품는다.

그 후 랠프와 잭은 사사건건 대립한다.

랠프는 문명사회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봉화를 피우는 것이 첫 번째 목표라고 생각한다.

그 다음에는 아이들이 안전하게 지낼 오두막을 짓는 것이다.

반면 잭은 사냥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모두들에게 고기를 먹여야 한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두 사람의 우선순위의 차이에 오는 대림으로 보인다.

그러나 랠프가 유지하려는 봉화와 오두막은 인간의 문명, 이성에 대한 마지막 끈이다.

잭은 인간 내면에 있는 광기와 살인, 피의 욕구를 추구한다.

 

처음에는 랠프가 승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이들은 무질서하지만 나름대로 그들이 만든 규칙에 복종하고, 랠프를 신뢰한다.

그런 랠프를 못마땅히 여긴 잭은 무리를 뛰쳐나가고...

나이든 아이들은 잭을 따라나간다.

그리고 그들은 점점 더 집단 광기에 휩쌓이게 된다.

맷돼지를 살육하고 피와 광기, 축제에 휩쌓이던 그들은...

처음으로 사이먼을 죽이며 인간을 죽인다.

그다음엔 랠프의 친구인 돼지를...

그리고 마지막에 랠프를 죽이기 위해 집단 몰이를 한다.

 

 

 

소설은 내내 그들을 공포에 몰어넣는 짐승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사실 그 짐승은 그들이 만들어 낸 허상이다.

그들이 짐승이라고 생각하고, 봉화를 올리기를 멈추었던 그것은...

사실은 짐승이 아닌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 군인의 시체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실을 안 후에도 여전히 짐승을 두려워한다.

짐승은 그들이 만들어 낸 허상이 아니라...

그들의 내면 안에 존재하는 피와 광기와 살인의 괴물이었다.

 

소설에서는 그 짐승을 '파리대왕'이라고 말한다.

잭과 그 일행이 맷돼지를 죽이고 그 머리를 짐승에게 바치기 위해 막대게 메달아 놓았는데...

그 머리에 파리들이 꼬이면서 마치 파리의 왕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 파리대왕을 마주친 사이먼과 랠프는 그 짐승이 인간의 내면에 하는 이야기를 듣는다.

 

"나 같은 짐승을 너희들이 사냥을 해서 죽일 수 잇다고 생가하다니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야! 넌 그것을 알고 있지? 내가 너희들의 일부라는 것을, 아주 가깝고 가까운 일부분이란 말이야, 왜 모든 것이 틀려먹었는가, 왜 모든 것이 지금처럼 돼버렸는가 하면 모두 내 탓인 거야(P214)"

 

 

이 책은 고도의 상징을 사용하고 있다.

인간의 이성과 문명을 상징하는 소라...

파괴와 살육을 상징하는 짐승...

결국 그 대결에서 파괴와 살육이 짐승이 승리하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소설의 압권은 마지막장면이다.

아이들의 집단 몰이를 당하여 해변까지 쫓겨 온 랠프가 구출을 하러 온 해군장교를 마주친 것이다.

다시금 문명과 마주친 것이다.

피투성이가 되어 살기위해 도망치던 랠프와 랠프를 죽이기 위해 온 몸에 진흙을 바르고 나무 창을 가지고 쫓던 아이들이 이성과 마주친 것이다.

그리고 랠프와 아이들은 소리 내어 운다.

무엇때문에 울었을까?

무엇이 서러워서 그렇게 울었을까?

 

 

 

마지막으로 이 책의 뒷부분에는 번역자와 E.L.엡스타인이 쓴 책에 대한 해설이 나와 있다.

번역자의 해설에서는 특히 인물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나와있다.

엡스타인은 인간 내면의 악마에 대해서 설명을 한다.

소설을 더 깊게 이해해 주는 좋은 글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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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4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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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대학시절 읽었던 책인데....

거이 20년만에 읽는 것 같다.

그때 참 감동있게 읽었는데..

지금 읽으니 뭐가 그렇게 어려운지..

그동안 너무 스토리 위주의 스릴러 소설에 길들여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다행힌 것은 고전강의를 들었던 이야기들이 소설을 읽는 맥락을 잡아 주었다는 것이다.

만약 그 강의를 듣지 않고 읽었다면 지금의 내 독서능력으로는 중간에 포기했을지도...

 

이 책의 스토리는 기본적으로 프라하의 봄이라는 역사적 배경과 토마시, 테레자, 사비나라는 삼각관계로 구성되어있다. 사비나를 좋아하는 프란츠까지 포함하면 사각관계?인가...

 

프라하의 봄이란 당시 소련의 위성국가였던 체코의 민주화운동이다.

사실 이것을 민주화 운동으로 불러도 되나 싶다. 개인적으로는 민주화운동과는 다른 성격이었다고 생각한다.

얼마 후 소련군이 이를 진압하고 지식인층 50만명을 숙청한 사건으로 알고 있다.

그때 지도자를 두부체크로 알고 있었는데... 이 책에서는 둡체크라고 발음한다.

 

이런 사건을 배경으로 에로틱한 우정을 꿈꾸며 200여명의 여성과 잠자리를 한 토마시라는 주인공과...

그를 사랑한 테레자...

토마시와의 에로틱한 우정 관계에 있는 사비나...

그리고 사비나를 사랑한 프란츠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사실 밀란쿤데라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스토리가 아니다.

밀란쿤데라에게 있어서 소설의 중심은 스토리가 아니라 인식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 인식이란 쿤데라가 이해하는 실존적 인간관이다.

 

따라서 위의 인물들의 사건들과 배경의 이야기는 이 책에서 소수의 분량을 차지한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역사적인 배경이나, 인물들의 관계가 아니다.

이런 역사적 상황과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나름대로의 세계관과 인간관이다.

(너무 거창한 단어들이다. 저자가 가장 싫어하는 단어들일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형이상학적이거나 관념적인 이론들을 극도로 싫어하는 것을 느낀다. 저자가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실존적인 인간이다. 그런데 사실 이런 실존적인 인간을 표현하는 방식도 형이상학적인고 관념적이다. 저자가 내가 하는 소리를 들으면 아마 욕을 할 것 같다...ㅠㅠ)

 

저자는 이 책의 시작부터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다룬다.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한다면! 이 우스꽝스러운 신화가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뒤집어 생각해 보면 영원한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인생이란 한 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란함조차도 무의미하다는 것이다.(P9)"

 

저자에게 세계는 영원히 반복되는 세상과 한 번뿐인 일회적인 세상으로 나뉜다. 저자에게 있어서 전자의 세상은 그냥 관념적으로만 존재하는 세상이고, 후자의 세상이 우리가 살고 있는 실제 세상이다. 그래서 저자와 저자가 창조한 소설 속의 인물들이 사는 세상은 가벼운 세상이다.

 

 "얼마 후 그는 다시 이런 생각을 했고, 나는 앞 장의 뜻을 밝히기 위해 이를 언급하고자 한다. 우주 어디엔가 우리가 두 번 째 태어나는 행성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또한 지구에서 보낸 전쟁과 거기에서 익힌 경험을 완벽하게 기억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리고 이미 두 번의 전생 체험을 가지고 세 번째로 태어나는 또 다른 행성이 존재할 수 도 있다.

  그리고 인류가 매 번 성숙하면서 다시 태어나는 다른 행성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영원회귀에 대한 토마시의 생각이다.

  지구(1번 행성, 미 체험 행성)에 사는 우리는 당연히 다른 행성에서 인간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에 대해서 막연한 개념밖에 지닐 수 없다. 인간이 더 현명해질까? 인간이 완순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반복함으로써 이에 도달할 수 있을까?

  비관주의와 낙관주의가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이런 유토피아에 대한 전망 속에서만 가능하다. 난관주의자란 5번 행성에서는 인간 역사가 피를 덜 흘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비관주의자란 그런 것을 믿지 않는 자이다.(P359-360)"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무거움을 지향한다.

토마시와 사비나는 이런 것들을 못 견뎌하는 인물이고...

아마 밀란쿤데라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래서 밀란 쿤데라가 이런 것들을 비웃기 위해 등장시키는 것이 섹스와 배설이다.

저자는 인간이 먹고 싸는 자연스러운 존재라고 한다.

그러나 종교나 철학은 이런 인간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을 '키치'(19세기 이후부터 등장한 문화비평적인 단어?)라고 한다.

실제적인 인간관과는 다른 이상적인 인간관이다.

토마시가 속한 체코의 공산주의는 이것을 꿈꾼다.

그래서 토마시와 사비나는 이런 것에 반대를 한다.

그러나 공산주의에 반대해 민주화 운동을 하는 이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키치를 꿈꾼다.

그래서 토마시와 사비나는 이것도 반대한다.

나는 이것이 바로 저자의 정치관이자 가치관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있는 그대로의 인간, 실존적인 인간을 주장한다.

인간은 먹고, 싸고, 선택을 하고, 실수를 하는 가벼운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또한 저자의 글을 읽다보면 이런 가벼움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 느껴진다.

그래서 이 소설이 아이러니하고 어렵다.

저자는 인간과 세상이 가볍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무거움을 주장하는 세상, 사상, 종교, 사람들을 비판한다.

그런데 또한 이 가벼움 때문에 괴로워한다.

이런 생각과 사상들이 소설 곳곳에 녹아져 있다.

 

소설은 이미 초반부분에 토마시와 테레자가 교통 사고로 죽는다고 언급하고 있다.

스토리상 이야기는 이미 초반부에 끝이 난 것이다.

그 다음은 각 자의 인물들이 깨닫는 세상과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이야기이다. 

결국 이 책에은 체코의 역사적 사건이나 남년간의 사랑이나 질투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가벼움의 세상, 우연으로 이루어진 세상, 그리고 그 세상에서 힘들어 하는 주인공들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 책의 결론, 저자가 이야기하려는 결론은 나도 모르겠다.

아마 밀란쿤데라의 다른 책들을 읽으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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