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혹당한 사람들
토머스 컬리넌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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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라면 가끔은 여자들만이 사는 무인도에 혼자 떨어지는 환상을 꿈꾸곤 한다. 그러면 그곳에서 모든 여성들의 사랑과 인기를 독차지하면서 살 수 있지 않을까. 오죽하면 이슬람에서는 죽은 후에 가는 낙원이 많은 미인들에게 둘러싸인 곳이라고 한다. 그런데 정말 그런 곳이 낙원일까. [매혹당한 사람들]이란 소설에는 아름다운 여성들만이 사는 외딴곳에 떨어진 한 남성이 나온다. 다만 그곳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만큼 아름다운 낙원은 아니다. 마치 소설 속에 등장하는 '독버섯'처럼 아름답지만 독을 간직하고, 상대를 파멸시키는 아름답지만 위험한 장소이다.

언제부터인가 소설 원작을 영화한 작품을 보려고 하면 꼭 소설부터 읽는 버릇이 있다. 어린 시절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영화를 보고 나서부터라고 생각된다. 이 영화를 보고 너무 감동을 받아서 원작 소설을 읽었다. 그런데 소설을 읽는 내내 '클라크 케이블'과 '비비안 리'가 떠올라 소설 속의 인물의 감정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유명한 영화가 개봉하면 원작을 먼저 보는 습관이 생겼다.

[매혹당한 사람들]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처럼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조금 더 광범위한 시대와 인물을 다루고 있다면 매혹당한 사람들은 버지니아주 외딴 숲 속에 있던 판즈워스 신학교라는 곳을 배경으로 8명의 여자와 한 명의 부상당한 북군 군인과의 관계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버지니아주의 숲 속에 위치한 판즈워스 신학교는 한때 이 지역에서 가장 명망이 있던 판즈워스 가문의 고택이다. 이제 옛 영화는 사라지고 두 자매인 마사 판즈워스와 해리엇 판즈워스만 남아서 여성 신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말이 신학교이지, 귀족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기숙학교 정도의 개념이다. 그나마 남북전쟁의 발발로 많은 여학생들이 떠나고, 여러 가지 이유로 오갈 데 없는 5명의 여학생들과 오래전부터 판즈워스 가문에 노예로 있던 '매티'라는 흑인 여자 노예만이 남아 있다.

판즈워스 신학교 근처에서 치열한 북군과 남군의 전쟁이 벌어지고, 부상당한 존 맥베니 상병이 산속에서 어밀리아 대브니라는 이 학교 학생에게 발견된다. 어밀리야는 맥베니를 데려오고, 맥베니는 8명의 아름다운 여성들에게 둘러싸여 극진한 대접을 받는다.

소설은 8명의 여성의 시각에서 돌아가면서 맥베니가 판즈워스 저택에 들어오는 과정서부터 그의 파멸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처음에는 모두들 맥베니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맥베니의 워낙 말주변이 좋아서 여성들에게 입맛에 맞는 말만 골라서 한다. 특히 항상 결단력이 있고, 냉철한 언니 마사 판즈워스보다 모든 부분에서 어리숙하고 친절한 해리엇 반즈워스에게 접근하는 부분은 혀를 내두르게 할 정도로 능숙하다. 그는 판즈워스 집에 들어온 다음 날 바로 부상당한 몸으로 누워있으면서도 자신을 간호하는 헤리엇에게 아주 능숙하게 접근해 키스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어쩔 수 없었어요. 하지만 사과하지 않을 거예요. 처음에 그렇게 키스했을 때, 그러니까 그 어린 아가씨와 키스했을 때 난 후회하지 않았어요. 지금도 후회하지 않지만, 거기 서 있는 당신은 별의별 생각을 다 하겠죠. 내가 신사답지 못하고, 천박하고, 그 외에도 관습에 얽매인 말들을 하겠죠. 하지만 한 가지만 말하죠. 해리엇 판즈워스, 난 당신을 모욕할 생각이 없어요. 이 상황이 처음 그 당시, 그러니까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와 똑같고, 난 처음과 똑같이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만약 내가 그래도 되냐고 물었더라면 당신은 안 된다고 하겠죠. 그래서 당신에게 묻지 않았어요. 이제 원하는 대로 하세요. 언니에게 말해도 좋아요. 당신이 원한다면 반란군을 불러 모아도 좋고요." (P184)

언니 마사 역시 맥베니의 교활함을 조금은 눈치채지만, 그에게 호감을 가진다.

"그는 다정하고 솔직했다. 미워할 수가 없었다. 그 순수함 이면에 교활함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교활함이 소년의 장난기 이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 그는 분명 교활했다. 그것만큼은 분명했다. 존 맥베니 상병이 무슨 말을 하건, 나는 속으로 그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P 134)

맥베니는 특히 판즈워스 학교에서 가장 어른이며 미인인 흑발의 에드위나 모로와 여성성이 뛰어나면서도 어머니를 닮아 남성을 유혹하는 재능이 있는 얼리샤 심스에게 호감을 느끼며 접근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이런 접근이 파국의 서막이 된다.

소설을 읽는 내내 밀폐된 공간인 파즈워스 학교에서 벌어지는 남녀 간의 기묘한 감정의 변화와 내밀한 욕망의 표출이 너무나 세밀하고 표현되어 있어 읽는 내내 마치 그 공간으로 내가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어떻게 남성으로서 그렇게 여성들의 심리를, 그리고 내밀한 욕망을 잘 그릴 수가 있을까? 무엇보다도 얽히고설킨 8명의 여성들의 관계와 맥베니의 감정을 그리는 것이 너무나도 섬세해서 읽는 내내 작가가 여성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느낄 정도였다. 그럼에도 맥베니가 다시 부상을 당한 후 점점 악의적으로 변해가는 과정이나 그에 대한 여성들의 반응은 너무 극단적이어서, 마치 스티븐 킹의 [미저리]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소설을 읽고 나서 영화가 더욱 기대가 되었고, 영화를 감상 후 소설과 함께 비교해서 리뷰를 남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과연 영화에서는 이런 치밀하고 섬세한 관계들을 어떻게 긴장감 있게 표현했을까. 거의 50년 전에 씌여진 소설이 이처럼 감성적이고 매력적일 수 있다는 사실에도 놀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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