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1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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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기전 약간의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를 트루니에가 완전히 뒤집어서 새롭게 썼다는 소개글을 읽으면서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와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가 유럽으로 대표되던 서구문명이 동양문명과 제3세계의 문명을 선도한다는 지극히 서구적이고 제국주의적 관점에서 쓰여졌다는 글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쟁반위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흑인 소년들을 서양인들이 포크를 들고 입맛을 다시는 삽화가 함께 삽입된 글이었다. 그런 선입견으로 이 책은 로빈슨과 방드르디의 입장을 역전시킴으로써 그러한 사고자체를 반전시키려는 글, 반대를 위한 반론의 글 정도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반론을 위한 글이 아니다. 황폐해진 문명 자체에 던지는 메세지이며 인간 본연의 회귀를 위한 메세지이다. 철학적 소양이 심오한 트루니에가 로빈슨의 사고의 변화를 통하여 문명과 인간과 자연에 대한 철학적 메세지를 소설 곳곳에 심어놓고 있다. 특히 로빈슨의 독백처럼 서술된 항해일지는 인간존재와 관계에 대한 혼돈과 변화를 들려주는 짧은 철학적 글이라고도 할수 있다.

조난을 당해 무인도에 홀로 남겨진 로빈슨은 탈출호의 실패후에 극심하게 좌절하나 무인도에 <스페란차(희망)> 란 이름을 붙이며 헌장과 형법을 만들고 스스로 섬의 총독이 되어 서구 문명, 과거로의 회귀를 꿈꾼다. 타자 부재의 현실을 인정하지 않던 그가 동굴속의 구멍으로 들어감으로써 자신속의 또 다른 섬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고 더 깊고 본질적인 관계의 인식이 단순히 타자와의 관계에서만 성립되는 것이 아닌 자아의 인식속에도 존재함을 느끼게 된다.

방드르디( 금요일 )의 등장은 새로운 사고의 전환점이다. 방드르디의 실수로 동굴이 폭발하고 다시 무인도의 초기 상태로 돌아간 섬에서 로빈슨은 방드르디의 활달하고 자유분방한 무질서에 극심한 혼돈을 겪으면서도 차츰 그에게 동화된다. 오히려 잘 짜여진 문명보다는 자유분방한 자연속에서 참다운 질서의 의미를 깨닫는다 . 28년 2개월후 나타난 구조선 화이트버드호에서 인간의 탐욕과 무질서에 혐오를 느낀 로빈슨은 남고 방드르디는 떠난다. 그의 옆에는 또 다른 불완전한 인간, 죄디(목요일)가 남는다..

로빈슨이 겪는 사고의 전환시점마다 등장하는 것이 물시계가 멈추는 것이다. 시간은 방향성을 가진다. 시계 바늘은 12시를 기점으로 미래를 향하여 움직이나 결국 다시 과거로부터 등장한다고 할수 있다. 과거로의 회귀와 미래로의 지향, 두가지 성향을 모두 지니고 있다. 로빈슨은 과거회귀도 미래지향도 아닌 정지된 현재속에서 사고의 전환을 맞는다. 적어도 현재의 나의 모습에 대한 폭넓은 통찰속에서 새로운 시각이 눈뜬다고 할수도 있겠다. 나도 시계를 멈추어볼까? 결국 지각만이 존재할 것이기에 잠시 보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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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져 2005-02-15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드르디, 죄디에 빠져 있다가...지각이 나오는 순간, 여긴 무인도가 절대로 될 수 없는 세상이란 걸...알아버렸어요.

icaru 2005-02-15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셀 투르니에를 마왕을 읽겠다고 덤볐던 게 딱 1년전이에요...
제겐 좀 낯설고도 어렵더라구요...좌절하고 싹 포기했습죠...
이것도 미셸 투르니에네요...헐...

호밀밭 2005-02-15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셸 투르니에의 작품이군요. 저도 이 작가의 작품을 온전하게 접하지 못했네요. 다 게으른 탓이지만요. 님의 리뷰 중 <오히려 잘 짜여진 문명보다는 자유분방한 자연속에서 참다운 질서의 의미를 깨닫는다.>라는 부분이 기억에 남네요. 가끔 무인도에 남겨지는 것을 상상하면서 제가 그곳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도 해요. 좋은 리뷰 잘 읽고 가요.

미네르바 2005-02-15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번에 이 책도 샀는데, 아직 안 읽었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다음에 살 걸... 땡스투 누르게요..^^ 그런데, 책 제목을 보고서도, 더군다나 저자가 미셀 투르니에인데도 방드르디를 금요일이란 생각을 왜 못했을까요? 불어인데.. 슬슬 무식한 제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하는군요. 님 리뷰 보니 어서 읽어보고 싶네요. 그런데 전 리뷰는 쓰지 못할 것 같네요. 비교 될 것 아니에요^^ 미셀 투르니에의 마왕도 지금 벼르고 있는데, 복순이 언니님 글을 보니 조금 엄두가 안나네요. 저도<오히려 잘 짜여진 문명보다는 자유분방한 자연속에서 참다운 질서의 의미를 깨닫는다 >라는 부분이 참 맘에 들어요.(호밀밭님 찌찌뽕~) 인간 대 자연의 모습을 비교해 주는 것 같아요. 지금 읽는 책 끝내면 얼른 이 책부터 읽어야겠네요.

잉크냄새 2005-02-16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한번 잡은 책은 어떻게든 읽고 마는 성격인지라 낯설어도 그냥 읽었답니다. 미셀 트루니에가 철학자여서 그런지 소설의 많은 부분을 그런 쪽으로 할애한것 같습니다. 아마 님들의 리뷰가 저자의 의도를 더 잘 파악하실겁니다.

파란여우 2005-02-23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인도에 남겨진다면 전, 알라딘을 통째로 갖고 갈 예정입니다.(가져가 질까요? 근데?^^)=허무맹랑한 파란여우는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역시나 간결하면서 명징한 리뷰였습니다.

잉크냄새 2005-02-24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인도에는 유쾌,상쾌,통쾌한 인터넷이 안되는 걸로 보고된바 있습니다.
그리고 리뷰여왕 여우님의 응원앞에 그저 글이 부끄러워질 뿐이군요.

2005-09-02 13: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5-09-19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두 저 물시계를 주목하긴 했는데, 전 일종의 휴식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였어요. 음..잉크냄새님 리뷰를 다시 읽어보니까, 아..정확히 이해가 가네요. 마지막 문단이 핵심을 요약한 듯한 파이널 총정리편이군요. 흐응~

잉크냄새 2005-09-23 0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 그날의 땡스투가 님이셨군요.^^
복돌님 / 단순히 야생이 문명을 극복한 사실보다도 그 이후 환상을 찾아 떠나 방군(?)의 뒷이야기를 유추해내시는 님의 안목, 존경스럽더이다.
 

116666

어느 서재지인이 캡쳐해주신 숫자이다. 줄에 꿰어져 달랑달랑 흔들리며 맑은 소리를 낼것만 같다.

1) 6

예전에 허접한 농담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별로 웃기지도 않은 것인데, 그때는 왜 그리도 낄낄거리며 웃었는지. 아마 잘 웃는다는 것도 순수하다는 말일것이다.

< 변씨가 소장이 되면 -> 변소장 , 육씨가 계장이 되면 -> 육계장 .....> 뭐 이런 시답잖은 농담이었다.

2) 66

가끔 나이에 비해 늙어보이는 사람이 있다. 개인적으로 나이에 비해 젊어보이는 것도 별로고 늙어보이는 것도 별로이다. 자기 나이에 맞게 나이들어 간다는 것, 그것을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라 여긴다.

며칠전 업체 부장님 한분의 주민등록번호를 볼 일이 있었다. 66년생, 그분은 예전에 등장한 선전 " 세상을 다 가져라"에 나왔던 아저씨의 인상과 똑같다. 적어도 50년대생일것이라 생각했는데 66년생이라니. 그분을 볼때마다 66이란 숫자가 떠오른다.

3) 666

아마도 < 오멘 > 이란 영화로 기억한다.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공포스럽고 독살스러운 눈매를 가진 정나미 떨어지던 남자 아역배우의 뒷통수에 선명하게 찍혀있던 숫자, 666. 악마의 숫자라고들 하곤 했다. 묵시룩에 등장하는 이 숫자를 피켓에 적어들고 1999년이 오기전에 회개하라던 사람의 모습도 언뜻 떠오른다.

가끔 행동이 표독스러운 인간을 대할때마다 뒷통수가 궁금하곤 했다.  슬쩍 지나치며 바라본 뒷통수에 666이란 숫자는 용서가 되어도 비듬은 용서되지 않았다.

4) 6666

6자 네개로 그리던 그림이 있었다. " 동그라미 동그라미 동그라미 / 동그라미 동그라미 동그라미 / 육육은 육육은 삼십육 / 육육은 육육은 백두산 " 라고 부르며 동작에 맞추어 그림을 그리면 곰이 그려진다.

동그라미 여섯개는 얼굴 하나, 눈 둘, 입 하나, 귀 둘, 몸통 하나. 육육은 양팔, 삼십육은 가슴에 새기던 숫자 마크, 또 육육은 양다리, 백두산은 다리 안쪽선을 그리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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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2005-02-02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6
요렇게 말이죠?^^(입주변은 곰답게 조금 변형시켰고, 가슴에 36은 못 썼네요)

Laika 2005-02-02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6 - 저희 식구 여섯이었습니다...지금은 아들 손자(아직 뱃속에 있지만) 며느리....외손자 ... 사위...

icaru 2005-02-02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박찬미님...작품...대단하세요~! 동그라미동그라미동그으~라미..

표독스러운 인간의 뒤통수가 궁금타....666이라는 낙인보다 더 용납 안 되는 비듬이라니..

앗...저희 집 식구도 6 이었다죠...


플레져 2005-02-02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찬미님, 그림 넘넘 잘 그리셨어요!!
저희두 식구가 여섯, 시댁에 제가 시집가자 식구가 여섯, 얼마전에 티격태격한 언니가 66년생, 오멘에 나온 악마의 숫자 666, 현재 6 네개와 관련된 꺼리가 없습니당 ^^

Laika 2005-02-02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은 매일 새벽 6 시에 문을 열고,

미스 하이드님의 이벤트도 매일 새벽 6 시에 시작합니다. ^^


진주 2005-02-02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메~제가 여기서 그림 잘 그렸다고 칭찬 받네요 ㅎㅎ
복순이 언니님, 플레져님 고마워요.

잉크냄새 2005-02-02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찬미님 / 명작입니다. 몸통을 표현하는 동그라미 하나가 빠진것 같아요. 이 노래말고도 " 아침먹고 땡, 점심먹고 땡, ~~~ 아이고, 무서워 해골바가지 " 하면서 그리던 해골도 있었죠.^^
라이카님 / 매일 아침 6시에 시작하는 이벤트는 뭐죠? @@
복순이언니님 / 비듬에 관한 지저분하고 추악한 추억이 있는지라... ( 이미 알고 있을것 같은데요)
플레져님 / 이곳은 여섯식구가 대세를 이루네요. 오메~ 그 영화 제목이 < 오멘 > 이었군요. ^^

미네르바 2005-02-02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정말 6이라는 숫자 네 개를 줄에 꿰어서 흔들면 딸랑딸랑하며 맑은 소리를 낼 것 같네요^^ 그나 저나 박찬미님 초등학교 6학년 때의 그 만화 실력을 여기서도 유감없이 보여주는군요.

잉크냄새 2005-02-03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네르바님 / 맑은 풍경소리가 날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올 겨울중 가장 추운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사무실 창을 통하여 내다보이는 무채색의 건물과 앙상한 가로수들이 묘한 조화를 이루어 더 을씬년스럽다. 건물도, 아스팔트도, 잎을 떨군 나무도 무채색의 음산함을 간직하기는 마찬가지다. 다만 길을 걷는 사람들의 움추린 옷과 시리도록 푸르른 하늘만이 무채색이 아니다.

평양거리를 촬영한 뉴스의 한자락이 떠올랐다. 온통 회색의 거리를 단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지나가던 거리, 언뜻 보이던 강렬한 빨간색이 왠지 부자연스럽던 거리가 떠올랐다. 그리고 셀수없을 정도의 색들이 줄지어 지나가는 서울의 거리를 떠올렸다. 옷가지들의 색의 다채로움에 무채색이 묻혀져버린 거리, 내형적인 면이야 어떨지 몰라도 가끔 뉴스를 통해 바라보는 서울거리가 온통 회색빛이 아닌것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IMF가 터진 직후, 신입사원으로 부도위기의 다른 회사를 인수하는 팀으로 참석한 적이 있었다. 톨게이트를 빠지자마자 위치한 공장은 온통 회색이었다. 봄이 막 움트기 시작한 직후였지만 잔디밭에 듬성듬성 머리를 내민 초록의 생명들이 그 건물을 덧칠하기에는 힘들어 보였다. 건물 내부로 들어서 잠시 일행과 떨어진 순간, 왠지 모를 공포와 한기를 느꼈다. 두리번거리며 잠시 짚은 건물벽에서 뿜어져나오던 한기를 잊을 수가 없었다. 종종 걸음으로 재빠르게 달려가며 뒤돌아본 건물의 음산한 복도는 이미 생명이 다해가고 있었다. 사람의 온기, 무생물의 존재를 따스하게 만드는 것은 사람의 온기였다. 의욕을 상실한, 지쳐 초라하게마저 느껴지던 그 회사의 사람들의 몸에서 건물은 더 이상 온기를 느끼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었다.

뒤돌아보니 사무실 곳곳이 떠들썩하다. 정신없이 전화기에 매달린 사람들, 시답잖은 농담으로 웃음웃는 사람들, 한치앞도 불안한 현재를 미련하도록 열심히 사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온기가 있어서 이 건물은 아직 따뜻하다. 사람사는 곳의 떠들썩함, 그것이 어느날보다 귀하고 정겹게 느껴지는 날이 있다. 내 자리로 돌아왔다. 아직 따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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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2005-02-01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아이들 뛰고 난리 법석을 피우면 우리 엄마는 그러시죠
"인제 사람 사는 맛이 난다"
고요...........

미네르바 2005-02-01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젠 떠들썩함이 그리워지네요. 학교에서 40명 가까이 되는 아이들이 떠들 때...유난히 그렇게 떠들 때가 있지요. 비오는 날이라던가, 잔뜩 찌푸린 날들... 조용히 하라고 소리를 치고(그래서 종종 목이 쉬지요^^), 교탁을 두드려 보아도 통제가 불가능할 때... 그 때는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지요. 그런데, 방학을 하고 한 달이상 아이들을 보지 못할 땐, 그 시끄러운 소리가 그리워지더라구요. 그 시끄러움 속에는 사람의 온기뿐만 아니라 사람 사는 냄새도 나지요? 그 시끄러움은 살아있다는 증거겠지요?

Laika 2005-02-01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겨울엔 특히나 더 이런 따스한 사람의 온기가 그리워지나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 따뜻한 보리차나 마셔야겠습니다. ^^

hanicare 2005-02-02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기와 온기.삐죽삐죽 다소 불규칙하고 어수선한 것들이 뿜어내는 입김일까요?
이제는 단정한 것보다 그런 쪽에 마음이 끌리는군요,

2005-02-02 1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잉크냄새 2005-02-02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아직도 회색을 보면 싸늘한 기운을 품고 죽어가고 있던 그때의 그 건물벽이 떠오릅니다. 무채색이란 이런거구나 하고요.
사실 전 회색을 무척이나 좋아했는데 ( 예전에 보물섬에 등장하는 칼잡이가 회색머리였죠. 그때이후로 쭈욱~~ ) 그 건물벽을 만진 이후로 회색에 정이 가지 않더군요.
 
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새벽 세시면 어김없이 울리던 자명종 소리, 간소한 밥상 차리는 소리, 두런두런 들리던 부모님의 목소리, 삐걱 현관문 여는 소리, 뒤이어 자전거 자물쇠 푸는 소리가 들리면 난 조용히 일어나 창문을 조금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절그럭거리며 어두컴컴한 동네어귀로 사라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한참을 바라보고 나서도 그 소리의 여운은 한참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오랜 세월 가슴 한켠이 아련하도록 들리오던 그 소리들이 아버지의 목숨이었음을 세월이 지난후에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허삼관을 만나면서 그 소리가 다시 들렸다.

허옥란과의 결혼을 위해 처음 피를 판 허삼관은 삶의 고난마다 피를 팔아 연명한다. 허옥란이 결혼전 한번의 실수로 얻은 자식 일락이가 자신의 친자식이 아님을 알고 일락이를 차별하고 임분방과 한번의 외도를 저지르기도 한다. 그런 그의 모습이 그저 옹색하고 치졸하게만 보이지 않는 것은 어리숙하기에 더 인간적인 아버지와 남편의 모습 때문이다. 피를 판 돈으로 아내와 나머지 두 아들과 국수를 먹으러 가면서 일락이에게만 고구마를 사먹게 한후 울먹이며 집을 나선 일락이를 찾아 업고 국수집으로 가는 장면이나 문화대혁명을 맞아 기생 허옥란으로 손가락질 받으며 가족비판대회에 선 허옥란을 자식들에게 비판하게한후 자신도 임분방과의 외도가 있었음을 자식들에게 고백하는 장면은 짧은 쓴웃음뒤에 길고 커다란 여운으로 남는다.

간염으로 상해로 실려간 일락이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진창길을 걸으며 들르는 도시마다 사나흘에 한번씩 매혈을 하는 허삼관은 다름아닌 우리들 아버지의 모습이다. 창백한 얼굴을 감추기 위해 겨울 햇살에 얼굴을 쪼이며 피를 팔다 오줌보가 터져 폐인이 된 방씨와 뇌출혈로 죽은 근룡을 떠올리며 우는 모습, 더 이상 자신의 피를 팔수 없음에 목놓아 통곡하는 그의 모습속에 가부장적 권위로 비추어지는 보통 아버지들의 슬픈 뒷모습이 보였다. 가슴 속의 아픔과 사랑을 시원하게 한번 표현하지 못하고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커다랗게 지고 가는 뒷모습이다. 아픔에 인내하고 사랑에 서툰, 그러나 가슴 한곳에 웅어리진 커다란 사랑을 품고 가는 모습이다. 슬퍼서 울고 기뻐서도 우는, 속 깊은 울음을 간직한 모습이다.

저자는 책머리에서 평등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그는 평등을 두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사람이 죽음에 이르러 위대한 성인과 스스로를 비교하며 결국 죽음앞에 인간은 평등하다는 진리를 깨닫는 것이요, 둘째는 그저 보통사람들의 평등이다. 내가 어렵고 힘들어도 남도 같이 어렵고 힘들면 그것으로 스스로를 위안삼고 살아가는, 사는게 다 그렇지, 라고 말할수 있는 사람들이다. 중국의 혼란하던 혁명기를 지나며 살아온 보통 사람들의 삶, 그것은 그 어떤 유창한 표현도 필요치 않는 그저 동시대의 아품을 함께한 사람들의 동질감이요 삶의 평등이라는 것일게다. 죽음으로써 맞는 평등이 아닌 삶으로써 맞이한 평등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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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29 15: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5-01-29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화의 책들 모두 좋아해요.
<사는 것은 연기와 같다>
'허름해서 좋은 위화의 사람들'......

미네르바 2005-01-30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많이 웃고, 울며 읽었던 책이었지요. 허삼관 매혈기가 아닌 "賣命記 " ...그렇지요. 단순히 피를 판 것이 아니라, 생명을 판 것이지요. 위화는 지금 중국에서 한참 뜨는 작가라고 하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는 그의 다른 작품도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아직 읽지는 않았지만 다음엔 다른 책도 읽어야겠어요. 잘 읽었어요^^

잉크냄새 2005-01-31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화의 또 다른 소설을 읽어볼까 해요. "허름해서 좋은 위화의 사람들"이란 표현도 참 적절한것 같군요. 허삼관식 웃음과 울음이 중국인의 정서인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습니다.

내가없는 이 안 2005-02-05 0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들었다 놨다 했어요. 의외로 너무 가슴 아플 것 같은 책은 고민을 하게 되더군요. 역시 잉크냄새님 리뷰를 읽어보니 또 새삼 마음 아픈 책이다, 주지가 되어선 또 고민합니다. 담담하게 쓰셨는데도 그 속에 피흘린 돈으로 자식에게 고구마 사먹이는 주인공에, 피흘리다가 기어이 오줌보까지 터진 또 다른 아버지의 모습이 고스란히 전해오는군요. 전 내내 고민하다가 언젠간 읽고 맙니다. 이 책 조만간 읽게 되겠군요.

잉크냄새 2005-02-14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안님의 글에서 허삼관은 또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까 궁금해집니다. 위화의 글 자체가 담담했던것 같아요. 일부러 감성을 자극하지는 않지만 글뒤에 감춰진 서글픔이랄까요.^^ 언젠가 올라올 님의 리뷰 기대합니다.^^

2008-11-17 15: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1-18 0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복장불량의 21살 청년
나는 그 시절 달릴때가
가장 무안했습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오래도록 달린 거리는 아마도 11km 정도쯤 될것이다. 축구 A매치에서 가장 많이 뛰는 미드필더가 7~8km를 뛴다고 한다. 그러니 지금 축구장에서 내가 뛰는 거리는 고작해야 2~3km 남짓일것이다. 가장 긴 거리 11km는 10km 단축 마라톤에 참여하여 뛴 거리이다. 1km는 반환점을 역으로 도는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덤으로 주어진 거리이다.

단축 마라톤에 참가한 것이 대학 1년인지 2년인지 봄인지 가을인지는 가물가물하다. 하여간 어느해 공대 체육대회였다. 수업중인 교실에 선배들이 처들어와 체육대회 단체상을 먹어야 하는데 후배들이 참여도 안한다고 궁시렁거리고 급기야 세대가 어쩌느니 하며 거들먹거리는 소리가 싫어서 자원한 자리였다.  미리 지원한 학생들은 운동복에 반바지, 운동화등 마라톤에 필요한 복장을 갖추고 나왔지만 나를 비롯한 몇몇의 급조된 지원자들의 복장은 천태만상이었다. 당나라 군대였다. 양복바지, 구두, 남방. 그날의  복장이다. 뛰어야하나 말아야하나를 고민하는데 미리 지원한 친구녀석이 축구화를 빌려주었다. 아마도 사려깊은 배려였겠지만 아스팔트 위에서는 축구화보다 차라리 구두가 낫다는 것을 안것은 한참이 지나서이다. 하여간 스타트를 알리는 총성이 울리고 마라톤은 시작되었다.

중략 ( 하여간 뛰었다 )

대열의 후미에서 뒤쳐져 천천히 달리던중 대열을 잃어버렸고 결국 반환점을 거꾸로 돌아 가뜩이나 뒤쳐져 있던 위치가 거의 꼴찌로 전락하고 말았다. 반환점을 돌아 다시 시내로 나왔을때는 주변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학교 차량이 뒤쳐져 포기한 몇몇을 싣고 달리는 것을 보았으나 그래도 남아있는 자존심에 끝까지 뛰고자 했다.

마라톤을 위해 교통정리를 하던 경찰관들이 복귀해버린 시내를 하교길의 꼬마들과 신호등 지켜가며 계속 달렸다. 나를 올려다보는 꼬마들의 시선이 왠지 꺼림칙했다. 경찰관에게 두번정도 붙들려 검문을 받았다. 이유를 알수 없었다. 그러나 고개를 삐닥하게 하고 나를 훏어보는 경찰관의 눈길을 따라 나의 모습을 보았을때 경악했다. 단추를 세개 정도 풀어헤친 남방, 무릅까지 걷어올린 양복바지, 그리고 축구화... 술이나 약에 취한 놈으로 보기에도 지나침이 없는 모습이었다. 이것을 무아지경, 무인지경이라 해야하나.

그러나 어쩌랴. 이미 엎어진 물인것을. 그 꼴로 완주를 하고 학교 정문을 들어설때는 이미 다 정리하고 단체상까지 선정한 이후였다. 신호등 기다리고 경찰관에게 심문받고 시간이 그렇게 흐른것은 당연하리라. 결국 머릿수도 채우지 못한 것이다. 난 왜 뛴 것인가? 그래서 지금도 마라톤을 보면 그냥 맹목적이라는 생각만이 드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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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져 2005-01-20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음... 그래도 완주를 하신거잖아요... 늦었지만, 박수 한다발~~ 짝짝짝 짝짝~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뛰지 않으려고 하는 주의라서요,
달리기를 하는 분들만 우러러본답니다.
이 영화, 보고 싶어요. 마라톤이면 그랬을 텐데...말아톤이라서요.

Laika 2005-01-20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재작년엔가 여성지 주관 단축 마라톤에 걸어도 된다는 얘기 듣고 참가했는데, 그만 같이간 꼬마가 상품 얘기 듣고 휙~ 달려나간 바람에 그 꼬마 잡으려고 그만 예정에 없이 (?) 달리고 말았답니다.
저번에도 다른분 페이퍼에서 봤지만 알라딘 사람들 다들 달리기 싫어하시는것 같아서....참 좋아요. ㅎㅎ 전 달려야 한다는 생각만 해도 다리에 힘이 쪼옥 빠지는 체질이라서요...^^
그래도 완주하신 잉크님께 박수를 ...짝짝짝~~

진주 2005-01-20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뒤에서 누가 막 따라오면 잘 뛰어지고, 하다못해 뛰는 대열에 끼어야 힘들지 않고 달릴 수 있던데요.....대단하십니다. 혼자서 끝까지 달리시다니! 영화의 한 장면 같아요.

2005-01-20 16: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란여우 2005-01-20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여간 뛰었다니 님의 단순한 성격이 저와 비슷하군요. 알라딘 체육대회때 꼬옥 출전하셔야 합니다^^

로드무비 2005-01-20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아톤' 영화 무지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달리기 젬병이랍니다.
1분에 22초였던가? 체력장 때 남 다 받는 A를 못 받았으니......

비로그인 2005-01-20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젊은 땀방울과 호흡이 느껴지는듯 하네요.
가끔씩 숨이 턱에까지 차도록 무작정 달리고 싶을 때,,,가끔 그럴때가 있더라구요.

잉크냄새 2005-01-20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 저도 말아톤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극장까지 달려가겠습니다.
라이카님 / 전 그냥 달리는 것은 별로네요. 축구장에서 달리는 것은 좋은데...이상하죠.^^
찬미님 / 도심을 정신나간 사람처럼 달리는 영화가 뭐가 있죠? 다이하드3 ?
속삭이신님 / 님도 항상 꾸준하십니다. 가늘더라도 길게 가기로 한 약속. 아시죠?
파란여우님 / 어쩌면 학익동과 용현동을 뛰어다니던 젊은 맛간 청춘을 보셨을수도 있겠군요.^^
로드무비님 / 전 단거리는 상급이었는데 장거리는 하급이었습니다.
나니님 / 숨이 턱에 차고 심장이 파열할것 같은 한계점을 넘는 것이 달리기의 또 다른 매력이라고 하더군요.

갈대 2005-01-20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추를 세개 정도 풀어헤친 남방, 무릅까지 걷어올린 양복바지, 그리고 축구화... ' 상상하면서 혼자 한참을 히죽거렸습니다^^

잉크냄새 2005-01-21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갈대님 / 말그대로 21살의 복장불량 청년 마라토너(?)였습니다.^^

내가없는 이 안 2005-01-26 0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1살의 복장불량의 청년이 찢어진 청바지가 아니라 양복바지라니, 전 그게 더 의아한걸요. ^^

잉크냄새 2005-01-26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안님 / 마라톤 복장불량입니다. 그때 왜 양복바지를 입고 있었는지는 기억이 가물 가물하네요.^^

sweetmagic 2005-01-28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 올려 주세요 ~!!!

잉크냄새 2005-01-31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직님 / 아쉽게도 사진이 없네요. 요즘에 그랬다면 아마 몰카 촬영이라도 하는지 알았을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