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겨울중 가장 추운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사무실 창을 통하여 내다보이는 무채색의 건물과 앙상한 가로수들이 묘한 조화를 이루어 더 을씬년스럽다. 건물도, 아스팔트도, 잎을 떨군 나무도 무채색의 음산함을 간직하기는 마찬가지다. 다만 길을 걷는 사람들의 움추린 옷과 시리도록 푸르른 하늘만이 무채색이 아니다.
평양거리를 촬영한 뉴스의 한자락이 떠올랐다. 온통 회색의 거리를 단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지나가던 거리, 언뜻 보이던 강렬한 빨간색이 왠지 부자연스럽던 거리가 떠올랐다. 그리고 셀수없을 정도의 색들이 줄지어 지나가는 서울의 거리를 떠올렸다. 옷가지들의 색의 다채로움에 무채색이 묻혀져버린 거리, 내형적인 면이야 어떨지 몰라도 가끔 뉴스를 통해 바라보는 서울거리가 온통 회색빛이 아닌것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IMF가 터진 직후, 신입사원으로 부도위기의 다른 회사를 인수하는 팀으로 참석한 적이 있었다. 톨게이트를 빠지자마자 위치한 공장은 온통 회색이었다. 봄이 막 움트기 시작한 직후였지만 잔디밭에 듬성듬성 머리를 내민 초록의 생명들이 그 건물을 덧칠하기에는 힘들어 보였다. 건물 내부로 들어서 잠시 일행과 떨어진 순간, 왠지 모를 공포와 한기를 느꼈다. 두리번거리며 잠시 짚은 건물벽에서 뿜어져나오던 한기를 잊을 수가 없었다. 종종 걸음으로 재빠르게 달려가며 뒤돌아본 건물의 음산한 복도는 이미 생명이 다해가고 있었다. 사람의 온기, 무생물의 존재를 따스하게 만드는 것은 사람의 온기였다. 의욕을 상실한, 지쳐 초라하게마저 느껴지던 그 회사의 사람들의 몸에서 건물은 더 이상 온기를 느끼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었다.
뒤돌아보니 사무실 곳곳이 떠들썩하다. 정신없이 전화기에 매달린 사람들, 시답잖은 농담으로 웃음웃는 사람들, 한치앞도 불안한 현재를 미련하도록 열심히 사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온기가 있어서 이 건물은 아직 따뜻하다. 사람사는 곳의 떠들썩함, 그것이 어느날보다 귀하고 정겹게 느껴지는 날이 있다. 내 자리로 돌아왔다. 아직 따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