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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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세시면 어김없이 울리던 자명종 소리, 간소한 밥상 차리는 소리, 두런두런 들리던 부모님의 목소리, 삐걱 현관문 여는 소리, 뒤이어 자전거 자물쇠 푸는 소리가 들리면 난 조용히 일어나 창문을 조금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절그럭거리며 어두컴컴한 동네어귀로 사라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한참을 바라보고 나서도 그 소리의 여운은 한참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오랜 세월 가슴 한켠이 아련하도록 들리오던 그 소리들이 아버지의 목숨이었음을 세월이 지난후에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허삼관을 만나면서 그 소리가 다시 들렸다.

허옥란과의 결혼을 위해 처음 피를 판 허삼관은 삶의 고난마다 피를 팔아 연명한다. 허옥란이 결혼전 한번의 실수로 얻은 자식 일락이가 자신의 친자식이 아님을 알고 일락이를 차별하고 임분방과 한번의 외도를 저지르기도 한다. 그런 그의 모습이 그저 옹색하고 치졸하게만 보이지 않는 것은 어리숙하기에 더 인간적인 아버지와 남편의 모습 때문이다. 피를 판 돈으로 아내와 나머지 두 아들과 국수를 먹으러 가면서 일락이에게만 고구마를 사먹게 한후 울먹이며 집을 나선 일락이를 찾아 업고 국수집으로 가는 장면이나 문화대혁명을 맞아 기생 허옥란으로 손가락질 받으며 가족비판대회에 선 허옥란을 자식들에게 비판하게한후 자신도 임분방과의 외도가 있었음을 자식들에게 고백하는 장면은 짧은 쓴웃음뒤에 길고 커다란 여운으로 남는다.

간염으로 상해로 실려간 일락이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진창길을 걸으며 들르는 도시마다 사나흘에 한번씩 매혈을 하는 허삼관은 다름아닌 우리들 아버지의 모습이다. 창백한 얼굴을 감추기 위해 겨울 햇살에 얼굴을 쪼이며 피를 팔다 오줌보가 터져 폐인이 된 방씨와 뇌출혈로 죽은 근룡을 떠올리며 우는 모습, 더 이상 자신의 피를 팔수 없음에 목놓아 통곡하는 그의 모습속에 가부장적 권위로 비추어지는 보통 아버지들의 슬픈 뒷모습이 보였다. 가슴 속의 아픔과 사랑을 시원하게 한번 표현하지 못하고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커다랗게 지고 가는 뒷모습이다. 아픔에 인내하고 사랑에 서툰, 그러나 가슴 한곳에 웅어리진 커다란 사랑을 품고 가는 모습이다. 슬퍼서 울고 기뻐서도 우는, 속 깊은 울음을 간직한 모습이다.

저자는 책머리에서 평등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그는 평등을 두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사람이 죽음에 이르러 위대한 성인과 스스로를 비교하며 결국 죽음앞에 인간은 평등하다는 진리를 깨닫는 것이요, 둘째는 그저 보통사람들의 평등이다. 내가 어렵고 힘들어도 남도 같이 어렵고 힘들면 그것으로 스스로를 위안삼고 살아가는, 사는게 다 그렇지, 라고 말할수 있는 사람들이다. 중국의 혼란하던 혁명기를 지나며 살아온 보통 사람들의 삶, 그것은 그 어떤 유창한 표현도 필요치 않는 그저 동시대의 아품을 함께한 사람들의 동질감이요 삶의 평등이라는 것일게다. 죽음으로써 맞는 평등이 아닌 삶으로써 맞이한 평등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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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29 15: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5-01-29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화의 책들 모두 좋아해요.
<사는 것은 연기와 같다>
'허름해서 좋은 위화의 사람들'......

미네르바 2005-01-30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많이 웃고, 울며 읽었던 책이었지요. 허삼관 매혈기가 아닌 "賣命記 " ...그렇지요. 단순히 피를 판 것이 아니라, 생명을 판 것이지요. 위화는 지금 중국에서 한참 뜨는 작가라고 하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는 그의 다른 작품도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아직 읽지는 않았지만 다음엔 다른 책도 읽어야겠어요. 잘 읽었어요^^

잉크냄새 2005-01-31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화의 또 다른 소설을 읽어볼까 해요. "허름해서 좋은 위화의 사람들"이란 표현도 참 적절한것 같군요. 허삼관식 웃음과 울음이 중국인의 정서인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습니다.

내가없는 이 안 2005-02-05 0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들었다 놨다 했어요. 의외로 너무 가슴 아플 것 같은 책은 고민을 하게 되더군요. 역시 잉크냄새님 리뷰를 읽어보니 또 새삼 마음 아픈 책이다, 주지가 되어선 또 고민합니다. 담담하게 쓰셨는데도 그 속에 피흘린 돈으로 자식에게 고구마 사먹이는 주인공에, 피흘리다가 기어이 오줌보까지 터진 또 다른 아버지의 모습이 고스란히 전해오는군요. 전 내내 고민하다가 언젠간 읽고 맙니다. 이 책 조만간 읽게 되겠군요.

잉크냄새 2005-02-14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안님의 글에서 허삼관은 또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까 궁금해집니다. 위화의 글 자체가 담담했던것 같아요. 일부러 감성을 자극하지는 않지만 글뒤에 감춰진 서글픔이랄까요.^^ 언젠가 올라올 님의 리뷰 기대합니다.^^

2008-11-17 15: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1-18 0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