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란 얼굴의 여성분이 도서관으로 들어오며 도움을 요청했다. 3층 여자 화장실에 남자가 들어왔다는 것이다. 일요일 도서관에는 여자 직원만 있었으므로 도움을 요청하는 그들의 요구에 응하여 3층으로 향했다. 상급자의 지시와 업무 매뉴얼을 확인하는 여직원은 계단을 오르내리며 연신 통화중이었다. 직원의 요청에 따라 난 남자를 제지할 목적으로 화장실 입구가 보이는 계단 근처에서 기다리며 상황을 주시중이었다. 처음에는 '에이 설마, 남녀 화장실을 헷갈려서 잘못 들어간 거겠지. 미친 놈이 아니고야' 라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남자가 화장실에서 나와 '죄송하지만 잘못 들어갔어요' 라고 말한다면 어떤 식으로 해야 하나 하는 다소 난감한 상황도 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시간이 흐를수록 실수가 아닌 의도된 행동일 수도 있다는 쪽으로 바뀌었다. 십 여분의 시간이 지나고 통화를 마치고 오는 여직원에게 '경찰에 신고해야 하지 않을까요' 라는 말을 했고 그 순간 화장실 문이 열리며 건장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이십 대 초반의 그는 남자인 내가 보기에도 위협적일 정도로 큰 키와 축구로 단련됐음을 한 눈에도 알만큼 다부진 체격이었다. 내가 제지할 틈도 없이 내 앞에서 머리를 숙이며 '죄송합니다. 제가 호기심에 눈이 멀어 실수를 했습니다' 라며 먼저 입을 열었다. '실수 여부를 떠나 범죄인 건 아시죠?' 라고 하니 무릎을 꿇으며 어리석은 호기심에 한 실수라며 선처를 호소했다.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여직원이 매뉴얼에 따라 그의 신상명세와 연락처, 화장실에 의도적으로 침입한 상황에 대하여 녹취를 진행하였다. 신체 구속의 권한이 없음을 고지한 여직원의 말을 마지막으로 그를 돌려보내고 도서관으로 다시 내려왔다. 도서관 한쪽 구석에 조마조마하게 앉아 있던 여성분이 상황을 물으며 다가왔다. 그때서야 그 여성분의 얼굴을 찬찬히 볼 수 있었는데 두려움과 공포가 눈동자에 고스란히 묻어 나왔다. 떨리는 목소리로 전하는 당시의 상황을 듣고서야 그가 반년 가까이 스토커처럼 행동했고 오늘은 화장실까지 몰래 침입한 상황이었음을 알았다. 상황의 긴박함을 느끼고 여직원은 피해자 여성과 함께 경찰에 신고했다.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소설을 읽은 것은 한국 출장 후 중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였다. 길지 않은 소설이라 비행 중 다 읽었는데 인상적인 글이었다. 특히 남성이 느끼는 별 것 아닌 일상과 생활이 여성에게는 공포와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상황은 놀라운 충격이었다. 당시 중국은 인터넷 검열로 다음 등 일부 사이트가 막혀있었고 한국의 상황에 별 관심도 없던 시절이라 이 소설의 평가가 어떠한지는 몇 달이 흐른 다음번 입국때 쯤이었다. 의미 있는 공론의 장이 되었으리라는 기대와 달리 인터넷은 온통 남혐, 여혐, 군대, 출산 등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남녀 간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군대와 출산 등의 문제는 한국에서 충분히 논의되어져야 할 사항이긴 하나 이 소설에서 어떻게 이 방향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인터넷 뿐만 아니라 내 주변에도 동일한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다수라는 상황은 더 혼란스러웠다.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올까. 누군가를 이해하는 데에는 입장의 동일화가 전제되어야 한다. 서로 다른 입장을 동일한 선상에서 바라보려면 타인에 대한 상상력, 특히 타인의 고통에 대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그때서야 비로서 타인에 대한 공감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내가 그 날 처음 사건을 단순히 실수이지 않을까 하고 받아들이는 감정 자체도 혼란한 상황에 대한 부정 방어 기제의 발현일 수도 있지만 타인에 대한 상상력의 부재에서 오는 바가 더 큰 듯 했다.   


얼마 후 도서관 복도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그 여성분이 가볍게 목례를 한다. 그 날 도와주셔서 감사하다고. 같이 인사하며 바라보니 그 날 보이던 두려움과 공포는 눈에서 보이지 않는다.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부디 그때의 장면들이 트라우마로 남지 않기를 바래본다. 화장실로 들어간 남성은 경찰 조사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모든 혐의에 대하여 자신의 어리석은 잘못임을 시인했다고 한다. 법적 처벌이 어떻게 이루어질지는 모르겠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충분한 법적 처벌을 받기를 원한다. 그리고 이번 사건을 계기로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고 살아가길 바란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감은빛 2026-04-24 01: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 일이 있었군요. 바로 곁에서 지켜보신 잉크냄새님도 수고가 많으셨네요.

우리나라의 스토킹 범죄와 성범죄는 도를 넘었다는 아니 아예 기본적인 선을 넘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쩜 이런 나라가 있을까 싶기도 하구요.

제가 가장 놀랐던 건, 그 옛날 화성 연쇄살인사건이 대부분 성적 쾌락에서부터 시작된 살인이었다는 부분이었어요. 정말 너무나도 다행히 과학기술의 발달로 뒤늦게라도 진범을 확인했지만, 증거 보관이 조금만 잘못 되었더라도 우리는 평생 화성 연쇄살인사건이라는 희대의 사건 진범을 모를 뻔 했지요.

감은빛 2026-04-24 01:22   좋아요 1 | URL
흔히 부산 돌려차기 사건이라고 말하는 그 건도 명백한 성범죄가 확실한데, 너무 어이없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증거가 없다는 식으로 결정되었다고 들었어요.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밀양 여중생 성범죄 사건이 있지요. 44명의 가해자가 무려 1년동안 성폭력을 가했지만, 거의 대부분 제대로 된 처벌은 받지 못했지요. 이런 나라가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라는 사실이 참담한 현실입니다.

잉크냄새 2026-04-24 21:09   좋아요 0 | URL
동물학대가 인간에 대한 범죄로 이어지듯이 스토킹이나 성추행도 강력한 성범죄나 가혹한 범죄로 이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머리만 똑똑한 판새들의 사법 판결이 어이없는 경우가 많은데 피해자의 고통보다는 가해자의 창창한(?) 앞날을 걱정하는 경향이 두드러지는 것 같아요. 확실히 사법부가 성에 대해서도 너무 보수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부산 돌려차기 미친 넘은 출소 후 보복 살인을 장담하는데도 적법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 것 같아 참 어이가 없더군요. 밀양 여중생 사건은 마을 전체가 은폐하고 감추려 했다는 점에서 구토가 나올 지경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국뽕이 아니라 사회의 아프고 약한 고리 먼저 생각하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firefox 2026-04-24 08: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당황스러우셨겠어요. 앞으로 일하시면서 같은 일이 없으시길 바래봅니다. 행복하고 건강하세요.

잉크냄새 2026-04-24 21:11   좋아요 0 | URL
네 좀 많이 당황스럽기는 했습니다. 흔한 경우는 아니니 더 이상 볼 일은 없겟죠. ㅎㅎ 폭스님도 행복하고 건강하세요.

페넬로페 2026-04-24 13: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반 년동안 스토킹을 당하고 그 남자가 화장실까지 따라 들어왔으니 그 분의 트라우마가 상당히 클 것 같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위험했을수도 있는데 도와주신 잉크냄새님에게도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저는 <82년생 김지영>을 읽으며 왜 젊은 남성들이 그렇게 김지영을 싫어했는지를 지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요 ㅠㅠ
어떠한 것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회적 상황이 너무 안쓰러울 지경입니다.

잉크냄새 2026-04-24 21:23   좋아요 1 | URL
저도 그 분을 도서관에서 다시 봤을 때 그 분이 받았을 트라우마가 먼저 떠오르더군요. 잘 극복하길 바래야요.

<82년생 김지영>은 글에서 언급했듯이 저도 이해가 가지 않더군요.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고 자신의 입장을 설득시켜 가는 과정이 아니라 ˝그건 잘 모르겠고 우리도 힘들어˝ 하며 대결 구도를 만들어 간 게 문제가 아닌가 싶어요

마힐 2026-04-25 07: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노출되고 있는 위험을 여성 혼자 지고 다닌다는 것이 너무나 가혹하네요. 남자인 저도 어떨 땐 조마조마한 순간이 살면서 가끔 느끼는데 여성분들은 평범한 일상에서조차 조바심으로 살아야 한다니, 참으로 먹먹해지네요. 그저 단지 나와 내 주변이 좀 더 밝아지길 마음 낼 뿐입니다. 잉크냄새님 같은 분이 계셔서 그 도서관도 밝으리라 믿습니다.

잉크냄새 2026-04-26 09:26   좋아요 1 | URL
<82년생 김지영>을 읽으며 일상의 두려움과 공포에 대하여 여러가지 생각을 참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학창시절 추억처럼 떠올리는 좋아하는 여학생을 몰래 따라가 집을 알아내었던 것들조차 그녀들에게 두려움과 공포였을 수 있다는 생각에 참 마음이 착잡해지던 기억이 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