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니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올 여름 정말 잠시도 쉴 틈없이 온다리쿠의 소설이 쏟아져나오는 바람에 아직 읽지 못한 그녀의 책들이 잔뜩 쌓여버렸다. 그렇게 쏟아져 나온 책 가운데 가장 읽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 <유지니아>. 기대가 컸던 탓인지 아니면 오랜만에 접하는 온다 리쿠의 소설이라 그런지 뭔가 이전과는 다른 느낌이 들었던 작품이었다.

  이 책은 흔히 온다 리쿠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인 미소년, 미소녀들이 등장해 학교를 둘러싼 미스터리가 펼쳐지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 사건에 대해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이 자기의 눈으로 바라본 사건에 대해, 그리고 한 인물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이라 오히려 온다 리쿠의 책을 읽고있다기보다는 미야베 미유키의 책을 읽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어디까지나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나 묘사 등의 세부적인 부분이 아니라 소재 면에서 그랬다는 거지만.  

  인근 마을에서 명성을 얻고 있는 아오사와家. 가족들의 생일이 겹치는 경사를 맞아 소소하게 파티(?)를 하고 있는 집에 음료가 배달되어 온다. 보낸 이가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이였기에 별 거부감없이 받아들고 음료를 나눠먹은 가족. 하지만 그 음료에는 독극물이 있었고, 일가족과 손님들은 죽는다. 그리고 남은 눈 먼 소녀. 소녀로부터 제대로 증언을 얻을 수 없었지만 경찰은 나름대로 수사를 진행해간다. 하지만 좀처럼 범인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고, 그런 와중에 진범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자살을 해 사건은 일단락된다. 하지만 사건은 거기서 끝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이었으니...

  책 속에서 사건 당시 이웃에 살았던 한 소녀가 성장해 <잊혀진 축제>라는 책을 쓴 것이 등장한다. (애초에 졸업 논문의 성격이었으나 어쩌다보니 출간된) 그렇기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도 내가 <잊혀진 축제>의 한 부분을 읽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를 읽고 있는 것인지 아리송할 때가 있었다. 뭐 둘 다 섞여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조사 당시에 밝혀지지 않았던, <잊혀진 축제>의 인터뷰가 이루어질 때에도 밝혀지지 않았던 내용들이 하나씩 둘 씩 수면 위로 떠오르지만 진실은 어디에도 없다. 제각각 보고 느낀 것, 그것은 모두 진실일 수도 있고, 허구일 수도 있다.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 그것이 결국 진실로 굳어지는 상황. 그 상황 속에서 인터뷰어는 진실을 찾아 끊임없이 헤맨다. 사막에서 신기루를 보고 그 허상을 쫓듯이, 어렴풋이 보이는 진실의 신기루를 부질없이 쫓을 뿐이다. 

  온다 리쿠가 이 책에서 보여주는 것은 단순히 '범인은 누구인가'라는 부분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범인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대체 17년 전의 그 사건의 경위는 무엇인지 그리고 현장에 남겨져있던 '유지니아, 나의 유지니아. 나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 줄곧 외로운 여행을 해왔다'라는 쪽지의 의미가 무엇인가가 오히려 중심에 놓인다. 잘 나가다가 결말이 흐지부지 되버린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들지만 오랜만에 만난 온다 리쿠는 여전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편으로는 이제 온다 리쿠의 소설을 예전처럼 열광적으로 읽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실망을 했다기보다는 그녀와 나의 공감대가 조금은 비켜가기 시작한 느낌이랄까. 어쨌거나, 기대가 컸었기에 실망도 컸지만 무더운 여름에 이 책 속의 화자들처럼 더위에 찌들었을 때 읽는다면 오히려 더 재미있지 않을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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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12-14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매지님 추카해요~ 리뷰대회 입상하셨어요^^

이매지 2007-12-17 20:46   좋아요 0 | URL
어머, 저도 한 건 했군요 ㅎㅎㅎ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퀴즈쇼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김영하가 신문에 소설을 연재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는 솔직히 볼까말까 많이 고민을 했었다. 김영하의 소설은 좋아하지만 한 번도 연재소설을 본 적이 없었기에 야금야금 소설을 읽어간다는 것 자체가 왠지 적응이 안됐기때문이다. '어차피 연재가 끝나면 단행본으로 나오겠거니'하고 신문을 읽을 때도 퀴즈쇼가 실렸던 페이지를 애써 호기심을 누르며 넘겼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연재되었던 <퀴즈쇼>가의 연재가 끝나고 이렇게 책으로 등장했다. 제법 두께감이 있는 책이었지만 한 페이지씩 넘겨가다보니 어느새 마지막 장을 읽고 있는 나를 만나게 되었다. 

  최근 한국문학에도 젊은 작가들이 많이 유입되고 있어서인지 유독 20대를 다룬 작품들이 늘어나고 있다. 확실히 이전의 한국소설과는 다른 느낌이지만(어떨 때는 일본소설을 읽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나와 같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20대를 만난다는 것은 분명 묘하면서도 반갑다. 이 책의 주인공인 민수는 80년생으로 '후진국에서 태어나 개발도상국의 젊은이로 자랐고 선진국에서 대학을 다닌' 인물이다. 대학을 졸업했지만 취직을 못하고 어영부영하다가 대학원에 진학한 그는 외할머니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외할머니가 유학을 보내준다고 했기에 어영부영 토플학원이나 다니며 어영부영 살아갔지만 외할머니의 죽음, 그리고 할머니의 빚을 갚으라는 독촉, 여자친구와의 이별 등의 사건이 잇달아 터지며 그의 삶은 180도 바뀐다. 그렇게 끝없이 끝없이 바닥으로 가라앉은 그는 우연히 인터넷 채팅사이트에서 퀴즈방에 들어가게 되고, 그 곳에서 '벽 속의 요정'이라는 인물을 만나게 된다. 스물 일곱해를 살며 겪은 것보다 더 드라마틱한 일들이 서서히 그를 찾아오게 되고, 그는 퀴즈를 통해 서서히 진짜 자신과 대면할 수 있게 되는데...

  확실히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작가니만큼 이 시대의 요소들을 많이 담고 있었다. 이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지만 정이현의 <달콤한 나의 도시>를 읽으면서 생각했던 것도 비슷했다. <달콤한 나의 도시>의 은수나 <퀴즈쇼>의 민수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인물이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문화를 공유하고, 같은 물질을 향유하며, 같은 장소를 누비고 있다. 그렇기에 책을 읽으면서도 단순히 문학 속의 인물의 이야기가 아니라 술집에서 옆테이블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어 계속 귀를 쫑긋하고 듣는 것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이건 비단 내가 민수와 같은 20대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서로에 대해 크게 관심을 갖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느끼는 차별, 소외, 편견 등은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했음직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며 떠올랐던 것은 영화 <타짜>였다. <타짜>나 <퀴즈쇼>모두 어느 면에서는 주인공의 성장담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는 평범하게 살았던 인물이 어떤 계기를 통해 이전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고, 그로 인해 진짜 자신과 대면하게 되는 모습이 닮았기 때문이다. 고니가 도박을 통해 진짜 자신을 만나게 되었듯이, 민수는 퀴즈쇼를 통해 진짜 자신과 만난다. 뭐 민수가 경험하는 퀴즈쇼(말하자면 퀴즈를 대상으로 하는 도박이다)나 고니가 전국을 돌며 하는 도박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기자간담회에서 "모니터 앞에서 낯선 사람과 사랑에 빠져본 e청춘들에게 바치는 이야기"라고 이 책에 대해 이야기했듯이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사랑은 이 시대의 20대의 사랑을 그리고 있다. 인터넷에서 자신의 사랑을 만나기도 하고, 이메일, 메신저 등으로 사랑을 속삭이는 모습은 그리 낯설지 않다. 나 또한 지금의 애인을 인터넷 동호회에서 만났고, 사귀기 전에는 이메일 등을 통해 서로에 대해 파악해갔었으니 민수의 이야기가 영 낯설지만은 않았다. 물론, 이 책 속의 민수와 지원의 앞날이 꼭 평탄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마저도 인정하고 포용하는 느낌이 들었다.

  최근 출간된 <88만원 세대>과 동일한 주제가 사실 이 책의 중심축이다. (아직 <88만원 세대>는 못 읽어보고 리뷰만 몇 편 읽어봤지만 이 책과 의도는 비슷한 듯)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시대가 그렇기때문에' 취직도 못하고 살아가는 20대들. 설사 일자리를 구했다하더라도 비정규직으로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이 이 책에는 담겨있다. 편의점에서 얼마 안되는 돈을 받으며 점장의 멸시를 받고, 방세를 내지 않았다고 금새 방을 비워 다른 사람을 받는 고시원 주인, 면접에서 가족관계때문에 마이너스라고 말하는 면접관들은 더럽고 치사하다. 하지만 그런 더럽고 치사하다고 해서 무시해버릴 수도 없는 인간들이 사회를 움직이고, 20대에게 돈을 지불해주는 것이다.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는 것 같은 민수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도 조금은 답답한 마음을 털어버릴 수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이 시대에 대한 해결책은 여전히 부재하지만. (어쩌면 본질적인 해결책은 부재할 수밖에 없겠지만.)

  오랜만에 접하는 김영하의 소설, 그리고 그와 어느새 콤비가 되버린 듯한 이우일의 일러스트(사실 표지 처음 봤을 때 이우일의 그동안의 스타일과는 다르다는 느낌이 들어서 선뜻 못 알아봤었다)가 강렬하게 다가왔다. 현실이 왜 이따위냐고 불만을 갖고 있는 20대라면(나처럼 취직도 못하고 방황하는 20대라면 더더욱), 평소 김영하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누구라도 만족하지 않을까 싶었다. 좀 더 창작에 전념하기 위해 교수직도 그만뒀다는 김영하(재직하던 학교가 집 근처라 지하철 역에서 본 적이 있기에 혹시라도 또 지하철역에서 만나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이제는 글렀다)가 다음에는 또 어떤 작품으로 독자에게 다가올 지 궁금해진다. <빛의 제국>에서 사실 조금은 실망했었는데 이 책으로 다시 점수를 만회한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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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퀴즈쇼 | 김영하
    from lunamoth 4th 2007-10-29 02:05 
    "어떤 질문은 충분히 생각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달리 말하자면,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 퀴즈도 있다.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인생의 거의 모든 질문이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김영하, 『퀴즈쇼』, 문학동네, 2007, p. 70. "왜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을까, 인생이란.1" 김영하의 장편소설 『퀴즈쇼』를 읽으며 그의 첫 번째 질문으로 돌아가 답변을 생각한다. "자기 대답을 갖고 있는 젊은이를...
 
 
lees 2007-10-27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빛의 제국에서 내가 아는(알지도 못하지만) 김영하가 맞나는 생각이 들었어요; 동명이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

이매지 2007-10-27 22:16   좋아요 0 | URL
이 책도 <오빠가 돌아왔다>와 같은 이전의 책과는 다른 느낌이긴 하지만
<빛의 제국>보다는 좀 더 김영하다운(?) 책이었어요 :)
 
퀴즈쇼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품절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스물일곱의 그 저녁에, 남들은 눈부신 청춘이라며 부러워하는 스물일곱의 그 밤에, 나는 내 생이 어쩌면 이렇게 하찮게 끝나버릴지도 모른다는 계시와도 같은 예감에 직면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이런 삶, 여자친구의 대학원 숙제는 도맡아 해주면서도 정작 필요할 때는 버려지는 이런 삶은 앞으로 찾아올 찬란한 인생의 전주곡, 그러니까 고진감래라고 말할 때의 그 '달콤한' 고(苦)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앞으로 살아갈 삶의 예고편처럼 느껴졌다. 아, 그러나 나는 결코 내 인생이, 예고편이 전부인 뻔한 영화가 되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다. -20쪽

그녀의 애교에는 자연스러움이 결여돼 있었는데, 그건 연기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애교를 떨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까지 온전히 내게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다. 필사적이 되는 순간 애교는 더이상 애교가 아니라 공포가 된다. -23쪽

여자를 달래는 것은 권투에서 잽을 먹이는 것과 비슷하다. 이렇게해서 언제 상대방을 다운시키나 싶지만 계속 하다보면 꽤 효과가 있다. 잽이 안 통한다고 갑자기 강력한 펀치를 날려서는 안 된다. 그럼 모든 게 파장이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25쪽

"자네도 요즘 젊은이 같구만. 생각도 하기 전에 질문부터 하고 있잖아."
"그게 어때서요?"
"우선 생각을 하는 게 중요하거든. 그리고 틀리더라도 일단 자기 답을 준비해둬야 하는 거야."
"왜요?"
그는 오른손으로 머리를 긁었다.
"세상이 그런 젊은이를 좋아하니까. 세상은 질문하는 젊은이를 좋아하지 않아. 자기 대답을 갖고 있는 젊은이를 원하지."
"질문을 잘하는 게 중요하다고 배웠는데요."
"그럼 그렇게 생각하고 살게."-46~7쪽

기회는 신선한 음식 같은 거야. 쟁장고에 넣어두면 맛이 떨어져. 젊은이에게 제일 나쁜 건 아예 판단을 내리지 않는 거야. 차라리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게 더 나아. 잘못된 판단을 내릴까봐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거, 이게 제일 나빠.-54~5쪽

인터넷은 미로와도 같다. 처음에는 어떤 목적이 있어서 들어오지만 포털의 뉴스에 한번 낚이면 그 목적도 잊어버리고 허접스러운 뉴스의 미로를 헤매게 된다. -64쪽

사랑이 운명이라고 믿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운명이란 맞힐 수밖에 없는 답을 결국 맞히는 것이다. 사랑해야 할 연인들에게는 맞힐 수밖에 없는 답이 즐비하다. 신화 속에는 깨진 거울이 서로 만나 온전한 거울이 되는 얘기들이 나온다. 오이디푸스는 결국 아버지를 죽이고 주몽은 끝내 고구려의 왕이 된다. 운명은 누구 말마따나 과녁에 명중하도록 쏘아진 화살인 것이다. 그러므로 운명은 백 퍼센트 명중할 수밖에 없는 것. 그러니 이미 만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그들의 만남을 운명이라 믿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다. 단 한 개의 단서도 치명적이며, 단 한 조각의 유류품도 무서운 확신이 된다. 사랑에 빠진 이들은 무능력한 탐정, 서툰 수사관이다. 그들은 법정에서는 채택도 하지 않을 어수룩한 증거 하나만으로도 놀라운 신념에 도달한다. 누구도 그 신념을 철회시킬 수 없다. 결코 흔들리지 않을 신념, 그것은 운명에 대한 확신이다. 이 서툰 탐정의 눈에, 운명적 사랑이라는 사건의 전모는 이미 명백하며 범인의 검거는 식은 죽 먹기다. 화살은 이미 표적에 꽂혀 있고 표적으로 걸어가 십 점 만점의 정중앙에서 그것을 확인하고 뽑아들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82~3쪽

화살을 뽑아든 우리의 영웅은 이렇게 외치기만 하면 된다. 이게 바로 운명적 사랑이라고. -83쪽

사람들은 책 한 권을 들고 나갈 때도 많은 생각을 한다. "저는 이런 사람이에요."라고 대노고 홍보하는 셈이니까. 데이트라면 더할 것이다. 우선은 들고 다닐 때 부끄럽지 않아야 하겠지. 철면피가 아니라면 <소녀경>이나 <아무도 몰랐던 성(性)의 비밀>같은 책은 좀 곤란할 것이다. 고전은 고루해 보일 수 있으니 패스. <돈키호테>같은 책은 실제 내용은 전혀 고루하지 않으나 늘 세계명작전집 첫머리에 있으니 문제가 된다. 한편 너무 실용적인 책은 신비감을 주지 못한다. <협상의 기술>같은 책을 데이트할 때 들고 나간다면 상대방으로 하여금 괜한 경계심만 불러일으킬 것이다. <바둑의 정석>이나 <월간낚시>같은 유로 대략 난감하고 <반지의 제왕>같은 판타지는 아무리 고전이라도 사람을 좀 어려 뵈게 만들고 약간 현실에서 동떨어진 몽상가처럼 보이게 한다. 영화잡지를 말아쥐고 다니면 좀 난 체하는 사람 같고 시사주간지를 들고 다니면 아저씨 같다. 그런가 하면, 교과서에 실린 작가의 책도 문제. 그런 소설을 들고 다니며 젊은 이성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기란 전 세계 어느 도시에서도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155쪽

세상에 그토록 많은 책이 있건만 데이트할 때 들고 나가기 적당한 책은 별로 없다니, 옷은 많은데 입고 나갈 옷은 없다는 여자들의 한탄이 아마 이와 비슷할 것이다. -156쪽

우리는 다시 한 번 운명이라는 도료로 우리의 만남을 멋지게 치장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우연이란 말인가. 내가 정은영에게 조금만 빨리 혹은 늦게 말을 붙였더라도 우리는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마치 궤도를 이탈한 우주선처럼 영원히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버렸을지도 모른다. 또한 내가 그 주가 아니라 그 전주 혹은 그 다음주에 출연했다면 역시 우리는 서로를 코앞에 두고도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밖에도 무수한 '....하지 않았다면'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들의 만남을 운명이라 믿고 싶어하는 연인들의 소중한 재산이었고 언제 꺼내봐도 질리지 않는 메뉴였다. -162~3쪽

"나가자." 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지갑을 꺼냈다. "내가 낼게."
가난한 사람은 이렇게 해서 좀더 가난해진다. 그들은 가난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에 결국 더 가난해진다. 가난을 숨기기 위해 '남들 다 하는 것'을 하고 그 '남들 다 하는 것'때문에 빚을 지고 그 빚을 갚으라 세상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이다. -163쪽

우리는 단군 이래 가장 많이 공부하고, 제일 똑똑하고, 외국어에도 능통하고, 첨단 전자제품도 레고블록 만지듯 다루는 세대야. 안 그래? 거의 모두 대학을 나왔고 토익점수는 세계 최고 수준이고 자막 없이도 할리우드 액션영화 정도는 볼 수 있고 타이핑도 분당 삼백 타는 우습고 평균 신장도 크지. 악기 하나쯤은 다룰 줄 알고, 맞아, 너도 피아노 치지 않아? 독서량도 우리 윗세대에 비하면 엄청나게 많아. 우리 부모세대는 그중에서 단 하나만 잘해도, 아니 비슷하게 하기만 해도 평생을 먹고살 수 있었어. 그런데 왜 지금 우리는 다 놀고 있는 거야? 왜 모두 실업자인 거야? 도대체 우리가 뭘 잘못한 거지?-193쪽

사실 어른들은 우리 세대가 책도 안 읽고 무능하며 컴퓨터 게임만 한다는 식의 이미지를 갖고 있짐나 그건 완전히 착각이다. 정작 책도 안 읽고 무능하고 외국어도 못하면서 이렇다 할 취미도 없는 사람들은 그날 면접장에 앉아서 나를 내려다보던 면접관들이지 우리가 아니다. 우리는 80년대에 태어나 컬러TV와 프로야구를 벗삼아 자랐고 풍요의 90년대에 학교를 다녔다. 대학생 때는 어학연수나 배낭여행을 다녀왔고 2002년 월드컵에 우리나라가 4강까지 올라가는 걸 목격했다. 우리는 외국인에게 주눅들어보지 않은, 다른 나라 광고판에서 우리나라 배우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첫 세대다. 역사상 그 어느 세대보다도 다양한 교육을 받았고 문화적으로 세련되었고 타코난 코스모폴리탄으로 자라났다.
도스가 윈도가 되고 보석글이 아래한글이 되고 유닉스 기반의 PC통신이 인터넷으로 발전해가는 것을 몸으로 겪었고 그 모든 운영체제 프로그램을 대부분 능숙하게 다룰 수가 있다. 예전이라면 전문 사진사나 찍을 법한 사진도 우리는 몇십만원짜리 카메라로 척척 찍고 과거엔 방송국에서나 하던 동영상의 촬영과 편집도 간단하게 해치울 수 있다. -193~4쪽

한마디로 우리는 우리 윗세대와는 완전히 다른 나라에서 자라났고 이전 세대에 비하자면 거의 슈퍼맨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후진국에서 태어나 개발도상국의 젊은이로 자랐고 선진국에서 대학을 다녔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겐 직업이 없다. 이게 말이 돼?
우리는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아침부터 밤까지 책상 앞에 앉아 공부만 했는데, 부모나 선생이 하라는 거는 얌전히 다 했는데, 왜 이렇게 된 거야? 세상은 죽이는 스터프들, 머스트 해브 아이템으로 가득 차 있는데 왜 우리 주머니에는 그걸 살 돈이 없는거야? 일 인당 국민소득 이만 달러라더니, 다 어디로 간 거야? 우리가 왜 이렇게 사는지 알아? 내 생각엔 우리가 너무 얌전해서 그래. 노땅들이 무서워하질 않잖아. 생각해봐. 386들은 손에 화염병을 들고 있었다구. 겁 많은 노땅들이 얼마나 무서웠겠어. 우리를 무서워해야 일자리도 주고 월급도 올려주고 그러는 건데, 이 놈의 대기업들은 채용은 안 하고 대학에 건물만 지어주고 앉아 있잖아. 누가 건물 필요하대?-194쪽

사랑의 기쁨은 그 예기치 않음에서 오는데, 정작 그 예기치 않음 때문에 인간은 불안에 떨며 그것이 제 손아귀를 빠져나갈까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고 상대방을 만나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함께 최고의 기쁨을 누린다 해도 그것은 사업의 성공이나 고시 합격과는 완전히 다른 성질의 것이다. 두 연인이 쟁취한 사랑의 승리는 오직 그들만의 것이므로 그야말로 배타적인 것이며 그 때문에 언제나 위태로워진다. 증명서도 공인된 형식도 없다. 그날 코엑스에서 우리를 스쳐 지나간 수만 명의 사람들 중 누구도 우리 기쁨의 증인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사랑에 빠진 두 연인은 마치 날달걀을 던지며 노는 어린아이들처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아주 작은 일에도 그들의 기쁨은 휘발되고 날카로운 고통이 그들을 지배하게 된다. -2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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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7-10-26 0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라 나왔어요? 어때요?

이매지 2007-10-26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에 맛만 보고 자려다가 1장 다 보고 잤다는 정도로 ㅎㅎ
아마 오늘 다 읽게 되지 않을까 싶네요 ㅎ
가독성은 좋은 것 같아요. ㅎ

홍수맘 2007-10-26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님 얘기 기다릴래요.
확실히 김영하님의 소설은 중독성이 있는지라......

이매지 2007-10-26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이따가 리뷰 올릴께요 :)
한 30페이지 남았나 그래요 ㅎ
 









<시계관 살인사건>과 <십각관 살인사건>을 보며 관시리즈가 다 나왔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는데 잊고 있던 차에 <암흑관의 살인>이 출간됐다. 96년부터 착수해 거의 8년동안 썼다는 책이니만큼 기대해봐도 좋을 듯. 무려 3권이나 되서 부담되지만 시간내서 읽어볼만한 책이 아닌가 싶다. 웹서핑하다가 이미 원서로 읽어보신 분의 리뷰를 보니 '국내에도 번역본이 나온다면 초반부터 글자 하나하나 묘사 하나하나 꼼꼼히 읽기를 바란다'고. 어떤 트릭이 숨어있을 지 기대된다.


이전에 성시경의 라디오 프로에서 이동진 기자의 필름 속을 걷다라는 코너가 있었다. 이동진 기자야 워낙 영화 관련해서 많이 접한 기자라 친근감도 갔지만 영화에 나온 장소들을 직접 가서, 영화 속의 주인공들이 묵었던 숙소나 방문한 식당들을 찾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이 책에 소개된 것말고도 많은 영화에 대해 다뤘지만 일부만 소개된 것 같아 약간 아쉽다.





미미여사의 시대극으로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책은 본격 미스터리는 아니지만 미미여사의 시대극은 어떤 느낌일런지 궁금하다. 북스피어에서 미야베 월드 제 2막으로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도 계속 출간될 예정인 듯. 예정작으로는 연작 단편 집인 <혼조 후카가와의 이상한 이야기>를 비롯해 <흔들리는 바위-영험한 오하쓰의 수사기록>, <아야시 怪>, <아캄베>, <봉쿠라>, <히쿠라시> 등이 있다고. 관심있으신 분은 요기를 참고 하시길.  (http://cafe.naver.com/mysteryjapan/5818)









원서 두께를 보고 대충 4권은 나오겠구만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4권. 마지막 권이 출간될 때 결말에 대한 갖가지 추측이 난무했고, 스포일러가 떡하니 기사화되서 나오기도 했었다. 뭐 그렇게 결말을 알아버렸지만(-_-) 해리포터와 볼드모트의 마지막 대결은 자뭇 궁금하다. 언제 날 잡아서 해리포터 시리즈를 한 번에 쭈욱- 읽어가야할 듯. 이건 뭐 하도 본 지가 오래되서 기억도 가물거리니..



지금 <원 포 더 머니>를 읽고 있는데 재미가 쏠쏠해 스테파니 플럼 시리즈가 계속 출간되려나 싶었는데 마침 시리즈 2편이 출간됐다. 1권에서는 생계를 위해 현상금 사냥꾼을 시작하게 된 스테파니 플럼의 좌충우돌 이야기가 그려진다. 적절하게 웃기고, 적당히 진지하고, 여기에 로맨스라는 양념이 더해져 재미있는 시리즈인 듯. 어쨌거나. 2권에서는 어떤 일이 펼쳐질 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셜록 홈즈 시리즈를 만든 장본인인 코난 도일의 생애를 담은 전기. 많은 사람들이 코난 도일을 추리 소설의 작가로 알고 있지만, 사실 그는 SF를 비롯한 다른 장르의 책들도 썼었다. 정형외과 의사를 비롯해, 군의관, 전쟁 특파원, 선원, 탐정 등의 다양한 직업을 경험했던 코난 도일의 삶이 궁금해진다. 사실 이전에도 셜록 홈즈 전집 류에서 그의 생애에 대해 살펴본 적은 있었지만 그건 몇 장 안팎의 내용이라 제법 두꺼운 분량에서 오롯이 코난 도일의 삶에 대해 다룬 책은 없었기에 궁금해진다. 그나저나 벌써 몇 달 전부터 나온다고 말하던 셜록 홈즈 외전은 올해 안에 나오기는 하는건가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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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7-10-25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건 11월 쇼핑으로 미루어야겠어요. 미로관, 인형관, 시계관, 십각관에 이어, 이제 암흑관까지 모으게 되네요 (모으기만, 읽기는 언제;;)

이매지 2007-10-25 09:33   좋아요 0 | URL
이왕에 나오는거 전 시리즈 다 나왔으면 좋겠어요.
그러면서 정작 암흑관은 언제 살 지 모르겠다는;;;;

Kitty 2007-10-25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세권짜린데 만원이 넘네요 ㄷㄷㄷ
그나저나 저 옆에 매지님 읽고계신 책 리스트를 보니 마신유희, 악의 영혼 무섭사옵니다 ㅋㅋㅋㅋㅋㅋ

이매지 2007-10-25 15:28   좋아요 0 | URL
졸업과 도서실의 바다가 좀 완화(?)시켜 주고 있잖아요 ㅎㅎ
 

  


  어처구니없게도 2003년도에 했던 전편과 2006년에 한 게 똑같은 건 줄 알고, (어디서 잘못봤는지도-_-) 2006년판부터 봤는데 보고나서야 2003년 판에 이은 후속편이라는 걸 알고 뒤늦게 부랴부랴 2003년에 방영된 거랑 특별판까지 챙겨서 역순으로 보게됐다. 어리버리한 실수때문에 시간상으로는 역순으로 본 셈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닥터 고토 진료소는 따스함으로 남은 드라마가 아닌가 싶었다. 2006년판만 봤을 때는 뭔가 아쉽다는 느낌이 많이 남았는데 2003년판을 보니 어느 정도 보완이 되었다. 아직 안 보신 분들이라면 나처럼 어리버리한 실수를 하지 말고 순서대로 보시길. 

  대학병원에서 일하다 어떤 사연에서인지 외딴 섬의 진료소로 온 고토. 늘상 섬에 오는 의사들은 믿을 수 없었기에 고토 역시 섬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한다. 며칠이 지나도 진료소를 찾는 환자는 없고, 이에 고토는 직접 섬을 누비며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진심으로 섬사람들을 대하는 고토에게 섬사람들은 마음을 열기 시작하고 그렇게 그들은 서로 가족처럼 살아가기 시작하는데...

  사실 2006년판만 봤을 때는 별점으로 치면 넷 정도 줄 수 있겠다 싶었는데 2003년판을 보고 나니 이건 별 다섯이다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따뜻함이 녹아있었던 드라마였다. 예전에 미드를 즐겨보는 내게 일드를 즐겨보는 친구가 '미드에는 정이 없어서 싫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 말대로 이 드라마는 따뜻한 정이 넘쳐나는 드라마였다. 물론, 그런 부분도 어느 정도 드라마라는 한계때문에 거리감이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보는 내내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만화가 원작이라고 하는데, 만화는 아직 못 봐서 잘 모르겠지만 고토 역을 맡은 배우는 정말 제법 고토같은 느낌이 들었다. 뭔가 어리버리하면서도 정감가는 스타일이라 왠지 정이 갔던. (예전에 <박사가 사랑한 수식>에서 봤을 때도 느꼈지만 임창정 닮았다) 잔잔하게 흐르는 음악도, 조용한 섬의 풍경도, 그리고 그 속에 살아가는 인물들이 잘 어우러진 드라마가 아닌가 싶다.



덧) 2006년 판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간호사 역을 맡은 아오이 유우는 사실 그간 별로 청순하다는 생각은 못했었는데 이 드라마보면서 홀딱 반했다. (<훌라걸즈>에서보고 살짝 반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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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7-10-25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2003년판부터 보고 2006년판은..고이고인 간직하고 있슴다..^^
정말..감동적이죠. 특히 2003년판의 그 짚신..눈물이 주룩주룩이었슴다..;;;

이매지 2007-10-25 15:29   좋아요 0 | URL
2006년 판 봤을 때 왜 그런 허름한 짚신을 신을까 싶었는데
2003년 판에서 보고 저도 감동했어요.
눈가가 짠해지는게.
여담이지만 수박도 먹고 싶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