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즈쇼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김영하가 신문에 소설을 연재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는 솔직히 볼까말까 많이 고민을 했었다. 김영하의 소설은 좋아하지만 한 번도 연재소설을 본 적이 없었기에 야금야금 소설을 읽어간다는 것 자체가 왠지 적응이 안됐기때문이다. '어차피 연재가 끝나면 단행본으로 나오겠거니'하고 신문을 읽을 때도 퀴즈쇼가 실렸던 페이지를 애써 호기심을 누르며 넘겼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연재되었던 <퀴즈쇼>가의 연재가 끝나고 이렇게 책으로 등장했다. 제법 두께감이 있는 책이었지만 한 페이지씩 넘겨가다보니 어느새 마지막 장을 읽고 있는 나를 만나게 되었다. 

  최근 한국문학에도 젊은 작가들이 많이 유입되고 있어서인지 유독 20대를 다룬 작품들이 늘어나고 있다. 확실히 이전의 한국소설과는 다른 느낌이지만(어떨 때는 일본소설을 읽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나와 같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20대를 만난다는 것은 분명 묘하면서도 반갑다. 이 책의 주인공인 민수는 80년생으로 '후진국에서 태어나 개발도상국의 젊은이로 자랐고 선진국에서 대학을 다닌' 인물이다. 대학을 졸업했지만 취직을 못하고 어영부영하다가 대학원에 진학한 그는 외할머니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외할머니가 유학을 보내준다고 했기에 어영부영 토플학원이나 다니며 어영부영 살아갔지만 외할머니의 죽음, 그리고 할머니의 빚을 갚으라는 독촉, 여자친구와의 이별 등의 사건이 잇달아 터지며 그의 삶은 180도 바뀐다. 그렇게 끝없이 끝없이 바닥으로 가라앉은 그는 우연히 인터넷 채팅사이트에서 퀴즈방에 들어가게 되고, 그 곳에서 '벽 속의 요정'이라는 인물을 만나게 된다. 스물 일곱해를 살며 겪은 것보다 더 드라마틱한 일들이 서서히 그를 찾아오게 되고, 그는 퀴즈를 통해 서서히 진짜 자신과 대면할 수 있게 되는데...

  확실히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작가니만큼 이 시대의 요소들을 많이 담고 있었다. 이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지만 정이현의 <달콤한 나의 도시>를 읽으면서 생각했던 것도 비슷했다. <달콤한 나의 도시>의 은수나 <퀴즈쇼>의 민수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인물이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문화를 공유하고, 같은 물질을 향유하며, 같은 장소를 누비고 있다. 그렇기에 책을 읽으면서도 단순히 문학 속의 인물의 이야기가 아니라 술집에서 옆테이블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어 계속 귀를 쫑긋하고 듣는 것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이건 비단 내가 민수와 같은 20대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서로에 대해 크게 관심을 갖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느끼는 차별, 소외, 편견 등은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했음직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며 떠올랐던 것은 영화 <타짜>였다. <타짜>나 <퀴즈쇼>모두 어느 면에서는 주인공의 성장담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는 평범하게 살았던 인물이 어떤 계기를 통해 이전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고, 그로 인해 진짜 자신과 대면하게 되는 모습이 닮았기 때문이다. 고니가 도박을 통해 진짜 자신을 만나게 되었듯이, 민수는 퀴즈쇼를 통해 진짜 자신과 만난다. 뭐 민수가 경험하는 퀴즈쇼(말하자면 퀴즈를 대상으로 하는 도박이다)나 고니가 전국을 돌며 하는 도박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기자간담회에서 "모니터 앞에서 낯선 사람과 사랑에 빠져본 e청춘들에게 바치는 이야기"라고 이 책에 대해 이야기했듯이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사랑은 이 시대의 20대의 사랑을 그리고 있다. 인터넷에서 자신의 사랑을 만나기도 하고, 이메일, 메신저 등으로 사랑을 속삭이는 모습은 그리 낯설지 않다. 나 또한 지금의 애인을 인터넷 동호회에서 만났고, 사귀기 전에는 이메일 등을 통해 서로에 대해 파악해갔었으니 민수의 이야기가 영 낯설지만은 않았다. 물론, 이 책 속의 민수와 지원의 앞날이 꼭 평탄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마저도 인정하고 포용하는 느낌이 들었다.

  최근 출간된 <88만원 세대>과 동일한 주제가 사실 이 책의 중심축이다. (아직 <88만원 세대>는 못 읽어보고 리뷰만 몇 편 읽어봤지만 이 책과 의도는 비슷한 듯)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시대가 그렇기때문에' 취직도 못하고 살아가는 20대들. 설사 일자리를 구했다하더라도 비정규직으로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이 이 책에는 담겨있다. 편의점에서 얼마 안되는 돈을 받으며 점장의 멸시를 받고, 방세를 내지 않았다고 금새 방을 비워 다른 사람을 받는 고시원 주인, 면접에서 가족관계때문에 마이너스라고 말하는 면접관들은 더럽고 치사하다. 하지만 그런 더럽고 치사하다고 해서 무시해버릴 수도 없는 인간들이 사회를 움직이고, 20대에게 돈을 지불해주는 것이다.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는 것 같은 민수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도 조금은 답답한 마음을 털어버릴 수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이 시대에 대한 해결책은 여전히 부재하지만. (어쩌면 본질적인 해결책은 부재할 수밖에 없겠지만.)

  오랜만에 접하는 김영하의 소설, 그리고 그와 어느새 콤비가 되버린 듯한 이우일의 일러스트(사실 표지 처음 봤을 때 이우일의 그동안의 스타일과는 다르다는 느낌이 들어서 선뜻 못 알아봤었다)가 강렬하게 다가왔다. 현실이 왜 이따위냐고 불만을 갖고 있는 20대라면(나처럼 취직도 못하고 방황하는 20대라면 더더욱), 평소 김영하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누구라도 만족하지 않을까 싶었다. 좀 더 창작에 전념하기 위해 교수직도 그만뒀다는 김영하(재직하던 학교가 집 근처라 지하철 역에서 본 적이 있기에 혹시라도 또 지하철역에서 만나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이제는 글렀다)가 다음에는 또 어떤 작품으로 독자에게 다가올 지 궁금해진다. <빛의 제국>에서 사실 조금은 실망했었는데 이 책으로 다시 점수를 만회한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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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퀴즈쇼 | 김영하
    from lunamoth 4th 2007-10-29 02:05 
    "어떤 질문은 충분히 생각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달리 말하자면,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 퀴즈도 있다.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인생의 거의 모든 질문이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김영하, 『퀴즈쇼』, 문학동네, 2007, p. 70. "왜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을까, 인생이란.1" 김영하의 장편소설 『퀴즈쇼』를 읽으며 그의 첫 번째 질문으로 돌아가 답변을 생각한다. "자기 대답을 갖고 있는 젊은이를...
 
 
lees 2007-10-27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빛의 제국에서 내가 아는(알지도 못하지만) 김영하가 맞나는 생각이 들었어요; 동명이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

이매지 2007-10-27 22:16   좋아요 0 | URL
이 책도 <오빠가 돌아왔다>와 같은 이전의 책과는 다른 느낌이긴 하지만
<빛의 제국>보다는 좀 더 김영하다운(?) 책이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