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불빛의 서점 - 서점에서 인생의 모든 것을 배운 한 남자의 이야기
루이스 버즈비 지음, 정신아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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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새 책을 사려고 이곳에 오는 것은 아니다. 서점에만 가면 흥분을 느끼는 까닭은 장소 자체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필요하다면 언제까지고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서점을 지배하는 무언의 규칙은 여타의 소매업을 지배하는 규칙과는 전혀 다르다. 서점은 대개 개인사업체지만, 영업장이나 영업시간 등에 대한 대중의 요구사항을 거부할 수가 없다. 서점은 휴지걸이라든가 이 세상에 종말이 왔을 때 먹을 타바스코 소스를 무한정 파는 대형매점이 아니다. 번쩍이는 금박 드레스나 희귀 보석 따위의 최고급 사치품을 파는 일류 부티크도 아니며, 고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음료수며 담배, 아이스크림을 사기 위해 불쑥 들르는 편의점도 아니다. 우리가 한참 동안이나 매장을 서성거린 후에야 겨우 책 한 권을 산다 해도 서점 직원 중 누구도 개의치 않는다. 서점에서는 얼마든지 죽치고 있을 수가 있는 것이다. 때로는 몇 시간씩이라도 말이다. -10쪽

그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여유와 느긋함은 거기서 파는 상품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책은 느림을 동반한다. 시간을 요한다. 글을 쓰는 일, 책을 펴내는 일, 읽는 일이란 죄 늘어지는 일이다. 400쪽짜리 책 한 권이면 집필에만도 몇 년이 걸리거니와 출판되기까지는 그보다 더 오랜 세월이 걸릴 수도 있다. 게다가 책을 구입한 뒤에도 그걸 읽는 독자는 며칠이나 몇 주, 때로는 몇 달에 걸쳐 한 자리에 눌러앉아 몇 시간씩을 보낼 작정을 해야 한다. -11~2쪽

책은 내구성이 빼어날뿐더러, 읽는 즐거움을 몇 번씩 누린다해도 전혀 훼손될 염려가 없다. 책에는 연료나 식량, 서비스 따위가 필요 없다. 어수선한 일을 만들거나 시끄러운 소리를 내지도 않는다. 한 권의 책은 읽고 또 읽은 뒤에도 친구들에게 건네거나 헌책방에 싼값으로 되팔 수 있다. 그래도 책은 산산조각 난다거나 얼어붙을 일이 없고, 모래 속에 처박힌다 해도 책의 기능을 상실하는 법이 없다. 혹여 욕조 속에 빠뜨린다 해도 곧장 말릴 수가 있으며 굳이 필요하다면 다림질 한 번이면 그만인 것이다. 혹 책등이 심하게 갈라져 페이지가 떨어져나갈 지경이 됐다고 치자. 그럴 경우엔 바람이 책장들을 흗뜨리기 전에 책장을 그러모아 고무 밴드로 한데 묶어주기만 하면 된다. -15쪽

처음부터 책 파는 사람이 되겠다고 말하는 아이는 없다. 책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병에 걸리기 전만 해도 나에게는 우주비행사, 심해 다이버, 천문학자, 풋볼 선수, 미 해병대 하사관, 코미디언, 록 스타 등 장래 희망사항이 수도 없이 많았다. 서적판매업자라는 직업 하면, 한 손으로는 고양이를 쓰다듬거나 차를 마시면서 제인 오스틴의 멋진 소설책 한 권을 끼고 높은 의자에 나른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할지 몰라도, 사실 이 일이 그렇게 매혹적이거나 영웅적일 수는 없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는 생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전혀 알지 못한다. -41쪽

그레타는 어른들의 참견이 지나치면 아이의 선택 능력에 해가 될 수도 있다고 조언했다. 아이들이 독서에서 자기만의 즐거움을 찾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그레타와 내가 크로 서점을 나와 일했던 프린터스 서점에서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서점은 스탠퍼드 대학 근처에 있었는데, 이 지역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공부 스트레스를 꽤나 심하게 받는 편이었다. 하루는 어느 부부가 서점에 들어와서 열한 살짜리 딸이 읽을 '고전' 몇 권만 골라달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딸애가 책 읽는 것을 무척 좋아해서 노상 책만 들여다보지만, 그 책이란 게 죄다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47쪽

어린 시절에 읽었던 책들은 우리를 과거로 인도한다. 그것은 꼭 책에 나오는 이야기들 때문만은 아니다. 그 책을 읽었을 때 우리가 어디에 있었고 우리는 누구였는가를 둘러싼 기억들 때문이다. 책 한 권을 기억한다는 것은 곧 그 책을 읽은 어린아이를 기억하는 것이다. -52~3쪽

우리는 책의 판매량이 높고 인기가 많다고 해서 작가의 능력이 탁월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수백만 부씩 팔리지만 지금부터 50년, 아니 단 5년만 지나도 읽히지 않을 책이 너무 많이 널려 있다. -61쪽

한 사람의 일생에서 중요한 책이란 게 반드시 대단하다거나 기억할 만하다는 평가를 받는 책일 필요는 없다. 중요한 책의 목록은 어린이책에서 문학성이 빼어나거나 조금 떨어지는 소설에 이르기까지 길고도 들쭉날쭉하며 작품 스타일과 주제만큼이나 광범위하다. 이 책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열두 살에서 열여덟 살 사이의 소년소녀들이 공감할 수 있는 세계를 아주 생생히, 총체적으로 그려냈다는 점이다. 그것도 잘난 체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63쪽

독서는 혼자서 하는 외로운 행위이지만 세계와 손잡기를 요구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비록 탐서가들이 모두 책 판매에 나서지는 않지만 그레타와 리즈, 나와 그 밖의 많은 사람은 우리를 감동시킨 책들 때문에 결국 서점으로 이끌린 것이다. 잠깐 중단된 시절이 있긴 했지만 우리가 이 일을 하며 서점에 머문 시간은 꽤나 길었다. -65쪽

만약 서가들이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형성하는 마천루라면 평평하고 나지막한 매대는 누구나 조금씩 속도를 늦추게 되는 개방된 공원이나 집 안뜰이다. 여기서 당신은 여태껏 보지 못했던, 표지에 눈길 한번만 주어도 매혹당할 수밖에 없는 책들을 마침내 손에 넣기로 돼 있는 것이다. 서두를 필요는 없다. 여기선 하루 종일 머물며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까. 여느 대도시처럼 이곳엔 누구에게나 어울리는 무드가 있고 골목골목 거리에 뜻밖의 놀라움이 기다리고 있다. -101쪽

한 권의 책, 거기서 읽은 하나의 문장으로 세상의 온갖 좋은 것, 사소한 것, 심오한 것들이 시작되었음을 나는 배웠다. 그 한 문장이 나를 다른 책으로 이끌고 다시 그 책이 훨씬 더 많은 다른 책으로 이끄는 시발점이 된 것이다. 책장수의 마음은 이런 작은 정보의 조각들, 즉 피보나치 수열, 철새들의 이동 패턴, 아비시니아의 민간설화, 16,17세기에 이탈리아 명장들이 썼던 바이올린 니스 등으로 채워져 있기 십상이지만 그건 아주 즐겁고 유쾌한 중독이라 할 수 있다. 하나의 정보를 실마리로 하여 계속해서 다른 정보를 찾아가는 인터넷 검색에 대해서도 같은 잉기를 할 수 있겠지만 거기에는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 서점에서는 책이 당장 팔릴 준비를 마친 상태로 고객 가까이에 있다는 점이다. -111쪽

책은 어떻게든 그 사람의 삶을 넌지시 이야기해준다. 그것은 단순히 누가 어떤 작가들을 좋아하는가 하는 독서취향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과 관계있는 것, 사로잡는 것 등을 판단하는 근거, 척도가 되는 것이다. 그곳 팔꿈치에 쓸려 반들반들하게 윤이 나는 계산대의 나무탁자 위에 얼굴을 마주한 채 판매원과 고객은 잠시나마 침묵 속에서 대화를 나눈다. 여행안내서, 요리책, 이혼에 관한 책, 병환중인 부모에 관한 책, 아기 이름에 관한 책, 새로운 세기에 퍼져나가게 될 소름 끼치는 전쟁에 관한 책, 어쩌면 단 20분 동안에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할 뱀파이어 소설일지도 모른다. 그건 얼마쯤은 다른 사람의 가슴속을 꼼꼼히 들여다보는 것과도 비슷하다. -148쪽

만약 당신이 다섯 살 때부터 시작해서 일주일에 책 한 권씩을 읽는다 치고 여든 살까지 산다고 가정하면 당신은 그 기간에 총 3900권의 책을 읽을 것이다. 현재 인쇄되어 시중에 나와 있는 책의 0.1퍼센트가 조금 넘는다. 사회비평가가 교양 시대의 종언을 주장하는 것은 시기상조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우리는 지금 책의 바다를 헤엄치고 있으니 말이다. -176~7쪽

서적판매상은 다음과 같은 말 때문에 자주 난감해지곤 한다. "그래요. 나도 책은 읽고 싶지만 책값이 너무 비싸서요." 여러분이 어린애였을 때 책값이 50센트쯤 했다거나, 똑같은 책을 도서관에서는 공짜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양장본 소설 한 권에 25달러는 터무니없는 사치로 비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간단한 비교만으로 이 까다로운 고객이 책의 장기적인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샌프란시스코에서 영화표 한 장을 구매하려면 10달러가 든다. 2시간가량 지나면 기억만 남아 있을 뿐 돈은 사라져버리고 없다. 적어도 20달러를 더 내고 DVD를 살 때까지는 그렇다. 400쪽짜리 소설은 아마 다 읽으려면 8시간은 족히 걸릴 것이다. 일단 책을 사면 그 내용은 당신 것이 되고, 머릿속에 삼삼하게 떠오르는 기막히게 좋은 문단에 표시를 해둘 수도 있고, 틈이 날 때마다 그것을 찾아볼 수도 있다. -178~9쪽

책은 영화보다 훨씬 더 융통성이 있고, 더 사용자 친화적이다. 전기 없이도 마음대로 읽을 수 있으며, 지금 절반쯤 지나고 있다. 3분의 1쯤 왔다, 끝에서 단 몇 장 남았다, 하는 식으로 손가락으로 흥분을 가늠하거나 조절하면서 항상 자기가 어디쯤 와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영화에서는 인상 깊은 장면을 슬로 모션으로 볼 수 있으나 거기엔 얼마간 비현실적인 느낌이 있다. 책 속의 한 구절을 천천히 또박또박 읽는다고 해서 그것이 단어들을 힘을 빼앗아버리는 일은 없다. 영화는 이미지를 제공해준다. 책은 독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동력으로 삼아 그의 내부에 이미지들을 만든다. 책은 두뇌에 좋다. 신경학자들은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볼 때는 사람의 두 눈이 멍하니 앞을 향하고 있지만, 책을 읽을 때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혹은 위에서 아래로 움직여 신체 움직임이 마음을 지배하는 뇌를 자극하고 조절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179쪽

선물할 책을 고르는 것 또한 늘 아슬아슬하다. 당신은 그 책을 좋아했는지 몰라도, 절친한 친구의 경우 말하는 미노타우로스에 관한 섬뜩한 책을 읽고 싶어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골라야 할 사이즈가 370만 가지나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틀린 사이즈의 스웨터를 선물로 주는 것과 크게 다를 게 없다. 책 선물은 양쪽 다 어려운 거래일 수 있다. 받는 사람은 선물을 받는 그 즉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고, 주는 사람은 감사하다는 인사말을 듣기 위해 몇 달, 혹은 몇 년을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그러다보니 어색한 침묵만 흐르게 된다.
그렇다고 이런 이유 때문에 책 선물을 그만둘 수는 없는 일이다. 표지가 아름다운 책들을 뽑아보라. 우선 당신은 오! 와! 아!하는 감탄사를 연발할 것이며, 새 책은 오래가고 어디에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진정 원하는 책과 언제든 교환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193쪽

성인 도서를 읽을 때마다 나는 이런 책을 읽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다짐하곤 한다. 반면 어린이용 그림책에는 뿌리깊은 중독성이 있다. 내가 스스로 즐길 목적으로 읽었든, 혹은 "다시, 다시" 하는 내 딸의 호된 명령 때문에 읽었든,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이런 책을 여러 차례 되풀이해 읽었다. 성인용 소설은 읽는 데 시간이 더 많이 걸리지만 그렇다고 소설을 다시 읽지 않을 이유는 없다. 단지 읽고 싶은 새 책이 너무 많이 쏟아져나오고 있을 따름이다. 새로운 즐거움을 선사하리라는 확신이 드는 책들을 위해 나는 호기심과 에너지를 아껴둔다. 5년 전, 10년 전, 혹은 20년 전에 처음 읽고 좋아했던 소설을 다시 읽는 것은 우리가 어린 시절로부터 얼마나 멀리 떠나왔는지를 가늠하는 일이자 오래전의 내 자아를 찾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어린이책 전문서점은 그런 식으로 머무르기에는 더할 수 없이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나는 포크너의 소설뿐 아니라 모리스 센닥의 작품도 다시 뒤적인다. -25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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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와 관련한 책들은 꽤 많이 출간됐는데 그에 반해 홍차 인구는 그리 많지 않아서 그런지 홍차에 대한 책은 몇 권 출간되지 않았다. 나름 홍차 덕후로 안타까워 했는데 오랫만에 홍차에 대한 책인 <홍차, 느리게 매혹되다>가 출간됐다. 기존에 나온 책들이 대부분 홍차 안내서에 가까웠는데, 이 책은 그보다 더 일상적인 이야기인 것 같아 궁금해졌다. 아직 해외 구매의 늪에 빠지지 않은 지라 국내에 수입되지 않은 티를 보며 침이나 질질 흘리겠지만.

티 러버's 소울은 서점에서 살펴보니 차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에세이를 모아놨더라. 차 한 잔 마시면서 읽기 좋을 듯.

















확실히 날이 더워지니 슬슬 장르소설이 쏟아져나오는 것 같다. <도착의 론도>를 재미있게 읽어서 관심가는 오리하라 이치의 <행방불명자>, 셜록홈즈 덕후에겐 어쨌거나 반가운 <셜록 홈즈 최후의 해결책>, 추천사가 빵빵해서 혹하는 <은폐수사>, 서점에 가서 나란히 있는 걸 보고 왠지 관심이 갔던 증후군 시리즈. 어째 요즘 예담에서 계속 이런 식의 표지를 미는 듯한 오기와라 히로시의 <소문>,









그동안 궁금했던 작가들의 책도 많이 쏟아지는 듯. <슬럼독 밀리어네어> 이후 오랫만에 만나는 비카스 스와루프의 <6인의 용의자>, 역시 <핑거스미스> 이후에 오랫만에 만나는 세라 워터스의 <벨벳 애무하기>, <헌법의 풍경> 이후 오랫만에 법조계 이야기를 들고 온 김두식의 <불멸의 신성가족>, 늘 홈페이지에서만 구경해서 아쉬웠던 스노우캣의 <지우개>, <책도둑> 이후 오랫만에 만나는 마커스 주삭의 <메신저>까지.



피천득 선생님의 새로운 이야기를 묶은건가 기대하고 봤더니 <수필> 발간 33주년 기념 특별 개정판이다. 그래도 15편의 이야기가 새로 수록되었다고 하니 한 번 읽어봐야지.



그 외 관심가는 책이 몇 권 더 있었는데 어째 상품 넣기에서 검색이 안 된다 -_ㅜ 다음에 수정해야지. 그나저나 바빠서 책 읽을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데 어째 보관함은 날이 갈수록 빵빵해진다. -_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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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9-06-06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심가는 사람들의 신작이 쏟아졌군요. 6인의 용의자, 벨벳 애무하기, 불멸의 신성가족, 메신저까지....
오랫만에 이매지님 관심서적 보는 것 같은데 반갑네요. ^^ 덕분에 또 보관함이 빵빵~~ ^^

이매지 2009-06-06 00:50   좋아요 0 | URL
한 일주일만 안 봐도 신간이 미친 듯이 나오더군요;;
앞으로는 주말마다 보고 쌓이기 전에 올려야겠어요 -_ㅜ

무해한모리군 2009-06-06 0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우개와 메시넞를 살까말까 망설이는 중이예요 ^^

이매지 2009-06-07 11:48   좋아요 0 | URL
흐흐. 저두 같이 망설여요 ㅎㅎㅎ
 
편집된 죽음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8
장-자크 피슈테르 지음, 최경란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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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쯤 새 작품이 나오나 이제나 저제나 기다려온 '블랙 펜 클럽'. 오랜 침묵을 깨고 드디어 새 책이 출간됐다. 오랜 기다려왔던 터라 이왕이면 두툼한 책을 기대했는데 실망스럽게도 얇은 분량이라 아쉬웠다. 그래도 얇긴 했지만 <편집된 죽음>이라는 제목에 걸맞는 표지에 혹해 얼른 읽기 시작했다.

  추남에 가까운 외모에 어디 있어도 존재감이 없는 영국에서 출판편집자로 일하고 있는 에드워드 램, 그리고 호남형 외모에 어딜가나 눈에 띄는 니콜라 파브리. 어린 시절 알렉산드리아에서 두 사람은 운명적으로 만난다. 알렉산드리아에 총영사의 아들로 온 니콜라와 에드워드는 얼핏 보기엔 공통점이 없어 친해질 리 없었지만 에드워드가 친구들과 함께 발행하는 문예지에 관심이 있던 니콜라가 접근해 둘의 질긴 악연은 시작된다.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엉망인 원고를 에드워드가 손봐 문예지에 실어줬기에 언제나 니콜라보다 자신이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다고 생각했던 에드워드. 하지만 첫사랑인 야스미나의 죽음 이후 에드워드는 뭔가 빠진 것처럼 그림자 같은 삶을 살아가고 창작에 대한 그의 재능도 꺼져버린다. 한편, 파일럿으로, 외교관으로 승승장구하던 니콜라는 소설가로 인기를 얻기 시작한다. 빛과 어둠처럼 정반대의 삶을 사는 두 사람. 수십년 동안 자신을 무시해온 니콜라의 태도와 오만한 모습을 늘 참으며 때를 기다려온 에드워드. 마침내 니콜라가 공쿠르 상 수상으로 작가로서의 정점에 오르자 그동안 준비해온 복수를 시작한다.  

  추리소설을 생각하고 읽었는데, 읽고 나니 추리소설이라는 생각보다는 심리 스릴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한 사람의 심리가 치부까지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분량도 그리 많지 않아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지만 에드워드의 이야기를 읽으면 읽을수록 그의 질투와 복수심이 느껴져 오싹해졌다. 누군가를 파멸시키기 위해 완벽하게 조작된 사건. 그리고 파국으로 치닫는 한 사람의 삶. 치밀하게 짜여진 복수극의 대단원을 읽으며 복수를 소재로 한 책의 완결판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결말에서 호불호가 갈릴 것 같다는 생각도 약간 들었지만, 그래도 나는 이 책의 결말이야말로 에드워드의 복수의 마침표라는 생각이 들었다. 초반에는 약간 늘어지는 것 같았지만 조금 지나니 내가 책장을 넘기는 건지, 책장이 저절로 넘어가는 건지 모를 정도로 에드워드의 이야기에 매료됐다. 

  읽고 나서 역자 후기를 보고 알았는데 이 책은 1994년에 출간된 <표절>의 개정판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표절>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니 역시나 절판된 걸 아쉬워하는 독자들의 아쉬움 내지 이 재미있는 책을 자기만 알고 있다는 안도가 담긴 리뷰를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제목과 새로운 표지로 이렇게 다시 나온 덕분에 그동안 이 작품의 진가를 몰랐던 나같은 독자들도 함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으니 다행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올 여름에 누가 추리소설 좀 추천해달라고 하면 주저없이 추천할 책이 한 권은 생긴 것 같아 기쁘다. 세상을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 복수를 꿈꾸지만 정작 복수의 통쾌한(?) 순간을 느끼는 사람은 많지 않다. 괜히 복수할 꺼라고 칼을 갈며 자신의 영혼을 파괴하기보다는 이 책에서 에드워드를 통해 대신 복수를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덧) 작가는 로맹 가리의 죽음에서 이 책의 모티브를 얻었다고 하니, 이 책과는 전혀 상관없지만 로맹 가리(에밀 아자르)의 책과 함께 읽는 것도 재미를 더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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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예뻤을 때
공선옥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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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왠지 모르게 영미가 미웠다. 순금이, 정금이, 영금이, 해금이, 하고 금자 돌림으로 쭉 나가다가 갑자기 막내만 영미가 된 것도 내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할아버지는 첫 손녀의 이름을 순할 순(順)에 비단 금(錦)을 붙여 순금이라 해놓고, 그 다음부터는 아예 비단 금자는 고정시켜놓은 채, 둘째 곧을 정(正), 셋째 꽃부리 영(英)까지는 옥편 찾는 성의 정도는 보이시더니 내가 태어나고 아버지가 또 딸입니다, 이름을 무엇으로 할까요, 하자 대뜸 그러셨다는 것이다.
"니무랄 것, 암꺼나 허라고 혀."
세상에 '암꺼나 해'자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겟지만 하여간 할아버지가 그렇게 하라고 했으니 아버지는 내 이름을 '암꺼나 해'자에 비단 금, 해서 해금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을 고모한테 들었다. -19~20쪽

아버지는 원래 우격다짐보다는 대화와 협상을 좋아하는 천상 민주주의자였다. 자신은 민주주의자가 확실한데 너희 엄마는 고집 센 것으로는 공산주의자, 맘대로 하는 것으로는 자유주의자라고 아버지가 우리 앞에서 엄마 흉을 본 적이 있다. 공산당과 자유당을 번갈아 오가는 엄마인지라 이름 정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만만치 않게 나왔다.
"꼭 큰애 거를 붙일 필요는 없제. 기중 이쁜 꽃부리 영자, 미영으로 합시다."
아버지의 심기가 뒤틀렸다. 그래서 동회에 신고하러 갈 때 뒤틀린 아버지의 심경을 이름자에 실어서는 미영을 영미로 바꿔쳐버렸다. -21쪽

어젯밤에 훔친 돈과 아버지가 준 돈 그리고 그 동안 내가 안 먹고 안 쓰고 모은 돈을 들고 나는 승희가 애를 낳은 보건소로 가기 전 정신이네 집에 전화를 걸었다. 정신이 엄마가 받았다.
"정신이 있어요?"
"정신이 없따!"
"정신이 나갔어요?"
"정신이 나갔따!"
"정신이 언제 돌아와요?"
"나도 모르겠따!"
나는 뻔히 알면서도 언제나 그렇게 물었다. 그러면 정신이 엄마도 내가 일부러 그렇게 묻는다는 걸 알면서 장난조로 받아친다. -40~1쪽

"악아, 우지 마라. 사는 것은 죄가 아닌게로 우지를 마라."-65쪽

"난 참 이상해."
우리는 수경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다. 다만 너무 아프고 너무 무서워서 다들 말을 안 할 뿐이다. 우리가 금요일쯤이면 땡땡이를 치고 산에 올라간다는 정보를 입수한 태용이와 승규가 나타났다. 승규가 가방에서 담배를 꺼냈다. 수경이 저도 달라고 했다. 수경은 캑캑거리면서도 담배 한 개비를 다 피웠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태용이가 담배 대신이라도 되는 듯 자랑스럽게 소주병을 꺼냈다. 우리는 한 사람씩 돌아가며 깡소주를 나발불었다.
"진짜 웃겨."
우리는 수경이 하려던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았던 것처럼 태용이가 더이상 말을 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이 세상이 참 이상하고 웃기다는 것을. 연거푸 담배 두 개비를 피우고 나서 승규는 남은 소주를 들이켜며 뇌까렸다.
"웃기기는, 좆 같지."-71쪽

세상 사람들은 왜 아무렇지 않지? 아무렇지 않은 것이 나는 너무 이상해.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닐까? 혹시 말이야, 우리나라 사람들이 먹는 물에 뭐든지 빨리 잊어먹게 하는 약이 섞여 있는 게 아닐까? 아니면 누군가 공기중에 누가 죽었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고 살아가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약품을 살포한 것은 아닐까? 나는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밥먹고 웃고 결혼하고 사랑하고 애 낳고 그러는 게 이상해. 우리 식군 내가 이상하다지만 말야. -76쪽

만영의 무시무시한 독서량도 태용은 잘 알고 있었다. 태용은 시골물 뺀답시고 사복 차림으로 음악다방을 드나들던 진만의 소개로 만영을 알았고, 만영이 어려서부터 가장 노릇을 해왔다는 사실도 진만을 통해 알고 있었다. 시인 김수영이 노동자들을 '강자'라고 했던 것처럼, 만영이 자신보다 강자임을 태용은 인정했다. -83쪽

태용은 보건소로 들어서기 전 잠깐, 머릿속 수첩을 꺼내 '잃은 것과 얻은 것'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잃은 것과 얻은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했다. 암만 생각해도 태용은 지금, 자신이 이전에 가졌던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한번 잃어버린 것들은 택시에 놓고 내린 기저귀 가방처럼 다시 오지 않을 것이고, 자신이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더이상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만 같았다. 텅 빈 스무살이었다. 태용은 다리를 휘청거리며 보건소 분만실로 들어갔다. -89~90쪽

"엄마는 아버지를 사랑해서 결혼했어?"
엄마는 입매를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속없는 년이 그 냉혈한을 너무나 사랑했지. 지 발등 지가 찍었어."
"사랑해서 결혼했고 그래서 우릴 낳았으면 된 거 아닌가? 뭘 복수하고 말고 해?"
"니가 사랑을 모르니까. 너도 언젠간 알 거다. 사랑하면 할수록 사람이 얼마나 외로워지는지. 엿 같아지는지."-111쪽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내가 그에게 뭔가를 주는 관계가 아니라 내가 그와 똑같은 입장이 되는 것이라고 정원은 말했었다. 애초부터 똑같을 순 없지만, 정원의 외로움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기 위해서 스스로 외로워지자고 정신은 생각했다. 자신을 외롭게 하는 것은 정원이 꿈꾸는 세상에 조금이라도 다가가기 위한 첫걸음이기도 했다. 가족의 외로움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사회를, 역사를 바꿀 수 있단 말인가. -113쪽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노동이란 거지. 혁명으로서의 노동 말이다. 나는 그 길을 갈 거야. 그 길이란, 이 땅에서 언제나 피와 눈물의 역사였지. 패배와 좌절과 고난과 슬픔의 길이었지만, 우리 선배들은 온몸을 다 바쳐서 그 가시밭길에 혁명의 씨앗을 뿌리기를 잊지 않았어. 이현상이 그랬고 박진홍이 그랬고 이재유가 그랬고 그리고 전태일이. 나는 그들이 갔던 그 길을 갈 거야. 이 척박한 땅에서 노동운동은 단순한 이권운동일 수는 없는 거야. 그것은 숙명적으로 반체제적, 혁명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단 거지. 너,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어? 내 동생이니까 알 거야. 아니, 알아야 해. (중략)
그래, 영미가 있지. 마영미, 걘 노래를 잘하지. 난 힘으로, 걘 노래로, 그리고 넌 니가 가진 그 무엇으로든, 이 세상을 사랑하자. 이 세상에서 설움받고 핍박받는 서러운 민중들을 위해 우리는 우리 각자가 가진 그 무엇이든 아낌없이 내놓자, 해금아. -122~3쪽

"희망을 가져라. 무슨 희망이냐면......"
승희 눈이 반짝 빛났다.
"빛은 어둠 속에서 나온다는 거. 아름다움은 슬픔에서 나온다는 거, 모든 행복은 고통 뒤에 온다는 거. 진짜 빛이 있고 진짜 아름다움이 있고 진짜 행복이 있다면 말야."
만영이의 말에 의하면, 진짜 빛, 진짜 아름다움, 진짜 행복은 어둠과 슬픔과 고통 속에서 나온다는 것인데...... 그게 그리 쉽지가 않아서 사람들이 희망을 버리게 되는지도 몰랐다. -199~200쪽

나 말고 다른 사람 때문에 울 수 있는 사람은 아름답지. 자신의 슬픔 때문에 우는 사람보다 다른 사람의 슬픔 때문에 우는 사람이 많을수록 세상은 좀더 아름다워질 거야. 그러니까 너도 아름답구나. 환이 때문에, 해금이 너 때문에 세상이 조금 더 아름다워졌는지도 몰라. 봐, 네가 울기 전보다 지금 별이 훨씬 더 반짝이잖아. -211~2쪽

정신은 말했다. 상대보다 힘이 세다고, 더 많이 배웠다고, 더 많이 가졌다고, 더 우월하다고 믿는 자들이 부리는 오만과 횡포와 모욕과 폭력과 무례함에 맞서기 위해서라도 우선은 그 오만과 횡포와 모욕과 폭력과 무례함을 견뎌내야 한다고. 모든 오만한 자들이, 모든 무뢰배들이 스스로 부끄러워할 때까지, 견디고 견뎌서, 그 견디는 힘으로 우리가 아름다워지자고. 왜냐하면 모든 추함은 모든 아름다움 앞에서 결국 무릎을 꿇게 되어 있기 때문에. 동물에서 출발한 인간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인간이기에, 동물적 본능의 시간에서 조금이라도 인간의 시간을 살기 위해 몸부림치기 때문이라고, 동물의 시간에서 인간의 시간으로 나아가기 위한 지난한 몸부림의 과정이야말로 진보의 역사라고, 정신은 힘주어 말했었다. 오늘, 저 무뢰배의 오만이 횡행할 수 있는 이 야만의 구조, 이 동물적 상황을 나는 견뎌야 한다. 저항하기 위해 견딜 것. 아름다워지기 위해 지금은 견딜 것. -240~1쪽

모든 좋은 것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우리의 사랑이, 우리의 행복이, 우리의 청춘이, 우리의 인생이, 우리 인생의 모든 환한 것들이 영원히 지속된다면, 이 세상에 슬픔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 어떤 것도 지속될 수 없으므로, 슬픔은 생겨나는 것이다. 우리 집, 탱자나무 울타릿집이 그립고 그리고 민들레의 집이 그리워 나는 주말이면 놀러 오라는 정신의 말도 잊은 채, 설움의 바다에 푹 빠져 공장에서의 첫 주말을 보냈다. 가고 싶지만 지금은 갈 수 없는 내 그리운 집들을 그리며. -248~9쪽

사장의 부도덕한 행태를 믿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분노보다 어떤 무섬증이 몰려왔다. 인간의 양심이란 것이 사실은 그다지 믿을 게 못 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느껴지는 두려움 같은 것이었다. 자신이 조금 힘이 세다고, 조금 더 가졌다고, 자신보다 약하거나 자신보다 덜 가진 사람을 간단히 무시해버릴 수 있는 그 마음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는 데서 오는 막막함 같은 것이었다. -2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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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바람 2009-07-08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소설글귀가 많네요. 제가 할려고 했는데 수고를 덜었어요
 
악인 오늘의 일본문학 6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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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동안 열 권을 읽으면 다섯 권은 일본 소설이었을 정도로 일본 소설에 빠져 지냈던 적이 있었다. 무엇보다 '가볍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일본 소설의 장점이지만 비슷한 분위기의 책을 연달아 읽다보니 어느새 시들해져버렸다. 그렇게 일본 소설에 대한 애정(?)이 식었을 무렵에 나왔던 요시다 슈이치의 <악인>은 어쩔 수 없이 책장에 고이 잠들어 있었다. 그러다 이번 주말 '뭐 그냥 가볍게 읽을만한 책 없나~'하며 책장을 살피다가 골랐는데 오랫만에 읽어서 그런지 페이지가 더 술술 넘어간 것 같다.

  보험설계사로 일하는 20대 여성의 요시노는 같이 어울리는 동료들에게는 거짓말을 하며 적당히 자신을 꾸미지만 실은 만남 사이트를 통해 남자를 만나곤 한다. 그녀는 동료들에게 대학생인 남자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말했지만, 다음날 외딴 도로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그리고 그날 밤 요시오를 만난 두 남자. 젊은 사람답지 않게 인생을 즐길 줄 모르며 조부모의 뒤치닥거리를 하며 살아가는 유이치, 부잣집에서 태어나 타인에게 상처주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마스오. 과연 요시노가 두 남자를 만난 그 날, 이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사실 책을 읽기 전에는 "감히 나의 대표작이라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는 작가의 말에 혹했다. 요시다 슈이치의 작품을 많이 접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간 읽었던 그의 소설이 평범한 일상의 발견 수준이었기에 대체 '악인'이라는 제목으로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갈까 궁금했는데, 의외로 살인사건이라는 비일상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어서 놀랐다. 평소에 다뤘던 젊은이들의 이야기가 아닌 저마다의 상처를 안고 있는 외로운 사람들의 이야기가 하나의 살인사건을 통해 보여지고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며 과연 '악인'이라고 규정짓는 것이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했다. 단순히 사회적인 규범을 어기고 범죄를 저지르는 것만이 악일까? 아니면 자신이 타인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며 남을 깔보는 사람이 악인일까? 아니면 거짓으로라도 자신을 그럴듯하게 포장해 속이는 사람이 악인일까? 이 책 속에는 참 못된 사람들이 많이 등장했지만 그들 모두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서 악인일 수도 아닐 수도 있었다. 다시 말해, 소설 속의 등장인물뿐만 아니라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사람은 모두 악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진짜 악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피해자가 되고 싶어한다는 책 속의 말처럼 어쩌면 사람들은 자신 외에 다른 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혹은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피해를 끼칠 때 그를 악인으로 규정하고 자신을 피해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어 씁쓸했다. 

  요시다 슈이치 특유의 소설을 예상했던 터라 의외의 전개라 살짝 놀라기도 했고, 마치 영화를 보는 듯 전개되는 것도 좋았지만, 중간중간 인터뷰처럼 형식이 바뀌는 점이나 서술자의 논평이 들어가는 부분, 선과 악을 너무 명징하게 설정한 점 등은 아쉬웠다. 뭐 그래도 어찌됐건 원래의 목표(?)대로 가볍게 읽기엔 더할나위 없는 선택이었던 것 같다. 요시다 슈이치의 대표작으로 꼽기엔 다소 아쉽지만 그냥 적당히 편하게, 적당히 재미있는 책이 읽고 싶다면 손색이 없을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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