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예뻤을 때
공선옥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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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왠지 모르게 영미가 미웠다. 순금이, 정금이, 영금이, 해금이, 하고 금자 돌림으로 쭉 나가다가 갑자기 막내만 영미가 된 것도 내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할아버지는 첫 손녀의 이름을 순할 순(順)에 비단 금(錦)을 붙여 순금이라 해놓고, 그 다음부터는 아예 비단 금자는 고정시켜놓은 채, 둘째 곧을 정(正), 셋째 꽃부리 영(英)까지는 옥편 찾는 성의 정도는 보이시더니 내가 태어나고 아버지가 또 딸입니다, 이름을 무엇으로 할까요, 하자 대뜸 그러셨다는 것이다.
"니무랄 것, 암꺼나 허라고 혀."
세상에 '암꺼나 해'자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겟지만 하여간 할아버지가 그렇게 하라고 했으니 아버지는 내 이름을 '암꺼나 해'자에 비단 금, 해서 해금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을 고모한테 들었다. -19~20쪽

아버지는 원래 우격다짐보다는 대화와 협상을 좋아하는 천상 민주주의자였다. 자신은 민주주의자가 확실한데 너희 엄마는 고집 센 것으로는 공산주의자, 맘대로 하는 것으로는 자유주의자라고 아버지가 우리 앞에서 엄마 흉을 본 적이 있다. 공산당과 자유당을 번갈아 오가는 엄마인지라 이름 정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만만치 않게 나왔다.
"꼭 큰애 거를 붙일 필요는 없제. 기중 이쁜 꽃부리 영자, 미영으로 합시다."
아버지의 심기가 뒤틀렸다. 그래서 동회에 신고하러 갈 때 뒤틀린 아버지의 심경을 이름자에 실어서는 미영을 영미로 바꿔쳐버렸다. -21쪽

어젯밤에 훔친 돈과 아버지가 준 돈 그리고 그 동안 내가 안 먹고 안 쓰고 모은 돈을 들고 나는 승희가 애를 낳은 보건소로 가기 전 정신이네 집에 전화를 걸었다. 정신이 엄마가 받았다.
"정신이 있어요?"
"정신이 없따!"
"정신이 나갔어요?"
"정신이 나갔따!"
"정신이 언제 돌아와요?"
"나도 모르겠따!"
나는 뻔히 알면서도 언제나 그렇게 물었다. 그러면 정신이 엄마도 내가 일부러 그렇게 묻는다는 걸 알면서 장난조로 받아친다. -40~1쪽

"악아, 우지 마라. 사는 것은 죄가 아닌게로 우지를 마라."-65쪽

"난 참 이상해."
우리는 수경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다. 다만 너무 아프고 너무 무서워서 다들 말을 안 할 뿐이다. 우리가 금요일쯤이면 땡땡이를 치고 산에 올라간다는 정보를 입수한 태용이와 승규가 나타났다. 승규가 가방에서 담배를 꺼냈다. 수경이 저도 달라고 했다. 수경은 캑캑거리면서도 담배 한 개비를 다 피웠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태용이가 담배 대신이라도 되는 듯 자랑스럽게 소주병을 꺼냈다. 우리는 한 사람씩 돌아가며 깡소주를 나발불었다.
"진짜 웃겨."
우리는 수경이 하려던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았던 것처럼 태용이가 더이상 말을 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이 세상이 참 이상하고 웃기다는 것을. 연거푸 담배 두 개비를 피우고 나서 승규는 남은 소주를 들이켜며 뇌까렸다.
"웃기기는, 좆 같지."-71쪽

세상 사람들은 왜 아무렇지 않지? 아무렇지 않은 것이 나는 너무 이상해.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닐까? 혹시 말이야, 우리나라 사람들이 먹는 물에 뭐든지 빨리 잊어먹게 하는 약이 섞여 있는 게 아닐까? 아니면 누군가 공기중에 누가 죽었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고 살아가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약품을 살포한 것은 아닐까? 나는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밥먹고 웃고 결혼하고 사랑하고 애 낳고 그러는 게 이상해. 우리 식군 내가 이상하다지만 말야. -76쪽

만영의 무시무시한 독서량도 태용은 잘 알고 있었다. 태용은 시골물 뺀답시고 사복 차림으로 음악다방을 드나들던 진만의 소개로 만영을 알았고, 만영이 어려서부터 가장 노릇을 해왔다는 사실도 진만을 통해 알고 있었다. 시인 김수영이 노동자들을 '강자'라고 했던 것처럼, 만영이 자신보다 강자임을 태용은 인정했다. -83쪽

태용은 보건소로 들어서기 전 잠깐, 머릿속 수첩을 꺼내 '잃은 것과 얻은 것'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잃은 것과 얻은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했다. 암만 생각해도 태용은 지금, 자신이 이전에 가졌던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한번 잃어버린 것들은 택시에 놓고 내린 기저귀 가방처럼 다시 오지 않을 것이고, 자신이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더이상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만 같았다. 텅 빈 스무살이었다. 태용은 다리를 휘청거리며 보건소 분만실로 들어갔다. -89~90쪽

"엄마는 아버지를 사랑해서 결혼했어?"
엄마는 입매를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속없는 년이 그 냉혈한을 너무나 사랑했지. 지 발등 지가 찍었어."
"사랑해서 결혼했고 그래서 우릴 낳았으면 된 거 아닌가? 뭘 복수하고 말고 해?"
"니가 사랑을 모르니까. 너도 언젠간 알 거다. 사랑하면 할수록 사람이 얼마나 외로워지는지. 엿 같아지는지."-111쪽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내가 그에게 뭔가를 주는 관계가 아니라 내가 그와 똑같은 입장이 되는 것이라고 정원은 말했었다. 애초부터 똑같을 순 없지만, 정원의 외로움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기 위해서 스스로 외로워지자고 정신은 생각했다. 자신을 외롭게 하는 것은 정원이 꿈꾸는 세상에 조금이라도 다가가기 위한 첫걸음이기도 했다. 가족의 외로움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사회를, 역사를 바꿀 수 있단 말인가. -113쪽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노동이란 거지. 혁명으로서의 노동 말이다. 나는 그 길을 갈 거야. 그 길이란, 이 땅에서 언제나 피와 눈물의 역사였지. 패배와 좌절과 고난과 슬픔의 길이었지만, 우리 선배들은 온몸을 다 바쳐서 그 가시밭길에 혁명의 씨앗을 뿌리기를 잊지 않았어. 이현상이 그랬고 박진홍이 그랬고 이재유가 그랬고 그리고 전태일이. 나는 그들이 갔던 그 길을 갈 거야. 이 척박한 땅에서 노동운동은 단순한 이권운동일 수는 없는 거야. 그것은 숙명적으로 반체제적, 혁명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단 거지. 너,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어? 내 동생이니까 알 거야. 아니, 알아야 해. (중략)
그래, 영미가 있지. 마영미, 걘 노래를 잘하지. 난 힘으로, 걘 노래로, 그리고 넌 니가 가진 그 무엇으로든, 이 세상을 사랑하자. 이 세상에서 설움받고 핍박받는 서러운 민중들을 위해 우리는 우리 각자가 가진 그 무엇이든 아낌없이 내놓자, 해금아. -122~3쪽

"희망을 가져라. 무슨 희망이냐면......"
승희 눈이 반짝 빛났다.
"빛은 어둠 속에서 나온다는 거. 아름다움은 슬픔에서 나온다는 거, 모든 행복은 고통 뒤에 온다는 거. 진짜 빛이 있고 진짜 아름다움이 있고 진짜 행복이 있다면 말야."
만영이의 말에 의하면, 진짜 빛, 진짜 아름다움, 진짜 행복은 어둠과 슬픔과 고통 속에서 나온다는 것인데...... 그게 그리 쉽지가 않아서 사람들이 희망을 버리게 되는지도 몰랐다. -199~200쪽

나 말고 다른 사람 때문에 울 수 있는 사람은 아름답지. 자신의 슬픔 때문에 우는 사람보다 다른 사람의 슬픔 때문에 우는 사람이 많을수록 세상은 좀더 아름다워질 거야. 그러니까 너도 아름답구나. 환이 때문에, 해금이 너 때문에 세상이 조금 더 아름다워졌는지도 몰라. 봐, 네가 울기 전보다 지금 별이 훨씬 더 반짝이잖아. -211~2쪽

정신은 말했다. 상대보다 힘이 세다고, 더 많이 배웠다고, 더 많이 가졌다고, 더 우월하다고 믿는 자들이 부리는 오만과 횡포와 모욕과 폭력과 무례함에 맞서기 위해서라도 우선은 그 오만과 횡포와 모욕과 폭력과 무례함을 견뎌내야 한다고. 모든 오만한 자들이, 모든 무뢰배들이 스스로 부끄러워할 때까지, 견디고 견뎌서, 그 견디는 힘으로 우리가 아름다워지자고. 왜냐하면 모든 추함은 모든 아름다움 앞에서 결국 무릎을 꿇게 되어 있기 때문에. 동물에서 출발한 인간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인간이기에, 동물적 본능의 시간에서 조금이라도 인간의 시간을 살기 위해 몸부림치기 때문이라고, 동물의 시간에서 인간의 시간으로 나아가기 위한 지난한 몸부림의 과정이야말로 진보의 역사라고, 정신은 힘주어 말했었다. 오늘, 저 무뢰배의 오만이 횡행할 수 있는 이 야만의 구조, 이 동물적 상황을 나는 견뎌야 한다. 저항하기 위해 견딜 것. 아름다워지기 위해 지금은 견딜 것. -240~1쪽

모든 좋은 것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우리의 사랑이, 우리의 행복이, 우리의 청춘이, 우리의 인생이, 우리 인생의 모든 환한 것들이 영원히 지속된다면, 이 세상에 슬픔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 어떤 것도 지속될 수 없으므로, 슬픔은 생겨나는 것이다. 우리 집, 탱자나무 울타릿집이 그립고 그리고 민들레의 집이 그리워 나는 주말이면 놀러 오라는 정신의 말도 잊은 채, 설움의 바다에 푹 빠져 공장에서의 첫 주말을 보냈다. 가고 싶지만 지금은 갈 수 없는 내 그리운 집들을 그리며. -248~9쪽

사장의 부도덕한 행태를 믿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분노보다 어떤 무섬증이 몰려왔다. 인간의 양심이란 것이 사실은 그다지 믿을 게 못 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느껴지는 두려움 같은 것이었다. 자신이 조금 힘이 세다고, 조금 더 가졌다고, 자신보다 약하거나 자신보다 덜 가진 사람을 간단히 무시해버릴 수 있는 그 마음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는 데서 오는 막막함 같은 것이었다. -2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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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바람 2009-07-08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소설글귀가 많네요. 제가 할려고 했는데 수고를 덜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