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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온실 수리 보고서
김금희 지음 / 창비 / 2024년 10월
평점 :
창경궁을 배경으로 한다는 광고를 보고 무작정 예약을 했다.
가을 체험학습을 창경궁으로 가서 사전답사를 다녀온 후였다.
다른 궁들은 한 번씩 가보았는데 창경궁은 처음이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을 당한 곳, 장희빈의 욕망으로 저주 인형들이 숨겨져 있던 곳, 성종이 태어난 곳, 일제가 우리나라를 능욕하기 위해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궁을 훼손했던 곳 등 참으로 다양한 이야기가 숨어져 있는 궁이었다.
창경궁에 대한 관심이 깊어 있을 때 이 책을 읽고는 더 알고 싶어 졌다. 처음에 창경궁에 다녀오고는 온실을 다녀오지 않아. 이책을 읽는 중에 온실 때문에 다시 한 번 다녀왔다.
소설을 읽고는 엄청 큰 대 온실을 기대했는데 직접 가보고는 약간 실망했다. 사실 지금이야 이 정도 규모는 카페 규모 정도 밖에는 되지 않았다. 온실 실물을 보고는 정말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을 했다. 지하 공간이 발견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이렇게 엄청난 이야기를 만들어 내다니 대단하다.
이 책은 400쪽이 넘는 분량이다. 액자식 구성도 약간 복잡하다.
현재의 영두가 창경궁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쓰기 시작하는 입장의 이야기가 가장 겉 테두리이다. 여기에는 강화에서의 친구 은혜, 은혜의 딸 산아, 딸의 친구들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과거의 영두가 창경궁 근처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의 일들이 나온다. 어린 시기에 너무 많은 일들을 겪어서 이제는 더 끄집어 내고 싶지도 않은 우울한 시기였다. 낙원 하숙 할머니, 딩 아주머니, 삼우씨, 유화 언니, 리사, 영두가 좋아했던 이순신이 나오는 중간 이야기가 있다.
가장 안쪽 이야기는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접하게 되는 대온실 공사 담당자의 회고록에 나오는 아주 오랜 과거의 이야기들이 있다. 자료를 읽는 과정에 나오는 이야기. 일제 강점기와 1950년 6.25때의 이야기들이다. 박목주 온실 만든 사람, 박목주의 아들 유진, 딸 마리코, 이창충, 박영출 등등의 인물들이다. 이 인물들을 파악하는 것도 많이 힘들었다.
작품을 읽으면서 손을 놓을 수 없었던 특별한 이유는 인물에 대한 묘사가 참 찰지다.
별명을 짓거나 말과 행동이 정말 디테일 하다. 작도 온세창 대리, 강도 강영두, 석모도의 헤밍웨이, 제도 제갈도희, 순신이라 불린 금성무, 어공(어쩌다 공무원) 아랑 등 재미난 별명들이 몰입도를 높였다.
그리고 각 인물들이 따로 놀지 않고 다시 연결연결 되어 그 연결고리를 찾는 재미도 있었다.
폭력적인 역사를 살아오는 사람들이 그 한스러운 인생을 작은 의지와 위로로 견뎌내는 모습도 감동적이었다.
아줌마의 대사가 인상적이었다. "장마가 그런데 어쩔 것이야. 다음을 기다려야지. 그런다고 바다 소금이 어디 가버리는 것도 아니고 사는 게 말이야. 영두야, 꼭 차 다니는 도로 같은 거라서 언젠가는 유턴이 나오게 돼. 아줌마가 요즘 운전을 배워본 게 그래. 그러니까 돌아올 곳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알고 있으면 사람은 걱정이 없어."
각자의 시간에서 각자 노력하며 살아 가고 있구나. 과거의 역사 속에서의 삶이 현재의 삶과 연계되고 또 다시 살아 움직이게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고 그 공간을 방문하는 아주 즐거운 독서였다.
처음에 배운 건 수리의 종류에 대한 용어들이었다. - P11
복병이 무슨 뜻인데? 적을 기습하기 위해 적이 지나갈 만한 길목에 숨긴 군사,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경쟁 상대. - P61
영두님, 그 담다아 과장 공문성애자예요. 그냥 공무눚의자 정도로 해두자. 대리님, 벌써 잊었어요? 그건 신념도 원칙도 아니고 거의 페티시죠. - P69
정말 기억이 안 날 수 있어. 트라우마가 깊으면 그래. - P181
나는 리사를 망치고 싶었다. 구길 수 있다면 구기고 싶었꼬 얼릴 수 있따면 그대로 얼려버리고 싶었따. 그런 내 마음을 눈치챈 날 나는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강화로 돌아가겠따고 말했다. 리사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렇게 생성되는 악의에서 나 자신을 구하기 위해 그래야 한다고 결심했다. - P219
다 우리 아이들입니다.그러니 뭐가 어떻게 되더라도 진실은 밝혀줘야죠. 그게 어른이 할 일 아닙니까? - P223
사람들은 어쩐지 자주 보는 건 결국 싫어해. 마음이 닳아버리나봐. 많이 쓰면 닳지. 닳아서 아예 움직이지 않기도 하는 걸. - P180
인간의 시간과는 다른 시간들이 언제나 흐르고 있다. - P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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