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불빛의 서점 - 서점에서 인생의 모든 것을 배운 한 남자의 이야기
루이스 버즈비 지음, 정신아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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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새 책을 사려고 이곳에 오는 것은 아니다. 서점에만 가면 흥분을 느끼는 까닭은 장소 자체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필요하다면 언제까지고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서점을 지배하는 무언의 규칙은 여타의 소매업을 지배하는 규칙과는 전혀 다르다. 서점은 대개 개인사업체지만, 영업장이나 영업시간 등에 대한 대중의 요구사항을 거부할 수가 없다. 서점은 휴지걸이라든가 이 세상에 종말이 왔을 때 먹을 타바스코 소스를 무한정 파는 대형매점이 아니다. 번쩍이는 금박 드레스나 희귀 보석 따위의 최고급 사치품을 파는 일류 부티크도 아니며, 고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음료수며 담배, 아이스크림을 사기 위해 불쑥 들르는 편의점도 아니다. 우리가 한참 동안이나 매장을 서성거린 후에야 겨우 책 한 권을 산다 해도 서점 직원 중 누구도 개의치 않는다. 서점에서는 얼마든지 죽치고 있을 수가 있는 것이다. 때로는 몇 시간씩이라도 말이다. -10쪽

그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여유와 느긋함은 거기서 파는 상품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책은 느림을 동반한다. 시간을 요한다. 글을 쓰는 일, 책을 펴내는 일, 읽는 일이란 죄 늘어지는 일이다. 400쪽짜리 책 한 권이면 집필에만도 몇 년이 걸리거니와 출판되기까지는 그보다 더 오랜 세월이 걸릴 수도 있다. 게다가 책을 구입한 뒤에도 그걸 읽는 독자는 며칠이나 몇 주, 때로는 몇 달에 걸쳐 한 자리에 눌러앉아 몇 시간씩을 보낼 작정을 해야 한다. -11~2쪽

책은 내구성이 빼어날뿐더러, 읽는 즐거움을 몇 번씩 누린다해도 전혀 훼손될 염려가 없다. 책에는 연료나 식량, 서비스 따위가 필요 없다. 어수선한 일을 만들거나 시끄러운 소리를 내지도 않는다. 한 권의 책은 읽고 또 읽은 뒤에도 친구들에게 건네거나 헌책방에 싼값으로 되팔 수 있다. 그래도 책은 산산조각 난다거나 얼어붙을 일이 없고, 모래 속에 처박힌다 해도 책의 기능을 상실하는 법이 없다. 혹여 욕조 속에 빠뜨린다 해도 곧장 말릴 수가 있으며 굳이 필요하다면 다림질 한 번이면 그만인 것이다. 혹 책등이 심하게 갈라져 페이지가 떨어져나갈 지경이 됐다고 치자. 그럴 경우엔 바람이 책장들을 흗뜨리기 전에 책장을 그러모아 고무 밴드로 한데 묶어주기만 하면 된다. -15쪽

처음부터 책 파는 사람이 되겠다고 말하는 아이는 없다. 책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병에 걸리기 전만 해도 나에게는 우주비행사, 심해 다이버, 천문학자, 풋볼 선수, 미 해병대 하사관, 코미디언, 록 스타 등 장래 희망사항이 수도 없이 많았다. 서적판매업자라는 직업 하면, 한 손으로는 고양이를 쓰다듬거나 차를 마시면서 제인 오스틴의 멋진 소설책 한 권을 끼고 높은 의자에 나른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할지 몰라도, 사실 이 일이 그렇게 매혹적이거나 영웅적일 수는 없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는 생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전혀 알지 못한다. -41쪽

그레타는 어른들의 참견이 지나치면 아이의 선택 능력에 해가 될 수도 있다고 조언했다. 아이들이 독서에서 자기만의 즐거움을 찾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그레타와 내가 크로 서점을 나와 일했던 프린터스 서점에서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서점은 스탠퍼드 대학 근처에 있었는데, 이 지역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공부 스트레스를 꽤나 심하게 받는 편이었다. 하루는 어느 부부가 서점에 들어와서 열한 살짜리 딸이 읽을 '고전' 몇 권만 골라달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딸애가 책 읽는 것을 무척 좋아해서 노상 책만 들여다보지만, 그 책이란 게 죄다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47쪽

어린 시절에 읽었던 책들은 우리를 과거로 인도한다. 그것은 꼭 책에 나오는 이야기들 때문만은 아니다. 그 책을 읽었을 때 우리가 어디에 있었고 우리는 누구였는가를 둘러싼 기억들 때문이다. 책 한 권을 기억한다는 것은 곧 그 책을 읽은 어린아이를 기억하는 것이다. -52~3쪽

우리는 책의 판매량이 높고 인기가 많다고 해서 작가의 능력이 탁월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수백만 부씩 팔리지만 지금부터 50년, 아니 단 5년만 지나도 읽히지 않을 책이 너무 많이 널려 있다. -61쪽

한 사람의 일생에서 중요한 책이란 게 반드시 대단하다거나 기억할 만하다는 평가를 받는 책일 필요는 없다. 중요한 책의 목록은 어린이책에서 문학성이 빼어나거나 조금 떨어지는 소설에 이르기까지 길고도 들쭉날쭉하며 작품 스타일과 주제만큼이나 광범위하다. 이 책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열두 살에서 열여덟 살 사이의 소년소녀들이 공감할 수 있는 세계를 아주 생생히, 총체적으로 그려냈다는 점이다. 그것도 잘난 체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63쪽

독서는 혼자서 하는 외로운 행위이지만 세계와 손잡기를 요구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비록 탐서가들이 모두 책 판매에 나서지는 않지만 그레타와 리즈, 나와 그 밖의 많은 사람은 우리를 감동시킨 책들 때문에 결국 서점으로 이끌린 것이다. 잠깐 중단된 시절이 있긴 했지만 우리가 이 일을 하며 서점에 머문 시간은 꽤나 길었다. -65쪽

만약 서가들이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형성하는 마천루라면 평평하고 나지막한 매대는 누구나 조금씩 속도를 늦추게 되는 개방된 공원이나 집 안뜰이다. 여기서 당신은 여태껏 보지 못했던, 표지에 눈길 한번만 주어도 매혹당할 수밖에 없는 책들을 마침내 손에 넣기로 돼 있는 것이다. 서두를 필요는 없다. 여기선 하루 종일 머물며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까. 여느 대도시처럼 이곳엔 누구에게나 어울리는 무드가 있고 골목골목 거리에 뜻밖의 놀라움이 기다리고 있다. -101쪽

한 권의 책, 거기서 읽은 하나의 문장으로 세상의 온갖 좋은 것, 사소한 것, 심오한 것들이 시작되었음을 나는 배웠다. 그 한 문장이 나를 다른 책으로 이끌고 다시 그 책이 훨씬 더 많은 다른 책으로 이끄는 시발점이 된 것이다. 책장수의 마음은 이런 작은 정보의 조각들, 즉 피보나치 수열, 철새들의 이동 패턴, 아비시니아의 민간설화, 16,17세기에 이탈리아 명장들이 썼던 바이올린 니스 등으로 채워져 있기 십상이지만 그건 아주 즐겁고 유쾌한 중독이라 할 수 있다. 하나의 정보를 실마리로 하여 계속해서 다른 정보를 찾아가는 인터넷 검색에 대해서도 같은 잉기를 할 수 있겠지만 거기에는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 서점에서는 책이 당장 팔릴 준비를 마친 상태로 고객 가까이에 있다는 점이다. -111쪽

책은 어떻게든 그 사람의 삶을 넌지시 이야기해준다. 그것은 단순히 누가 어떤 작가들을 좋아하는가 하는 독서취향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과 관계있는 것, 사로잡는 것 등을 판단하는 근거, 척도가 되는 것이다. 그곳 팔꿈치에 쓸려 반들반들하게 윤이 나는 계산대의 나무탁자 위에 얼굴을 마주한 채 판매원과 고객은 잠시나마 침묵 속에서 대화를 나눈다. 여행안내서, 요리책, 이혼에 관한 책, 병환중인 부모에 관한 책, 아기 이름에 관한 책, 새로운 세기에 퍼져나가게 될 소름 끼치는 전쟁에 관한 책, 어쩌면 단 20분 동안에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할 뱀파이어 소설일지도 모른다. 그건 얼마쯤은 다른 사람의 가슴속을 꼼꼼히 들여다보는 것과도 비슷하다. -148쪽

만약 당신이 다섯 살 때부터 시작해서 일주일에 책 한 권씩을 읽는다 치고 여든 살까지 산다고 가정하면 당신은 그 기간에 총 3900권의 책을 읽을 것이다. 현재 인쇄되어 시중에 나와 있는 책의 0.1퍼센트가 조금 넘는다. 사회비평가가 교양 시대의 종언을 주장하는 것은 시기상조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우리는 지금 책의 바다를 헤엄치고 있으니 말이다. -176~7쪽

서적판매상은 다음과 같은 말 때문에 자주 난감해지곤 한다. "그래요. 나도 책은 읽고 싶지만 책값이 너무 비싸서요." 여러분이 어린애였을 때 책값이 50센트쯤 했다거나, 똑같은 책을 도서관에서는 공짜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양장본 소설 한 권에 25달러는 터무니없는 사치로 비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간단한 비교만으로 이 까다로운 고객이 책의 장기적인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샌프란시스코에서 영화표 한 장을 구매하려면 10달러가 든다. 2시간가량 지나면 기억만 남아 있을 뿐 돈은 사라져버리고 없다. 적어도 20달러를 더 내고 DVD를 살 때까지는 그렇다. 400쪽짜리 소설은 아마 다 읽으려면 8시간은 족히 걸릴 것이다. 일단 책을 사면 그 내용은 당신 것이 되고, 머릿속에 삼삼하게 떠오르는 기막히게 좋은 문단에 표시를 해둘 수도 있고, 틈이 날 때마다 그것을 찾아볼 수도 있다. -178~9쪽

책은 영화보다 훨씬 더 융통성이 있고, 더 사용자 친화적이다. 전기 없이도 마음대로 읽을 수 있으며, 지금 절반쯤 지나고 있다. 3분의 1쯤 왔다, 끝에서 단 몇 장 남았다, 하는 식으로 손가락으로 흥분을 가늠하거나 조절하면서 항상 자기가 어디쯤 와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영화에서는 인상 깊은 장면을 슬로 모션으로 볼 수 있으나 거기엔 얼마간 비현실적인 느낌이 있다. 책 속의 한 구절을 천천히 또박또박 읽는다고 해서 그것이 단어들을 힘을 빼앗아버리는 일은 없다. 영화는 이미지를 제공해준다. 책은 독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동력으로 삼아 그의 내부에 이미지들을 만든다. 책은 두뇌에 좋다. 신경학자들은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볼 때는 사람의 두 눈이 멍하니 앞을 향하고 있지만, 책을 읽을 때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혹은 위에서 아래로 움직여 신체 움직임이 마음을 지배하는 뇌를 자극하고 조절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179쪽

선물할 책을 고르는 것 또한 늘 아슬아슬하다. 당신은 그 책을 좋아했는지 몰라도, 절친한 친구의 경우 말하는 미노타우로스에 관한 섬뜩한 책을 읽고 싶어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골라야 할 사이즈가 370만 가지나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틀린 사이즈의 스웨터를 선물로 주는 것과 크게 다를 게 없다. 책 선물은 양쪽 다 어려운 거래일 수 있다. 받는 사람은 선물을 받는 그 즉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고, 주는 사람은 감사하다는 인사말을 듣기 위해 몇 달, 혹은 몇 년을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그러다보니 어색한 침묵만 흐르게 된다.
그렇다고 이런 이유 때문에 책 선물을 그만둘 수는 없는 일이다. 표지가 아름다운 책들을 뽑아보라. 우선 당신은 오! 와! 아!하는 감탄사를 연발할 것이며, 새 책은 오래가고 어디에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진정 원하는 책과 언제든 교환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193쪽

성인 도서를 읽을 때마다 나는 이런 책을 읽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다짐하곤 한다. 반면 어린이용 그림책에는 뿌리깊은 중독성이 있다. 내가 스스로 즐길 목적으로 읽었든, 혹은 "다시, 다시" 하는 내 딸의 호된 명령 때문에 읽었든,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이런 책을 여러 차례 되풀이해 읽었다. 성인용 소설은 읽는 데 시간이 더 많이 걸리지만 그렇다고 소설을 다시 읽지 않을 이유는 없다. 단지 읽고 싶은 새 책이 너무 많이 쏟아져나오고 있을 따름이다. 새로운 즐거움을 선사하리라는 확신이 드는 책들을 위해 나는 호기심과 에너지를 아껴둔다. 5년 전, 10년 전, 혹은 20년 전에 처음 읽고 좋아했던 소설을 다시 읽는 것은 우리가 어린 시절로부터 얼마나 멀리 떠나왔는지를 가늠하는 일이자 오래전의 내 자아를 찾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어린이책 전문서점은 그런 식으로 머무르기에는 더할 수 없이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나는 포크너의 소설뿐 아니라 모리스 센닥의 작품도 다시 뒤적인다. -25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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