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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일드 44 ㅣ 뫼비우스 서재
톰 롭 스미스 지음, 박산호 옮김 / 노블마인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어쩌다 보관함을 정리하다보면 '내가 이런 책을 보관함에 넣었었나?' 싶을 정도로 잊고 있었던 책을 만나게 된다. 이 책 <차일드 44>도 분명 보관함에는 들어 있는데 언제, 왜 넣어놨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보를 찾아보니 아마 유독 높은 평점에 혹해서 보관함에 넣어두었던 것 같았다.) 또 보관함에 묵혀뒀다가는 언제 읽을 지 기약이 없어서(라기보다는 또 까먹을 게 뻔하므로) 낼름 도서관에 가서 빌려와 읽기 시작했다. 그저 높은 평점. 그거 하나 보고 읽기 시작한 책이라 어떤 내용인지도 모른 채 읽었는데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만날 수 있는 책이 아닐까 싶었다.
소비에트 연방의 작은 마을에 눈이 내리던 어느 날, 오랜 가뭄으로 변변찮은 음식이 먹어 굶주리던 소년 앞에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난다. 소년은 동생과 함께 작전을 짜 고양이를 잡는 데는 성공하지만 누군가에게 공격을 당하고 어리버리한 동생만 혼자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20년 뒤. 전쟁 영웅으로 현재는 국가 안보부 소속의 비밀 경찰로 일하는 레오가 등장한다. 자신이 맡은 임무에 대해 한 치도 의심을 한 적이 없었던 그가 어느 날, 기찻길에서 죽은 채 발견된 소년의 죽음을 납득하지 않는 유가족을 찾아가 그들이 헛된 생각(아이가 살해당했다는)을 하지 못하도록 경고하는 임무를 수행하며 처음으로 자신의 일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감시하던 스파이 용의자의 도주로 레오의 인생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기껏 용의자는 잡지만, 그의 입에서 아내인 라이사의 이름이 언급된다. 우여곡절 끝에 레오는 시골 민병대로 좌천돼 라이사와 함께 모스크바를 떠나고, 그곳에서 모스크바에서 죽은 소년과 같은 방식으로 살해당한 또다른 어린아이의 시체를 발견한다. 이상한 낌새를 채고 레오는 민병대 대장에게 다른 지역에서 유사한 사건이 있는 지 알아봐달라고 부탁하고, 놀랍게도 44명의 아이들이 비슷한 방식으로 살해당한 것이 밝혀진다.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게 된 레오. 자신의 목숨을 걸고 수사를 시작한다. 그리고 밝혀지는 놀라운 진실.
서방세계보다 부족한 것이 없어야 하고, 더 살기 좋아야했던 소비에트 연방에서 범죄, 특히나 연쇄살인 같은 범죄는 있어서는 안 되는, 아니,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어쩌다 정신 이상자들이 저지르는 살인은 있을 수 있어도 정상적인 지능을 가진 이들이 살인을 한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 속의 범인은 레오가 알아낸 것만으로도 44명의 아이들은 살해하고도 꼬리를 잡히지 않은 채, 누구의 의심도 받지 않은 채 살아간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는 시의 한 구절처럼 레오가 아이들의 죽음을 연쇄살인이라고 규정짓기 전에 그것은 그저 정신이상자들이 저지른 이상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 애초에 범죄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는 나라이기때문에 사람들은 범죄가 일어나고 있다는 의식조차 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보통의 사람들처럼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고 자신이 살고 있는 국가와 체제를 신봉했던 레오. 그가 한 아이의 죽음을 계기로 그동안 미처 깨닫지 못했던 소비에트 연방의 실상과 연쇄 살인에 대해 눈을 뜬다.
항상 자신을 지켜보는 눈과 귀가 있고, 말 한마디만 실수해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반체제분자로 몰릴 수 있는 상황이기에 모두가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의견다운 의견을 갖지도 못하며 살아간다. 그런 사람들에게 '의심'을 불어넣었기에 레오는 단순히 연쇄살인을 수사하는 것이 아니라 체제 자체를 뒤흔드는 반체제분자로 몰린다. 이곳에서 무엇이 '진실'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진실과 거짓 여부를 떠나 체제를 유지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진실로 취급된다. 단순히 외국인들의 개를 치료해줬다는 이유로 스파이로 오해받았던 수의사도, 레오에 대한 악의로 스파이 명단에 올라간 레오의 아내 라이사도 그들이 진짜 서방세계와 손을 잡고 체제를 무너뜨리려 했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아무리 그들이 평범한 사람이었다고 해도, 아무리 그들이 체제를 옹호하는 자들이었다고 해도 일단 반체제분자(혹은 스파이)로 몰리고 나면 그 다음에 오는 것은 오직 죽음뿐. 이런 식의 공포 정치를 통해서 소비에트 연방은 그 체제를 유지한다. 소비에트 연방의 공포정치는 비록 극단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가 이런 공포와 억압에서 과연 자유롭게 살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살고 있는 국가를 믿지 못하는 국민의 모습이나 폭력과 공포로 사람들을 억압했던 70~80년대로 비춰볼 때 소비에트 연방의 모습은 우리나라의 불완전한 민주주의와 크게 달라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소련에서 있었던 살인사건과 대기근 등을 소재로 하고 있어서 그런지 더 생생하게 읽을 수 있었다. 작가의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노련한 글쓰기를 엿볼 수 있었다. 장르소설은 저급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은데, 이 책을 보면 훌륭한 장르소설은 그 어떤 문학보다 메시지가 강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읽을 때도, 읽고 나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책. 그 어떤 책보다 리뷰 쓰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이 맴돌았다. 그 어떤 말로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읽단 읽고 판단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