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일드 44 뫼비우스 서재
톰 롭 스미스 지음, 박산호 옮김 / 노블마인 / 2009년 5월
구판절판


범죄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물론 없었다. 이 사회는 아직 과도기라 그 나름의 단점이 있었다. MGB 간부인 레오는 의무적으로 레닌의 저작을 공부해야 했는데, 사실 전 시민의 의무이기도 했다. 빈곤과 결핍이 사라진 것처럼 사회 불안정으로 발생하는 범죄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임을 레오는 알고 있었다. 다만 아직 안정기에 다다르지 못했을 뿐이다. 사람들은 아직도 남의 물건에 손을 댔고, 술에 취해 벌인 말다툼이 주먹다짐으로 변하기도 했으며, 범죄자들의 갱단인 우르키도 남아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삶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믿어야 했다. 이 사건을 살인이라고 한다면 그 믿음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짓인 것이다. 레오는 상사이자 스승인 야누슈 쿠즈민 총경이 해준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1937년 열린 재판에서 피고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믿음을 잃은 것이 바로 죄다. -37~8쪽

가장 믿음이 가는 사람이 가장 의심을 받아야 할 사람이다. 쿠즈민은 스탈린의 유명한 잠언을 이용했다.

믿되 조사하라.

스탈린의 이 말은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믿는 이들을 조사하라.

믿음직스러운 사람이나 의심스런 사람이나 똑같이 철저하게 조사하기 때문에 일종의 평등이 존재한다는 논리다.
조사관의 의무는 유죄가 드러날 때까지 결백한 사람들을 철저하게 캐는 것이다. 어떤 죄도 찾지 못했다면 그만큼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는 뜻이다. -55~6쪽

진실보다 더 끈질긴 건 없어. 그래서 당신이 진실을 그렇게 증오하는 거야. 진실 때문에 당신 기분이 더러워지는 거지. 그래서 나, 아나톨리 타라소비치 브로츠키가 수의사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당신을 화나게 할 수 있는 거야. 당신은 내가 유죄이기를 바라기 때문에 내 결백이 화가 나는 거야. 나를 체포했기 때문에 내가 유죄이기를 바라는 거야. -106쪽

아나톨리는 무고하게 잡힌 사람이었다. 꼭 있어야 하고, 중요한 사람이지만, 오류도 저지르는 국가란 기계의 톱니바퀴에 눌려 으깨져버렸다. 아나톨리 사건은 이처럼 단순하면서 불운한 일일 뿐이었다. 사람 하나가 그들이 수행하는 작전의 의미를 약화시키지는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그들의 근무 원칙은 계속 공고하게 남아 있다. 국가를 지키는 것은 한 사람보다 더 중요하고, 천 명의 사람보다 더 중요한 일이다. 소비에트 연방의 공장과 기계와 군대들은 얼마나 중요한가? 이것들에 비하면 일반 대중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렇게 상황의 경중을 따지는 일은 그의 업무에 필수적이다. 계속 이 일을 하려면 이런 식으로 사태의 경중을 잘 판단해야 했다. 이론은 그럴싸했지만 사실 하나도 믿지 않았다. -130쪽

줄 하나로 생사가 갈리는 그것이 바로 이 나라의 사법 체계였다. 눈을 감은 레오는 루비안카의 복도에서 들은 억누른 공포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들의 도덕적인 나침반은 너무나 오랫동안 쓰지 않아서 통제력을 잃어버렸다. 북쪽이 남쪽이 됐고 동쪽이 서쪽이 됐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에 대한 문제에 직면하면 답이 없었다. 사람들은 스스로 판단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이런 불안한 시기에 취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행동 방침은 가능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1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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