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발머리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키가 크고 덩치가 큰 남자 영어 선생님이 계셨는데, 머리 스타일이 단발머리였다. 하얀 얼굴에 단발머리. 그래서 그 분 별명은 ‘앙드레‘였다. 앙드레 김이라는 유명한 디자이너의 머리 스타일과 유사해서 붙여진 별명이 아니었을까 싶다. 머리를 더 길게 길러서 묶고 다니거나 늘어뜨리고 다니는 장발은 까까머리 남자 고등학생들에게 원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락을 즐겨 들었고, 노래 실력 때문에 락커를 꿈꾸지는 못했지만, 락밴드가 등장하는 이야기를 끄적거리곤 했던 나는 대학생이 되면 머리칼을 장발로 길러보려고 생각하곤 했다. 장발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이 있었던 나는 뉴스 자료화면 같은 곳에서 볼 수 있는 70년대 장발 단속 장면 같은 것이 궁금했다. 그 시절은 어떻게 저렇게 머리칼을 기른 남자들이 많았을까? 어떤 사회 분위기가 장발을 단속하게 만들었을까?

지금 단발머리를 주제로 이 글을 두드리는 건 한 3주전에 미용실에서 내 머리칼을 단발머리로 잘랐기 때문이다. 대학시절에도 또 30대 중반 무렵에도 머리칼을 길러보려고 하다가 중간에 흔히 말하는 거지구간을 참지 못하고 늘 실패했었는데, 참 어이없게도 교통사고를 당하고 일을 쉬는 동안 머리칼을 자르지 않았더니 장발이 되어 있었다. 그대로 계속 자르지 않고 기른 시간이 대략 1년 10개월쯤 되니 머리 스타일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중간에 한번도 다듬은 적이 없어서 머리카락 길이가 들쭉날쭉 엉망이었다. 그래도 평소엔 늘 묶고 다녀서 별로 상관이 없긴 했는데, 이젠 묶어도 끝 부분이 등 윗부분에 늘어질 정도로 길어서 내가 생각했던 포니테일 스타일의 장점을 별로 느낄 수가 없었다. 머리를 묶지 않고 다니기엔 너무 지저분해 보였다. 게다가 날이 점점 더워지면서 긴 머리가 답답하게 여겨졌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짧은 머리 스타일로 돌아가기도 싫었다.

어쨌거나 머리칼을 한번 자르자는 생각을 몇 주째 하고 있다가 거의 2년 전에 마지막으로 들렀던 단골 미용실에 갔다. 주인장인 미용사는 처음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가 내가 안내받은 의자에 앉고 나서야 뒤늦게 알아보고 손뼉을 쳤다. 어떻게 자르고 싶냐는 말에 어깨 언저리쯤의 길이로 해달라고 말했다. 그게 단발머리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몰랐다. 지금 제일 긴 머리칼이 가슴까지 내려오고, 제일 짧은 머리칼이 어깨쯤에 걸리니까 그렇게 길이를 맞추면 좋지 않을까 라고 단순하게 생각해서 한 말이었다.

처음으로 머리칼을 길러본 것이었고, 어떻게 머리 스타일을 만들고 꾸미는 지에 대한 고민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그 미용사는 어쨌든 솜씨가 좋은 분이었고, 내가 예상한 것보다 짧은 시간에 가위질을 마쳤다. 안경을 쓰고 보니 내 생각보다 머리칼이 더 짧다고 느껴졌다. 그 모습이 너무 어색했다. 그리고 이젠 예전처럼 머리를 감겨주지 않았다. 딸들을 데리고 같이 가면 나는 머리를 감겨주지만, 딸들은 감겨주지 않아서 예상은 했었다. 이젠 나도 미용실에서 머리를 감겨주지 않겠구나.

집에 돌아와서 머리를 감는데, 약 한뼘 언저리 길이로 머리칼이 짧아졌을 뿐인데, 머리 감기가 엄청 수월하게 느껴졌다. 머리를 말리는 시간도 훨씬 줄어들었다. 이래서 단발머리를 좋아하는 여성들이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머리를 다 말리고 머리칼을 묶어봤는데, 너무 짧뚱하게 묶여서 뭔가 어색했다. 그리고 뒷머리 일부는 너무 짧아서 묶이지 않았다.

며칠간 이런저런 실험과 시도를 해보다가 그냥 머리칼을 묶지 않고 단발머리로 다니기로 했다. 처음에는 보는 사람들마다 다들 놀란 반응이었다. 긴 시간 쉬다가 복귀할 때 장발로 나타났을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다들 놀란 표정과 멈춘듯한 동작은 보여줬다. 누군가는 계속 주기적으로 놀래킨다고 말했고, 누군가는 잘 어울린다고 말했다. 미용사가 솜씨가 좋다고 칭찬한 사람도 있었다.

머리를 묶고 다닐 때는 그렇게 티가 많이 나지 않았던 흰머리가 상대적으로 훨씬 더 돋보이게 되어 나이들어 보인다는 단점이 생기기는 했지만, 처음 해보는 이 스타일이 나도 아주 싫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익숙해지고 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살면서 이 정도 길이의 머리 스타일을 한 경우는 맨처음 얘기한 고등학교 시절 영어 선생님과 원빈 밖에 보지 못한 것 같다. 원빈은 뭐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고, 그 선생님의 경우 내 편견 때문인지 몰라도 그다지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었다. 내 경우는 모르겠다. 내 지인들이니까 다들 내게 괜찮다. 잘 어울린다고 말해주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나는 객관적인 판단을 할 수 없으니 그냥 다시 머리칼이 더 길어서 안정적으로 묶고 다닐 수 있을때까지 이렇게 살아야지. 뭐 다른 방법이 없지 않은가. 누군가 농담으로 야한 생각을 많이 하면 머리칼이 잘 자란다는 말을 해줬다. 그렇다면 나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거라고 대꾸해줬다.

인라인 스케이트

아이들은 제법 규모가 큰 공원 옆에 살고 있다. 아이들을 만나러 갈 때마다 그 공원을 가로질러 가는데, 매번 시간대에 따라 다양한 사람들을 마주친다. 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편안하게 쉬러 온 사람들도 많더라. 아이들이 이 집으로 이사오고, 이 공원을 처음 걸었을 때 나는 아이들과 이 공원에서 자주 산책도 하고, 운동도 하고 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바쁘다고, 피곤하다고 여러 이유로 집에 머물기를 원했다. 이렇게 좋은 공원을 바로 앞에 두고 집에만 있는 건 나로서는 참기 힘든 상황이지만, 사춘기 딸들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엊그제 아이들을 보러 가는 길에 공원에서 작은 꼬마아이가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불안하게 비틀거리며 나를 향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대여섯살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은 아주 어린 여자아이였다. 아이가 내 바로 코 앞에서 비틀 넘어질 것 처럼 옆으로 기울어져서 나도 모르게 손이 나갔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빠르게 손을 다시 거둬들이며 살짝 아이를 지나쳐 걸었다. 아이는 정말 운이 좋게도 넘어지지 않고 쪼그리고 앉은 자세로 멈췄다. 아이의 손이나 팔을 잡아 넘어지지않게 부축하려던 내가 순간적으로 나가던 손을 다시 거둬들인 이유는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 아이의 부모가 함부로 자신의 아이에게 손을 댔다고 기분나빠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마도 여자아이여서 더 그런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입장을 바꿔서 만약 내 아이가 그렇게 어리고, 넘어져 다칠지도 모를 상황이었었는데, 알지도 못하는 중년 사내가 나타나 아이의 손이나 팔을 잡으면 과연 나는 기분이 나쁠것인가? 나는 곧바로 아니라고 생각했다. 고마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경험적으로 나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이 나처럼 고마워했다고 하더라도 정말 소수일지라도 이 일로 시비를 걸어올 사람은 분명 존재할 것이다. 혹시라도 그런 시비에 휘말리도 모른다는 생각이 아주 짧은 순간 뇌리를 스쳤고, 나는 손을 거둬들이고 부자연스런 동작으로 최대한 자연스러운 척 애쓰며 아이를 스쳐 지나갔다. 아이가 넘어지지 않고, 다치지 않았던 것은 정말 다행이었다. 만약 아이가 넘어져 다쳤다면 나는 죄책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아이를 지나쳐 공원을 걷는데 옛날 생각이 떠올랐다. 먼저 우리집 책장 위 구석에 먼지에 쌓인 인라인 스케이트 가방이 떠올랐고, 그걸 선물받은 시점이 떠오른 것이다.

내가 애들 엄마에게 호감이 있다고 용기내어 고백했던 시기에 그는 한창 인라인 스케이트 동호회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내게 인라인 스케이트를 사주었고, 데이트는 주로 공원에서 인라인을 타면서 했다. 그는 차근차근 쉽게 인라인 타는 법도 잘 가르쳐주었다. 그때까지 인라인은 커녕 롤러 스케이트조차 한번도 타본 적이 없었던 나는 빠르게 인라인을 배워 그와 함께 공원을 누비게 되었다.

당시 애들 엄마와 동호회 회원들이 주로 했던 컵들을 주욱 늘어놓고 그 컵들 사이로 이런저런 어려운 동작을 펼치며 빠르게 지나가는 것을 함께 할 정도는 되지 못했지만, 그냥 공원 안에서 이동하는 정도라면 어디라도 무리없이 갈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그렇게 연애하던 시절에는 열심히 인라인 스케이트를 탔었는데, 언제부터 그걸 전혀 타지 않게 되었을까?

결혼하고 큰 아이를 임신했을 때부터였던 것 같다. 아니, 생각해보니 큰 아이가 아직 어렸을 때 근처 공원에서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아이가 앉은 유모차를 몰고 놀았던 기억이 있다. 큰 아이가 좀 더 자라서 아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인라인 스케이트를 사주고 내가 잠깐 가르쳐줬던 기억도 났다. 아마 그게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지금 우리집에 처박혀서 먼지를 덮어쓰고 있는 그 인라인은 큰 아이가 아직 어렸을 때 탔던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 평생 타볼 일은 없을 것이다.

4년 하고도 몇 달전에 이 집으로 이사오기 직전에 이삿짐을 싸면서 역시나 책장 위 구석에서 저 인라인을 발견했을 때, 순간적으로 고민했다. 앞으로 저걸 탈 일이 있을까? 아마 없을거라고 결론 내렸고 그럼 버려야지 생각했지만, 차마 버리지 못했다. 아마 이 집에서 다른 집으로 이사간다고 해도 그 집에서도 역시 책장 위 구석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 같다.

다시 운동을 제대로 시작하면서 역대급 근육통에 시달리고 있다. 몸은 무겁지만 기분은 좋다. 얼른 집에 가서 샌드백부터 두들기고 다른 운동을 해야지. 오랜만에 불가리안 백을 들어볼까? 케틀벨 운동을 해볼까? 바벨을 들어볼까? 몸이 무거우니 가볍게 덤벨 운동으로 만족할까? 조금씩 다 해버릴까? 아마 그러면 내일 출근도 못하고 하루종일 누워있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내일은 중요한 일정이 있으니 가능한 한 가볍게 하는 걸로 생각하고 있어야지. 물론 그래놓고 순간적으로 흥이 오르면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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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2-06-07 2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 단발이시군요. 요즘 남자 단발이 유행인가봐요. 제 남편도 단발이에요.ㅎㅎㅎ 제 머리끈 같이 쓰고 있답니다.

불가리안백은 진짜 어렵던데요. 대단하세요^^

감은빛 2022-06-08 11:29   좋아요 1 | URL
꼬마요정님 남편께서도 단발이시라니, 무척 반갑습니다.
단발 스타일을 오래 해오셨는지, 최근 바꾸신 건지 궁금하네요. ㅎㅎ

불가리안백은 운동법이 정말 다양하죠.
스핀 같은 동작은 정말 어려운데, 쉬운 동작도 제법 많아요.
저는 무게 욕심을 부리다보니 100% 활용을 못하고 있는데,
조만간 조금 더 가벼운 무게로 하나 더 구매할 생각입니다.

꼬마요정 2022-06-08 18:00   좋아요 0 | URL
작년부터 열심히 길러서 파마도 하고 매직도 하고 그러더라구요. 조만간 히피펌도 하겠답니다. 제가 단발히피펌인데 뒤에서 보면 똑같겠어요 ㅋㅋㅋㅋ

불가리안 백 스핀 도전했다가 어이쿠 했어요. 도장 코치님이 붕붕 돌리길래 쉬운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구요. 전 조용히 깨갱 케틀벨 가벼운 거나 들었죠 머 ㅎㅎㅎ

감은빛 2022-06-10 18:57   좋아요 1 | URL
작년부터 기르셨군요. 히피펌이라니! 멋지네요!
꼬마요정님과 닮은 모습이면 더 좋아보이겠네요.

스핀을 잘 하려면 암쓰로우 동작에 먼저 숙달이 되어야 하지요.
가벼운 무게로 암쓰로우를 먼저 연습하시면 곧 하실 수 있을 거예요.
저는 스내치, 벤트오버로우, 쉬러그 등을 주로 합니다.
저도 아직 스핀은 부드럽게 연결되지 않아서 어려워요.

바람돌이 2022-06-07 2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우 단발머리 감은빛님 상상이 안가요. 남자분들 꽁지머리나 긴머리는 차라리 상상이 가는데 단발머리는 여자들도 관리하기 힘든 머리라서 말이죠. ㅎㅎ 어쨌든 멋있을것 같습니다 ㅎㅎ
책도 그렇지만 물건에도 어떤 애틋함이 있는 것들이 있죠. 감은빛님의 인라인 스케이트가 그런것 같네요. 저희 집의 인라인은 그런 의미가 하나도 없어서 안타게 되자 벌써 없애버렸지만 말이죠.

감은빛 2022-06-08 11:31   좋아요 0 | URL
바람돌이님. 그렇죠. 저도 늘 꽁지머리로 묶고 다니다가 이번에 단발이 되었네요.
관리하기 힘든 머리인데, 저는 관리를 전혀 안 해서 괜찮은 것 같습니다. ㅎㅎ
애틋함이 묻은 물건들이 있죠.
제 인라인은 미련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지만요.

잉크냄새 2022-06-07 22: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농구부 복귀하기 전 비뚤어져 있던 불꽃남자 정대만도 단발머리죠.

다락방 2022-06-08 07:57   좋아요 1 | URL
아, 잉크냄새 님 이 댓글 왜이렇게 좋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감은빛 2022-06-08 11:32   좋아요 0 | URL
아! 정대만!
잠시 반가웠다가 금방 사람 기죽게 만드는 상황이네요. ㅎㅎ
정대만처럼 잘 생겼다면 어떤 머리든 어울리겠지요.
하지만 제 현실은 ㅠㅠ

다락방 2022-06-08 07: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단발머리 라고 하니까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의 ‘하비에르 바르뎀‘이 퐉 떠오르네요. 감은빛 님 이미지와는 완전히 어긋나지만요.

감은빛 2022-06-08 11:35   좋아요 1 | URL
아! 안톤 쉬거를 연기한 하비에르 바르뎀이 있었군요.
두 번이나 본 영화였는데, 떠올리지 못했네요.
제가 지금까지 본 영화들 중에서 최고의 악역으로 꼽을 수 있을 역할인데요.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잉크냄새 2022-06-08 13:51   좋아요 1 | URL
영화속 주인공이면 월드워Z의 브래드 피트도 단발이죠.
정신 건강을 위해 영화속 주인공은 생각치 않으심이 좋을듯 합니다.
얘네들은 뭘 해도 멋있으니까요.

감은빛 2022-06-08 16:52   좋아요 0 | URL
음. <월드워Z>라 그 영화 본지 엄청 오래되어서 잘 기억이 안 나네요. 잉크냄새님 말씀처럼 그 분들과 비교하면 못 살죠. ㅎㅎ

저는 제 처지를 잘 아니까요. ㅎㅎ

책읽는나무 2022-06-08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건축탐구 집>이란 다큐를 즐겨 보는데요. 몇 년 전 거기에 나왔던 문훈 소장님이 단발머리였어요. 그후로, 단발머리 남자들을 보면 제 눈엔 창의성과 개성이 넘쳐 보이는 인상이 들곤 하더군요.^^

감은빛 2022-06-08 11:37   좋아요 1 | URL
책읽는나무님. 의외로 단발머리 스타일의 남성들이 꽤 있군요.
저는 뭐 창의성과는 거리가 멀지만,
나름 개성은 있는 편인 것 같아요.
이런 스타일로 뻔뻔하게 돌아다니는 것만 봐도 그런 것 같아요. ㅎㅎ

희선 2022-06-10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머리를 깎아서 머리가 가벼워졌겠습니다 이번에 다듬었으니 다시 길러도 괜찮겠네요 머리를 깎으면서 고등학교 때 선생님도 떠올리셨군요

쓰지 않아서 바로 버리는 것도 있고 버리지 못하는 것도 있을 것 같아요 기억이 담긴 물건은 쉽게 버리지 못하겠습니다


희선

감은빛 2022-06-10 19:00   좋아요 0 | URL
희선님. 맞아요. 다시 기르려고 이번에 다듬었다는 성격이 강합니다. ㅎㅎ
제가 물건들도, 책도 한번 들어오면 잘 못버리는 성격이긴 합니다.
왠지 희선님도 그러실 것 같아요.
 

며칠 전이었다. 새벽 4시쯤 잠에서 깨어 멍하니 누워 있다가 음악이라도 들으려고 유튜브를 켰다. 바로 음악을 검색하지 않고 먼저 유튜브가 내 취향에 맞게 골라주는 첫화면에 올라온 영상들을 먼저 훑어보았다. 티비가 없는 나는 주로 유튜브로 뉴스를 보는데, 새로 올라온 뉴스가 없는지를 먼저 살폈다. 그러다가 내가 구독하고 있는 운동정보 채널에 오랜만에 새 영상이 올라온 것을 발견하고 클릭했고, 그 영상에 이어 자동으로 다른 운동과 관련한 영상들이 계속 재생되었다.

그러다 우연히 팔씨름 선수가 악력 기르는 방법을 찍은 영상이 재생되었다. 다양한 장력의 악력기를 이용해서 훈련을 하고, 특히 고장력의 악력기를 잘 활용해서 꾸준히 노력하면 악력을 빠르게 기를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다른 힘이 비해 악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편인데, 특히 왼손 악력은 유난히 약했다.

어려서부터 늘 힘이 센 편이라고 생각해왔던 내가 유독 악력이 약하다는 걸 깨달았던 건, 군대에서 진지공사를 하면서였다. 전방으로 배치되었던 내 군생활의 절반은 경계근무였고, 나머지 절반은 진지공사였다. 포대에 각목 두 개를 집어넣어 만든 단카(알고보니 이 단어 일본어로 들것이었다.) 라고 부르는 걸로 흙, 돌, 씨멘트 등 온갖 무거운 것들을 실고 먼거리를 이동하는 일이 많았다. 단카는 두 명이서 들어야 했는데, 나보다 키도 작고 체구도 작은 고참이 뒤에서 들고, 나는 앞에서 들었는데, 아주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할 상황이었다. 가다보니 어느 순간 분명 그 무게를 들 수 있는 힘은 아직 남아있었지만, 그 당카 손잡이 즉 각목을 쥘 힘이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다. 특히 왼손이. 결국 나는 이동 중에 왼손이 풀려 당카 손잡이를 떨어뜨렸고, 당카에 실려있던 것이 쏟아졌고, 뒤에 고참에게 어마어마한 욕설을 들었다. 그 일은 내게 충격이었다.

제대하고 몇 년 후에 운동을 꾸준히 하다가 악력을 기르려면 악력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악력기를 사러 체육사에 갔다. 작은 가게라 악력기가 두 종류 밖에 없었다. 횟수를 표시해주는 일반 악력기와 나무로 된 단순한 모양의 악력기였는데, 그 나무 악력기가 장력이 세다고 추천해줬다. 그걸 사와서 자주 쥐었는데, 오른손으로는 쉽게 여러번 쥘 수 있었지만, 왼손으로는 한 번 쥐어서 두 손잡이를 마주치게 하는 것(영상에서는 이걸 클로즈한다고 표현하더라.)조차 안 되었다. 그 당시 같이 살던 선배가 그 모습을 보고 비웃으며 니 왼손은 니 손 아니냐고? 왜 그렇게 힘을 안 키웠냐고 막 뭐라고 했었다. 그 나무 악력기가 내가 처음으로 구매한 악력기였고, 그때부터 그걸로 꾸준히 노력해서 점점 왼손 악력을 길렀다. 어느 순간 처음으로 왼손으로도 손잡이를 마주치는 것이 가능해졌고, 이후 그 횟수가 늘었다.

두 번째 악력기를 산 것은 몇 년 전이었다. 우연히 레인보우 악력기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단계별로 색이 다른 악력기를 정복해나간다는 컨셉이 재미있어서 알아보았는데, 아무 생각없이 나 정도면 두 번째 단계는 쉽게 하겠지라고 생각해서 두 번째 단계인 파랑색을 주문했다. 받아보니 웬걸. 오른손으로도 손잡이 마주침을 할 수 없었다. 젖먹던 힘까지 다 이를 악물고 힘을 써서 정말 종이 한 장 차이로 느껴질만큼의 틈 밖에 없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간 했는데 마주쳐지지가 않았다. 왼손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이건 처음 나무 악력기를 샀을 때보다 더 처참한 상황이었다. 다시 악력기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교통사고 이후 근육이 싹 빠지고 나서 운동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근력을 잃어버리고 운동에 흥미도 잃었다. 내가 좋아하는 운동을 할 수 없으니, 운동이 재미가 없었다. 그렇다고 아예 운동을 안 할수는 없으니 가벼운 운동 중심으로 조금씩 하고는 있었지만, 운동 능력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나는 늘 봄에 운동을 열심히 해서 여름에 몸에 붙는 옷을 입고 다니는데, 작년에 다시 운동을 시작한 후에도 코로나 때문에 외출도 자주 못하고, 여름 휴가도 갈 수 없는 상황이어서 그냥 운동도 대충하고 말았다.

올해도 그런 상황은 계속 이어졌다. 그냥 가끔 생각나면 운동을 했고, 늘 운동기구들이 눈에 보이니 한번씩 하나씩 이용해준다는 개념으로 해왔다. 그러다 아까 말한 그 악력 기르는 법 영상을 본 것이었다. 곧바로 잊고 있었던 레인보우 악력기를 꺼냈다. 내가 오른손으로 이걸 정복했던가 못 했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일단 오른손으로 해봤다. 어렵지 않게 손잡이를 마주치게 했고, 두세번 더 할 수도 있었다. 왼손으로도 조금만 더 하면 마주칠만큼 가까이 잡을 수 있었다.

온라인 쇼핑몰 앱을 열어서 레인보우 악력기를 검색했다. 첫번째 단계인 체리색과 세번째 단계인 오렌지 색을 구매했다. 오른손은 파랑색을 정복했으니 오렌지에 도전해야 하고, 왼손은 아직 파랑색이 안되니, 체리색으로 단련해서 다시 도전해야 할 상황이기 때문이다.

악력기를 주문하면서 권투 스트랩도 주문했다. 샌드백을 칠 때마다 글러브가 너무 커서 그 안에서 손이 겉도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손목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스트랩이 필요했다.

항상 운동에 재미가 붙을 때는 새로운 운동기구를 샀을 때였다. 악력기와 스트랩이 도착하고 나니 갑자기 운동이 재미있어졌다. 양 손에 붕대를 감고 나니 글러브를 끼지 않아도 샌드백을 칠만하다고 느꼈다. 붕대를 감은 채로 글러브를 끼니 훨씬 더 샌드백을 치는 감이 좋아졌다. 기분 탓인지 펑펑 하고 나는 소리도 더 좋은 것처럼 느껴졌다. 평소보다 훨씬 더 긴 시간 샌드백을 두들기며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고 펀치가 잘 적중되었을 때의 쾌감을 즐겼다. 글러브 속의 붕대가 땀에 젖을 때까지, 지쳐서 더는 주먹을 들어올릴 수 없을 때까지 즐기고 나서야 비로소 샌드백 두드리기를 멈췄다.

땀을 씻어내면서 오랜만에 참 기분이 좋았다. 다시 땀흘리는 기쁨과 근육통의 쾌감을 되찾았다. 당장 예전만큼 근육을 회복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올 여름에 몸에 붙는 옷을 입을 정도는 되겠지. 내년 여름에는 예전의 근육량을 회복하고 원하는 모든 운동을 다시 할 수 있도록 운동능력이 향상되기를 바라며 열심히 운동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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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6-05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운동이라고는 걷기밖에 안하는 사람이지만 이 글을 읽으니까 막 뭔가 있어보이는 느낌이랄까? 막 좋네요. ㅎㅎ 열심히 운동하셔서 올 여름에는 멋진 핏을 자랑하시길.... ^^

감은빛 2022-06-06 17:09   좋아요 0 | URL
바람돌이님. 걷기라도 꾸준히 하시는 게 중요하죠. 걸으시다가 가끔 아니 하루에 딱 한 번만 아주 짧은 거리를 뛰어보시는 것 추천합니다. 좀 더 가능하시면 짧게 뛰고 길게 걷기를 반복해도 좋구요.

아직 새로 산 운동기구들과 친해지는 단계라 의욕이 충만합니다. 적어도 두 달은 열심히 운동하게 될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북극곰 2022-06-06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런 기분 느껴보고 싶네요! 여기저기 몸이 망가지니 운동이 절실한데, 늘 실행은 어렵네요. 우리집 비쩍 마른 남자 고등학생이 집에서 할 수 있는 운동은 뭐가 있을까요? 나도 안하면서 아들 운동시키고 싶은 욕심. ㅋㅋ 근데 샌드백에 집에 있으신 거에요?!!

감은빛 2022-06-06 17:15   좋아요 0 | URL
북극곰님도 지금부터 조금씩 찬찬히 해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각자의 컨디션에 맞게 가볍게 시작하셔도 됩니다. 아들과 같이 해도 좋을 것 같아요.

집에서 할 수 있는 맨몸운동도 엄청나게 많구요. 덤벨이나 케틀벨 등 간단한 기구 한 두 가지만 있어도 운동 가능한 운동 종류는 수십가지로 늘어납니다. 우리 집에 모셔서 운동 알려드리고 싶네요. ㅎㅎ

샌드백을 작년 여름에 샀어요. 이거 왜 진작 안 샀을까 엄청 후회했어요. 스트레스가 많은 날 퇴근하자마자 두드리면 기분이 꽤 풀립니다. 땀을 씻고 나면 더 상쾌하니 기분이 좋아지구요. 설치는 문틈에 하면 되구요. 저는 베란다쪽 문에 설치했어요. 직장인의 필수품이라 생각합니다. ㅎㅎ
 

아쉬움


토요일 오전에 1시간짜리 강의를 맡았다. 내가 정말 잘 못하는 것 두 가지는 짧은 글을 쓰는 것과 짧은 강의를 하는 것이다. 긴 글을 얼마든지 쓸 수 있지만, 짧게 써달라고 하면 머리가 아파진다. 예전에 시민신문에 연재할 당시에는 정해진 원고 분량의 두 배 정도 글을 써놓고 분량에 맞게 줄이느라 엄청 힘들었다. 강의도 마찬가지다. 세시간이나 네시간짜리 강의는 얼마든지 환영하지만, 1시간짜리 강의는 너무 어렵다. 요청받은 주제를 제대로 떠들어보려면 적어도 서너시간은 필요한 내용이었다. 그래서 준비 과정에서 더 긴장되었고, 핵심 내용을 빼먹지 않으려고 미리 대본을 작성하기까지 했다. 만약 2시간짜리 강의였다면 이렇게까지 준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주 강의했던 주제였고, 2시간 안에 적절하게 시간 분배하며 떠들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열심히 준비한 것에 비해, 강의 참석자가 무척 적었다. 지금까지 강의했던 중에 제일 적었다. 두자리 수를 채우지 못 했으니. 게다가 온라인 강의라는 부분 역시 횟수가 늘어나도 자연스럽게 진행하지 못한 원인이 되면서 여러모로 아쉬움이 많이 남게 만드는 원인이었다. 강의를 열심히 잘 하고도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스스로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강의를 준비하면서 새로 논문도 많이 찾아보고, 해외 기사들도 많이 찾아봤는데, 그런 내용들을 다 제대로 전달하지도 못했다. 시간 압박 때문에 조금 더 얘기해주고 싶었던 걸 망설였고,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다음 내용으로 넘어갔다. 그런 틈새가 생기면서 매끄럽게 진행이 되지 않아서 조금 당황하게 되었고, 나도 모르게 단어가 떠오르지 않거나 발음이 부정확하게 되는 일이 벌어지고 그래서 또 다른 실수로 이어지는 등의 평소 나 답지 않은 사소한 실수들이 자꾸 나왔다.


나를 믿고 강의를 부탁한 분에게 실망을 안겨드린 것 같아서 좀 부끄러웠다. 아, 진짜 온라인 강의가 아니었다면 이 정도는 아니었을텐데. 강의 시간이 1시간만 더 있었어도 이보다는 훨씬 더 잘해을텐데. 아쉽지만 지나간 일을 되돌릴 수는 없는 일. 이번 상황을 잘 새겨서 다음에는 더 잘 할 수 있는 거름으로 만들어야지.


체스


작은 아이가 학교 방과후 활동으로 체스를 배우고 있다. 아이는 처음 배우는 체스가 재밌었는지, 내게 조잘조잘 이야기를 했다. 마침 아이들과 대형 마트 근처에 저녁을 먹으러 가던 참이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 나는 아이에게 체스 판을 사주고, 집으로 돌아오자 마자 같이 체스를 뒀다. 나는 체스를 한번도 둔 적이 없어서 두는 법을 몰랐기에 아이에게 배웠다. 다만 어려서부터 장기는 많이 뒀기 때문에 말의 움직임에 있어서는 익숙한 패턴들이 보였다.


체스 판을 구매한 날 작은 아이와 두 판을 뒀는데, 아이에게 체스 두는 법을 배운 내가 두 판을 내리 이겼다. 장기와 비슷한 면이 있어서 몇몇 말의 운용이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아이는 계속 체스를 배우고 익히면서 아빠를 이기는 것을 목표로 했다. 


어떤 부모들은 아이에게 일부러 져주기도 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어떤 일이든 아이에게 일부러 져주는 편은 아니다. 그게 달리기거나, 보드 게임이거나, 가위바위보라도 어떤 놀이라도 아이가 스스로 노력해서 이길 수 있게 노하우를 가르치는 편이지, 일부러 지는 편은 아니다. 체스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는 몇 주가 지나도록 계속 크게 지고 이기지 못하자 좀 기가 죽은 모습이었다. 게다가 작은 아이보다 더 체스를 못 두는 큰 아이와는 딱 한 판을 뒀는데, 승부욕이 강한 큰 아이가 졌다는 사실 때문에 눈물을 보이며 제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가 버렸다.


그리고 다시 한 주 뒤에 작은 아이와 한 판을 뒀는데, 이때는 내가 조금 정신이 산만해 실수를 했던 건지, 아니면 유난히 아이가 잘 뒀던 건지. 처음으로 무승부가 나왔다. 아이는 엄마에게 큰 소리로 자랑을 했다. 드디어 아빠랑 비겼다고. 다음에는 이기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 후 다시 몇 주가 지나는 동안 나는 다시 계속 연승을 이어가고 있다. 이제 다시 비기는 것도 허용하지 않고 있다. 


체스는 생각보다 룰이 복잡하더라. 아이가 아직 어리고 경험이 부족해서 쉽게 이기는 것이지, 결코 내가 잘 두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 나보다 조금 더 경험이 많은 사람을 만난다면 거의 이기지 못할 것이라 본다. 나는 작은 아이에게 장기를 가르쳐보고 싶었다. 장기라면 훨씬 더 재밌게 같이 놀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이는 싫다고 거절했다. 음. 만약 아이가 호기심을 가진다면 우리나라 장기에 그치지 않고, 중국 장기(샹치)와 일본 장기(쇼기)까지 같이 배워가며 놀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져봤는데, 아이는 응하지 않았다. 


뭐 아이가 싫은 걸 억지로 시킬 수는 없는 일. 그나마 아이가 체스에 관심을 가져서 같이 놀 수 있는 것이 내겐 큰 선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 이제와서 새로 배울 것이 많은 것이 부담스러워 그런 것인지 몰라도 체스를 막 잘 두고 싶다는 생각이 그닥 들지는 않는다.


그래서 예전에 봤던 [퀸스 갬빗] 드라마를 다시 보면서 흥미를 가질 수 있으려나 생각을 해봤다. 책도 사려고 했는데, 몇몇 알라딘 이웃 분들의 평을 보니 드라마와 거의 다르지 않다는 내용이 있어서 책을 살지 말지 조금 망설여진다. 그리고 사놓고 일지 않았던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을 발견했다. [체스 이야기]를 읽지 않고 책장 어딘가 방치해두고 있었더라.





























일단 [퀸스 갬빛] 드라마를 다시 보기 시작한 것은 성공이었다. 처음 봤을 때에도 여주인공을 맡은 안야 테일러 조이의 연기에 푹 빠져서 봤던 기억이 나는데, 이번에도 연기력 뿐 아니라 연출과 의상, 영상미 까지 뭐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잘 만든 드라마라고 느끼며 빠져들었다. 아쉬운 건 체스를 두는 내용이 자세히 묘사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긴 [신의 한 수]도 소재만 바둑일 뿐 바둑을 두는 장면은 전혀 의미가 없었지. 원작이 일본 만화라고 알고 있는 [3월의 라이온]은 어쩌다 실사판으로 대충 봤는데, 주인공들이 쇼기를 두는 장면이 그래도 비중이 조금 있는 편이라고 느꼈다. 특히 우리나라 장기와는 전혀 다른 면이 많아서 호기심이 많이 생겼고, 두는 법을 따로 찾아보고 우리 장기와 비교해보는 재미가 있었다.


만약 작은 아이가 이대로 계속 체스에 관심을 유지하고 조금씩 실력이 늘어간다면 나 역시 더 실력을 늘리기 위한 노력을 같이 할 수 있을텐데, 과연 아이가 그럴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어쩌면 이미 관심이 다른 것으로 옮겨가는 것은 아닌가 싶다. 


운동


사실 아이들과 함께 해보고 싶은 건 운동이었다. 예전부터 종목에 관계없이 뭐든 아이들과 몸을 움직이며 노는 것이 좋았다. 아이들은 어렸을 때는 나를 잘 따랐기에 배드민턴도 같이 치고, 쉬운 코스로 등산도 종종 다니고, 가볍게 축구도 하곤 했다. 큰 아이는 애들 엄마의 영향으로 동네 여자 축구단에 가볍게 참여하기도 했다. 사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내 손으로 아이들에게 태권도, 권투, 격투기 등을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도 했는데, 그렇게 힘들게 몸을 써야하는 무술을 부모가 가르치는 일은 쉽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큰 아이는 나중에 태권도 도장을 다니기도 했는데, 시범 경기를 보러 갔다가 이 아이는 태권도에 참 맞지 않구나 하고 깨달았다. 본인의 흥미와 용기가 따라주지 않는다면 쉽지 않다고 느꼈다. 인도 영화 [당갈]을 작은 아이와 같이 보면서 아빠랑 같이 레슬링을 배워보면 어떠냐고 여러 번 물어봤는데 아이들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예전에는 가끔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운동을 할 때 아이들이 내 철봉에 매달려 놀거나 아령이나 케틀벨을 들어보려고 용을 쓰기도 했다. 물론 아이들이 어렸을 때였기 때문에 꿈쩍도 하지 않을만한 무게였고, 철봉 역시 놀이기구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아빠와 같이 운동할 수 있도록 운동에, 아니 가볍게 몸을 움직이는 정도의 신체활동에라도 관심을 가져주면 참 좋겠다는 내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며칠 전 저녁을 먹고 작은 아이와 공원 산책을 나갔다가, 야외 농구 코트에서 농구 연습을 하고 있는 한 가족을 발견했다. 얼핏 보았던 거라 나이를 장담할 수는 없지만, 부부는 모두 30대 초중반으로 보였다. 아이들은 이제 겨우 대여섯살 수준이었다. 그 집 작은 아이는 아직 어려 그 큰 농구공을 어쩌지 못했지만, 큰 아이는 어린 나이에도 큰 농구공을 튕기며 드리블을 했다. 수비수를 등지고 드리블하는 모습이 엄마 아빠가 연습하는 장면을 잘 보고 따라하는 것 같았다. 그 집 아빠는 키와 몸매를 보아 기본적으로 운동을 좋아하고 운동 신경이 좋다고 느꼈다. 농구 실력도 제법 좋아보였다. 그리고 엄마는 실력은 뭐라 말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래서 배운지 그리 오래된 것 같지 않아 보였지만, 움직이는 모습은 무척 열성적으로 보여서 부러웠다. 


당연히 거절당할 줄 알았지만, 같이 걷고 있던 작은 아이에게 아빠랑 같이 농구하자고 졸라봤는데, 아이는 전혀 흥미를 갖지 않았다. 작년에 학교에서 농구를 접했던 큰 아이는 당시에 조금 농구에 흥미를 가졌었는데, 그때는 내가 농구를 같이 할 짬을 전혀 내지 못했었다. 코로나 때문에 농구할 수 있는 공간도 찾기가 쉽지 않았었다. 다시 큰 아이를 꼬셔봐야겠다. 과연 넘어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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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adhi(眞我) 2022-05-14 13: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체스이야기」 정말 좋았어요. 이 책에 실린 다른 단편도 좋더라구요. 퀸즈 갬빗, 저는 아역 연기에 반했어요. 큰 인물 되겠다 싶어요.
이제 늙어서 그런가 우리 남편 오랜만에 농구하러 가서(저는 근처에서 책 읽고)
힘들어서 헉헉대더라구요. 같이 뛰던 또다른 아재는 펄펄 나는데... 제가 마구마구 놀렸더랬죠. 가끔 남편이랑 같이 농구하기도 했는데.

감은빛 2022-05-20 19:26   좋아요 1 | URL
진아님. 남편이랑 같이 농구하러 가신다니! 멋져요!
저도 아마 힘들어서 헉헉거리겠죠. 연식이 연식이다보니. ㅎㅎ
그래도 농구하러 가는 남편님 대단하세요!

찔끔찔끔 읽는데다 다른 책들도 역시 조금씩 읽다보니 아직 다 못 읽었어요.
뒤에 실린 다른 단편까지 얼른 읽어야겠네요.

희선 2022-05-19 23: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체스 하나도 모릅니다 체스뿐 아니라 장기 바둑도... 작은따님과 함께 체스를 두셔서 즐겁겠네요 언젠가 작은따님이 감은빛 님을 이기면 무척 기뻐하겠습니다 감은빛 님은 따님과 함께 운동하고 싶으시군요 뭐든 함께 하면 좋겠네요


희선

감은빛 2022-05-20 19:28   좋아요 1 | URL
희선님. 체스나 장기 한번 배워보시면 정말 재미있어요!
물론 사람마다 흥미를 느끼는 점이 다르니 아닐 수도 있겠지만요.
저는 아이들과 등산을 가거나 운동하는 게 좋은데,
어릴 때 잘 따라다니던 아이들이 이젠 좀 자랐다고 안 따라다녀서 서운해요. ㅎㅎ

얄라알라 2022-05-23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온라인으로 60분 강의에 다 담아내실 수 없는 풍부한 내용을 전달하시지 못해 많이 아쉬우셨겠지만 곧 다른 기회로 청중 더 많이 만나서 오프 강의 하시겠죠!! 화이팅하시어요. 감은빛님
 

5월이구나


길을 걷는데, 어디선가 맹렬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얼마나 처절하게 울던지 멀리서도 길을 가던 사람들 대부분이 발을 멈추고 울음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 남자가 아기를 안고 있었다. 개월수까지 짐작할 수는 없지만, 대략 두 돌 가량 되지 않았을까 싶은 아기. 옷을 보고 여자아이일 거라고 짐작했다. 아빠는 아이를 달래려 애쓰지 않고 그냥 걷고 있었는데, 아이는 목청을 높여 점점 더 심하게 울었다. 그 몇 발짝 뒤로 엄마로 보이는 여성이 고개를 뒤로 돌린 채, 손을 뒤로 뻗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그 몇 발짝 뒤에 대여섯살쯤으로 보이는 남자 아이가 킥보드를 밀고 엄마 쪽을 향하고 있었다. 짧은 순간 그 네 가족의 모습이 마치 사진처럼 내 머리 속에 저장되었다. 그 가족을 스쳐지나가면서 보니 아빠도, 엄마도, 오빠도 모두 입을 꾹 다물고 굳은 표정으로 이동했다. 오직 아빠 팔에 안긴 아기만이 목이 터져라 울고 있었다.


대개의 경우 아직 말을 할 수 없는 아기의 울음은 생존을 위한 것이다. 혼자 아기를 돌보던 밤, 이유도 모르고 계속 울기만 하는 아기를 달래려 애썼던 밤, 아기가 말만 할 줄 알아도 얼마나 좋을까 생각을 하곤 했다. 분명 기저귀도 갈았고, 분유도 먹였고, 트림도 시켰는데, 안아서 달래도 울음을 그치지 않는 아기를 보며 아빠로서 마음이 너무 아팠다.


말이 통하는 아기가 우는 이유는 조금 다를 것이다. 그건 생존의 문제라기 보다는 고집의 문제라 여겨진다. 내 경우에는 이럴 때는 인내심의 한계까지는 어떻게든 달래고 참지만, 한계에 닿으면 단호하게 대했던 것 같다. 아까 길에서 마주친 가족이 했듯이 더는 달래려 애쓰지 않고, 들어주지 않고, 울던 말던 그냥 무시하는 것. 그럼 아이는 지칠 때까지 울다가 스스로 지쳐 울기를 포기한다. 그걸 옆에서 지켜보는 일은 무척 마음 아픈 일이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물론 아이마다 상황마다 대처는 다를 수 있겠지만, 당시의 나는 그랬다. 최후의 방법이었다. 다른 오만가지 방법을 다 써봐도 안 되는 경우, 어쩔 수 없었다. 아이는 경험을 쌓는다. 다음에 같은 일이 반복되면 처음보다는 훨씬 더 일찍 울음을 그친다. 아무리 목이 터져라 울어도 소용없다는 걸 한 번 겪었기 때문이다.


길에서 우는 아기를 보고 이제 사춘기를 벗어나는 아이와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드는 아이가 고만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큰 아이는 뭐든 처음 경험이라 다 서투르고 힘들었다. 하지만 나중에 둘째를 키우면서 훨씬 수월했던 거였구나 하고 깨달았다. 작은 아이는 고집이 너무 쎘다. 한번 울면 울음을 그칠 줄을 몰랐다. 애들 엄마가 장기 해외 출장을 가고 없었던 기간 동안 매일 밤마다 작은 아이는 잠투정을 심하게 했다. 그게 잠투정이었다는 건 한참 후에야 짐작했다. 어쨌든 당시로서는 아무 이유도 모르고 애가 혹시 어디 아픈가 싶어서 걱정도 많이 했다. 다음날 아침 반차를 쓰고 병원에 데려갔다가 아무 이상이 없다는 의사의 말을 들었는데, 그날 밤에 또 그렇게 집이 떠나가라 동네가 떠나가라 우는 모습을 보고는 다시 어디가 아프지 않으면 이렇게 울까 생각하기도 했다. 목이 터져라 우는 아이 때문에 내가 넋이 나가 있을 때, 큰 아이는 두 손으로 귀를 막고 혼자 놀던 장난감을 치우고, 양치하고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내 곁으로 와 내 다리를 안았다. 큰 아이가 무척 대견했지만, 한 편으로 미안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울음을 그칠 생각이 없는 작은 아이도 미우면서도 미안했다. 


당시로서는 끔찍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빨리 아이들을 재우고 천기저귀를 빨고 삶아야 하고, 분유병도 씻어서 삶아야 하고, 어린이집에 가져갈 물품들도 챙겨야 하고 할 일도 많았는데, 아이를 재우는데 그렇게 한 두 시간을 써버리면 다른 일을 할 체력도 의욕도 사라진다. 그래도 안 할 수는 없으니 억지로 몸을 움직이고 새벽 늦게 기절하듯이 뻗었다가 다시 피로가 덜 풀린 상태로 아이 둘을 깨워서 준비를 시켜야 했다.


그런데 이렇게 아이들이 크고 난 후엔 문득 그리운 시간처럼 느껴진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기에 그립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겠지. 만약 다시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면 여전히 끔찍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을지도 모른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지나갔다. 한때 같은 단체에 있었던 후배 활동가 한 명이 sns에 전쟁 같은 한 주를 지냈다고 적었더라. 특히 어버이날은 하루 밖에 없는데, 부모님 댁은 두 곳이라 어쩔수 없이 이번에도 지는 쪽을 선택했다고 적은 부분을 읽으면서 여전히 여성이 약자일 수 밖에 없는 구조를 체감했다. 그 친구는 당당하고 똑똑한 활동가였다. 그런 친구도 결국 여성이라는 한계를 깨닫고 올해에도 지는 쪽을 선택했다고 적었다. 여기서 약간 이혼한 사람으로서의 마음의 여유를 느꼈다. 나 역시도 아직 부부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면 여기서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몰론 내 경우에는 부모님이 아주 멀리 계시니 명절이나 연휴가 아니면 방문 자체를 생각하지 못하니 양가 부모님이 모두 서울에 있는 그 친구의 경우와는 다르긴 하지만 말이다.


이혼한 후로 해마다 5월이 되면 확실히 마음이 가벼움을 느낀다. 더는 처가댁에는 방문하지 않아도 되고, 우리 집은 너무 멀리 있어서 방문을 못한다고 핑계를 댈 수 있으니, 몸이 편했고, 몸이 편하니 마음도 편했다. 대신 아이들이 없는 우리 집은 너무 쓸쓸했다.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는 법. 혼자라서 편한 것이 있다면 혼자라서 힘든 일도 있는 법이다.


아, 대통령이 바뀌는 날이구나. 5월도 금방 휙 하고 지나가 버리겠지. 내일이면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두 활동가의 단식이 30일차가 된다. 오늘은 저녁 문화제 이후 철야 농성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더 늦기 전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가 오늘은 늦게까지 할 일이 많았다는 걸 뒤늦게 생각해낸다. 에휴! 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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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다가 문득


시를 즐겨 읽는 편은 아니지만, 꾸준히 읽기는 한다. 시를 쓸 줄 모르지만, 꾸준히 읽기는 한다. 시를 음미할 줄 모르지만, 꾸준히 읽기는 한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아는 시인들이 제법 있어서 그 분들이 새 시집을 내면 예의상 읽어줘야 할 것 같아서는 아니다. 새 시집 소식을 접하면 궁금해서 사서 읽는 편이다. 소식을 접하지 못하면 몰라서 못 읽겠지. 나중에 우연히 시집을 발견하고 어! 이런 시집도 냈어? 왜 몰랐을까? 라고 생각하겠지.


요즘은 시 공부를 하는 아이 덕분에 예전보다 훨씬 더 다양한 시집을 구매한다. 아이는 종종 학교 과제를 이유로 서너권씩 시집을 사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면 나는 당연히 사줄수 밖에 없겠지. 시집 제목을 부르라고 하고 주문한다. 그리고 시집들이 도착하면 아이보다 먼저 주르륵 훑어보고, 각 시집마다 한 두 개 가량 마음에 드는 시를 여러 차례 읽어 본 후에 아이에게 준다. 

















이번에 아이가 사달라고 한 시집들 중 한 권이다. 첫 번째 시와 두 번째 시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예전에 내가 출판사에 있을 때, 우리 출판사에서 낸 시집은 전부 표제작을 시집의 제목으로 사용했다. 그게 옛날 방식이고 이젠 그러지 않는 방식이 점점 늘어나는 것인지 몰라도 이 시집의 경우 저 제목 [폭설이었다. 그다음은] 이라는 시는 이 시집에 없었다. 즉 표제작을 제목으로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이 제목은 이 시집에 실린 두 번째 시의 첫 부분이었다. 암튼 앞의 두 시가 워낙 인상적이어서 주르륵 넘기며 몇 개의 시를 빠르게 훑어보고 아이에게 넘겼다. 나중에 시간이 날 때마다 야금야금 더 읽어야지.


시집 제목과 표제작 이야기를 꺼낸 김에 언젠가 이 서재에 쓴 적이 있는 이야기를 다시 재활용해보자. 박영희 시인의 시집 [팽이는 서고 싶다]의 경우 표제작을 어떤 시로 정하느냐에 대해 시인과 출판사의 의견이 갈린 경우인데, 나중에 박영희 시인은 이를 두고 많이 아쉬웠다고 말씀하셨다. 처음 본인이 표제작으로 생각해둔 시는 오래 전에 이 서재에 소개한 적이 있는 [아내의 브레지어]였다. 제목이 아내의 속옷이라서 출판사에서 반대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출판사는 다른 제목(출간된 시집의 제목)의 시를 표제작으로 고집했고, 출판사의 고집을 꺾지 못한 시인이 그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서재에 시를 소개하고, 그 시에 대한 짧은 글을 엮은 글을 열개 남짓 적었었다. 더 부지런했다면 계속 적었을텐데, 바쁘다는 핑계로 결국 조금밖에 못 적었네. 암튼 그 열개 가량의 글 중에서 알라딘 이웃들이 가장 뜨거운 관심과 폭발적인 반응을 보여준 글이 바로 저 [아내의 브레지어]라는 시를 소개한 글이었다. 박영희 시인은 아내의 브레지어를 빨았던 이야기를 시로 적었지만, 나는 아내의 브레지어 뿐 아니라 팬티 그리고 면생리대 까지 빨곤 했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적었더니 여성 이웃분들께서 한마디씩 적어주셨던 것이다.


비슷한 소재로 그 다음으로 많은 알라딘 이웃들이 관심을 주신 글은 서정홍 시인의 [작업복 팬티]라는 시를 소개하고 과거 내 작업복 팬티 이야기와 군대에서 훈련 나갔을 때 팬티가 모자라서 겪었던 이야기를 쓴 것이었다. 


암튼 이 글을 쓰면서 한동안 잊고 있었던 저 '시와 함께 읽는 추억' 카테고리를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여유가 생긴다면 또 다른 시들과 그에 얽힌 이야기들을 풀어내 봐야지.



밥 맛 떨어지게 만드는 식당


저녁 8시에 온라인 회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집에서 접속하면 주위가 산만해 집중이 잘 되지 않아서 야근을 하면서 사무실에서 회의 시간을 기다렸다. 7시가 되어 배가 고파져서 회의 전까지 간단히 뭘 먹고 들어와야지 생각했는데, 배는 고팠지만, 입맛은 별로 없어서 딱히 뭘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아무 생각없이 사무실 근처 김밥 집에 들어갔다. 김밥과 라면을 주문했다. 평소 점심 때는 빈 자리가 없고, 가끔 저녁때 지나가면서 보면 김밥을 포장해가는 손님들로 꽉 차곤 했는데, 오늘 따라 웬인일지 식당에 손님이 거의 없었다. 나처럼 김밥과 라면을 드시고 계신 여성 한 분 밖에 손님이 없었다. 김밥을 포장하는 손님은 끊길 듯 이어지는 듯 했으나, 매장의 빈 자리가 많은 건 유독 눈에 띄었다. 그런데 음식이 나와서 먹기 시작할 무렵 주방 쪽 맨 앞자리에 삐딱한 자세로 앉은, 방금까지 자전거 라이딩을 하다 오신 듯한 민망한 옷차림의 남성이 눈에 띄었다. 그는 주방에 계신 제일 연세가 많은 여성 분에게 반말로 시비를 거는 것 같았다. 투정을 부리는 것 같기도 했고, 짜증을 내는 것 같기도 했다. 암튼 뭔가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내면서 뭐라고 하고 있었다. 대화가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를 보아하는 그 두 사람이 이 가게 사장 부부인 것처럼 보였다. 오늘 따라 저녁 시간인데도 유난히 손님이 없어서 그렇게 짜증을 내고 있는 건가 싶었다. 


그런데 그 짜증인지, 투정인지, 시비인지 모를 남자의 기분 나쁜 태도가 너무 거슬렸다. 손님을 앞에 두고 대체 뭐하는 짓인거지. 나는 음식을 입에 집어넣다가 기분이 나빠져서 탁 하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마음 같아서는 확 젓가락을 던져서 그 남자 입을 다물게 만들고 싶었으나 사회적 체면을 생각해서 간신히 참았다. 빨리 먹고 나가야지 싶었다. 


그 남자는 쉴새없이 입을 놀리며 계속 신경 쓰이게 만들었고, 나는 옆 테이블에서 나와 같은 메뉴를 드시고 계신 여자 분은 어떤지 눈치를 살폈다. 혹시 나처럼 기분 나빠하시는 눈치가 보이면 한 마디 할까 싶었는데, 그 분은 묵묵히 식사를 하고 계실 뿐, 불편해 하는 낌새가 보이지는 않았다.


한참 있다가 그 남자가 뭔가 명령조로 언성을 높였다. 주방에 계신 두 명 중에 한 분과는 아까부터 계속 반말로 대화하고 있었고, 다른 한 분은 어쩔줄 몰라하면서 가만히 계셨다. 그 남자는 같은 명령을 반복하면서 조금씩 언성을 높였고, 급기야 시키는대로 하지 않으면 때리겠다는 뉘앙스의 말을 던졌다.(정확한 표현이 기억나지 않음)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화가 났다. 세상에서 제일 못난 인간이 약자를 괴롭히는 인간이고, 약자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인간이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 남자를 빤히 쳐다봤다. 그는 삐딱한 자세로 건들건들 몸을 움직이고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이내 고개를 돌려 내 눈길을 피했다. 뭔가 행동을 취해야 하는 건가 생각이 들었는데, 그 말을 들었던 여성 분은 딱히 겁먹거나 한 눈치는 아니었다. 그게 장난인지 그냥 입버릇 같은 건지 모르겠지만,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는 분위기는 아니건가 싶었다.


그 남자는 이후에도 계속 건들거리며 이런 저런 말들을 내뱉았고, 나는 계속 신경이 쓰여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 건지도 모를 정도로 기분 나쁜 상태로 억지로 그릇을 비웠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서 계산을 하면서 마지막으로 남자를 노려봤다. 그는 시선을 주방으로 향한 채로 계속 건들거리고 있었다.


8시에 시작한 온라인 회의는 9시 반이 되기 전에 끝났다. 나는 일을 마무리하고 이 글을 후다닥 두드렸다. 기분 전환이 필요하다. 얼른 퇴근하고 집에 가서 맛있는 걸 먹으며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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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2-05-05 0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학교 다닐 때 교과서에 나온 시만 알았어요 다른 시나 책은 거의 안 봤네요 감은빛 님 따님은 벌써 글을 쓰고 싶어하고 시나 다른 책을 봐서 좋겠습니다 어릴 때 자신이 하고 싶은 걸 찾아서 부럽기도 합니다 예전에도 이 말 했던 것 같네요

식당 사람이 손님이 있는 데서 안 좋은 말을 하다니, 그런 건 예의가 아닐 듯하네요 거기에서 밥 먹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곳은 안 좋은 식당이군요 집에 가시고는 기분이 나아졌기를 바랍니다


희선

감은빛 2022-05-09 19:26   좋아요 1 | URL
이 글에도 썼지만, 시를 잘 모릅니다. 즐겨 읽는 편도 아니예요.
그런데 계속 손에서 놓지 못하고 꾸준히 읽기는 하네요.
뭔가 지적 허영심을 채우려는 간사한 의도가 저도 모르게 제 몸을 움직이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젠 그 식당 안 가려구요.
같이 일하는 후배 활동가에게도 얘기했더니,
그 친구도 다음날부터 다른 식당을 간다고 하더라구요.
이렇게 단골이 하나 둘 떨어져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 분이 알아야 할텐데요.

바람돌이 2022-05-05 0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를 공부하는 딸 좋네요. 부러워요. ㅎㅎ
가끔 저렇게 가까운 사람을 함부로 대하면서 그걸 폭력으로 인지조차 못하는 사람을 보면 진짜 화나요. 그러면서 강해보이는 사람한테는 또 비겁해지겠죠.
어째쓴 집에 가셔서는 맛난것도 드시고 책도 영화도 보셨길 바랍니다.

감은빛 2022-05-09 19:29   좋아요 0 | URL
바람돌이님. 그날 엄청 과식하고 책 읽다가 잠들었어요.
예전에는 가끔 제가 아는 시인들의 시집을 중심으로 시를 읽었는데,
아이 덕분에 굉장히 폭 넓은 시인들의 시집을 읽어보는 계기가 되었어요.
이런 것도 재미구나 싶긴 합니다.

서니데이 2022-05-05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해보니까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시집은 거의 읽지 않는 편인 것 같아요.
그러니 학교 과제 등 그 시기에 많이 읽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오늘은 어린이날입니다.
즐거운 휴일 보내시고, 좋은 시간 되세요.^^

감은빛 2022-05-09 19:29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어린이날 잘 보내셨나요?
오늘은 또 한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이네요.
일기예보 느낌이 드는 서니데이님의 글을 찾으러 가봐야겠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