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발머리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키가 크고 덩치가 큰 남자 영어 선생님이 계셨는데, 머리 스타일이 단발머리였다. 하얀 얼굴에 단발머리. 그래서 그 분 별명은 ‘앙드레‘였다. 앙드레 김이라는 유명한 디자이너의 머리 스타일과 유사해서 붙여진 별명이 아니었을까 싶다. 머리를 더 길게 길러서 묶고 다니거나 늘어뜨리고 다니는 장발은 까까머리 남자 고등학생들에게 원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락을 즐겨 들었고, 노래 실력 때문에 락커를 꿈꾸지는 못했지만, 락밴드가 등장하는 이야기를 끄적거리곤 했던 나는 대학생이 되면 머리칼을 장발로 길러보려고 생각하곤 했다. 장발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이 있었던 나는 뉴스 자료화면 같은 곳에서 볼 수 있는 70년대 장발 단속 장면 같은 것이 궁금했다. 그 시절은 어떻게 저렇게 머리칼을 기른 남자들이 많았을까? 어떤 사회 분위기가 장발을 단속하게 만들었을까?
지금 단발머리를 주제로 이 글을 두드리는 건 한 3주전에 미용실에서 내 머리칼을 단발머리로 잘랐기 때문이다. 대학시절에도 또 30대 중반 무렵에도 머리칼을 길러보려고 하다가 중간에 흔히 말하는 거지구간을 참지 못하고 늘 실패했었는데, 참 어이없게도 교통사고를 당하고 일을 쉬는 동안 머리칼을 자르지 않았더니 장발이 되어 있었다. 그대로 계속 자르지 않고 기른 시간이 대략 1년 10개월쯤 되니 머리 스타일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중간에 한번도 다듬은 적이 없어서 머리카락 길이가 들쭉날쭉 엉망이었다. 그래도 평소엔 늘 묶고 다녀서 별로 상관이 없긴 했는데, 이젠 묶어도 끝 부분이 등 윗부분에 늘어질 정도로 길어서 내가 생각했던 포니테일 스타일의 장점을 별로 느낄 수가 없었다. 머리를 묶지 않고 다니기엔 너무 지저분해 보였다. 게다가 날이 점점 더워지면서 긴 머리가 답답하게 여겨졌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짧은 머리 스타일로 돌아가기도 싫었다.
어쨌거나 머리칼을 한번 자르자는 생각을 몇 주째 하고 있다가 거의 2년 전에 마지막으로 들렀던 단골 미용실에 갔다. 주인장인 미용사는 처음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가 내가 안내받은 의자에 앉고 나서야 뒤늦게 알아보고 손뼉을 쳤다. 어떻게 자르고 싶냐는 말에 어깨 언저리쯤의 길이로 해달라고 말했다. 그게 단발머리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몰랐다. 지금 제일 긴 머리칼이 가슴까지 내려오고, 제일 짧은 머리칼이 어깨쯤에 걸리니까 그렇게 길이를 맞추면 좋지 않을까 라고 단순하게 생각해서 한 말이었다.
처음으로 머리칼을 길러본 것이었고, 어떻게 머리 스타일을 만들고 꾸미는 지에 대한 고민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그 미용사는 어쨌든 솜씨가 좋은 분이었고, 내가 예상한 것보다 짧은 시간에 가위질을 마쳤다. 안경을 쓰고 보니 내 생각보다 머리칼이 더 짧다고 느껴졌다. 그 모습이 너무 어색했다. 그리고 이젠 예전처럼 머리를 감겨주지 않았다. 딸들을 데리고 같이 가면 나는 머리를 감겨주지만, 딸들은 감겨주지 않아서 예상은 했었다. 이젠 나도 미용실에서 머리를 감겨주지 않겠구나.
집에 돌아와서 머리를 감는데, 약 한뼘 언저리 길이로 머리칼이 짧아졌을 뿐인데, 머리 감기가 엄청 수월하게 느껴졌다. 머리를 말리는 시간도 훨씬 줄어들었다. 이래서 단발머리를 좋아하는 여성들이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머리를 다 말리고 머리칼을 묶어봤는데, 너무 짧뚱하게 묶여서 뭔가 어색했다. 그리고 뒷머리 일부는 너무 짧아서 묶이지 않았다.
며칠간 이런저런 실험과 시도를 해보다가 그냥 머리칼을 묶지 않고 단발머리로 다니기로 했다. 처음에는 보는 사람들마다 다들 놀란 반응이었다. 긴 시간 쉬다가 복귀할 때 장발로 나타났을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다들 놀란 표정과 멈춘듯한 동작은 보여줬다. 누군가는 계속 주기적으로 놀래킨다고 말했고, 누군가는 잘 어울린다고 말했다. 미용사가 솜씨가 좋다고 칭찬한 사람도 있었다.
머리를 묶고 다닐 때는 그렇게 티가 많이 나지 않았던 흰머리가 상대적으로 훨씬 더 돋보이게 되어 나이들어 보인다는 단점이 생기기는 했지만, 처음 해보는 이 스타일이 나도 아주 싫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익숙해지고 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살면서 이 정도 길이의 머리 스타일을 한 경우는 맨처음 얘기한 고등학교 시절 영어 선생님과 원빈 밖에 보지 못한 것 같다. 원빈은 뭐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고, 그 선생님의 경우 내 편견 때문인지 몰라도 그다지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었다. 내 경우는 모르겠다. 내 지인들이니까 다들 내게 괜찮다. 잘 어울린다고 말해주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나는 객관적인 판단을 할 수 없으니 그냥 다시 머리칼이 더 길어서 안정적으로 묶고 다닐 수 있을때까지 이렇게 살아야지. 뭐 다른 방법이 없지 않은가. 누군가 농담으로 야한 생각을 많이 하면 머리칼이 잘 자란다는 말을 해줬다. 그렇다면 나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거라고 대꾸해줬다.
인라인 스케이트
아이들은 제법 규모가 큰 공원 옆에 살고 있다. 아이들을 만나러 갈 때마다 그 공원을 가로질러 가는데, 매번 시간대에 따라 다양한 사람들을 마주친다. 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편안하게 쉬러 온 사람들도 많더라. 아이들이 이 집으로 이사오고, 이 공원을 처음 걸었을 때 나는 아이들과 이 공원에서 자주 산책도 하고, 운동도 하고 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바쁘다고, 피곤하다고 여러 이유로 집에 머물기를 원했다. 이렇게 좋은 공원을 바로 앞에 두고 집에만 있는 건 나로서는 참기 힘든 상황이지만, 사춘기 딸들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엊그제 아이들을 보러 가는 길에 공원에서 작은 꼬마아이가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불안하게 비틀거리며 나를 향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대여섯살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은 아주 어린 여자아이였다. 아이가 내 바로 코 앞에서 비틀 넘어질 것 처럼 옆으로 기울어져서 나도 모르게 손이 나갔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빠르게 손을 다시 거둬들이며 살짝 아이를 지나쳐 걸었다. 아이는 정말 운이 좋게도 넘어지지 않고 쪼그리고 앉은 자세로 멈췄다. 아이의 손이나 팔을 잡아 넘어지지않게 부축하려던 내가 순간적으로 나가던 손을 다시 거둬들인 이유는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 아이의 부모가 함부로 자신의 아이에게 손을 댔다고 기분나빠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마도 여자아이여서 더 그런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입장을 바꿔서 만약 내 아이가 그렇게 어리고, 넘어져 다칠지도 모를 상황이었었는데, 알지도 못하는 중년 사내가 나타나 아이의 손이나 팔을 잡으면 과연 나는 기분이 나쁠것인가? 나는 곧바로 아니라고 생각했다. 고마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경험적으로 나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이 나처럼 고마워했다고 하더라도 정말 소수일지라도 이 일로 시비를 걸어올 사람은 분명 존재할 것이다. 혹시라도 그런 시비에 휘말리도 모른다는 생각이 아주 짧은 순간 뇌리를 스쳤고, 나는 손을 거둬들이고 부자연스런 동작으로 최대한 자연스러운 척 애쓰며 아이를 스쳐 지나갔다. 아이가 넘어지지 않고, 다치지 않았던 것은 정말 다행이었다. 만약 아이가 넘어져 다쳤다면 나는 죄책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아이를 지나쳐 공원을 걷는데 옛날 생각이 떠올랐다. 먼저 우리집 책장 위 구석에 먼지에 쌓인 인라인 스케이트 가방이 떠올랐고, 그걸 선물받은 시점이 떠오른 것이다.
내가 애들 엄마에게 호감이 있다고 용기내어 고백했던 시기에 그는 한창 인라인 스케이트 동호회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내게 인라인 스케이트를 사주었고, 데이트는 주로 공원에서 인라인을 타면서 했다. 그는 차근차근 쉽게 인라인 타는 법도 잘 가르쳐주었다. 그때까지 인라인은 커녕 롤러 스케이트조차 한번도 타본 적이 없었던 나는 빠르게 인라인을 배워 그와 함께 공원을 누비게 되었다.
당시 애들 엄마와 동호회 회원들이 주로 했던 컵들을 주욱 늘어놓고 그 컵들 사이로 이런저런 어려운 동작을 펼치며 빠르게 지나가는 것을 함께 할 정도는 되지 못했지만, 그냥 공원 안에서 이동하는 정도라면 어디라도 무리없이 갈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그렇게 연애하던 시절에는 열심히 인라인 스케이트를 탔었는데, 언제부터 그걸 전혀 타지 않게 되었을까?
결혼하고 큰 아이를 임신했을 때부터였던 것 같다. 아니, 생각해보니 큰 아이가 아직 어렸을 때 근처 공원에서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아이가 앉은 유모차를 몰고 놀았던 기억이 있다. 큰 아이가 좀 더 자라서 아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인라인 스케이트를 사주고 내가 잠깐 가르쳐줬던 기억도 났다. 아마 그게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지금 우리집에 처박혀서 먼지를 덮어쓰고 있는 그 인라인은 큰 아이가 아직 어렸을 때 탔던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 평생 타볼 일은 없을 것이다.
4년 하고도 몇 달전에 이 집으로 이사오기 직전에 이삿짐을 싸면서 역시나 책장 위 구석에서 저 인라인을 발견했을 때, 순간적으로 고민했다. 앞으로 저걸 탈 일이 있을까? 아마 없을거라고 결론 내렸고 그럼 버려야지 생각했지만, 차마 버리지 못했다. 아마 이 집에서 다른 집으로 이사간다고 해도 그 집에서도 역시 책장 위 구석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 같다.
다시 운동을 제대로 시작하면서 역대급 근육통에 시달리고 있다. 몸은 무겁지만 기분은 좋다. 얼른 집에 가서 샌드백부터 두들기고 다른 운동을 해야지. 오랜만에 불가리안 백을 들어볼까? 케틀벨 운동을 해볼까? 바벨을 들어볼까? 몸이 무거우니 가볍게 덤벨 운동으로 만족할까? 조금씩 다 해버릴까? 아마 그러면 내일 출근도 못하고 하루종일 누워있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내일은 중요한 일정이 있으니 가능한 한 가볍게 하는 걸로 생각하고 있어야지. 물론 그래놓고 순간적으로 흥이 오르면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