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다보다
일터는 건물 3층. 내 자리에선 왕복 5차선 도로를 오가는 차량들이 보인다. 건너편 인도를 걸어가는 사람들도 보인다. 지금은 폐업하고 문이 닫혀있지만, 한때는 문을 열어놓고, 가게 앞에 잡다한 물건들을 진열해두었던 잡화점도 보인다. 그리고 시선이 닿을듯 말듯 저 멀리 편의점도 볼 수 있다.
그날은 아마 더운 여름이었다. 아침부터 시청에서 회의를 하고, 구청과 세무서에 들러 각종 서류를 발급하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평소라면 헐렁한 반팔티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출근했겠지만, 그날처럼 공무원들과 회의를 하거나, 거래처를 방문하는 등 외부에서 공식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날에는 되도록 셔츠에 긴바지를 입는다. 오래전 여기가 아닌 다른 시에서 다른 분야에서 일할 때, 목이 늘어난 반팔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출근한 날, 갑자기 시청 문화국장이랑 면담이 잡혀 방문했다가 엄청나게 무시당한 일이 있었다. 물론 당시 나는 옷차림만 보고 날 무시했던 국장의 거만한 태도를 되갚아주었다. 문화재 관련 업무 파악이 채 되지 않았던 국장을 지적하며 부하직원들 앞에서 망신을 주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 가능하면 내 능력이 아닌 옷차림만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싶지 않아서, 평소에는 무척 자유로운 옷차림으로 출근하지만, 외부에 공적인 업무가 있는 날엔 꼭 평범한 직장인과 비슷한 느낌이 날만큼의 복장을 챙기려고 노력한다.
아, 그러니까 그날은 아침부터 오후까지 관공서 3곳을 오가며 진행하는 사업과 관련한 담당 공무원만 대여섯명 이상을 만났던 날이다. 오랜만에 꺼내입은 셔츠는 답답하고 불편했다. 긴바지 역시 갑갑했다. 겉으로는 공무원들에게 최대한 일 잘하는 스마트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려고 애쓰면서, 속으로는 후줄그레 한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으로 출근했던 어제를 떠올리며 빨리 오늘 하루가 아니 적어도 이 회의시간만이라도 지나가길 바라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들렀던 세무서에서 일터까지는 버스로 두 정거장 거리였다. 걸으면 대략 15분 걸릴 정도의 거리. 햇빛은 뜨거웠고, 가만히 서있어도 땀이 줄줄 흐를 정도였지만, 나는 습관적으로 그러니까 너무나도 당연히 그냥 사무실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한참 걷다가 땀에 젖어 몸에 붙은 셔츠 자락을 손가락으로 떼어내며, 손등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다가 막 옆을 지나가는 버스를 보았다. 그 안에 타고 있는 한 여학생의 얼굴도. 저 학생은 시원하게 에어컨 바람을 쐬고 있겠지. 비록 학교를 나와 버스정류장까지 가는 동안 덥고 땀이 엄청 났겠지만, 버스를 타고 잠시 앉아 있는 동안 시원한 에어컨 바람 덕분에 그 땀이 다 날아갔을거야. 그래서 지금 쾌적한 버스 안에 앉아 이렇게 땀을 닦으며 땡볕에 서있는 나를 보고 지나가고 있는 거야. 무심코 저 멀리 내가 걸어서 지나온 버스 정류장을 돌아보았다. 나는 왜 저기서 버스를 탈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가? 이 더운 날에 말이다.
그렇다고 다시 저기로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방금 버스가 지나갔다. 다음 버스가 오려면 적어도 10분 이상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 시간이면 사무실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다시 가슴에 달라붙은 셔츠 자락을 떼어내며 걸었다. 목이 말랐다. 시원한 음료수를 벌컥벌컥 마시고 싶었다. 머리로는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편의점에 들어가 냉장고 문을 열고 차가운 음료수 병을 꺼내 계산도 하기 전에 벌컥벌컥 마시는 나를 상상하면서 걸었다.
두 통의 업무 전화를 받아 대화하면서 걸었더니 금방 일터 근처에 도착했다. 횡단보도를 건너면 되는데, 그 앞에 편의점이 보였다. 그래 음료수를 마시고 싶었지.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잠시 멈춰섰다가 냉장고를 향했고, 상상에서처럼 계산도 하기전에 한 병을 다 마셔버리고 싶었지만, 습관적으로 음료수 병을 계산대 앞에 놓았다. 가만, 가방에 담배가 있었던가? 없었던 것 같은데, 사무실에는? 어제 저녁 야근하다가 마지막 담배 한 개비를 피우고 담배갑을 구겨서 휴지통에 넣었던 장면이 영화 장면처럼 머릿속에 떠올랐다.
서쪽하늘에 빨갛게 석양이 타오르고, 나는 옥상 난간에 한 팔을 얹은채 마치 멋진 영화배우처럼 담배를 물었다가 길게 연기를 내뿜었다. 아무도 보는 이가 없었지만, 왼손으로 옆머리를 슬쩍 넘기며 고개를 한번 치켜드는 듯한 동작을 잊지 않았다. 아마 누군가 아니 어느 여성이 보았다면 멋있다고 생각했겠지? 라고 생각하며 다시 멋있게 담배를 입으로 가져갔던 장면이 머리속에서 상영되었다.
"천팔백원입니다."
순간 밝고 상쾌한 느낌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유니폼 조끼를 입고 모자를 쓴 여성이 계산대에 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마치 얼음이 된 것처럼 잠시 멈춰있던 나는 담배를 사려고 했던 사실을 겨우 떠올리며, 무의식적으로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입술에 갖다 대었다.
"저기"
음, 내가 피우던 담배 이름이 뭐였더라? 요즘 담배는 이름을 외우기가 너무 어렵다. 처음 담배를 배웠던 시절에는 훨씬 쉬운 이름이었다. 청자, 백자, 팔팔, 도라지 얼마나 외우기 쉬운가? 아니 외울 필요 자체가 없는 이름이다. 하지만 지금은 뭐라더라? 보헴 시가 쿠...... 쿠 머시기였는데, 쿠바? 그래 이름에 쿠바가 들어갔던 것 같기도 하다. 근데 그게 다가 아니었는데, 아씨! 모르겠다.
나는 빠르게 눈동자를 굴리며 아까부터 나를 쳐다보는 여성의 뒤편 담배 진열장을 훑으며 익숙한 색깔을 골라내려고 애썼다. 잘 보이지 않았다. 담배 종류가 너무 많았다. 요즘은 이름도 어렵지만 종류도 너무 많다. 내가 처음 담배를 배웠던 시절에는 종류도 몇 개 없었다. 청자, 백자, 팔팔 아니 그만하자. 빨리 담배를 고르지 않으면 저 계산대에 있는 여성의 불쾌지수가 올라갈 것이고, 나를 한심하게 아니 재수없게 여길지 모른다.
일단 손가락으로 아무곳이나 짚었다. 여성은 말없이 고개를 돌려 내 손가락이 가르키는 곳을 돌아보았고, 담배 한 갑을 꺼내 앞면을 내게 보이며 물었다.
"이거요?"
뭔지 이름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찾는 건 아니었다.
"아니, 그거 말고, 저, 이름이 생각나지 않네요. 보헴 시가......"
그는 빠르게 보여주던 담배를 꽂아두고 한발짝 걸음을 옮겨 보헴 시가 종류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보헴 시가 몇 미리요"
내가 피웠던 게 몇 미리짜리였던가? 대략 10년전 하루에 한 갑 반에서 두 갑 가량 피우던 담배를 약 1년 이상 끊었다가 다시 피웠을 때부터 담배 피우는 양이 확 줄었다. 그때부터 특정 담배 이름을 외워서 피우는 것이 너무 귀찮았다. 누군가 피우는 게 있으면 그걸 따라 피웠고, 이름따위 잘 외우지 못했다. 어차피 나는 사람 이름도 잘 외우지 못하는데, 담배 이름을 외울 수 있을리 없었다. 그 복잡하고 이상한 외국말로 된 뜻도 모를 긴 이름들. 그런 내가, 이름조차 못 외우는 내가 몇 미리짜리였는지 숫자를 기억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예전에는 담배 이름만 알면 되었는데, 이젠 미리 수까지 알아야 하나? 팔팔은 그저 팔팔이었을 뿐. 팔팔 일미리, 팔팔 오미리라고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팔팔이 몇 미리짜리 담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하나였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의 이름을 가진 담배가 타르 함량에 따라 1밀리그램과 5밀리그램 등으로 나눠 다른 담배가 있었다. 저 보헴 시가는 종류가 유난히 많았던 것 같은데, 대여섯개쯤이었던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시간이 얼마나 지났던 걸까? 많이 지났을까? 아니면 머리속으로 생각했으니 깨닫지도 못할만큼 짧은, 찰나의 시간만이 지났던 건 아닐까? 유니폼과 모자를 쓰고 계산대에 서있는 사람의 표정을 슬쩍 보니 그건 아닌 듯하다. 그 표정은 뭐랄까? 욕을 하고 싶은데, 애써 참으며 영업용 웃음을 보이려 노력하는 표정이라고 할까? 아니면 그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무표정이었던 걸까? 잘 모르겠다.
별 일도 아닌데 괜히 부끄러워 그를 정면으로 쳐다보지 못하고 슬쩍 스쳐 보았더니 표정을 잘 읽지 못하겠다. 아니 모자 때문에 잘 안 보였던 것 같다. 그런 것 같다. 그나저나 빨리 담배를 선택햐야 할텐데, 대충 골랐다가 맛 없는 담배를 피우는 건 정말 싫고, 그랬다면 비싼 담배 한 갑을 버리는 느낌이다. 아마 정확히 스무번 이 순간을 떠올리며 후회할 것이다. 지금 잘 골라야 스무번 담배 맛을 만끽하며, 아무도 쳐다보는 이 없는 옥상 난간에 기대어, 멋진 자세로 손을 뻗어 담배를 입술로 가져갔다가, 연기를 길게 내뿜고는 손가락으로 옆 머리를 슬쩍 넘기며 고개를 살짝 치켜드는 듯한 연속 동작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것이다.
아니, 그러니까 지금 나는 무더웠던 여름날, 그날따라 유난히 더웠던 날, 아침부터 공무원들과 마라톤 회의를 하고, 구청과 세무서에 들러 복잡하고 귀찮은 서류를 잔뜩 작성하고 나와서, 갈증을 느끼며 긴 거리를 걸어 편의점에 들어왔는데, 담배를 고르지 못해서 아직 계산을 끝내지 못했고, 그래서 아직 목이 타들어가는 듯한 갈증을 해결하지 못한 채, 바로 세 발짝 거리에서 나를 한심하게, 아니 재수없게, 아니 무표정으로 쳐다보는, 유니폼을 입고 모자를 쓴 여성 앞에 서서 어쩔줄을 몰라하던 당시 상황을 떠올리고 있는데, 이상하게 바로 다음 순간이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 내가 뭔가 말을 했을 것이고, 그래서 그는 몸을 돌려 담배를 뽑아서 기계적인 동작으로 바코드를 찍었을 것이고, 음료수 가격 1,800원과 담배 가격. 음 담배 가격. 아마도 4,500원? 아마 맞겠지? 그럼 1,800원 더하기 4,500원이니까. 음 8 더하기 5는 13이고, 음 1에 4를 더하고 다시 1을 더해야 하니까. 음 오천 아니 육천삼백원인가? 암튼 그는 예의 그 밝고 상쾌한 목소리로 그 가격을 불러줬을 것이고, 그러면 나는 땀에 젖은 바지 뒷주머니에서 땀이 묻은 지갑을 꺼내, 만원짜리 지폐가 있는지 슬쩍 보았다가, 카드를 꺼내 눈치를 보며 내밀었을 것이다. 만원짜리 지폐가 있었을 수도 있으나,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잠깐, 어떻게 무엇을 골랐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암튼 담배를 고르고, 육천삼백원인지 아닌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암튼 그가 금액을 말할 때, 예의 그 밝고 상쾌한 목소리가 맞았던가? 안그래도 불쾌지수가 높은 여름 오후, 평소라면 손님이 없을 가장 한가한 시간에 들어와 겨우 음료수 한 병을 올려놓고는 담배를 고르는 척 하면서 시간을 때우고 있는 저 한심한 아니 재수없는 아니 잘생긴 아니 그냥 평범한 인상의 이상한 아저씨 때문에, 인스타그램이나 아니 트위터나 아니 페이스북이나 아니 카카오스토리를 들여다보고 있을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원망하며, 처음 인사했을 때의 그 밝고 상쾌한 영업용 목소리가 아닌 본심이 드러난 낮은 목소리가 아니었던가?
아니면 평소 손님이 없을 가장 한가한 시간에 갑자기 들어와 살짝 놀라며 밝게 영업용 목소리로 인사했더니, 겨우 음료수 한 병을 가져와 계산대 앞에서 담배를 고르는 척 하며 에어컨 바람을 계속 쐬고 있는 저 땀에 젖은 셔츠의 아저씨 때문에 영어 공부를 혹은 일어 공부를 혹은 중국어 공부를 혹은 일어 공부를 혹은 스페인어 공부를 하지 못하고 아까운 시간을 낭비한다고 원망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애써 태연하게 아까 인사할 만큼 밝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딱히 낮거나 어둡지는 않은 목소리로 육천삼백원인지 아닌지 정확하지 않은 그 금액을 말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고보니 계산대 위에 영어책이 접혀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 그게 일어책이나 중국어책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스페인어 였을 수도 있지만, 분명 책이 놓여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음 머리속에서 영화 필름을 되감듯 기억을 뒤로 돌려본다. 그러니까 내가 음료수 병을 꺼내 계산대에 올려놓았던 바로 그때, 스톱. 자, 여기서 잘 보면 저기 그가 계산대를 짚은 오른손 새끼 손가락 끝이 책 모서리에 닿아 있다. 책의 글씨는 잘 보이지 않는데, 저건 분명 뭔가 어학책이 틀림없을 것 같다.
아니 잠깐 그런데 다시 보니 책의 판형이 그러니까 크기가 일반적인 어학서적 판형이 아니네. 그럼 저건 에세이나 소설책인가? 그렇다면 그는 지방에서 올라와 학교 근처 반지하 단칸방에 살며, 학비와 월세를 내기 위해 아르바이트로 편의점에서 일하는, 그 와중에도 장학금을 받기 위해 시간을 아껴가며 틈틈히 영어를 아니 일어를 혹은 중국어나 스페인어를 공부하는 학생이 아니었던가?
이번에는 빠른 속도로 필름을 돌려 육천삼백원인지 아닌지 정확하지 않은 금액을 말하고, 내가 땀에 젖은 바지 뒷주머니에서 땀이 묻은 지갑을 꺼내, 만원짜리 지폐가 있는지 확인하고, 당연히 없었기에 카드를 꺼내 눈치보며 내밀었던 그 순간, 얼핏 훔쳐본 그 얼굴이 나오는 장면에서 멈춰보자. 여기 아니 조금 더 가서 여기. 음 역시 훔쳐본 얼굴이라 해상도가 높지 않은데, 조금 확대해서 보면, 전체적인 인상이 어려보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학생인 것 같지는 않은 것 같기도 한데, 해상도가 떨어져서 뭐라 말할 수가 없네.
그렇다면 유니폼을 입고 모자를 쓰고 계산대에 서있는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하려다가 비싼 학비를 감당하기 어려워 마음을 바꿔 취직을 하려 했지만, 쉽지 않아서 계속 이력서를 넣어보고, 면접을 보러 다녔지만, 기회를 얻지 못하고 결국 편의점에서라도 몇 시간 일을 해서 입에 풀칠은 해야 하기에 억지로 앉아 있는 20대 중반 혹은 후반의 여성인데, 어차피 손님도 별로 없는 낮 시간이고, 손님도 별로 없는 위치에, 유난히 가까운 거리에 경쟁 편의점이 많고, 유난히 가게 크기가 작고, 유난히 취급 품목이 적은 편의점이라 상대적으로 한가한 편의점이기에 지겨운 낮 시간을 보내는 방법으로 소설이나 에세이를 가져와 읽고 있던 중이었을지도 모른다.
카드를 건네받은 그가 단말기에 카드를 꽂고, 계산이 끝나고, 카드를 꺼내 내게 돌려주려고 고개를 들고 손을 내밀었을 때, 나는 갈증을 참지 못해 카드를 건네자마자 음료수 병을 낚아채어 뚜껑을 비틀어 열고 벌컥벌컥 음료수를 마시고 있었다. 그러니까 앞에 서서 카드를 돌려주기 위해 팔을 뻗은 그의 시선을 의식하며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히고, 젖힌 김에 고개를 한 번 흔들어주어 머리칼에 묻은 땀이 공기중으로 흩어지고, 흩뿌려진 땀방울 중 하나가 그에게 날아가 내게 카드를 건네던 손등에 떨어지고, 나는 음료수 병을 입에 대고 벌컥벌컥 마시고, 캬~ 라고 감탄사를 크게 내뱉고 싶었지만, 이건 맥주가 아니고, 그래서 오버라고 생각하고 감탄사는 생략하고, 이제서야 그가 내민 손을, 그 손등에 떨어진 내 땀방울을 아니 그 손이 쥐고 있는 내 카드를 보고 나도 손을 내밀었다.
내가 내민 손이 그가 내민 손에 닿으려는 그 순간, 아니 그러니까 카드를 건네주고, 건네받기 위해 서로 내민 손이지만, 늘 항상 언제나 두 손이 정확히 카드의 양쪽 끝을 붙잡고, 정확하게 건네주는 이가 손가락 끝에서 힘을 빼고, 건네받는 이가 손가락 끝에 힘을 주어 교환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아마도 99.99 퍼센트 쯤? 아니 뭐 한 70이나 80 퍼센트쯤? 아니면 한 30 퍼센트라도 두 사람의 손이 닿는 경우가 생기는데, 이게 굳이 건네주는 이가 여성이라서 일부러 혹은 고의로 손가락이 정확하게 카드의 끝을 붙잡을 수 있는 거리보다 조금 더 뻗어서 그 손가락 끝에 살짝 닿도록 뻗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남성이 카드를 건네주는 경우에도 여성의 경우보다 그 빈도는 조금 아니 어쩌면 조금 많이, 아니 확실히 떨어지지만, 손가락이 닿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손이 닿았고, 그 짦은 순간 마치 전기가 흐른 것처럼 찌릿한 느낌과 함께 심장이 뛰었다. 보통 그런 순간을 심쿵이라고 표현하던가?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당황한 표정인지, 기분나쁜 표정인지, 아니면 그냥 별일 아닌 듯 무표정한 얼굴인지 알아보고 싶었다. 그 표정은 음 단언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그냥 무표정인 듯 했다.
돌려받은 카드를 다시 땀이 묻은 지갑에 넣고, 땀이 묻은 지갑을 다시 땀에 젖은 바지 뒷 주머니에 쑤셔 넣고, 손에 쥔 음료수 병 뚜껑을 열고, 차가운 음료를 한 모금 더 마시며 이제 이 편의점을 나가, 횡단보도를 건너, 사무실로 돌아가려고 몸을 돌리는데, 아니 돌려서 한 두어발짝 걸어서 문 앞에 다다랐는데, 높은 목소리로 조금은 다급한 듯한 느낌으로 그가 불렀다.
"저기요!"
나는 마시던 음료를 삼키고, 뚜껑을 돌려 닫으면서 몸을 돌려 그를 보았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의 얼굴이 또렷이 보인다. 아까까지는 내가 좀 더 안쪽에 서서 밖에서 들어오는 햇빛을 등진 그를 비스듬한 각도로 보고 있었기에, 거기다 모자까지 쓰고 있었기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그가 햇빛을 받아, 큰 검은 눈과 오똑한 콧날과 작고 도톰한 붉은 입술과 갸름한 얼굴 선이 보였다. 예쁜 얼굴이었다.
출입문을 나서려는 내가 나가버리기 전에 불러 세우기 위해 다소 긴장한, 조금은 다급한 표저이었다. 눈이 평소보다 조금 더 커진 듯. 눈동자는 출입문 그러니까 내 쪽으로 치우쳐있고, 입이 살짝 벌어진 상태, 그러니까 "요" 발음이 끝나는 상태의 입술 모양으로 멈춰있었다.
머릿속에서 화면을 멈춰놓고 그 입술 도톰하고 붉은 입술을 확대해본다. 입맞추고 싶은 입술이다. 분명 당시에도 저 입술을 본 순간,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 입맞추고 싶다고 생각했을까? 분명 그랬을거라고 확신하며 다시 재생 버튼을 누른다. 그는 손을 내밀고 있었다. 아까 카드를 건네받을 때 살짝 닿았던 손이었다. 이번에는 담배갑을 쥐고 있었다. 그렇게 긴 시간 고민한 후에 무엇을 선택했는지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그 담배를 나는 놓고 나가려던 것이었다.
"아! 예"
순간 부끄러운 감정이 들어 얼굴이 확 달아올랐고, 당황한 나는 얼른 달려들어 낚아채듯 담배갑을 받아왔다. 이번에도 아주 짧은 순간 손이 닿지 않았을까 떠올려봤는데, 이번에는 분명 손이 닿은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황한 내가 너무 급하게, 빠른 속도로 달려가 담배갑을 낚아채려고 뻗은 손이 너무 빨랐고, 거리 조절이 되지 않았고, 그래서 내가 그의 손을 덥석 잡아버렸던 것이다.
당황한 그는 짧은 비명과 함께 담배갑을 놓고 손을 뺐고, 내게 잡혔던 희고 작은 손은 빠른 속도로 내 손에서 빠져나갔다. 담배른 아래로 떨어졌고, 나는 뒤늦게 상황을 깨닫고 이번에는 아까보다 훨씬 더 붉어진 얼굴로, 어쩔줄을 몰라하며, 나도 비명을 지르고 싶은 심정으로 뻗었던 손을 거둬들이며, 동시에 허리를 급하게 숙여 담배를 주웠다. 그리고 곧바로 90도로 깍듯이 절을 하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인 상태에서 뭔가 그의 반응이 돌아오지 않을까 잠시 기다렸다. 아무런 답도 없었다 다만 당황해서 흥분한 그의 숨소리가 크게 들렸다. 조심스레, 천천히 고개를 들며 허리를 세웠다. 차마 그 얼굴을 바라볼 용기가 없었지만, 나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 표정은 확실히 화난 표정이었다. 아니 당황하고 어이없어 하는 표정이었지만, 아주 조금 화가 섞여 있었다. 나를 노려보는 듯한 눈빛이 마치 내뿜는 레이저 광선처럼 느껴졌다. 내가 한 번 더 사과를 해야하나? 너무 당황해서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나 손을 덥석 잡았다기 보다는 오히려 찰삭 소리나게 때리듯 잡았던 것은 아닌가? 혹시 다치지 않았는지, 손자국이 나진 않았는지 손을 보여달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이 상황에서 손을 보여달라고 하면 오히려 더 화를 내지는 않을까? 고민하며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저기, 죄송합니다! 혹시 다치신 거 아닌가요?"
다시 한번 사과하며 이번에는 고개만 살짝 숙여 절을 하고, 그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그는 내 왼손에 짧은 순간 잡혀있다가 빠르게 뻬낸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싸쥔 채, 움직이지 않고,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서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니 조금 오래 침묵이 흘렀을 지 모른다. 어쩌면 아주 짧은 침묵이었을 수도 있다. 내겐 아주 긴 시간이었을지 모르지만, 어쩌면 그에게도 긴 시간이었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짧았을지도 모르는 그 조용한 순간, 서로가 움직이지 않고 그저 상대를 주시하던 그 순간, 그의 숨소리가 들리던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눈동자만 움직여 그의 가슴을 보았다.
유니폼 조끼를 입은 가슴은 흥분해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실제로 그 거리에서, 실제로 그의 가슴이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내가 그렇게 보았을 것이라고, 그의 가슴이 그렇게 요동치듯 뛰고 있었을 것이라고 믿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대체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왜 그순간 내 시선이 가슴으로 행했을까? 그는 내 시선을 눈치챘을까? 그랬다면 엄청난 변태라고 생각했겠지? 암튼 나는 내 시선이 나도 모르게 가슴을 향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놀라며 다시 그의 눈으로 시선을 올 올렸다. 마치 재판관의 판결을 기다리듯 나는 다시 침묵의 시간을 견뎠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긴 침묵을 깨고, 아니 어쩌면 짧은 침묵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암튼 그는 입을 열었다. 자, 여기서는 느린 화면을 천천히 그의 입을 클로즈업 해보자. 그 빨갛고 도톰한 입술이 살짝 벌어지는데, 그가 뭔가 목소리를 내어 말하는 바로 그 순간 갑자기 출입문에 매달아놓은 방울 소리가 크게 울렸다.
정말 타이밍 좋게, 아니 나쁘게 라고 표현해야 하나? 암튼 어떤 사람이, 아니 사람들이, 아니 그게 아니라 자기 몸집만한 가방을 맨 쪼끄만 초등학생들이 큰 소리로 떠들어대며 편의점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렇다 그냥 들어왔다가 아니라 정말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은 끝없이, 쉴새없이 떠들며 소란스럽게 편의점 안을 뛰어다녔다. 그리고 우리의 대치 상태는 마침내 끝났다. 나를 향해 있던 그의 몸과 시선이 방향을 틀어, 마구 뛰어다니는 초등학생들을 향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마치 이제 그 공간에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는 나를 외면했다. 아니 외면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다시 조금 더 초등학생들이 뛰어다니며 떠드는 소리르 들으며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분명 아까 뭔가 말을 하려고 했는데, 아니 실제로 말을 했을텐데, 듣지 못했다. 뭐라고 했을까? 정말 궁금했지만, 도저히 다시 물어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결국 나는 오른손에 반쯤 마신 음료수 병을 들고, 왼손에 한참 고민했지만, 결국 뭘 골랐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담배갑을 들고 그 편의점을 나왔다. 다시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고, 더운 열기가 후끈 나를 덮쳐왔다. 내가 출입문을 나서자마자 운좋게 눈앞에서 바로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절반 이상 대략 2/3쯤 걸어간 지점에서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전면 유리 건너편에서 그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