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세우스의 배 그래비티 픽션 Gravity Fiction, GF 시리즈 9
이경희 지음 / 그래비티북스 / 201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책 표지가 독특해서 일단 꺼내 펼쳐봤다. 그리고 제목도. 아테네 인들이 긴 시간동안 테세우스의 배를 보존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목재가 낡고 썩어서 새로운 목재로 교체하곤 했다는 이야기. 결국 오랜 시간이 지나 테세우스의 배는 처음 보존을 시작했던 때의 목재가 하나도 남지 않고 모두 새로운 목재로 교체했는데, 그렇다면 그 배는 과연 테세우스의 배가 맞는 것일까? 만약 교체되었던 낡고 썩은 목재들을 모두 모아 다시 배를 만든다면 어느 쪽이 진짜 테세우스의 배일까? 당신은 어느 쪽 배를 테세우스의 배라고 부를 것인가? 라는 철학적 명제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이 소설은 그 질문들에서 출발한다. 존재와 정체성 그리고 의식에 대해 고민하고 질문하도록 만든다.


한국어 제목은 [테세우스의 배] 이지만, 책 표지에 적힌 영어는 Theseus's paradox 이다. 외국에서는 이 표현이 정식 명칙인 것 같고, 우리는 여기서 역설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인 배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책 뒷표지에는 Cyberpunk is now 라는 문장이 크게 쓰여있다. 이 책의 장르가 사이버펑크임을 명시한 것이다. 사실 사이버펑크 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잘 알지 못하는데, 그냥 머리속으로는 신체 개조에 대한 이미지가 떠올랐고, 괴상하게 생긴 기계 신체가 덕지덕지 달린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책을 읽어보니 역시나 기계 신체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등장했다. 그리고 온 몸이 기계로 대체된 사람이 기계가 되기 전의 그 사람과 동일인임을 증명해야 하는 제도도 등장한다. 그걸 증명하지 못하면 기계가 되기 전에 가졌던 재산과 가족관계 등을 모두 인정받지 못한다고 한다.


주제와 접근방식은 정말 좋았지만, 이야기 자체는 좀 아쉽다. 이 책에 대한 다른 100자 평들과 글들을 훑어보니 '클리셰 덩어리'라는 표현이 눈에 띄었다. 좀 과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 정도로 이야기가 너무 뻔하기는 했다. 한 편으로 조금 더 정교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과 다른 한 편으로 너무 손쉬운 소재만 사용한 것이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래도 결말이 궁금해서 책을 내려놓을 수는 없었다. 결말은 조금 허무하기는 했지만, 다른 가능성들을 상상해보니 그나마 가장 합리적인, 아니 가장 무난한 결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주인공은 마지막까지 자신이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로 끝나는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묘사도 조금은 아쉽다. 특히 이 소설이 사이버펑크라고 크게 써놓았는데, 미래의 공간 배경에 대한 묘사와 기계로 신체를 대체한 여러 사람들에 대한 묘사가 적어서 아쉬웠다. 이야기를 따라가며 머리 속으로 어떤 이미지를 상상해보려고 하는데, 구체적인 묘사가 적어서 막연하게 느껴지는 부분들이 많았다. 특히 아쉬웠던 것은 다양한 교통수단들이 어떻게 생겼고, 어떻게 움직이는지 하는 부분이 적었던 점이다. 마천루라는 초고층 건물들 안에서만 생활하고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 미래 생활을 말하면서 건물 안에서는 주로 초고속 엘리베이터로 수직, 수평 이동을 한다고 했고, 건물 밖으로 나올 일이 생기면 건물 간에 연결된 튜브카를 탄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이게 어떤 것인지 잘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 외에도 다른 교통수단들도 등장했는데, 역시나 묘사가 별로 없었다.


등장인물들을 살펴보자. 우선 너무 뻔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가장 큰 이유인 주인공을 보자. 주인공 석진환은 거대 재벌 그룹의 회장이다. 상식적인 범위를 아득히 뛰어넘을만한 부를 가진 것으로 나온다. 정략 결혼을 통해 딸을 낳아서, 아내와 딸이 있는데, 사고로 모두 죽었다. 그리고 본인은 그 사고로 크게 다쳐서 신체 대부분을 아니 전부를 기계로 대체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옛날 영화의 주인공인 로보캅은 뇌를 제외한 모든 신체가 기계인데, 진환은 뇌 마저도 기계다. 이 부분을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나노 머시기를 통해서 뇌세포를 1대1로 기계로 바꿨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주인공의 신쳬가 계속 바뀌는데, 맨 처음 신체는 군용 스펙으로 키가 2미터가 넘고, 두꺼운 철판이나 콘크리트도 때려부술 정도의 팔다리를 가진 것으로 나온다. 이야기의 중간쯤에는 일반 사람 체격이지만, 총알을 튕겨내는 몸체를 가진 신체로 바뀌고, 맨 마지막에는 실리콘인가 뭔가 사람처럼 부드러운 살결 같은 외관의 신체로 바꾼 것으로 나온다. 아마 필요에 따라 여러 신체를 바꿔 끼운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갈아탄다고 표현해야 하나 그런 느낌이었다.


이 이야기의 악역은 석진환의 배다른 여동생 석미진이다. 온갖 불법적인 짓들을 통해 거대 재벌 그룹을 일으킨 진환의 아버지가 러시아계 여성을 통해 얻은 딸이며, 금발에 파란 눈이다. 이야기의 공간이 한국이다 보니 평소에 금발을 갈색으로 염색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남성인 진환보다 체격이 더 크고 힘도 좋은 것으로 나오기도 한다. 안하무인에 아무것도 거리낌 없이 막나가는 인간이다. 사람 죽이는 것을 벌레 죽이는 것 정도로도 여기지 않는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인간이고, 자신의 만족을 위해 한 사람을 죽였다가 살렸다가 또 죽이기를 수십번 반복하는 것으로도 나온다. 아, 이 소설에서는 마침애 인류가 죽음을 극복했다며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기술이 나온다. 이 재벌그룹 안에서 진환이 주도하는 인공장기와 인공신체 사업을 주도하는 기업과 미진이 주도하는 손상 신체를 되살리는 기업이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것이 두 사람 갈등의 시초다.


이 두 남매 외에 가장 비중이 높은 등장인물은 여울이라는 사람이다. 진환이 불치병에 걸린 아버지를 살려보려고 전세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의료, 생명과학 분야 기술들을 섭렵하고, 그중 가장 뛰어난 연구소나 기업을 사들이는 것으로 나오는데, 그때 만난 사람이다. 그때는 아직 미혼이었던 진환이 여울에게 빠져들어 둘이 사랑을 나누는 장면들이 과거 시점으로 나온다. 그리고 현재 어떤 무리들에게 목숨의 위협을 받으며 쫓기며 갈 곳이 없었던 진환이 의지해서 찾아가는 사람이다. 여러모로 미스테리한 인물이다. 지하세계에 어지간한 대기업 연구소보다 훨씬 더 기술력이 뛰어난 인물들과 설비가 있고, 진환을 그들에게 연결해서 새로운 신체를 구매하도록 해준다. 그리고 이 여울이라는 인물 역시 신체 대부분을 개조한 것으로 보인다. 원격 조정하는 자신의 대체 신체를 사용하는 장면도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에서는 이 이야기 전체의 최종 승자로 나온다. 다 좋은데, 조금 더 정보를 주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아마 작가가 마지막 반전을 위해 의도적으로 이 인물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덜 주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래서 독자 입장에서는 감정 이입을 할 기회가 적은 인물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그 다음으로 비중있는 인물은 현석이다. 석진환 회장의 심복으로 등장한다. 배다른 동생이 장악해버린 회사에서 단 한 명 믿을 수 있는 인물이자, 개인적인 일들까지 모두 처리해주는 가장 의지할 만한 인물이기도 하다. 초반에는 이 인물이 조금 더 많은 비중을 가질 것으로 예상했지만, 여울이 등장한 이후로는 비중이 확 줄어버렸다. 그러다 되살아난 진환 때문에 다시 조금 비중이 늘어날 상황이었는데, 그럼에도 비중이 더 늘어난 것 같지는 않다. 마지막 모습은 너무 뻔한 전개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족회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아버지의 동생들, 즉 삼촌들은 세트로 등장한다. 이 거대 재벌 기업에서 지분으로 따지면, 진환, 미진과 거의 대등하게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지만, 너무 손쉽게 제압당해버리면서 그다지 존재감이 없는 사람들이 되었다. 다만, 그들이 갖고 있었던 차명 지분이 이 이야기의 마지막까지 그룹 내 권력 다툼 결말을 결정지을 핵심적인 요소로 등장한다. 이 부분도 이 이야기가 너무 뻔한 이야기로 느껴지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다.


나머지 인물들은 거의 비중이 없는데, 꼭 소개하고 넘어가야 할 사람이 있다. 다섯명이던가 여섯명이던가 다수가 다수의 몸을 함께 사용한다는 개념이다. 그래서 이름이 아니라 그냥 '교수'라고 불린다고 한다. 처음 여울이 진환에게 소개할 때는 아직 어린 여성의 신체를 가진 사람인데, 이야기를 주고 받는 중에 다른 인격들이 자꾸 튀어나와 여러 차례 말하는 주체가 달라지는 장면이 나온다. 이 인물이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어쩌다 여러 인격 혹은 여러 존재가 되어버린 진환이 결국에는 이 인물처럼 함께 공존하는 결말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단서를 제공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인물은 신체도 여럿이고 그 신체들을 공유하는 인격도 여러 명인데, 어째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들어서 기억을 더듬어 보니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비슷한 개념이 떠올랐다. 하나의 몸에 여러 영을 받아들여 함께 살아가는 '군령자' 라는 존재인데, 이영도 작가의 [눈물을 마시는 새]에 등장했다. 이 군령자는 죽음을 회피하는 방법으로 선택하는 것으로 나온다. 군령자의 몸에 흡수되거나 자의로 합류하면 계속 몸을 옮겨 다니며 계속 살아가는 개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역사 속 위인으로 분류될만한 여러 인물들이 의외로 군령자의 영들 중 하나로 나오는 부분에서 의외라는 반응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예를 들면 아주 용맹한 장군이 죽음을 앞두고 "나와 함께 영원히 살아가자." 라는 유혹에 빠져 군령자의 몸에 합류를 한다던가, 어떤 훌륭한 성취를 이룬 과학자나 예술가가 평생의 업적을 이루기 직전에 죽음을 앞둔 상황이라면 영이 되어서라도 그걸 이루고 싶어서 군령자에 합류한다던가 이런 개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긴 시간을 살아온 군령자는 그만큼 수많은 영을 거느리고 있기에 어떤 영들은 그 하나의 몸에서 거의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교수라는 인물은 각자의 장점이 필요한 순간 서로 몸을 옮겨 다니며 활약할 기회가 충분하리라. 아, 지금 막 생각났는데, 워쇼스키 자매가 오래 전에 제작했던 드라마 시리즈 [센스8]도 8명의 주인공이 짧은 시간 동안 시공간의 한계를 넘어 몸을 공유하는 능력을 지닌 것으로 나온다. 이들은 처음에 서로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서로 몸이 바뀌기도 하는데, 나중에는 이런 능력을 활용해 어려움을 헤쳐나가고 자신들과 적대하는 세력에 맞서는 내용이다. 이를테면 우리나라 배우 배두나는 태권도 국가대표 출신 무술인으로 등장하는데, 무기를 든 다수의 적들을 상대할 때면 어김없이 배두나가 등장해 적들을 쓰러뜨린다. 또 남미쪽 인물 중 카 레이서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적들에게 쫓기는 상황이면 반드시 이 인물이 등장하여 경이적인 실력으로 자동차 추격전을 펼친다. 주인공 일행이 8명이나 되다보니 매력적인 인물들이 많고, 이 8명이 서로 몸을 바꿔가며 위기를 극복해간다는 설정이 신선해서 즐겨 봤었는데, 세번째 시즌까지 찍은 후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가장 큰 원인은 아마도 막대한 제작비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이야기가 펼쳐지는 도시는 평택인데, 이 미래 시대의 평택은 평택혁신도시라고 불리고 있으며 우리나라에 있지만, 우리나라의 법과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공간 같은 느낌이다. 책 속 설명에 의하면 북미 관계가 개선되면서 미군 기지가 축소되고, 그 자리에 한미연합군사연구소가 들어서고, 이 연구소를 중심으로 첨단 기술들을 연구하고 그 성과를 시험하는 공간으로 신기슐에 대한 모든 규제를 면제하는 특구라고 했다. 그런데 이 설정이 좀 과하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소설의 시작 부분에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는 총격전이 벌어지는데, 경찰은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중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 잔인한 살인극들이 등장하는데, 공권력의 개입은 아예 없다. 마지막에 검사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래서 국가 권력이 아예 없는 건 아니구나 싶기는 한데, 여러모로 우리나라가 배경인데, 이렇게 대규모 총격전이 벌어지고, 이렇게 사람들이 죽어나가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것이 어색하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우리나라 모습이 아니라 첨단 기술에 대한 대부분의 규제가 사라진 좁은 영역, 특구라는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라는 단서를 잊지 말아야 조금 억지로라도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다. 그리고 그 특구 안에서 온갖 더러운 방법으로 악착같이 돈을 끌어모았다는 진환과 미진의 아버지 덕분에 그들이 비정상적인 재력과 권력을 손에 쥐었다는 부분도 전제조건으로 달아놓아야 한다. 그러니까 이런 설정들이 너무 손쉬운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고, 이 이야기가 뻔한 이야기라고 느끼게 되는 부분인 것이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진환의 존재는 두 번 더 등장한다. 즉 막판에 진환은 세 명이 된다. 이 세명 중 누가 진짜 진환인가? 우리는 과연 누구를 진짜 진환이라고 인정할 것인가? 여기에서 이 소설의 제목이 등장한다. 의식이 계속 이어져 온 것으로 인정할 수 있는 기계 몸을 가진 진환이 진짜 진환인가? 소설에서는 이 인물에게 컨티넘이라는 단어를 쓴다. 그리고 사고를 당한 시점의 진환의 의식을 백업해 놓은, 그러나 신체는 없이 메모리 칩으로만 존재하는 의식(몸이 없으니 인물이라는 단어를 쓰기가 어색한 느낌)이 진짜 진환일까? 이 녀석의 장점은 가장 완벽한 기억을 갖고 있다는 부분이며, 그래서 메모리로 불린다. 그리고 기계로 완전히 대체해버런 진환이 가졌던 원래 신체 부위들을 모두 가져다가 다시 소생시킨 진환이 존재한다. 이 진환은 그러나 기억이 아예 없다. 마치 기억상실증 환자처럼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겉 모습으로는 이 인물이 가장 완벽한 진환이다. 그리고 앞서 말한 차명 지분이 담긴 태블릿을 열기 위해서는 신체 인증이 반드시 필요한데, 이미 기계 몸으로 바뀐 진환은 이 신체 인증을 해결할 방법이 없다. 암튼 이 진환은 보디라고 불린다.


일단 의식을 백업 받아놓은 메모리는 제쳐두고, 원래의 의식을 그대로 이어받은 기계 몸의 진환이 진짜 진환일까, 아니면 기억은 없지만 원래 신체를 그대로 갖고 있는 진환이 진짜 진환일까? 처음에는 너무 당연히 컨티넘으로 불리는 의식이 이어진 진환이 너무 당연히 진짜라고 생각했지만, 막판에는 정말 그게 너무 당연한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이 지점에서 이 이야기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싶다. 그리고 여러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이 책을 읽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 소설 초반에도 언급되는 내용인데, 실제로 인류가 노화라는 현상의 원인으로 밝힌 유전자 텔로미어를 유지하거나 복구하는 기술들이 개발 중이라고 들었다. 언젠가는 인류가 노화와 죽음을 극복하는 시기가 올지도 모르겠다. 또는 이 소설에 나온 것처럼 점점 기계로 신체를 대체하는 미래가 올 수도 있겠지. 그런 미래가 되면 이 소설은 일종의 예언서가 될지도 모르겠다. 아니 현재의 과학기술들도 아주 오래 전에 SF 소설에 나온 개념들을 살린 것들이 여럿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우리가 계속 관심을 갖고 SF를 읽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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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과 열대야

언제였던가? [뉴 노멀] 이라는 영화를 봤었다. 새로운 삶의 양식을 바탕으로 여러 상황들을 그려내는 옴니버스식 영화였다. 인상적인 장면들이 몇 있어서 나중에 글을 써야지 생각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사실 최근의 나는 조금 무기력증에 빠진 것처럼 뭔가 의미있는 일들에 잘 집중을 못하고 있다.

북플 앱에서 작년 오늘 쓴 글을 열여봤다. 폭염과 열대야에 시달리며, 에어컨 있는 집을 찾아다니며 생활하는 이야기였다. 벌써 몇 해째 여름마다 일어나는 상황이었다. 아직 혼자 사는데, 무더위 때문에 에어컨을 설치한 친구와 혼자 신축 빌라로 이사한 친구 등 친한 친구이며, 에어컨이 있는 사람들 집을 옮겨다니며 열대야와 폭염이 심한 한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올해는 조금은 양상이 달랐다. 애들 엄마와 아이들이 태국으로 며칠 여행을 간다고 애들 엄마 집으로 와서 고양이들을 돌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면서 고양이들이 더위에 힘들어하면 안 되니까 사람이 집에 없어도 에어컨을 늘 켜두고, 조금 높은 온도와 제습 운전을 설정해 두라고 요청 받았다. 생각해보니, 친한 친구이자 가끔 이삼년째 가끔씩 한 여름에 신세를 지곤 했던 지인도 고양이 때문에 에어컨을 끄지 않고 조금 높은 온도로 계속 켜두곤 했다. 예전 같았으면 전기 요금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인버터 형 에어컨과 전기요금 누진 요금제 개편 등으로 가능한 상황이었다. 암튼 한 편으로 이 열대야에 집에서는 제대로 잠을 잘 수 없고, 정상적인 생활 자체가 거의 불가능한데, 어느 집 고양이들 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에 자괴감이 들었다. 고양이들이 나보다 훨씬 쾌적한 환경에 살고 있구나. 나는 그 고양이들이 살고 있는 집에 매달 양육비를 대주고 있는데도, 에어컨도 없이 폭염과 열대야에 시달리며 인간다운 삶을 누리지 못하고 매일 누군가 나를 재워줄 지인과 친구를 찾아다니고 있구나.

애들 엄마와 아이들이 해외여행에서 돌아오는 시점에 나는 또 어느 집으로 혹서기 대피를 가야할까 고민이었다. 정말 다행히 친한 친구 하나가 며칠간 자신의 집을 쓰라고 출입 정보 등을 알려줬다. 가족 모두가 약 10일 가량 일본 여행을 다녀온다고, 그 동안 집이 비니까 자기 방에서 생활하라고 제안했다. 아주 친한 친구이기도 하고, 그 집으로 이사하는 날 이삿짐 옮기는 걸 도와주기도 했던 친구이다. 그 친구는 이사짐 옮기는 걸 도왔던 사람을 집이 비는 동안 묵게 해주는 걸 부모님도 모두 승낙했다고 알려줬다. 평소 여름마다 내가 여러 집을 옮겨다니며 살아가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본인은 가족들 때문에 나를 돕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친구라서 그런 제안을 한 것 같았다. 암튼 감사한 마음으로 그 집에 며칠 머물 예정이다.

정말 에어컨 없이 밤에 잠을 자는 것이 두려운 날씨다. 선풍기 정도로는 이 온도와 습도를 해결하기가 어렵다. 매년 이런 폭염과 열대야가 반복되는 이 땅에서 언제까지 에어컨 없이 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장마? 열대지방 국지성 폭우, 스콜?

기후위기 수업을 하면서 이 이야기를 한 것도 벌써 거의 10년이 다 되어간다. 우리나라는 이제 아열대 기후에 가깝게 변해서 장마의 양상도 달라졌다고. 이젠 비가 와도 중부 지역, 남부 지역 이렇게 넓은 지역에 긴 시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아주 좁은 특정한 지역에 강력한 폭우를 내리고는 금방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고. 최근에 본 기상청 기후 예보관의 인터뷰에서는 비구름이 좁은 지역에서 생성되어 주위 기압의 영향으로 쉽게 움직이는 탓에 정확한 일기예보를 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점점 장마의 양상이 달라지고 있다고. 내가 이런 장마의 양상을 설명한 단어 중 하나는 열대지방의 국지성 폭우인 스콜이었다. 정말 아주 짧은 시간 엄청난 폭우를 퍼붓고는 금방 떠나버리는 비를 몇 년째 경험하고 있다. 작년에도 한참 엄청난 폭우가 퍼붓길래 잠시, 거의 5분 가량 어느 건물 아래서 비를 피했는데, 미친듯이 퍼붓던 폭우가 약 5분이 지나자 그쳤던 기억이 있다.

최근 나는 낮에 배송 일을 하다가 신기한 경험을 했다. 낮이었고 햇살이 강한 뜨거운 날씨였다. 갑자기 비가 조금씩 내렸는데, 이슬비 수준이었다. 그날은 배송 건수도 많았고, 장거리 이동이 대부분이라 서둘러 이동 중이었다. 한 교차로에서 신호 대기 중이었다. 햇빛이 쨍한데 비가 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우습다는 생각을 하며 저 멀리까지 시야가 닿는 곳을 보고 있었는데 문득 깨달았다. 저 멀리에서는 비가 내리는 양상이 달랐다. 폭우였다. 아직 내가 머무는 곳엔 이슬비 수준의 잔잔한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왁 쏟아붓는 폭우가 저 멀리에서부터 실시간으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냥 감으로 느낀 거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평소 매일 운전하면서 느끼는 거라 막 틀린 것은 아니리라 생각했는데, 폭우가 저기 약 700미터 거리에서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약 400미터 거리로 다가오자 소리가 먼저 들렸다. 익숙한 폭우의 소리가 들리는데, 아직 내 차가 있는 곳에는 조금씩만 비가 오고 있었다. 그리고 곧 그 폭우가 빠르게 다가와 내가 정차해 있는 교차로에 들이쳤다. 순식간에 엄청난 소음과 함께 비가 쏟아졌고, 와이퍼 속도를 최대로 설정해도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폭우 때문에 약간 번져 보이는 시야 너머로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는 걸 확인했다. 비상등을 켜고 천천히 엑셀러레이터를 밟아 차를 움직였다. 자동차라는 문명의 도구도 폭우라는 자연 현상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50킬로미터 제한 속도 도로에서 약 20킬로도 안되는 속도로 거북이처럼 움직이며 그 동네를 벗어나고 있었는데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 비가 퍼붓는 소리가 달라졌다. 앞을 보니 점점 더 빠르게 비가 잦아드는 것이 느껴졌다. 폭우가 저 멀리에서부터 가까이 다가오는 모습을 보는 것도 신기했는데, 그리 길지 않은 시간에 또 비가 잦아드는 모습을 보는 것도 신기했다. 이런 것이 바로 열대지방에서 자주 일어나는 국지성 폭우인 스콜 아닐까? 그런데 최근에 본 기상청 소속의 한 기후학자는 스콜이랑은 그 성격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폭우의 양상은 비슷하지만, 그것이 일어나는 원인과 성격이 달라 스콜이라 부를 수는 없다고 말하더라.

고층 아파트와 엘리베이터

몇 차례 배송을 갔던 조합원 집은 47층에 있었다. 47층이라! 젊은 시절에 한창 막노동을 하며 아파트 공사장을 다녔던 때에 제일 높은 현장은 20층 언저리였다. 어쩌다 10층 이상 고층에서 작업을 하게 되면 아직 뼈대 외에 아무것도 없는 상황 때문에 고소공포증을 느끼곤 했었다. 그땐 그래도 20층 언저리가 가장 높은 아파트였는데, 이젠 50층 정도로 바뀌었구나. 궁금한 것은 엘리베이터 버튼이었다. 20층 정도까지는 지하4층 정도부터 꼭대기 층까지 모든 층의 버튼이 설치되어 있었다. 해당 층수를 찾아서 누르는 구조다. 하지만 이 건물 엘리베이터는 달랐다. 층수를 표기한 버튼이 아예 없었다. 디지털 키패드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47이라는 숫자를 누르자 엘리베이터는 아주 빠른 속도로 상승했다. 이렇게 빠르게 움직이는 엘리베이터를 타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무사히 배송을 마치고 다시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올 때는 화면에서 영문 B와 숫자 2를 눌렀더니 다시 빠르게 하강했다. 속도가 너무 빨라서 조금은 겁이 날 정도였다. 처음엔 엄청 신기했는데, 몇 달 동안 여러 차례 방문하면서 조금은 익숙해지기는 했다.

며칠 전에는 14층으로 배송을 갈 일이 있었다. 지하주차장 3층에서 공동현관 문을 열고 엘리베이터 앞으로 찾아갔는데, 엘리베이터가 점검 중이라는 표시가 보이며 운행하지 않는 상태였다. 내가 든 상자는 제법 무거웠고, 올라갈 곳은 14층, 여기는 지하3층. 요즘 아파트는 별도로 L층이 존재하는 곳도 많다. 적어도 17층, 아니면 18층을 계단으로 올라야 할 상황이었다. 불가능했다. 이후에 배송할 곳들도 많은데, 여기서 이 무거운 상자를 들고 17층 이상을 올라갈 수는 없었다. 그냥 맨몸으로 가도 10층 이상은 체력적으로 힘들다. 아직 20대였던 시절에는 40킬로그램 짜리 쌀 가마를 메고 16층 가량 계단을 올랐던 적이 있었다. 그날도 엘리베이터가 고장이었다. 그때는 젊어서 별 생각 없이 당연히 계단을 그냥 올랐었다.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조합원님께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 그 분은 상황을 이해하고 계단실 입구에 상자를 두고 가시면 나중에 엘리베이터 점검이 끝나고 찾아가시겠다고 했다. 나는 계단실 입구에 상자를 놓아둔 사진을 찍어 보내고 다음 배송지로 출발했다. 만약 이 건을 계단을 올라야 했다면 아마 그날 전체 일정을 소화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교통사고 결과

저번에 가벼운 접촉사고를 냈던 상황을 썼었다. 그날따라 지하주차장에서 직접 올라갈 통로가 없는 배송 건 때문에 시간을 많이 허비했는데, 하필 다음 매장에서는 배송 건이 유난히 많으니 얼른 오라는 연락이 왔었다. 계속 전화를 받지 않던 조합원과 어렵게 통화 연결이 되었는데, 그는 지하주차장에서는 직접 연결되는 통로는 없으니 지상으로 올라와서 해당 건물을 찾아오라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설명을 했다. 내가 해당 아파트 단지를 여러차례 다녀봤는데, 지상으로는 차로 접근할 길이 없었다. 오직 지하주차장으로만 차량이 드나들도록 설계된 아파트였다. 그럼에도 그 조합원은 그런 건 경비실에 문의하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는 급한 마음에 일단 지하주차장을 나가려고 후진 기어를 넣고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면서 고개를 뒤로 돌렸는데, 뒤에 갑자기 없던 자동차가 있었고 접촉사고가 생겼다. 황당한 건 그 운전자의 태도였다. 자신은 아무 잘못이 없는 듯 행동하며, 속도가 거의 없는 상태의 아주 가벼운 접촉 사고였음에도 자신과 동승자가 놀랐으니 병원을 가겠다고 했다. 참, 어이가 없었다. 보험회사 담당자는 예전과 달리 이런 경우 병원 가는 것 자체를 막을 수 없다고 했다. 사고가 난 책임이 내 쪽에 조금 더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경미한 접촉으로 병원을 간다는 것, 그것도 운전자와 동승자가 모두 가겠다는 것은 납득하기도 용납하기도 어려웠지만, 내가 어찌할 도리는 없었다. 며칠 전에 보험회사 담당자에게 전화를 받았다. 상대측 과실도 일부 인정이 되었고, 상대방이 병원을 갔으나 딱히 사고로 인한 부상이 인정되지 않았다고 했다. 상식적으로 그게 너무 당연한 결과였는데, 결국 이렇게 된 상황 자체는 여전히 납득도 용납도 되지 않았다. 그 여성들은 도대체 뭘 믿고 병원을 가겠다고 했을까? 세상이 그렇게 만만한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길래 그런 몰상식한 짓을 저지르는 걸까? 참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아침 일찍 중요한 일정이 있어서 일찍 자려고 했는데, 남의 집이라 그런지 쉽게 잠들지 못했다. 꿈에서도 이런 저런 악몽들이 반복되며 새벽에 깨버린 후에 다시 잠들지 못했다. 어차피 잠도 못 자는 상황이면 글이나 쓰자라고 생각해, 작고 불편한 폰 화면으로 이 글을 두드렸다. 오전 일정은 어떻게든 되겠지만, 오후에 운전할 때 졸릴까봐 걱정이다. 오늘은 커피를 좀 많이 마셔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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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7-28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여름 건강하고 무탈하게 잘 넘기시길 바랍니다.
 

폭염과 열대야


열대야는 밤 최저 기온이 25도씨 이상인 날을 의미한다. 올해 서울에서는 공식적으로는 아직 열대야는 없었다. 그러나 나는 지나 금요일 밤에서 토요일 새벽으로 이어지는 시기부터 너무 더워서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리고 토요일 밤에는 조금 나았으나, 다시 어제 밤에 더위로 인해 잠을 설쳤다. 장마 기간이라 습도는 엄청나게 높고, 낮에도 밤에도 더위가 이어지니 덥고 습한 기운 때문에 너무 힘든 하루 하루를 보내야 한다. 


우리 나라는 다행히 늦은 장마로 상대적으로 덜 뜨거운 6월을 보냈지만, 그 사이에 유럽과 미국, 인도와 파키스탄 등 남아시아는 40도가 넘는 고온으로 고통받았다. 특히 유럽은 열돔이라는 기상현상 때문에 유럽 대부분이 불가마 속에 갇혀 있는 상황처럼 되어 버렸다. 프랑스가 44도, 그외 유럽 대부분이 40도를 넘겼고, 인도와 파키스탄 일부는 45도를 넘겼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덜 뜨거웠던 우리나라였지만, 그렇다고 덥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순전히 내 기준으로 나는 6월 내내 더위에 시달렸다. 내가 오후에만 일을 하기 때문에, 심지어 가장 더운 시간인 2시에서 6시까지 일을 하기 때문이다. 잘 달궈진 차량 안은 그 무엇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뜨겁다. 내가 주로 운전하는 회사 차량은 두 사람이 함께 사용한다. 오전에는 주로 매장간 재고 이동을 담당하는 사람, 나와 친한 선배가 이용하고, 그 선배가 일을 마치고 약 1시간 가량 후에 내가 이 차량을 몰고 출발한다. 원칙적으로 그와 내 근무 시간 사이 간격은 1시간이지만, 그는 평소에 늘 일을 일찍 마치는 편이라 실제로는 1시간 반에서 2시간 사이 정도로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 추측한다. 사무실 근처는 늘 주정차 차량으로 혼잡하다. 근처 식당들에서 점심을 먹으려는 차량들과 그 근처 사무실에 출근한 이들의 차량들이 엉켜있다. 운이 좋아서 그늘에 차량이 주차되어 있다면 정말 다행이지만, 운이 나빠 땡볕에 주차된 상태라면, 그야말로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런 날엔 일하는 4시간 내내 차량 내부 열기가 식지 않는다. 달리 방법이 없다. 그냥 온 몸으로 땀을 줄줄 흘리며 운전을 할 수 밖에.


그래도 밤에는 기온이 조금 떨어져서 그 정도로 덥지는 않았기에, 그나마 살 수 있었는데. 이번 주말부터 그러니까 서울 기준으로는 아직 공식적인 열대야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나는 더위에 잠을 이루지 못하기 시작했다. 이제 9월 초까지는 매일 밤 잠을 자는 것조차도 쉽지 않을 것이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날엔 운전을 하는 일이 너무 피곤하고 힘들 것이고, 그 피로는 계속 누적되어 나를 괴롭힐 것이다. 새벽에 아마 4시쯤, 땀을 흘리다 잠에서 깨어 선풍기를 살폈다. 이미 최대 풍속으로 바람을 보내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더 시원하게 잠을 잘 방법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찬 물을 덮어 쓰고 돌아왔다. 아침 일찍 짐을 옮겨주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운전도 해야 했다. 피로가 덜 풀린 상태도 집을 나설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예상보다 일이 일찍 마쳐서 오후에 출근하기 전에 다시 집으로 돌아와 쉴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등산하듯 집으로 올라와 찬 물을 덮어 쓰고 알람을 여럿 맞춰놓고 눈을 감았다. 워낙 피곤했던 덕분인지 곧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알람이 한참 울려서 깨보니 세 시간이 휙 지나있었다. 그냥 눈만 감았다가 바로 다시 뜬 것 같은 기분인데, 1초도 안 지난 것 같은 느낌인라 세상에게 아니 시간에게 사기를 당한 기분이 들었다. 출근하려면 서둘러야 해서 일어나 간단히 씻고 움직이는데, 피로감은 여전했다. 하, 올 여름 에어컨 없이 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접촉사고


1996년 1월에 운전면허를 따고 2005년쯤에 처음으로 접촉사고를 냈었다. 당시 일하던 시민단체 소유의 12인승 승합차를 몰고 가다가 아주 살짝 옆 차를 긁었다. 우리 차는 아무 문제도 없었고, 옆 차에는 조금 스크래치가 생겼을 뿐이었는데, 그 차 운전자였던 중년의 아저씨는 나중에 병원에 드러누우려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엔 경험이 부족하기도 했고, 세상 물정을 잘 모르기도 했다. 더군다나 개인 차량도 아닌 일터의 차량이었기에, 일터 직속상관이었던 사무처장이 사고 처리를 맡아주었었다. 처음에는 그저 스크래치 정도라 적은 돈으로 합의를 할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상대가 병원까지 가겠다고 하자 결국 보험회사에 처리를 맡겼었다고 들었다. 나중에 보험회사 직원이 병원을 못가게 막았다고 들었다. 


그리고 약 20년이 지난 최근에 두 번째 접촉사고를 냈다. 이 배송 일을 맡은 지 약 3개월 만이다. 그날은 여러모로 일이 꼬인 듯한 느낌이었다. 첫번째 매장의 배송 건수는 아마 4건이었다. 한 곳을 제외하고 모두 여러차례 다녀왔던 곳이라 네비게이션도 켜지 않고 빠르게 배송을 했다. 마지막으로 처음 가보는 아파트를 향했다. 네비가 알려준 아파트 입구가 지하 주차장이길래 그리로 들어갔다. 그리고 안내를 살피며 내가 가야할 동을 찾기 시작했다. 배송 영수증에 적힌 주소는 202동이었다. 그런데 지하주차장에 202동에 대한 안내만 없었다. 201동도 있고, 203동도, 204동도 있는데, 202동은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다. 어딘가 있겠지. 층을 옮겨가보면 나올지도 모른다. 다른 아파트 단지에서도 그런 경우가 있었다. 여기 아파트 지하 주차장은 총 3개 층이었다. B1부터 B3까지 모든 경로를 다 뒤지며 202호를 찾아다녔는데 없었다. 설마 아파트 입구가 없을 수가 있나? 내 실수였겠지. 나는 다시 3개 층을 차근차근 돌면서 202동을 찾아다녔다. 두번째 돌아봐도 없었다. 벌써 거의 10분 정도를 허비했다. 아쩔 수 없이 영수증에 적힌 번호를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매장으로 전화를 걸어 해당 조합원에게 202동 입구가 어디인지를 알려주셔야 한다는 것을 전해달라고 했다. 처음 들어왔던 주차장 출입구 근처에 차를 세워놓고 연락을 기다렸다. 


한참 기다리고 있는데, 두번째고 가야 할 매장에서 전화가 왔다. 오늘따라 배송 건수가 유난히 많다는 소식을 전했다. 두번째 매장 담당자는 나에게 일찍 오라고 재촉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오늘 평소보다 건수가 더 많으니 시간 배분을 잘 하셔야 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전한 것 뿐이었다. 그런데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안그래도 이 마지막 배송 때문에 너무 어이없게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얼른 이 건을 마치고 다음 매장으로 이동해야지 하는 마음 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해당 조합원의 전화가 왔다. 지하 주차장에는 202동으로 통하는 입구가 없다고 했다. 그럼 어떻게 202동으로 갈 수 있는지를 물었더니 일단 주차장에서 나와서 상가 쪽으로 오면 무슨 부동산 근처에 1층 지상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가 있고, 거기서 내리면 근처에서 202동이 보일거라는 설명을 했다. 내가 이 아파트로 배송을 온 것은 그날이 처음이지만, 3달동안 계속 지나다녔던 곳이라 해당 상가는 계속 보았었다. 이 주차장을 나서면 바로 큰 글이라 차를 세워둘 곳이 없다. 해당 상가에는 주차장이 따로 없었다. 게다가 곧바로 202동으로 연결되는 통로를 알려주지 않고 상가에서 1층으로 올라온 후에 눈으로 202동을 찾으라니! 이게 말이 되는 설명인가? 아니 상품을 주문하고 배송을 시켰으면, 배송 노동자가 상품을 집 앞까지 갖다 줄 수 있는 정보를 줘야 할 것이 아닌가? 나는 화가 나려는 마음을 가라 앉히고 차분한 말투로 다시 물었다. 202동으로 바로 갈 수 있는 통로는 없나요? 그 조합원은 아까의 설명만 반복할 뿐이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다시 말했다. 주문하신 물량이 많잖아요. 저는 지금 차량으로 이동 중입니다. 차를 주차할 곳이 필요하고, 주차한 곳에서 해당 동으로 이동해야 하는데, 지금 말씀하신 곳에는 주차할 곳이 없어요. 그러자 그 조합원은 그런 것까지는 모르겠으니, 필요하면 주차장 입구에 있는 경비에게 물어보라고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가만히 기억을 떠올려보니 큰 길에서 인도로 올라설 수 있는 공간이 두세개 정도 있었다. 차량이 인도로 진입하는 막기 위해 볼라드 라고 부르는 기둥들이 막고 있었지만, 차량을 그 볼라드 앞에 올려놓을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여기까지 생각한 나는 얼른 거기 차를 올려두고 이 지긋지긋한 건을 마무리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너무 오래 시간을 허비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다. 후진 기어를 넣고 고개를 뒤로 돌리는 동시에 엑셀러레이터를 밟았다. 밟자마자 차가 무언가에 부딪혔고, 둔탁한 소리가 났다. 깜짝 놀란 나는 다시 브레이크를 밟고 사이드 미러를 살폈다. 내 뒤에 비스듬한 방향으로 차가 한 대 서 있었다. 아니 대체 언제 저 자리에 차가 있었지? 아니, 여기는 주차 공간도 아니고 그냥 통로인데, 왜 내 뒤에 저렇게 어정쩡한 방향으로 차가 서 있었던 거지? 아니 막 부딪혔을 당시엔 그저 저 자리에 왜 차가 있을까? 하는 생각만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너무 정신이 없었다. 차에서 내려보니 우리 차 조수석 쪽 후미 범퍼가 상대방 운전석 쪽 문을 들이받아 문이 찌그러져 있었다. 상대 차량 운전석과 조수석에서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여성 두 명이 내렸다. 두 여성은 자신들이 바쁘다며 얼른 보험회사에 연락하라고 채근했다. 나는 왜 내 뒤에, 왜 하필 이 자리에 있었느냐 물었는데, 마치 못 들은 것처럼 답을 하지는 않았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일단 후진 기어를 넣고 뒤를 돌아보는 동시에 엑셀을 밟았기 때문에 나는 저 차를 보지 못했다. 부딪히는 소리를 먼저 들었다. 엑셀을 밟고 거의 동시에 사고가 났기 때문이다. 후진하면서 뒤를 살피지 않았으니 명백히 내 잘못이었다. 그건 어떻게 해도 변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일단 사무국 상무님께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하고 보험회사 전화번호를 알려 달라고 했다. 사무국에서는 얼른 번호를 찾지 못했다. 상무님은 나를 진정시키더니 사진을 잘 찍어두고, 서로 연락처 교환한 다음에 보험 접수하고 연락한다 전하고 상대를 보내라고 했다. 그리고 내가 다음 매장에 배송 건수가 많다고 전했더니, 나보고 보험 접수하고 마음 잘 가다듬고 천천히 출발하라고, 자신이 먼저 가서 절반 정도를 배송할테니, 걱정하지 말고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오라고 했다.


보험사에 사고 접수를 하고 나서 아까 사고 나기 전에 기억을 더듬어 생각해뒀던 자리에 차를 올려두고 손수레를 꺼내어 무거운 상자 두 개를 실었다. 전화로 설명 들었던 부동산을 찾아서 엘리베이터 위치를 찾았다. 차에서 한참을 먼 곳이었다. 엘리베이터는 지하 상가와 1층만 오가는 것이었다. 1층에 올라서서 주위를 둘러보니 높은 아파트 건물이 여럿 보였다. 전화로 설명을 들었던 것과 달리 곧바로 202동을 찾을 수는 없었다. 손수레를 엘리베이터 근처에 세워두고 이 건물과 저 건물로 동 숫자가 보이는 곳까지 뛰어 다녔다. 한참 후에 겨우 202동을 찾았다. 건물이 낮았다. 복도로 들어서서 보니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건물에는 1층과 2층 밖에 없었다. 무슨 아파트가 겨우 2층 높이라고? 그제서야 그 조합원이 '테라스 동'이 어쩌고 하는 단어를 사용한 것을 떠올렸다. 아니 아무리 테라스 동인지 뭔지 그렇다고 해도, 그럼 자신들은 주차를 안 하나? 차가 없나? 설마 이 비싼 아파트에 살면서 차가 없다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암튼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손수레는 전혀 소용이 없었다. 무거운 상자 두 개를 들고 일어서는데 허리가 휘청 했다. 계단을 오르려는데, 1개 층이 유난히 높았다. 다른 동네에서 엘리베이터 없는 낡은 빌라 5층이나 6층에 배송을 자주 다니지만, 여기 1개 층이 그런 빌라 2개 층 이상 높이라고 느꼈다.


암튼 우여곡절 끝에 마지막 배송을 마치고 차량으로 돌아와 땀을 닦으며 아까 사고 상대방에게 전화를 걸었다. 보험 접수를 마쳤으니, 담당자가 연락할 거라고. 그러자 그 사람은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병원을 가겠다고 말했다. 나는 순간 내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닐까 싶었다. 당황스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기분에 빠졌다. 상대 차량은 내 차 바로 뒤에 있었고, 후진을 하자마자 곧바로 부딪혔다. 거리도 없었고, 속력도 없었다. 내가 엑셀을 쎄게 밟았던 것도 아니고 고개를 뒤로 돌리는 동시에 슬쩍 밟았을 뿐이다. 이 거리와 속도로 상대방이 다쳤다는 것은 그야 말로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제서야 20년도 더 지난 사고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심지어 차량이 부딪힌 것도 아니었다. 그저 옆을 지나며 긁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병원을 가겠다는 인간이 있었다. 그제서야 상대방이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구나 싶었다. 아니, 분명 상대방도 상식을 가진 평범한 사람일 것이다. 그럼에도 사고가 나면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고 몰상식한 짓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인간 같지도 않은 어떤 존재로 변하는 구나. 성별도 나이도 아무 상관없구나.


두번째 매장으로 이동하는 중에 보험회사 담당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차를 한적한 곳에 세워두고 한참 통화를 했다. 자세한 상황을 모두 설명하고 상대방이 병원에 간다고 통보한 사실도 전했다. 전화를 걸었던 보험회사 담당자는 자신은 대물 담당이라 대인 건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고, 대인 담당자가 상담을 할 수 있도록 연결해주겠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 다시 운전하는 중에 대인 담당자 전화가 왔다. 갓길에 차를 세우고 대화를 나눴다. 대인 담당자 말로는 시대가 변해서 이제는 상대방이 병원에 가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다고 했다. 몇 가지 사례와 판례를 들먹이며 마치 짧은 강의를 하듯 나를 가르쳤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그제서야 왜 갑자기 그 차가 그 자리에 나타났던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는 앞에 4칸의 주차구획이 있는 통로에 잠시 서 있었다. 그리고 내 앞에 있던 4칸에는 모두 차량이 주차되어 있었다. 즉, 빈자리가 없었다. 나는 주차하지 않고 잠시 기다리다 근처에 있는 주차장 출구로 나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서 있었지만, 그 차는 왜 그 통로에, 그것도 하필이면 내 차 바로 뒤에 비스듬한 각도로 있었을까? 그러다 문득 차를 돌리려고 이동하는 중에 내가 뒤를 보지 않고 차를 돌려서 부딪힌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 차가 정차한 상태에서 내가 들이받았다면 내 과실 100퍼센트에 상대 과실은 0퍼센트이겠지만, 상대도 차를 돌리려고 움직이는 중이었다면 달라질 것이다. 상대 과실이 10이던 20이던 나올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보험 담당자에게 이 가설을 설명했다. 나는 그 차량을 보지 못했지만, 그 차량의 위치와 각도가 너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설명을 하면서 아무래도 그 차 역시 움직이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보험 담당자는 우리 차에 후방 카메라가 있는지 질문했다. 카메라는 있었다. 그러나 시동을 걸 때마다 후방 카메라를 인식할 수 없다는 안내가 뜨는 것을 나는 매일 보았었다. 카메라는 있지만, 아마 찍힌 것을 없을 것 같다고 전하며 혹시 모르니 일을 마치고 찾아보겠다고 했다.


두 번째 매장에 도착하니 이미 상무님께서 절반 보다 조금 더 많이 실고 떠났다고 했다. 매장 담당자는 사고 이야기 들었다며 안 다쳤는지를 물었다. 나는 사람이 다칠 정도로 부딪히지 않았다고 설명하고 얼른 짐을 실고 출발했다.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일을 모두 마친 나는 카메라 메모리 칩을 꺼내어 사무실로 갔다. 살펴보니 역시 아무것도 찍혀있지 않았다. 상무님 말씀으로는 메모리칩 자체가 망가진 것 같다고. 새 걸로 사서 끼우겠다고 했다. 보험회사 담당자에게 우리측 카메라는 아무것도 찍혀있지 않다고 했다. 그는 상대측 전방 카메라를 확보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 후에 전화가 왔다. 상대방 차량 역시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 맞다며, 그래서 우리측 일방 과실이 아니라 쌍방 과실이 되었다고. 그럼에도 후방 주시를 하지 않았던 내 탓이 더 크기 때문에 우리 80, 상대 20으로 최종 조정했다고 전했다. 보험회사 담당자는 비록 8대2 이기는 하지만, 상대방도 과실이 생겼으니 우리 차도 고칠 것이 있으면 고치고, 나보고도 병원에 가시려면 가셔도 된다고 했다. 우리 차는 범퍼에 아주 살짝 칠이 벗겨질락 말락 하는 상태일 뿐 망가진 곳이 전혀 없고, 나 역시 다친 곳이 전혀 없었다. 애초에 다칠만한 사고가 아니었으니. 


20년 만에 낸 접촉사고였다. 그날 유난히 운이 따르지 않았었고, 하필 배송 건수가 많아 너무 마음이 급하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내 실수는 명백했고, 무조건 내가 잘못한 것이 맞았다. 다시는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리라. 언제나 한번 더 생각하고 한번 더 살펴보고 출발해야지 라고 다짐을 하며 이 사고에 더는 미련을 두지 않기로 했다. 상무님께서는 자신도 어이없는 사고를 여러 차례 냈었다고, 운전을 하다보면 사고가 날 수도 있는 것이고, 그러라고 보험에 드는 것이고, 그러라고 범퍼라는 것이 있는 거 아니겠냐고 얼른 잊어버리라고 했다. 사실 이 배송 일을 시작하기 전의 나는 훨씬 더 조심하며 운전하는 편이었다. 이 일을 하면서 계속 시간에 쫓기며 운전을 하다보니 점점 더 급하게, 덜 조심하며 운전하는 방식으로 습관이 바뀐 것이다. 사실 내가 배송 일을 하기에는 너무 느긋하게 운전하는 것이라는 자각이 있기는 했다. 여기저기서 종종 마주치는 택배 기사들, 배달 기사들을 살펴보면 나보다 움직임이 훨씬 더 빨랐다. 분명 동시에 지하1층 엘리베이터에 내렸는데, 택배 기사는 순식간에 차를 몰고 저쪽으로 가고 없었고, 나는 겨우 시동을 걸고 네비를 열어 다음 목적지를 검색하고 있었다. 지금보다 조금 더 빠르게 움직이되 조심하고 무조건 주위를 살피고 출발하는 것만은 잊지 말아야겠다.


일베 말투 논란


스타벅스 사태 이후로 배재고 야구부가 광주일고 야구부를 향해 조롱을 한 사건이 크게 이슈가 되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저 혐오 표현이 무슨 의미인지 정말 제대로 알고 있다면 저런 조롱을 할 수 있을까? 과연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그럴 수 있을까? 전두환과 그 일당들 같은 인간이 되지 못한 것들이 아니고서야 과연 사람의 목숨을 그리 함부로 조롱할 수 있을까? 새삼 일베라는 그 어떤 것이, 과연 그것이 그저 커뮤니티에 불과한 것인지 어떤 거대한 집단인 것인지, 그도 아니면 거대한 사회 현상인 것인지 명확하게 규정하지 못하겠지만, 그것이 가진 영향력이 얼마나 큰 지 느꼈다. 


우연히 본 뉴스타파에서 올림픽 경기장을 봉쇄하고 있는 시위대가 윤어게인 세력들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는 상황을 접했다. 부정선거를 부르짓는 세력들이 중국의 지령을 받은 김대중 덕분에 노무현이 당선된 그 대통령 선거에서부터 우리나라에서 부정선거가 시작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부정선거가 만연한데, 그 뒤에는 무슨 일루미나티인가 뭔가 하는 국가를 초월한 조직이 있고, 전시안이라는 문양이 그 상징이라는 이야기가 그 시위대 사이에 퍼지고 있다고 했다. 물론 뉴스타파 기자가 접한 것은 그 수많은 시위대 중 일부일 뿐일 것이고, 그런 어이없는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도 있겠지. 하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어떤 아이돌이 일베 말투를 썼다는 것으로 각종 SNS 가 아주 시끄럽다고 했다. 누군지 모르는 어느 젊은 여성 아이돌이 "무섭노." 라는 말을 썼다고 한다. 그 여성은 경상도 출신이라고. 사람들은 그 말이 사투리가 맞다 아니다 그리고 일베 말투가 맞다 아니다를 놓고 싸우고 있었다. 거기에 조국 같은 위선에 가득찬 정치인들이 끼어들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그 연예인이 사용한 말이 실제 그 지역의 사투리가 맞는지 아닌지 나는 모르겠다. 내가 나고 자랐던 부산 사투리에는 확실히 그런 표현은 없다. 내가 아는 한 부산 사투리에서 '노' 라는 어미는 내가 무서운 감정을 느낀다고 표현할 쓰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무섭냐고 물을 때 쓰는 것도 아니다. 만약 앞에 '뭐가'가 붙어서 "뭐가 무섭노?" 라고 말한 것이라면 그건 맞는 말이다. '노' 라는 어미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묻는 어미로 경상도 사투리에 아직 남아 있는 중세 국에의 흔적 중 하나다. 예를 들어 "밥 먹었나?" 라는 질문은 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여부를 묻는 것이지만, "뭐 먹었노?" 라는 질문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먹었느냐고 묻는 질문이다. 일베 추종자들이 흔히 쓴다는 "심심하노.", "아프노." 와 같은 표현들은 부산 사투리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제대로 된 사투리 표현으로 바꾼다면 "와? 심심하나?" 라고 묻는 질문이나, "어데가 아픈데?" 와 같은 질문으로 바꿀 수는 있겠다. 일베를 따르는 인간들이 흔히 쓰듯이 혼잣말 하듯 자신의 상태를 드러내듯 하는 것은 고 노무현 대통령을 조롱하기 위해 자기들끼리 사용하는 표현이며, 그들 집단 안에서는 동질감과 소속감을 느끼고, 그들 바깥에 있는 평범한 사람들에 대항해 자신들을 구별하는 하나의 표식 같은 것이다. 크게 보면 나치 독일의 상징이나 일본 제국 상징 같은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해당 연예인이 그 표현을 쓴 것 자체는 논란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것만으로 그를 비난하는 것은 올바른 대응이 아닐 것이다. 그가 일베 표현이라는 것을 알고 썼는지, 모르고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유행처럼 젊은 사람들 사이에 퍼져있는 그 말투를 쓰는 것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조롱과 혐오 표현이 왜 나쁜 것인지를 사회적으로 공감하고 성찰하는 태도가 필요하겠다. 그 표현을 사용하는 젊은 사람들이 모두 나쁜 것이 아니라 이 표현이 왜 혐오 표현인지를 인지할 기회를 주는 것과 유행처럼 퍼뜨려 나갈 성격이 아님을 제대로 아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최근 우리 아이들도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표현들을 자주 쓰는 것을 목격한다. 그게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쓰는 것이라면 그래도 괜찮겠지만, 그 내막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그저 유행이니 따라 쓰는 것은 조금 위험하다고 볼 수 있다. 잘 생각해보면 젊은 사람들만 유행을 따라 이상하고 위험한 표현들을 쓰는 것은 아니다. 지금의 중년들도 입에 밴 위험하고 상식적이지 않는 표현들이 제법 있다. 오늘 페이스북에서 본 것은 어느 엘리트 체육인이 학부모 체육대회에 나가서 '민간인 학살'을 했다.'는 표현을 아무렇지 않게 쓴다는 거였다. 나는 누군가 그런 표현을 쓰는 것을 본 적은 없지만,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나 역시 올바르지 않은 혹은 문제가 있는 표현들을 나도 모르게 쓰고 있을 것이다. 분명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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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6-07-07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모론자들의 주장하는 이야기는 사실 하나도 새겨 들을 것이 없지요.진보 세력이 선거에서 승리할 적마다 흔히들 부정선거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말을 일고의 가치도 없지만 문제는 이번 선관위 부실 선거논란에서 알 수 있듯이 음모론자들의 주장에 사람들의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어처구니 없는 행태가 계속 자행된다는 문제라면 문제겠지요..
오림픽 경기장 봉쇄 시위와 관련해서 일부 윤어게인 세력이나 음모론자들이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은 순수하게 참정권을 박탈당해 자발적으로 나선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이들의 순수한 의도를 곡해하고 그들의 주장을 모두 부정하는 것은 결국 음모론자들의 세력만을 키우는 것이라고 여겨지네요

그리고 조국이 갑작스레 걸 그룹 ~노 발언을 혐오발언으로 매도하는 것은 참 뜬금없단 생각이 듭니다.개인적으로 일베의 ~노 발언은 어떻게 보면 유행이 한물 간 것으로 주변에서나 인터네상에서 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물론 일베끼지 아작까지 사용할 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부의 사람들이 혐오 발언이라고 인식하고 있어 굳이 ~노라는 것을 쓰지 않지요.그러면에 걸 그룹 아이들이 ~노라는 어투를 사용했다면 인터넷상에 난상 토론이 벌어지듯 경북의 사투리거나 아님 혐오 발언이라고 인식하지 못하고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제는 거의 사장되 간는 느낌의 ~노 발언을 왜 조국이 뜬금없이 소환해서 다시 사람들한테 회자시키는 이유는 선거 탈락후 자신의 좁아진 정치 입지를 어떻게 든지 되살려 보려는 최후의 발악으로 느껴져서 한때 한국을 이끌 지도자중의 한명으로 여겨졌던 분의 처절한 추락이 안타깝기 그지없네요.

감은빛 2026-07-17 14:44   좋아요 0 | URL
카스피님, 정말 부정선거 음모론자들의 얘기처럼 실제 선관위가 너무 어이없는 짓들을 해서 정말 어이가 없고 화가 납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운영되어 왔다는 사실에 큰 배신감을 느낍니다.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해요.

2026-07-16 2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7-17 14: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늑대사냥 - SF어워드 대상 수상작 포션 2
김성일 지음 / 읻다 / 2023년 6월
평점 :
절판


처음에 제목만 보고 책을 집어들 때까지만 해도 예전에 본 영화 [늑대사냥]의 원작 소설인가 생각했다. 그런데 목차를 보고 늑대, 할머니, 사냥꾼 이렇게 셋이 반복되는 걸 보고 그 영화의 원작은 아니겠구나 싶었다. 그 영화에는 늑대도, 할머니도 사냥꾼도 등장하지 않으니까. 그 다음에 든 생각은 옛 이야기 빨간 모자의 변형인가? 싶었다. 그 이야기에서 빨간모자를 쏙 빼고 사냥꾼을 넣었나? 하는 생각을 해봤다. 그리고 첫 장인 늑대의 앞부분을 읽고 나서야 완전히 다른 이야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각 소제목은 해당 장의 시점 주인공을 의미한다. 늑대의 장에서는 늑대 시각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할머니 장에서는 할머니 시점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사냥꾼 장만 살짝 애매한데, 이 인물은 다소 비밀스러운 면이 있어서 이 인물을 만난 사람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암튼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늑대, 할머니, 사냥꾼 이 순서로 세 등장인물이 번갈아 나타나 이야기를 펼친다. 순서가 한번도 바뀌지 않고 끝까지 이어진다.

정확히 이 대목이 이 소설의 참신한 부분이다. 세 화자가 정확히 그 순서를 지키며 번갈아 전면에 나오며 전체 이야기를 매끄럽게 풀어간다는 점. 마치 세 명으로 구성된 아이돌 그룹이 공연을 하면서 각자의 파트에 따라 전면에 그러니까 센터에 섰다가 다시 옆으로 빠지는 것을 반복하는 느낌이다.

또 이 소설의 흥미로운 부분은 주요 등장인물 셋이 모두 일반적인 이야기의 주인공과 다르다는 점이다. 일단 가장 중요한 주인공은 늑대다. 즉, 동물이다. 늑대의 시점에서 그러니까 늑대의 시야와 청각 그리고 후각과 촉각을 이용해 이야기를 풀어야 한다. 동물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는 것이 인간의 입장에서 그리 쉬운 일이 아니고, 거기에 개나 고양이가 아닌 늑대라는 점이 더 어려울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 읽고 나서 든 생각은 정말 그럴듯하게 늑대의 시점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늑대가 그냥 자연의 늑대가 아니고 만들어진 존재이며, 여러 도구를 통해 인간과 소통이 가능하다는 설정이 있기에 좀 더 편안하게 늑대의 시점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점은 고려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정말 늑대가 생각한다면 이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전개였다.

이 늑대 파트가 돌아올 때마다 나는 정유정의 소설 [28]을 떠올렸다. 그 소설에서도 이야기를 끌고 가는 주요 등장인물 중 동물이 나왔었다. 야생에서 살아가는 맹견이었다. 이 소설을 읽고 뉴타운이 지어질 무렵 버려진 덩치가 큰 개들이 북한산 인근에 몰려다니는 유기견이 되어 야생화 되었다는 기사가 생각났다. 빨간 눈이 특징인 인수공통 감염병이 퍼져가는 수도권 한 도시 이야기인 이 소설에서 주인공 격인 한 맹견의 존재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지금 이 소설의 주인공인 늑대를 주인공으로 인식하는 일이 조금은 덜 낯선 상황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또 다른 주인공은 할머니였다. 와! 할아버지도 아니고 중년 여성도 아니고 할머니를 주인공으로 쓴 소설이라니! 일반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이 대개 남성이고, 가끔 여성이 주인공을 맡아도 젊거나 어린 여성이 맡는데, 할머니를 전면에 내세운 이야기는 거의 본 적이 없었다. 늑대는 인간이 아닌 동물이고, 할머니는 성별로도 나이로도 소수자이자 약자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더 매력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주인공인 사냥꾼은 베일에 쌓인 비밀스러운 인물이다. 인간이 아닌 존재라는 점이 늑대와 공통점이다. 사회의 주류가 아닌 소수자라는 점에서는 할머니와 마찬가지다.

SF라는 틀 안에서 실존이라는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흥미로운 이야기. 가족, 인간다움, 존재 등 생각할 꺼리가 많은 소설이다. 늑대와 사냥꾼은 인간이 아님에도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면모를 보여주며, 실존이란 무엇인가 끊임없이 고민한다. 할머니는 인간이기는 하지만 현재 시점 사회로 부터 인간다운 다운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라고 쓰고 나서 생각해보니 꼭 그렇지는 않은 느낌이다. 암튼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돈과 권력 밖에 모르는 인간들은 비인간적인 느낌이지만, 그런 면이 오히려
인간의 특징임을 잘 보여준다.

적절한 긴장감과 적절한 따뜻함이 이 책을 손에서 내려놓기 어렵게 만든 덕분에 한번도 쉬지않고 단숨에 끝까지 읽었다. 이 소설과 세계관을 공유하는 작품도 있다고 하던데, 그것도 찾아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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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6-07-16 22: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흥미롭게 읽을 소설일 것 같네요. 시점을 바꾸어서 전개되는 소설은 거의 재밌었던 것 같아요. 한 사건에 대해 각자 다르게 얘기하는 류노스케의 ‘덤불속‘이 떠오르네요. 오디오북으로 들었던 개, 에 관한 소설도 있는데 개의 생각을 풀어나가는 이야기예요. 김훈 작가의 소설이었던 것 같아요. 며칠간 듣다 중단했는데 뭔가 무서운 느낌이 들어서였어요. 어떤 무서움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네요.ㅋ

감은빛 2026-07-17 14:56   좋아요 1 | URL
네, 페크님. 몇 가지 지점에서 흥미가 생겼고, 생각보다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쉬지 않고 끝까지 읽었어요. 동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들이 생각보다 많을 것 같아요. 언젠가 찾아서 비교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아요.
 

밤티, 왁뿌, 야르

아이들이 뭔가 말랑한 인형 같은 동그란 걸 손에 쥐고 조물락 거리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그냥 아이들 대화를 들으며 작은 아이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요 녀석은 이제 사춘기를 지나갔으려나. 요즘 여드름 때문에 고민이 많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며 한동안 못 만난 아이 얼굴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큰 아이가 ‘밤티‘ 라는 단어를 쓰는 걸 들었다. 밤티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 궁금했던 내가 아이들 대화에 끼어들었다. ˝밤티가 무슨 뜻이야?˝ 큰 아이는 설명해주지 않고 계속 작은 아이에게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작은 아이는 큰 아이 말을 듣지 않고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작은 아이가 ‘왁뿌‘ 라는 단어를 썼다. 나는 이번에는 작은 아이를 향해 물었다. ˝왁뿌는 뭐야?˝ 대화는 이미 난장판이 되었다. 아무도 듣는 이 없이 서로 자기 말을 하고 있었다. 큰 아이가 이 상황이 어이없다는 듯이 ˝나 누구랑 이야기 하고 있니?˝ 라고 혼잣말을 했다. 그러더니 ˝아빠, 왁뿌 몰라요?왁뿌.˝ 라고 되물었다. 나는 고개만 저었다. 그러자 아이가 한숨을 한 번 내쉬더니 설명을 시작했다. 내용을 요약하면 이랬다. 자신이 어릴 때 갖고 놀던 액체괴물과 비슷한 것인데 액괴는 액체라 그 자체는 모양이 없지만, 이건 왁스를 굳혀서 고체로 만들어 놓은 것이고 그걸 뿌시는 걸로 재미를 느끼는 것이라고 요즘 젊은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액괴는 아이들이 어릴 때 자주 갖고 노는 걸 보았던 기억이 있어서 이해했는데, 왁뿌는 설명을 들어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어차피 둘이 나누던 대화에 끼어들었던 건데, 내가 그걸 이해해봐야 뭐 하겠나 싶었다. 그리고 다시 둘이 떠들다가 이번에는 ‘야르‘ 라는 단어가 나왔다. 이번에도 끼어들어 뜻을 물어보려다가 참았다. 그러고보니 밤티는 그래서 무슨 말인지 알려주지도 않았네. 대신 폰을 찾아서 검색했다. 밤티는 못생겼다 라는 뜻이고, 야르는 기분 좋다는 뜻이라고 한다. 왜 이런 이상한 말들을 쓰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려다가 남들이 다 쓰니까 따라 쓰는 거겠지 무슨 이유가 있겠나 싶어서 그만두었다.

요즘 매일 아이들이 열심히 셋로그를 올리는 걸 본다. 저번에 소개한 적이 있는 이 앱은 특정한 구성원들과 매 시간 약 2초짜리 짧은 영상을 공유한다. 지금 아이들과 함께 있는 방엔 아이들 둘과 나 이렇게 3명이다. 아이들은 엄마와도 셋로그를 하니까 거기도 3명 방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아이들은 매 시간 두 번씩 2초짜리 영상을 찍어야 하는 건가? 바쁘겠구나. 아니면 한번 찍은 걸 두 방에 공유하는 걸까? 모르겠다. 나는 방이 하나밖에 없고, 내 지인 중에 이 앱을 쓸만한 사람들은 모른다. 요즘은 언급하지 않지만, 나에게 이 앱을 깔아줬을 때 아이들 말에 의하면 애들 엄마는 이 셋로그를 거의 하지 않는다고 했다. 사실 나도 매 시간 이걸 올리지는 않는다. 평소엔 거의 생각하지 못하다가 가끔 쉬는 시간에 애들이 셋로그를 올렸다는 알림을 보고 나도 하나 찍어볼까 생각을 한다. 주로는 일을 마치고 저녁에 회의를 하러 이동하거나 달리기를 하러 가면서 셋로그를 찍어 올린다. 아마 하루 24시간 중에 두세번 정도 올리는 것 같다.

아이들은 집에 있는 시간 동안은 주로 고양이를 찍는다. 큰 아이는 원래 본가(큰 아이 표현)에 있던 가장 덩치가 큰 고양이, 타로를 자기 자취방에 데려와서 함께 지내고 있다. 학교와 알바 외에는 거의 타로를 찍는다. 그래서 며칠 전에는 본인 셋로그가 아니라 타로 셋로그라고 써놓기도 했다. 그리고 학교에 있을 때는 태블릿과 교재 등을 찍기도 하고 밥이나 차를 찍기도 한다. 알바 가서도 일하는 중에 부지런히 찍어 올린다. 이 셋로그를 엄마 아빠랑 같이 하고 싶다고 한 건 큰 아이였다. 혼자 살면서 자기 생활을 부모와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다. 암튼 거의 매 시간 가장 열심히 셋로그를 올리는 건 주로 큰 아이다.

작은 아이도 자주 올린다. 집에 있을 때에는 주로 먹는 걸 찍어 올리고 가끔은 집에 있는 두 고양이, 차차와 먀오를 찍기도 한다. 학교에서는 거의 올리지 않는데, 하교 중에는 계단이나 바닥을 찍어 올린다. 그리고 야간 자율학습을 할 때에는 하기 싫다고 책상 위를 찍어 올린다. 요즘 부쩍 화장에 관심이 많아진 아이는 가끔 화장한 자신의 얼굴을 찍어 올리기도 한다.

나는 거의 올리지 않는데 일을 하다가 잠시 쉴 때 하늘이나 꽃을 찍는 편이다. 내가 일하며 이동하는 길에서 북한산이 잘 보인다. 가끔 북한산을 찍어 올리기도 한다. 아이들 어릴 때 작은 아이를 안고, 큰 아이 손을 잡고 북한산을 올라가다가 도중에 내려온 적이 몇 차례 있었다. 북한산을 보고 그 기억을 떠올려주기를 기대하고 올린다. 달리기를 할 때는 천변 꽃들을 주로 찍고 가끔 한강 풍경을 찍기도 한다. 회의나 일정 때문에 이동할 때는 예전에 아이들과 가곤 했던 가게들 간판을 찍기도 한다.

길을 가다가 가끔 젊은 사람들이 이 셋로그를 찍는 걸 보기도 한다. 짧게 2초간 뭔가를 찍는 젊은 사람이 있다면 셋로그를 찍는 것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다. 며칠 전에는 전철에 교복입은 여학생 세명이 탔는데 번갈아 셋로그를 찍는 모습을 봤다. 이 아이들은 셀카로 다같이 찍더라.

노동과 운동

약 이주 전부터 늘 몸이 피곤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최근의 나는 일과 운동만 생각하고 살고 있다. 동네 헬스장에서는 약 40분 가량 운동을 한다. 먼저 2~3킬로미터 트레드밀을 달려서 워밍업을 하고, 바벨 운동을 한다. 여기는 바닥에 바벨을 두고 프리웨이트를 할 공간이 좀 애매하다 그래서 벤치프레스를 주로 한다. 우리 집에는 바벨은 있지만, 벤치가 없어서 10년 넘게 벤치프레스를 못하고 살았었다. 그동안 못했기 때문인지 그냥 벤치프레스만 해도 재미있다. 그다음에는 덤벨 운동을 생각나는대로 몇 가지 한다. 마지막은 정리 운동으로 케틀벨을 한다. 스윙과 클린 앤 저크를 섞어서 하는 편이다. 스내치는 양손으로 할 수는 없어서 잘 안 하는 편이다. 암튼 이삼주 전부터 다시 운동에 재미를 붙여서 조금 무리하게 운동을 하곤 한다. 일단 재미가 있으면 멈추지 못하니까. 그러면 기분 좋은 근육통 보다 조금 더 근육 피로가 더 강하게 느껴져 피로감이 심하게 들고 좀 오래간다. 거기에 주 2회 정도 달리기를 하고 있다. 한번은 10킬로미터에서 15킬로미터 사이를 그때 그때 컨디션에 따라 달리고 나머지 한번은 주로 7~8킬로미터를 가볍게 달린다. 달리기와 운동 모두 일을 마치고 저녁 회의들을 가기 전에 하는데, 일을 마치고 바로 하는 운동이나 달리기가 약간 몸에 부담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최근에 하고 있다. 특히 달리기는 공복인 상태로 하다가 몸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지는 걸 느끼기도 했었다.

어제는 정말 힘든 하루였다. 오전에 매장간 재고 이동 일을 하는 형이 병원 때문에 하루 쉬어서 내가 아침부터 일을 해야 했다. 근데 하필 일년에 두 번 하는 할인행사 날이라 재고 이동 품목이 많았고, 매장마다 급하다고 요청하는 건이 있었다. 게다가 나는 오후 배송이 주로 하는 일이라서 각 매장간 이동 경로가 익숙치 않았다. 그래서 하나 실수가 있었다. 순간의 착각으로 가장 가까운 매장을 두고 조금 더 거리가 있는 매장으로 먼저 향했는데, 나중에 그 가장 가까운 매장 점장님께서 반쯤 장난으로 항의를 하셨다. 어제 아침 일을 시작하자마자 들렀던 매장이었고, 그 점장님은 자신이 아침식사로 드시던 샌드위치 반 조각을 기꺼이 내주셨었다. 그랬는데 중요한 품목 하나를 너무 늦게 갖다줬으니 서운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도 뒤늦게 실수를 깨닫고 너무 미안한 마음이었고, 진심으로 죄송하다고 사과 드렸다.

오후에 다시 일을 시작할 때는 이미 오전에 일한 피로 때문에 집중력이 떨어졌다. 첫번째 매장으로 갔는데 배송이 10건이나 있었다. 거기에 매장 지원을 나온 사무국 활동가가 사무실로 한 건을 더 부탁했다. 이 매장에서 가장 건수가 많았던 횟수가 8건이었는데, 드디어 두 자리수를 갱신했다. 그리고 할인행사 때문에 집집마다 박스 수가 많았고, 또 무거웠다. 짐을 실으며, 이러다 두번째 매장은 어쩌나 생각이 들었다. 마침 그 매장에 팀장님이 나와 계셔서 그 얘기를 했더니 두번째 매장까지 할 수 없을 상황일 거라고 미리 예상하고 다른 배송 기사님을 임시로 구해 배치했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오늘 고생이 많을 거라며 커피를 사주셨다. 안그래도 집중력이 떨어져 있었는데, 커피가 들어가니 조금 정신이 들었다.

이 차 짐칸에 짐을 완전히 꽉 채운 것도 처음이었다. 마직막 열번째 집 박스들은 못 실을 뻔 했는데 테트리스 게임 하듯이 박스 모양에 맞춰 짐정리를 해서 겨우 실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사무국 활동가도 그 생각을 했는지, 테트리스를 잘 하셨다고 한 마디 했다. 열곳의 집 주소를 모두 네비게이션 앱에 입력하고 이동 동선을 머리 속에서 그렸다. 할인 행사 때문인지 처음 가보는 집들이 몇 곳 있었다.

매장에서 가장 가까운 첫번째 집을 보자마자 걱정이 들었다. 저번에 그 집에 갔다가 차를 돌려 내려오느라 엄청나게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났다. 경사가 무척 급한 오르막 골목이었다. 언덕 위가 좁아서 차를 돌릴 공간이 없었다. 어쩔수 없이 후진으로 내려왔는데 언덕 경사가 급해서 아래쪽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도중에 골목이 크게 한번 휘어 꺾이는데 이 각도를 돌리기가 쉽지 않았다. 경사가 워낙 급해서 자꾸만 차가 아래로 밀렸다. 몇 차례 후진과 전진을 반복하며 각도를 맞추려다가 옆으로 아주 작은 공간이 있는 걸 발견했다. 올라갈 때는 못 봤던 곳이었다. 거기로 진입하면 어떻게든 차를 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차가 좌우로 크게 기울었다. 진입로가 앞뒤로도 급경사에 좌우로도 경사가 급해서 마치 차가 뒤집어 질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진땀을 흘리며 간신히 그 좁은 공간으로 올라섰는데, 생각보다 좁아서 차를 돌리기 위해 또 한참을 전진과 후진을 반복했다. 이게 지난 번에 겪었던 일이었다. 그때 무사히 내려와서 했던 생각은 그냥 골목 입구에 차를 대놓고 짐을 들고 올라가자 였다. 다시는 이 골목으로 차를 몰고 올라가지 않겠다 였다. 이번에는 이 차 짐칸이 꽉 차있어서 후진으로 내려오기는 더 어려울 것이 뻔했다. 손수레를 꺼내 무거운 박스 하나와 수박이 든 상자 하나를 실었다. 언덕 위로 손수레를 끌고 올라가는 일이 쉽지 않았다. 경사가 급하기도 했고 길이 평탄하지 않아서 자꾸 바퀴가 걸렸다. 첫 배송부터 온몸이 땀으로 완전히 젖어버렸다. 마침내 언덕을 거의 다 올라설 무렵 손수레가 뒤집히며 상자들이 바닥에 굴렀다. 속으로 욕이 나왔다. 얼른 수박부터 살폈다. 다행히 수박이 깨지지도 않았고, 상처도 없었다. 건물 입구는 아직 거리가 좀 있었는데, 그냥 상자 두 개를 힘으로 들고 가야했다. 그리고 계단. 이런 오래된 빌라는 대부분 엘리베이터가 없다. 그리고 이렇게 할인 행사가 있는 날에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빌라에서 쌀을 비롯해 무거운 물품들을 주로 주문한다.

첫번째 집 배송을 마치고 이미 완전히 지쳐버렸다. 너무 힘들었다. 네번째 집에서는 무거운 상자가 3개였는데, 손수레가 워낙 작고 부실해서 옮기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화장지 한 묶음을 다른 손으로 들어야 했다. 다행히 엘리베이터가 있는 아파트였다. 여기 배송을 마친 후부터 허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땀에 젖은 셔츠가 에어컨 바람에 잠시 마르다가 다시 짐을 옮기며 젖기를 반복했다. 마지막 열번째 집 배송을 마친 시점이 딱 거의 퇴근 시간이었다. 중간에 처음 가보는 집들 때문에 골목에서 좀 헤매느라 시간을 허비했다. 혹시 힘들면 먹으려고 챙겨왔던 에너지 바를 급하게 먹으며 잠시 쉬었던 시간이 채 오분도 되지 않았다. 사무국 활동가 자리에 마지막 짐을 배송하고 차를 반납하고 나오는데 허리도 아프고 온 몸의 피로가 심했다. 대체로 수요일에는 아이들을 만나거나 아니면 달리기를 했었다. 어제도 만약 조금이라도 일찍 마치면 달리기를 하려고 런닝복을 챙겼었다. 일찍 마치지도 않았고 너무 힘들어서 달리기는 절대 할 수 없었다. 그리고 회의에도 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서 운영위원회 소통방에 상황을 설명하고 하루 빠지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그러고 집으로 걸어서 돌아오는 길이 너무 힘들었다. 우리집도 꽤나 경사가 급한 언덕 위에 있고, 매번 귀가길은 등산하는 기분으로 올라야 하는데, 어제는 정말 너무 지쳐서 그냥 길바닥에 주저 앉고 싶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찬 물에 샤워를 하고 곧바로 침대에 누웠다. 배는 고팠지만, 뭔가 먹을 힘도 없었다. 그냥 잠들었다가 밤 10시쯤 깼다. 그제서야 늦은 저녁을 먹었다.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허리 통증은 확실히 나아졌다. 다행이었다. 다음날인 오늘도 여전히 할인행사 중이라 또 얼마나 많은 무거운 상자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밤에 푹 잔 덕분에 다행히 피로감은 많이 가셨다. 여기저기 조금씩 근육통이 있기는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일할 수 있는 상태다. 오늘 같은 중요한 행사날 대체 인력도 없는데 내가 아프다고 빠질 수는 없는 일이라, 더 최악의 몸 상태를 걱정하며 잠들었었다. 그래서 아침에 깨자마자 몸 여기저기를 살폈는데,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 생각이 들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을 좋아한다. 오늘도 육체노동에서 재미를 느끼며 즐겁게 일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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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6-18 2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줄임말을 쓰는 것이 유행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줄임말 수준이 아니라 동남아 어느 지역의 언어 같은 느낌이네요.

감은빛 2026-07-17 14:57   좋아요 0 | URL
음, 답이 거의 한 달 늦었군요.
줄임말은 또 줄임말대로 계속 쓰더라구요.
요즘 들은 줄임말은 ‘올공‘인데요.
올림픽 공원 시위대를 말하기 위해 줄인 거라고 하네요.

다락방 2026-06-18 20: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밤티가 못생겼다는 뜻이었군요..

감은빛 2026-07-17 14:58   좋아요 0 | URL
그렇다고 합니다. 다락방님.
이런 말을 쓰는 사람이 있는 줄 몰랐는데,
아이들이 제 앞에서 쓰더라구요.

cyrus 2026-06-21 14: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밤티가 촌스럽고, 엉성하다는 뜻도 있던데, 저에게 딱 어울리는 단어라고 생각했어요. ^^;;

인스타그램에 ‘왁뿌볼’을 만지고 노는 동영상이 뜨던데, 그거 한 번 보고 나니까 알고리즘이 왁뿌볼을 파는 가게를 알려주더군요. 사실, 다른 사람이 왁뿌볼을 만지작거리는 것만 봐도 기분이 좋아져요. 왁뿌볼이 부서질 때 나는 소리가 나름 듣기 좋습니다... ㅎㅎㅎ

감은빛 2026-07-17 15:01   좋아요 0 | URL
저에게 시루스님은 정반대의 느낌이에요.
굉장히 똑똑하고 똑 부러지는 느낌.

왁뿌볼을 본 적이 없어서 어떤 기분인지 상상하기가 어렵네요. ㅎㅎㅎㅎ
그런데 시루스님도 왁뿌볼을 좋아할 정도로 젊은 세대이신거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