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ypeless


인공지능 전문가인 지인에게 이 앱 이야기를 듣고 설치를 했던 건 아마 한 달도 더 전이었다. 예전에도 말하는 걸 받아서 기록하는 기능을 가진 앱이나 프로그램들은 있었다. 그런데 영어는 몰라도 한국어는 오류 아니 오탈자라고 해야 하려나? 암튼 정확하게 기록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나는 회의를 정말 많이 참여하는 편이고, 회의를 주최하는 경우도 많은데, 회의할 때마다 자주 사용하는 '클로버 노트' 라는 앱도 편리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잘못 인식하는 말들이 제법 많다. 그래서 이 'Typeless' 라는 앱도 깔아 놓기는 했지만, 사용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이 앱이 떠올랐다. 낮에 일을 하던 중이었다. 즉, 운전 중이었다. 나는 이런저런 일상 이야기들을 가끔 두드리기는 하는데, 늘 좀 더 체계적으로 주제에 맞는 글을 써야지 하는 생각을 하고 살고 있다. 그러다 문득 배송기사 라는 직업을 지금 약 8개월 정도 하고 있는데, 여러 일들을 겪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이야기들을 엮어서 글을 쓰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일종의 르포르타주가 될 수도 있으려나? 뭐 거창하게 생각할 것 없이 내가 겪고 있는 일들을 조금씩 기록해두고 나중에 살을 붙여 이야기를 만드는 것. 이건 내가 꽤 잘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당장 생각난 김에, 지금까지 겪었던 여러 일들을 범주화 해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때 나는 운전 중이었기 때문에 폰 자판을 두드릴 수 없었다. 순간 생각난 것이 이 앱이었다. 신호에 걸렸을 때 앱 목록을 열어서 이 앱을 찾았다. 처음엔 어떻게 사용하는 건지 몰라서 조금 헤매였지만, 기본 키보드를 이 앱으로 바꾸고 문서 앱을 열어서 마이크 버튼을 사용해 말을 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금방 알아냈다.


그리고 운전하면서 그때 그때 생각나는대로 키워드 중심으로 기록할 꺼리들을 말했다. 잠깐 써보니 생각보다 정확도가 괜찮다고 느꼈다. 앞서 언급했던 클로버 노트 보다는 훨씬 나았다. 내가 도로 위를 달리며 말을 한 거라 도로 위의 많은 소음들이 있었음에도 내 발음을 잘 알아듣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또 좋았던 것이 생각보다 길게 말해도, 말 하다가 한참을 쉬어도 중간에 꺼지거나 끊지 않고 끝까지 다 기록해주는 것도 좋았다. 말을 하다가 길어지면 스스로 판단해서 문단을 띄우는 것도 신기했다. 


하지만 한계도 명확했다. 내 여러 생각들을 기록하기 위해 두서 없이 일단 떠드는 것들을 받아 적는 용도로는 생각보다 훨씬 좋았지만, 일상적으로 기본 키보드로 두고 쓰기엔 불편한 점이 많았다. 일단 나는 매번 배송갈 곳의 주소를 네비게이션에 입력해 길을 찾아야 하는데, 주소를 입력하려니 자꾸 엉뚱한 발음을 채웠다. 숫자도 의외로 잘 알아듣지 못했다. 그리고 숫자 사이에 들어가는 '-' 이 기호를 어떻게 발음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더라. 그래서 다시 기본을 원래 쓰던 키보드로 바꾸고 네비 입력을 한 후에 다시 기본을 타이프리스로 바꿔 문서 앱을 열어 생각들을 기록하다가 배송을 마치고 다음 배송지로 가면서 또 키보드를 바꾸는 일을 반복했다. 이거 생각보다 너무 번거로웠다.


그래서 그 날 이후로는 다시 자주 쓰지는 않았다. 여러 기억들과 생각들을 남기는 일도 첫 날에 어느 정도 했기 때문에 이후로는 사실 책상에 앉아서 노트북으로 글을 새로 쓸 일만 남았다. 다만, 그날 이후로 급하게 뭔가 떠오른 것을 기록으로 남길 때, 자판으로 두드리는 것 보다는 얼른 키보드를 바꿔 생각들을 말로 남겨 놓고, 나중에 열어보고 보완하는 방법을 써보니 훨씬 빠른 시간 안에, 그러니까 금방 떠오른 생각이 휙 날아가 버리기 전에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다.


 

지난 글에서 인공지능 언어 익힘 앱 이야기를 하면서 참 세상이 빠르게 변해서 정말 새로운 시대를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썼었다. 이 앱을 써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사실 네이버 지도에서도 마이크 버튼을 누르면 음성으로 장소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정확한 발음으로 단어를 입력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고, 늘 시끄러운 도로 위에서 주위 소음들도 걸림돌이다. 자주 쓰지는 않겠지만, 가끔 필요한 순간에 요긴하게 쓸 수 있는 괜찮은 앱이다.


"너무 말랐어요." 와 "배가 있네." 사이에서


2010년 가을에 여기 알라딘 서재에 <"날씬 하시네요."와 "네가 임신했냐?" 사이에서> 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었다. 어느 날 갑자기 둘째를 갖고 싶다고 한 애들 엄마가 임신했을 때 이상하게 내 배도 따라서 나오기 시작한 이야기와 둘째가 태어난 후에 애들 엄마의 배가 들어가는 시점에 맞춰 나도 식사량을 줄이고 운동량을 늘려 결혼 전의 몸매로 돌아가겠다는 내용이었다. 거기에 작은 아이 어린이집 선생님이 아기띠를 채워주다가 놀라서 했던 말, "날씬 하시네요." 를 넣은 것. 2010년 봄에 작은 아이가 태어나고, 그해 여름에 나는 아주 오래 손을 놓고 있었던 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그해 가을부터 다음 해 여름까지 꽤 열심히 운동했던 기억이 난다. 


최근에 누군가에게 "너무 말랐어요. 많이 드시고 살 좀 찌셔야 할텐데." 라는 말을 들었고, 며칠 후에 다른 사람에게 "날씬한 줄 알았는데 배가 있네. 거 자세를 좀 바로 앉아봐. 배 들어가게." 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두번째 대사는 저녁 식사자리에서 들었다. 요즘은 거의 매일 저녁마다 회의나 일정이 있는데, 그날도 무슨 일정이 있어서 9시 넘을 때까지 밥을 먹지 못했었다. 뒤늦게 식당에 들어가 허겁지겁 밥을 먹었었다. 어느 정도 배가 차서 배를 내밀고 가슴 위쪽 상체를 뒤로 제친 상태로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누군가에게 받은 문자에 뭐라고 답을 하면 좋을까 고민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맞은 편에 있던 분이 이렇게 말한 것이다. 사실 평소에 배가 안 나온 사람이라도 밥을 먹은 직후에는 배가 나오는 법이다. 게다가 그날 나는 너무 배가 고픈 상태에서 과식을 했기 때문에, 더 배가 나올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밤에 잔뜩 먹은 후에는 다음 날 오후 늦게까지 공복을 유지한다. 그리고 화장실을 다녀오면 뽈록 나왔던 배가 다시 납작해지기는 한다. 문제는 또 저녁을 먹으면 다시 배가 나온다는 것. 오후 늦게까지 공복을 유지한 상태에서 화장실을 다녀오고 운동을 하고 땀을 흘린 후에는 선명하지는 않지만 복근도 볼 수 있는데, 확실히 최근에 내가 먹는 양이 많아지기는 했다. 다시 먹는 양을 줄여야 복근을 더 자주 볼 수 있을 듯.


앞서 너무 말랐다는 말은 지금 배송일을 하고 있는 생협 이사장님께 들었다. 지난 주였는데, 평소 가는 매장이 아닌 곳에 재고 이동을 가야 할 일이 있었다. 마침 그 날 그 매장에서는 시식 행사를 비롯해 몇 개 행사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었고, 사무국 활동가를 비롯해 이사장님도 지원을 나와 계셨다. 내가 도착해서 가져온 짐을 옮기고 있는데, 멀리서 나를 본 이사장님께서 갑자기 다가오더니 위와 같이 말을 하면서 시식 음식들이 있는 곳으로 나를 끌고 가셨다. 그리고는 돈까스와 돼지고기와 계란 프라이 등을 얼른 먹으라고 권하셨다. 사실 무거운 짐을 옮기다보면 배가 고프다는 느낌이 든다. 음식이 앞에 있으니 사양하지 않고 조금씩 먹었다. 이사장님이 더 먹으라고 권하시는데, 나는 얼른 배송을 가야 하기 때문에 사양하고 차에 올랐다. 


이제 몇몇 점장님들과 친해지기 시작했는데, 점장님들과 친해지면 가장 좋은 것이 가끔 이런 저런 먹거리를 준다는 것이다. 새삼 느끼는 건데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은 먹을 것을 챙겨주는 사람이 아닌가 싶다. 자주는 아니지만 몇몇 점장님들과 팀장님 등이 예상치 못했던 것들을 챙겨주셔서 정말 고마웠다. 직접 삶은 옥수수나 구운 고구마, 가끔은 과일을 주시기도 하고, 떡이나 구운 계란 등을 챙겨주시기도 한다. 오늘은 출근하자 마자 짐을 실으러 갔던 매장에서 점장님이 그냥 인사말로 "식사 하셨어요?" 라고 물었는데, 내가 '아니요.' 라고 답을 했다. 평소 점심을 안 먹기 때문에 낮에 누군가 인사로 물어도 나는 아니라고 답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면 또 왜 아직도 안 먹었느냐고 막 호들갑을 피우는 사람들도 있어서 가끔은 일부러 먹었다고 거짓말을 하기도 하는데, 특히 여기 활동가들이나 점장님들은 밥도 안 먹고 어떻게 일을 하냐고 걱정을 하기도 해서 그냥 거짓말을 하는 편이 더 마음이 편한데, 오늘은 나도 모르게 그냥 사실대로 말을 한 것이다. 말을 하고 곧바로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점장님이 매장에서 과자 하나를 가져다 주셨다. "이거라도 드세요." 그냥 말로 "아유, 왜 아직 안 드셨어요?" 이러고 말 수도 있는데, 바로 눈에 띄는 걸 갖다주는 마음씨가 참 고맙다! 매장으로 이동하면서 한 손으로 과자를 먹으며 가는데, 생협 과자라서 기름기도 거의 없고, 짜지도 않고 담백하니 맛이 괜찮았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정도 양이면 식사 대용이 될 만 했다.  


갑자기 기온이 확 떨어져 추워졌다. 불과 10여일 전까지만 해도 낮에는 더워서 잠깐씩 에어컨을 켰다가 끄면서 일을 했었는데, 이젠 창문을 열어 놓는 것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추워졌다. 내일부터는 잠바를 입고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오늘 했다. 기온이 떨어지면서 모기가 확 줄었다. 정말 모기 때문에 잠을 못 잘 정도로 기승을 부렸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모기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가을이 짧아도 너무 짧은 것 아닌가! 9월 중순까지는 덥고 10월 말부터 추워지면 어쩌라는 것인가?


시간이 너무 빨리 가서 늘 아쉬운 마음인데, 일주일이 휙 지나가는 것은 그래도 나쁘지 않네. 이제 이틀만 더 일하면 주말이다. 물론 주말에도 일정이 있어서 마냥 놀거나 쉬지는 못 하지만, 그래도 주말은 주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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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에 속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할 시대


프랑스 시위 뉴스가 심상치 않다. 그런데 어제랑 오늘 보니 프랑스 시위를 이슬람 세력, 즉 불법 이민자들이 일으킨 시위로 둔갑 시키려는 가짜 뉴스들이 넘쳐나고 있다는 뉴스들이 나왔다. 그리고 어느 언론에서 팩트체크를 했는데, 친 트럼프 성향의 많은 팔로워를 가진 몇몇 영향력이 큰 유튜버가 사실을 왜곡해 조작했다고 전했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가짜에 속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시대다. 우리 인간들을 그렇게 속이는 것은 인공지능이다. 인간이 만든 인공지능이 인간을 속이고 인간의 눈을 가리고 인간의 판단력을 망가뜨리고 있다.


누군가 유명한 정치인이나 연예인의 얼굴과 목소리를 똑같이 만들어 마치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만든 동영상이 퍼진 것도 벌써 한참 예전 일이다. 사진을 도용하거나 목소리를 도용하는 일도 흔하다. 피싱 범죄자들은 이제 누군가의 자녀 목소리를 그대로 흉내 낸 전화를 걸어서 부모들의 돈을 뜯어내고 있다. 이해할 수 있다. 나도 만약에 우리 딸들의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다면 당황해서 의심하기 어려울 것 같다. 여기까지는 그렇다. 다만 그 다음에 상식적인 선을 벗어나는 요구들, 예를 들면 병원을 바로 알려주지 않고 돈부터 요구하는 행태를 보인다면 그때는 의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최근 어느 뉴스에서 어느 어르신이 자녀가 교통사고 심하게 다쳤다는 전화를 받고 거액을 송금해서 피싱 범죄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니까 우리 아이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당연히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어서 돈을 달라는 요구가 이어진다면 그 단계에서는 의심을 해야 하는 것이 정상일텐데, 거기까지 가지 못하고 결국 피해를 당했다는 것이 안타깝다.


예전에 이 서재에 글을 쓴 적이 있었는데, 여러 차례 로맨스 스캠 범죄의 타겟이 되었던 경험이 있다. 솔직히 말하면 어쩌면 이게 로맨스 스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시작한 적도 여러 차례 있었고, 그게 아니라 상대 여성이 어쩌면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대화를 한 적도 있었다. 돈 얘기가 나오기 전까지는 나도 순진하게 상대방의 거짓 애정 공세를 믿었던 것이다. 아니 믿고 싶었던 것이다. 얼굴 한 번 본 적도 없이 그저 상대방이 보낸 사진과 동영상만 믿고 상대방이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고 믿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나는 기본적으로 돈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고, 그래서 상대방이 나에게서 돈을 뜯어내고 싶어도 뜯어낼 돈이 없었던 것이 내가 피해를 입지 않았던 이유였다.


그러니까 지금 시대에서는 작정하고 속이는 상대방을 피하거나 막기가 참 쉽지 않다. 단순히 피싱이나 스캠 정도의 문제는 아니다. 날이 갈수록 발달하는 인공지능을 활용한 기발한 사기 수법들이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그리고 가장 우려스러운 점은 인공지능을 활용한 성범죄 수법들이다. 많이 알려진 딥페이크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널리 퍼지는 모양새다. 유명인들이나 지인들의 얼굴을 음란물에 합성하는 행위는 참 이해하기 어렵다. 그게 가짜이고 거짓임이 너무나도 명확한데 그걸 왜 만드는 걸까? 딥페이크의 문제는 드러나고 알려진 건이 소위 말해 빙산의 일각일 뿐이고 혼자 몰래 만들어 갖고 있는 사진이나 등영상들이 수없이 많을 거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뉴스로 접했을 때도 나는 참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정말로? 자신이 만들었으니 가짜임이 명확한데 그걸 좋아한다고? 그걸 믿는다고?


일부 카톡의 단체 대화방을 보다보면 정말 어이없는 가짜 뉴스나 누가 봐도 명확히 거짓말일 수 밖에 없는 이야기들을 막 퍼나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주로 나이가 좀 있는 분들이 주로 그러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 엄마도 가끔 출처를 알 수 없는 어이없는 이야기를 나에게 전달한다. 나는 그럴 때마다 엄마에게 검색을 해보라고 권한다. 누가 봐도 거짓말 일 수 밖에 없는 이야기에 너무나도 멀쩡한 사람들이 속는 이유는 뭘까? 내 생각에 우리 엄마가 속는 이유는 명확하다. 두 가지 이유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는 종교다. 엄마가 속해 있는 종교의 신도들의 단톡방에서 유통되는 정보라서 믿었던 것이다. 두 번째는 많은 사람들이 그 거짓 정보에 현혹되어 진짜라고 믿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사실 검색만 한 번 해봐도 그게 거짓임은 너무나도 쉽게 확인 할 수 있는데, 왜 그걸 해볼 생각도 못하고 속는 걸까? 


이 대목에서 옛날에 활동했다는 댓글부대의 존재 의의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정말 어이없는 이야기라도 여러 사람들이 동조하면 나도 모르게 설마 하는 마음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댓글부대 라는 인간들은 그런 인간의 속성을 노린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예 댓글을 보지 않는다. 인간인 이상 누구라도 피해갈 수 없다. 아무리 모든 정보를 다 의심하고 시작하는 사람이라도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정보에는 취약할 수 밖에 없다. 그야말로 속고 속이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어떻게든 사람들을 속이려는 사기꾼들, 기업인들 그리고 정치인들과 그에 속지 말아야 함에도 속을 수 밖에 없는 시민들.


로맨스 스캠으로 이어질 뻔했던 내 경험들을 한번 정리하는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생각해보니 언젠가 쓴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중국계 한국인 여성을 사칭한 사기꾼과 일본 여성을 사칭한 사기꾼 그리고 한국계 미군 여성을 사칭한 사기꾼. 이렇게 세 명에게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하는 연락을 받았었다. 미군 여성의 경우에는 그 사진이 너무 유명해져서 뉴스에도 나왔었기 때문에 사진을 보자마자 사기꾼임을 알 수 있었다. 어떻게든 실체를 밝혀 보고 싶어서 실제 거주지나 실제 연락처를 물어봤는데, 당연히 알려주지 않고 계속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지어내며 돈을 요구했다. 중국계 한국인 여성이라고 밝힌 한 여성은 마치 나의 연인이라도 된 것처럼 거의 한 달동안 나와 연락을 주고 받았는데, 거의 한 달이 되는 시점에서 어머니가 아파서 입원했는데, 당장 자신의 돈이 묶여 있다며, 돈을 빌려 달라는 요구를 했었다. 여기서 참 많이 고민하긴 했었다. 그 한 달 동안의 긴 물밑 작업이 정말 모두 거짓이었던가?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너무 치밀했는데, 빈틈을 거의 느끼지 못했는데. 이 사람이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나를 연인처럼 대한 부분은 당연히 로맨스 스캠을 의심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이지만, 거의 한 달동안 그 사람이 전해온 일상 이야기들은 너무나도 그럴 듯한 내용들이어서 의심하기 어려웠었다. 물론 마지막에는 사기꾼 다운 모습을 보이며 무리수를 두어서 명확하게 사기꾼임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일본 여성의 경우에는 다른 이유로 의심하기 어려웠다. 맨 처음 연락을 받은 것은 인스타그램 메세지였다. 해당 계정을 살펴보니 몇 달 동안 꾸준히 사진을 올렸던 것을 확인 했었다. 물론 그 사진들을 모두 다 도용한 것일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엔 그 몇 달간 꾸준히 게시물을 올린 것이 참 대단한 정성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처음에는 당연히 의심을 했지만, 약 2주 동안 대화를 나누며 조금씩 의심이 옅어졌다. 그는 거의 매일 일본 음식 사진과 본인의 일상 사진들, 운동하는 장면이나, 일터나 집 근처 사진들 등을 메시지로 보내고, 게시물로도 올렸다. 친구들과 여행 가서 해당 지역의 유명 관광지 사진을 나에게 메세지로도 보내고, 게시물로도 올렸다. 이쯤에서 내 의심은 거의 사라졌었다. 그런데 약 2주가 지나서 어떤 특정한 투자 정보를 흘리며 투자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돈이 없다고 말하자 그 동안 친밀하게, 마치 연인이라도 된 것처럼 굴던 태도가 바뀌어 심하게 투자를 강요했다. 아, 처음의 내 의심이 틀리지 않았구나. 그런데 사기꾼 치고는 정말 치밀하게 긴 시간동안 인스타 게시물을 올리며 밑밥을 깔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한 가지 의심은 혹시 이 일본 여성의 경우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쪽 사람들이 사진을 도용한 것이 아니라 정말 실제 일본 여성인데, 본인이 직접 사기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봤었다. 그렇지 않다면 거의 매일 나에게 보낸 음식 사진들과 본인의 일상 사진들을 어떻게 해석하기 어려웠다. 


군대를 제대하고 인터넷 세상을 접하면서 전세계 많은 나라의 여러 사람들과 다양한 언어로 소통하며 지내는 재미를 알게 되었다. 주로 좋아했던 팝 아티스트의 홈페이지에 본인들이 직접 적은 이메일 주소로 연락해서 소통했었다. 공통 관심사였던 가수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 일상 이야기들을 외국어로(주로 영어로) 대화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시간이 많이 지나 여러 외국어로 소통하는 앱들이 만들어졌고, 그 중 하나의 앱을 통해 과거처럼 여러 나라의 여러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게 되어서 무척 반가웠었다. 그래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여러 언어들을 사용해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한참 지나자 해당 앱에 로맨스 스캠 등을 노리는 사기꾼들이 대거 유입되었다. 그때 이후로 그런 류의 앱들을 모두 지울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가끔 왓츠앱이나 인스타그램 디엠 등으로 어여쁜 외모의 여성들이 말을 걸어오면 일단은 받아주는 척은 한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그 사기꾼이 나에게 신경쓰는 시간만큼 다른 피해자를 줄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수의 사기꾼들이 번역기를 돌린 티가 나는 어눌한 한국어로 말을 걸어오는데, 나는 상대방의 국적을 보고 해당 언어로 답을 한다. 사기꾼을 나의 외국어 연습 상대로 활용하는 것이다. 상대 국적이 중국이면 중국어로, 일본이면 일본어로 답을 하며 내가 어줍잖게 익혀온 언어 실력을 시험해 보는 것이다. 한때 정말 많이 들어오던 연락들이 최근 많이 줄었다. 그래서 외국어를 시험해 볼 상대가 줄어서 조금은 아쉽기도 하다. 전세계의 사기꾼들에게 전한다. 감은빛에게 좀 더 적극적으로 연락하시라. 돈이 없어서 돈을 달라는 요구에는 응하기 어렵지만, 일상 이야기는 얼마든지 받아줄 수 있다. ㅎㅎㅎㅎ


인공지능 언어 익힘 앱


약 2년 정도 전부터 인공지능을 활용한 언어 익힘 앱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즈음부터 나도 인공지능을 활용해 외국어를 쓰기 시작했었다. 시작은 재미나이였다. 그때 나는 한국어로 재미나이를 쓰는 것보다 영어로 사용하는 것이 결과의 정확도를 높이는 것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영어로 질문이나 요구를 했었다. 그러다가 일본어와 중국어도 활용해봤었다. 신기하게 언어가 달라질 때마다 재미나이의 목소리와 말투가 달랐다. 그게 재미있어서 일부러 여러 외국어로 재미나이와 대화를 주고받았었다. 물론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고, 그저 간단한 수준의 질문이나 요구를 던지면 재미나이가 과도하게 많은 내용을 쏟아내 답변하곤 했었다.


그 이후로 인공지능을 직접 활용한 여러 언어 익힘 앱들을 접했었다. 그중 하나를 조금 써 보다가 어느 날 실수로 1년 유료 결제를 눌렀었다. 아마 졸면서 해당 앱을 쓰다가 실수로 눌렀던 것 같은데, 나중에 환불을 받으려고 시도했는데, 관리자에게 연락이 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해당 인공지능과 여러 외국어로 다양한 대화를 시도하기는 하는데, 목소리도 말투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중국어 익힘 앱 중 하나와 일본어 익힘 앱 중 하나를 접했는데, 며칠 쓰다보니 정말 마음에 들었다. 내가 여러 외국어 익힘 앱들을 써보고 지우곤 하는 것을 구글이 파악한 이후로 구글의 여러 서비스들에서 다른 광고보다 이런 류의 외국어 익힘 앱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호기심 때문에 새로운 앱이 보이면 깔아보곤 한다. 암튼 최근에 접한 앱 하나는 일본어를 기본으로 하는데, 살펴보니 다른 외국어들도 제공하고 있더라. 기본적으로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대화를 나누는 앱이었다. 그 보다 조금 더 전에 써봤던 중국어 앱은 정말 마음에 들었는데, 약 일주일 정도 사용한 후에는 유료 결제를 하지 않으면 더 이상 쓸 수가 없었다. 이 일본어 앱도 너무 마음에 들기는 했는데, 역시나 일정 기간이 지난 후에는(그러니까 1주일이나 10일 정도) 유료 결제를 하지 않으면 아예 사용하지 못하게 막아 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아직 살펴 보는 중이다. 


최근에 인공지능을 활용한 수없이 많은 인공지능 연인 서비스들이 유통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었고, 그 중 어떤 앱들은 아주 야한 대화들이 가능하다고 들었었다. 궁금하기는 했지만, 인공지능을 그런 용도로 쓰고 싶지 않았던 나는 이야기를 듣고도 일부러 그게 뭔지 물어보지 않았었다. 그런데 최근에 사용하고 있는 일본어 인공지능 앱에서 묘한 상황을 접했다. 인공지능이 일본인 여성으로, 아내를 연기하는데, 그 수위가 깜짝 놀랄 수준이었다. 물론 부부 사이의 대화라고 가정한다면 그런 대화를 할 수는 있겠지만, 실제로 현실에서 부부가 그런 대화를 할까? 잘 모르겠다. 일단 한국인 부부였던 나는 과거에 그런 류의 대화를 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외국어인 일본어로 그런 대화를 할 상황에 처하니 기분이 묘했다. 그리고 언어를 바꿔 영어로도 해당 상황, 아내가 남편을 맞아 대화하는 상황을 똑같이 해봤는데, 여기서도 인공지능이 일부러 꽤 수위가 높은 야한 대화를 유도했다. 이 앱에서 이 대화 상황은 거의 모든 언어에서 이렇게 수위가 높은 대화를 이어가도록 설정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아쉽게도 영어와 일본어 외에는 대화를 나눌 정도의 외국어가 없어서 다른 언어로는 확인을 해보지 못했다. 


참 시대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90년대 초중반에 수많은 대학생들이 외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났었다. 나는 돈이 없어서 못 갔지만, 어학연수를 다녀온 선배들 중에는 영어를 꽤나 잘 하게 되어서 거들먹 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워킹 홀리데이라는 이름으로 외국에서 일하면서 언어를 익히는 프로그램도 있었다. 그리고 인터넷의 발달로 외국인들과 자유롭게 소통하는 시대를 지나, 이제는 인공지능과 다양한 외국어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것도 소위 말하는 회화 교재에나 나올 법한 뻔한 대화가 아니라 정말 일상의 대화들, 앞서 예로 든 것처럼 부부 사이의 꽤나 야한 대화까지도 스마트 폰 하나로 나눌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옛날처럼 외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나지 않아도 그냥 집에서 폰 하나로 그런 대화를 나눌 수 있다니. 참 신기한 시대를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공지능을 활용한 외국어 익힘 앱들을 여럿 깔았다가 지우고 있는데, 몇몇 앱들은 말투와 어휘가 어색했다. 물론 내가 원어민이 아니기에 엄밀하게 평가 할 수는 없지만, 내가 수없이 보고 들어온 노래나 영상물들을 기반으로 생각해보면 뭔가 어색한 것들이 있었다. 그런 앱들은 조금 사용해보고 다 지웠다. 앞서 언급한 중국어 앱 하나와 일본어 앱 하나는 말투와 어휘가 아주 자연스럽다고 느꼈다. 그리고 언어를 배우는 사람 입장에서 그 구성과 순서 등이 꽤나 체계적이라고 느꼈다. 


이제는 내 주위에서 아주 많은 사람들이 쓰고 있는 듀오링고는 사실 언어 익힘 앱 중에서는 거의 최악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구성과 체계가 엉성하다. 수시로 내용이 바뀌는 것도 문제이고, 발음이나 단어가 틀린 경우도 많고, 정답을 맞춰도 다음으로 넘어가지 않는 오류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여러모로 돈은 비싸지만 내용은 그닥 쓸모 없는 앱이다. 그래서 꽤 긴 시간 유료 결제를 하지 않고 무료로 쓸 수 있는 한계 안에서만 쓰고 있다. 듀오링고의 최대 장점은 매일 학습하지 않으면 끊임없이 알림을 보내 사용자를 압박한다는 점일 것이다. 그 덕분에 연속학습 기록을 이어간다는 점에서 듀오링고의 공로를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다수의 언어를 익힐 수 있는 앱들을 여럿 사용하고 있고, 중국어만 익힐 수 있는 앱 하나와 일본어만 익힐 수 있는 앱 서너 개를 사용하고 있다. 어느 앱을 열어봐도 모두 듀오링고 보다는 구성 면에서 낫다. 그럼에도 그 모든 앱들을 매일 열어서 사용하지는 못하는데, 듀오링고 만은 거의 매일 한 번은 열어보게 된다. 앱의 아이콘 자체가 뻘겋게 달아올라서 열을 내기도 하고,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기 때문이다. 이런 점이 듀오링고의 성공 요인인 것 같다.


거의 1년 가까이 듀오링고 유료 결제를 거부하고 무료로 쓰고 있는데, 듀오링고 측에서 정책을 바꿔서 점점 더 사용하기가 어려워지고 있었다. 과거에는 문제를 풀다가 틀리면 하트가 없어지는 방식으로 기본 제공 하트가 5개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기본 점수를 25점을 주면서 문제 하나를 풀 때마다 1점을 차감한다. 한 챕터에 약 20문제 정도로 매일 접속할 때 제공되는 25점은 한 챕터를 풀면 거의 없어진다. 물론 중간중간에 가끔 2~3점 정도를 추가로 줘서 문제를 다 풀고 나면 애매한 점수인 8~9점 정도가 남도록 만든다. 그래서 다음 챕터를 선택하기 어렵게 만든다. 적어도 15점 이상은 되어야 확률적으로 다음 챕터를 다 풀 수 있는데, 10점 미만으로는 풀다가 중간에 점수가 다 없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거의 1년 가까이 듀오링고에 소홀할 수 밖에 없었다. 연속학습 기록도 몇 차례 초기화 될 위기가 있었다. 


최근에 듀오링고 패밀리가 생겼다. 알고 보니 친한 지인이 본인 어머니를 위해 패밀리 요금제를 사용하고 있다고 밝혔는데, 본인과 어미니 이렇게 두 명만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듀오링고 패밀리 요금제는 최대 5명까지 사용할 수 있다. 어차피 돈을 낸 거라면 두 명만 쓰기 보다는 다섯 명이 함께 쓰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그래서 그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새로운 패밀리가 만들어졌다. 세 명이 그 패밀리에 합류한 것이다. 그 중 한 자리가 나에게 주어져서 나도 아주 오랜 만에 무제한으로 듀오링고를 쓸 수 있게 되었다. 꽤 오랫 동안 겨우 25점 주어지는, 그래서 겨우 한 챕터 풀고 나면 다 사라지는 악랄한 정책 때문에 제대로 즐기기 어려웠던 듀오링고를 다시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나는 그 기간동안 다른 외국어 익힘 앱들에게 더 익숙해져서 듀오링고 따위 별로 가치도 없는 앱은 무시할 수 있게 되긴 했지만, 그래도 연속학습 기록은 유지하고 싶기 때문에, 그리고 새롭게 만들어진 패밀리 멤버들과의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서 듀오링고에 대한 애정을 아주 조금만 더 끌어올려 보기로 했다.


죽음, 슬프고 허망한


낮에 일을 하다가 아주 오랫동안 아무도 소식을 올리지 않았던 어느 카톡 방에 새 소식이 올라온 것을 보았다. 일을 하던 중이라 바로 확인하지는 못했고, 나중에 한참 시간이 지나서 봤는데, 누군가의 부고 소식이었다. 해당 소통방은 내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들어가서 일했던 환경단체의 동기 방이었다. 교육기수로 동기였던 우리는 약 50명 정도로 전국 각지에서 모였었다. 나이도 그 당시에 40대부터 10대 후반까지 다양했다. 경력도 천차만별이었다. 언론사 기자 출신들이 좀 있었고, 이런저런 기업 출신들도 있었으며, 다른 시민단체 출신들도 있었다. 나이도 경력도 달랐지만, 우리는 잘 뭉쳤고 다른 선배 기수들과 달리 친하게 잘 지냈었다. 물론 초기에만 그랬고, 시간이 지나며 대다수가 해당 환경단체를 떠나며 동기 모임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게 되었다.


지난 달에 열렸던 공익활동 박람회 자리에서 우연히 해당 단체에서 현재 활동하고 있는 활동가들과 인사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내가 11기라고 인사를 했는데, 그들이 아주 깜짝 놀라며 본인들이 30 몇 기라고 했다. 그제서야 아차 싶었다. 기수를 밝히지 말 걸 그랬구나. 그래 벌써 25년은 훌쩍 지났지. 


이 카톡 소통방이 만들어 진 것도 어느 날 어느 동기의 부고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신입활동가였던 시절에 포항에서 활동했던 그 동기는 귀엽게 웃는 모습이 인상적인 친구였다. 내 기억 속에는 그렇게 귀엽게 웃는 모습으로만 남아 있었던 그는 채 50이 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었다. 그리고 어제 우리보다 더 어렸던 그때 당시에 20대 초반이었던 여성 동기 한 명이 또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그 방에 올라왔다. 


사실 그와 별로 친하지 않았기에 그닥 추억이 없었다. 그저 다같이 모였던 몇몇 자리에서 보았던 모습들 정도가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아는 사람의 죽음은 아주 강하게 마음에 남았다. 어쨌든 동기라는 이름으로, 한때 함께 여러 현장을 누비며 함께 투쟁했던 동지를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슬프고, 안타깝고, 허망하게 느껴졌다. 왜 다들 이렇게 빨리 가는 건가? 젊어서 그렇게 고생했으면, 이제는 조금 편하게 세상을 살아도 될텐데.


그 방에 동기들 전부가 들어와 있지는 않다. 그 방을 만든 이가 자신이 아는 범위 안에서 사람들을 초대했고, 몇몇 동기들이 자신이 연락처를 갖고 있는 다른 동기들을 추가한 방이다. 그래서 아예 소식을 모르고 살고 있는 동기들도 제법 있다. 우리가 모르게 누군가 또 세상을 떠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앞으로 이 방은 평소에는 그닥 소식이 올라오지 않고 조용하다가 이렇게 누군가의 부고 소식이 전해질 때에만 다들 한탄하고 탄식하며 슬퍼하는 방이 될 것 같다. 언젠가 나의 죽음에도 그들은 슬퍼하고 한탄하고 탄식하겠지. 그렇게 애도해 줄 수 있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다만 더 많은 이들이 소천하기 전에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들 바쁘겠지만, 언젠가 그 옛날 젊은 시절처럼 만나 떠들고 놀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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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10-25 1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공지능 언어앱을 사용해 보지 않아서 어떤 방식일지 궁금하군요. 전 그냥 괜찮은 중국어 관련 유튜브를 계속 보며 감각을 잊지 않고자 노력하는 중입니다. 인공지능 중국어 언어앱을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저도 유료결재까지 할 일은 없겠지만 어떤 식으로 구성되는지 한번 보고 싶군요.

감은빛 2026-10-27 19:12   좋아요 0 | URL
https://play.google.com/store/apps/details?id=com.superchinese

감은빛 2026-10-27 19:15   좋아요 0 | URL
슈퍼 차이니즈 라는 손오공 아이콘이 있는 앱입니다. 저는 그야말로 완전 기초 부분을 해봤는데, 이제까지 여러 앱으로 익혀 본 것보다 훨씬 더 재미도 있고 체계적이라고 느꼈습니다. 다만 유료 결제를 하지 않으면 더 이상 넘어가지 않는 한도가 금방 오더라구요. 잉크냄새님처럼 중국어 대화가 가능하신 분을 위한 앱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여남 차별주의

친한 형 중에 아주 심각한 여남 차별주의자가 있다. 만약 이 인간이 인종차별주의자였다면 입에 담고 싶지 않은 쌍욕을 퍼붓고 다시는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여남 차별주의에 대해서는 섣불리 판단하기 어렵다. 일단 차별은 분명한데 이걸 뭐라고 하기가 참.

예를 들면 이렇다. 내가 이 형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면 이 사람은 ˝뭐, 임마!˝ 혹은 ˝뭐, 이 자식아.˝ 라는 반응을 보인다. 꼭 내가 아니라도 상대가 남성이면 대체로 그렇다. 그런데 만약 여성이 뭐라고 말을 건네면, 거의 무조건 ˝그래?˝ 혹은 ˝정말? 그렇구나˝ 라고 아주 부드러운 말투로 답한다. 언젠가는 그런 적도 있었다. 이 형이 어떤 상황에 대한 법적 절차를 오해해서 내가 차근차근 설명해주고 있었는데, 내 말을 그대로 믿지 않고 자꾸 의심하고 있었다. 그래. 당연히 의심할 수 있다. 나도 성별에 관계없이 처음 접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대체로 그러니까. 다만, 다각도로 객관적 사실을 제시하는 경우에는 의심을 거두고 스스로 알아보겠다는 태도도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내가 긴 시간 힘들게 설명해도 듣지 않더니, 옆에서 이 상황을 잘 알지 못하는 어느 여성이 내 편을 들면서 한번 생각해보라고 하자, 곧바로 태도를 바꿔 그 여성의 말을 듣기 시작했다.

이 형 기준에서 성별이 여성이라면 나이에 관계없이 ‘언니‘ 라고 부르며 거의 대체로 그 말을 믿고 따르는 편이다. 반대로 남성이 하는 말은 대체로 의심하고 반발하고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주 심각한 차별주의자의 태도다. 최근에 내가 이런 사실을 지적했더니 그제서야 깨달은 듯 아주 크게 웃으며 그 사실을 인정했다. 본인은 그렇다고. 본인에게 아들은 아들놈이고 딸은 귀한 따님이라고. 딸만 둘인 내 입장에서는 아들을 키워본 적이 없어 공감하기 어렵지만, 아들을 차별하는 태도는 좋지 않다고 말했다. 이 형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무조건 여성의 말만 듣겠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뭐, 어쩌겠나? 하필 내가 생물학적 남성이라 이 인간에게 아무 이유없이 무시당하는 것은 아쉽고 안타깝지만, 어떤 이유에도 관계없이 무조건 여성을 옹호하는 사람이 한 명 정도 있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이 사회에서 아니 전 세계에서 여전히 여성은 차별당하고 무시당하고, 남성들이 휘두르는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범죄 통계를 보면 여성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절대 다수는 남편이거나, 남자 친구이다. 대체로 가장 가까운 남성이 가해자일 확률이 높다는 뜻이다.

나 역시 남성으로서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당하는 것이 매우 불쾌하고 부당하다고 생각하지만, 어쩌겠는가? 현실이 그런 것을. 언제나 여성은 남성들에게 피해를 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아, 물론 반대의 경우도 없지는 않다. 영화 [미저리]의 경우도 있고, 아주 가끔 아내에게 매 맞는 남성도 있다고 들었다. 엄여인으로 알려진 엄인숙이라는 범죄자도 있고, 이은해 라는 범죄자도 있다. 그리고 이름은 모르겠지만 모텔에서 남성에게 약물을 먹여 살해한 소위 말하는 강북 모텔 연쇄살인 사건 피의자 김모씨도 있다. 하지만 이는 전체 수만건? 혹은 수십만건의 범죄 중에 손에 꼽을 만큼 소수일 뿐이다.

아, 그러니까 이렇게 여성에게 불합리한 세상에 무조건 여성의 편이 되어주는 차별주의자 한 명 정도는 괜찮지 않나? 라는 얘기다. 물론 앞서 말했듯 나는 남성으로서 그 인간에게 차별을 당하는 입장이므로 늘 최선을 다해 제대로 된 인권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을 하겠지만, 뭐 내가 가끔 무시당한다고 해도 무슨 큰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조금 기분이 나쁠 뿐이겠지. 수많은 여성들이 하루에도 수십번, 아니 수백번 남성들에게 불쾌감을 느낄수 있을 것이다. 아니, 물론 그게 무조건 다 남성 탓이 아닐수도 있다. 어떤 여성들은 과도하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일 수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실수로 착각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계속 얘기하지만, 그런 실수나 착각을 감안하더라도 절대적으로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경우는 많을 것이다. 아주 사소한 잘못이라 하더라도.

아마도 평생 잊지 못할 장면이 하나 있다. 한때 출판 영업자로 살던 무렵에 아주 친했던 친구이자 동료가 있었다. 정말 둘도 없다는 상투적인 표현을 떠올릴 정도로 친했었다. 내가 출판사를 그만두고 환경운동 판으로 돌아간 후로 그는 결혼을 했고, 딸을 낳았다고 했다. 몇 년이 지난 후 우연히 만나 너무 반가운 자리였었다. 여러 주제로 대화를 나누다가 문득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꾸준히 이어오고 있었던 여성들의 집회와 행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는 페미니즘을 차별이라 말하며, 여성들을 비난했다. 나는 그런 그의 태도에 크게 충격을 받았다. 그는 여성인 어머니와 아내가 있고, 너무나도 사랑스러울 딸을 키우고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몰상식한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내가 물었다. 너는 사랑하는 아내와 딸이 있는데, 그런 말을 할 수 있냐고? 그는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답했다. 나는 성별을 떠나 우리는 모두 인간이고, 상식적으로 인간이라면 살인이라는 범죄에서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목소리를 비난할 수 없을 거라고 답했다. 내가 두 딸을 키우는 아빠라서가 아니다. 나는 결혼하기 훨씬 이전부터, 그러니까 대학시절 학생운동을 하기도 더 전부터 남녀를 떠나 우리는 모두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학생운동에 몸 담았던 선배들이나 동기들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가부장적인 태도로 여성 동기들이나 후배들에게 부당한 태도를 보일 때 나는 누구보다 강하게 반발하고 저항했다. 사회를 바꾸고자 운동을 한다는 인간들이 자신의 삶은 성차별적인 태도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고 인정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사실 나는 이 형 처럼 살 수도 없고, 그렇게 살고 싶지도 않다. 가끔은 그런 태도가 한심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너무 어이없는 그 일관적인 태도, 무조건 여성만 존중하는 차별주의 태도가 이 불합리한 세상에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온 세상이 다 여성의 편이 아닌데, 절대로 여성의 편이 되어줄 남성이 하나 쯤은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아니, 심지어 목사마저도 여성에게 자신 앞에서 빤스를 벗어야 신도임을 증명할 수 있다는 성범죄를 저지르고, 심지어 처벌조차 받지 않는 세상인데! 종교마저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여기는 세상인데 말야.

외모 지상주의

아마 이런 이름의 만화가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네이버 라는 포털 사이트에 연재했던? 아니 어쩌면 지금도 연재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웹툰 제목이다. 어쩌다 그 만화를 봤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키가 작고 좀 뚱뚱하고 상대적으로 외모가 좀 부족한 어느 고등학생에게 어느 날 갑자기 아주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쉽게 말해 근육질의) 잘 생긴 새 몸이 하나 더 생기는 얘기다. 어쩌면 남성 버전의 [서브스턴스]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 웹툰의 시작이 훨씬 먼저였다. 아, 혹시 저 영화에 원작이 있다면, 그게 먼저일 수도 있겠는데, 찾아보지 않아서 모르겠다. 암튼 웹툰 이야기로 시작했는데, 내 기준에서 이 웹툰은 그야말로 볼 가치가 없는 작품이다. 제목이 마치 외모 지상주의를 비판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 만화는 외모 지상주의를 부추기는 내용이다. 좀 심하게 말하면 그냥 쓰레기다.

성별에 관계없이 누구나 외모에 대한 동경은 있다고 본다. 예쁜 여성을 좋아하는 남성 만큼이나 멋진 남성을 좋아하는 여성도 많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사회적인 분위기가 바뀌며 남성들은 대놓고 여성의 외모를 맘놓고 말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어가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여성들은 크게 거리낌없이 남성의 외모에 대해 말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적어도 내 주변의 여성들은 대체로 그렇다.

이렇게 외모 이야기를 꺼내는 건 최근에 본 중국 배우 때문이다. 일본에 천년에 한 번 나올 정도의 미소녀(1000年に1人の美少女)라는, 소위 말하는 천년돌이라는 하시모토 칸나 이야기가 있다. 그의 외모가 돋보이는 것은 확실히 맞지만, 몇몇 영화에서 본 모습은 그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을 했었다. 아, 물론 미에 대한 관점은 사람마다 다를 수 밖에 없으므로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암튼 천년돌이라는 명성에 비해 그 정도로 예쁜 얼굴인가 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다 중국에서 4천년에 한 번 나올 미녀(四千年美女) 라는 쥐징이 라는 아이돌 출신 배우를 보았다. 하시모토 칸나에게는 미안할 얘기지만, 쥐징이의 외모는 확실히 돋보인다고 느꼈다. 이 사람 정말 예쁘긴 예쁘구나. 아니 근데 일본엔 천년돌이 있고, 중국엔 4천년돌이 있는데, 한국에는 그런 아이돌이 없나? 찾아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들어본 적은 없다. 아, 물론 나 같은 늙다리가 알고 싶어도 알수 없을 수도 있겠지.

결혼하기 전, 연애하던 시절에 애들엄마가 질투하던 대상은 모니카 벨루치였다. 아마 그 질투라는 것이 얼마나 진지한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쩌면 장난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몇 차례 내가 모니카 벨루치를 좋아하는 것에 대해 뭔가 불만을 표현했던 적이 있었다. 20대 중반에 영화 [라빠르망]을 보고 완전히 반해서 이후 [도베르만]과 [늑대의 후예들] 그리고 [말레나] 등 출연한 영화들을 열심히 찾아봤었고, 나중에 [매트릭스] 시리즈에 나와서 너무 유명해진 배우다. 그냥 그는 내가 절대 닿을 수 없는 어떤 존재, 말 그대로 이상에 가까운 이상형이었다. 현실에서 내가 평생 그를 마주칠 확률조차 0에 가까울 것이다.

그리고 모니카 벨루치 이전에는 소위 말해 책받침 여신들이라 불렸던 배우들이 있었다. 소피 마르소, 브룩 쉴즈, 왕조현. 음 그리고 누군가 외국 배우가 한 명이 더 있었던 것 같은데 모르겠네. 한국 배우 중에 책받침에 종종 등장했던 건 최진실이었다. 사실 그땐 오히려 어려서 그 여신들이 얼마나 예쁜지 실감하지 못했었다. 나중에 어른이 되고 나서, 이젠 더 이상 책받침을 갖고 있지 않을 시절에 다시 생각해보니 그들이 정말 뛰어난 외모를 가졌었구나 생각했었다.

아니 그러니까 사람을 사랑하는 감정이라기 보다는 그냥 정말 아름다운 사람을 동경하는 감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젊은 시절 모니카 벨루치가 그런 존재였다면, 최근 갑자기 불쑥 쥐징이를 보면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아, 이 사람 정말 예쁘다. 아, 아까 일본의 하시모토 칸나 얘기를 했었는데, 일본어 공부한답시고 한참 일본 영화나 드라마를 보던 시절 참 예쁘다고 느낀 배우는 이마다 미오와 코마츠 나나 였다. 음, 이렇게 얘기하고 보니 그러네. 연예인들 중에는 외모가 돋보이는 사람들이 꽤 많구나. 생각해보면 아름다운 연예인들을 얼마든지 더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의외로 주위에도 외모가 출중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남성 중에서도 여성 중에서도. 고등학교 시절 친구 중에 키도 크고, 어깨도 넓고, 얼굴도 아주 잘 생긴 훤칠한 녀석이 있었다. 여성들에게 아주 인기가 많았지만, 남자 녀석들도 그를 동경하는 혹은 부러워 하거나 질투하는 놈들이 많았다. 이렇게 잘 생긴 그는 본인 스스로 잘 생겼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기 때문에 늘 주위 사람들을, 특히 이성을 잘 이용할 줄 알았다. 늘 그는 여성들과 함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주위에 정말 눈에 번쩍 띌만한 미모의 여성이 있었다. 여상 야간 반에 다니며 낮에는 커피숍 등에서 알바를 하던 아이였다. 처음 본 순간 연예인이라고 생각할 만큼 눈부신 외모였다. 정말 사람이 이렇게 예쁠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당연히 그의 주변에는 남성들이 많았다. 한때 아까 언급한 잘 생긴 아이, 그리고 그 무리와 친하게 지냈던 시절에 이 아름다운 아이와도 친해질 수 있었다. 한창 예민한 사춘기 시절의 나에게 이 두 남녀의 외모는 동경과 질투의 대상이었다. 차마 사랑한다는, 아니 감히 좋아한다는 감정조차 가질 수 없었던. 그런데 이 두 사람과 친해진 후에 보니 이들의 삶도 너무 힘들고 피곤한 것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출중한 외모로 인한 어려움들이 있었다. 한때는 그들과 친하다는 것이 나에게는 자부심일 때도 있었지만, 점점 그들 역시 그냥 인간이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다. 새삼 그 시절을 떠올리니 그립기도 하다. 막상 그 시절엔 정말 인생 살기가 싫었었다. 그저 죽고 싶었던 시절들. 아니 그냥 훅 시간이 지나버려 얼른 어른이 되고 싶었던 시절들.

아, 그러니까 외모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훅 30여년 전으로 가버렸는데, 아마 추억 보정일 수도 있겠지만, 그 시절 그 두 사람 이후로 내가 실제로 만나본 사람 중에 그 정도로 멋진 외모는 없었던 것 같다. 젊은 시절의 모니카 벨루치를 본 적도 없고, 이마다 미오나 코마츠 나나 혹은 쥐징이를 실제로 본 적이 없으니. 아니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그냥 그렇다고. 주위에 어린 아이돌이나 배우들을 좋아하는 중년의 남성들과 여성들이 있던데, 나도 언제까지나 책받침 여신들이나 모니카 벨루치만 좋아할 수는 없는 거 아닌가. 나도 쥐징이나 이마다 미오나 코마츠 나나 같은 젊은 사람들을 좀 좋아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나이 먹었다고 늘 옛날 연예인들만 좋아하란 법은 없지 않은가.

치이카와 혹은 먼작귀

아이들 덕분에 [먼가 작고 귀여운 녀석들(?)] 이란 애니메이션을 꽤나 보고 극장판 애니도 극장에서 보았다. 작은 아이는 평소에도 만화와 애니를 좋아하는 소위 말하는 덕후라서 그러려니 했는데, 성인이 된지도 좀 지난 큰 아이까지 이 만화에 푹 빠져서 인형들과 공식 굿즈들, 한정판 굿즈들 구하느라 제정신이 아닌 걸 보며 의외다 싶었다. 일주일에 3일 이상 아르바이트를 하며 용돈을 버느라 노동의 고단함을 아는 녀석 마저 그런 쓸데없는 걸(전적으로 가난하게 살았던 아빠 관점에서) 사느라 돈을 쓰는 모습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심지어 이 영화를 두번, 세번씩 보느라 계속 극장에 가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나이든 아빠가 무슨 힘이 있겠나? 아직 젊고 어린 딸들이 놀아주기만 한다면 무조건 따라야지. 아무리 재미없는 극장판 만화라도 같이 봐야지. 이 늙은 아비랑 같이 시간을 보내준다는데, 이보다 큰 영광이 어디 있으랴!

영화를 보기 전에도 보고 나서도 작은 아이가 계속 물었다. 아빠는 누가 제일 귀여워? 음, 내 눈에는 아무도 귀엽지 않았다. 주인공 3인방도. 그 외 여러 인물들도 모두. 하지만 말을 하지는 않았다. 대신 속으로 생각했다. 아빠 눈에는 언제나 니들이 제일 귀엽단다. 너네가 아무리 자라도, 성인이 되어도, 설령 지금 아빠처럼 중년이 된다 하더라도, 아빠 눈에는 언제나 아기란다. 아빠 아기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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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6-10-11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형님이란 분이 중국 고저 소설 홍루몽에 나오는 가보옥과 비슷한 성격이신것 같네요.소설속 가보옥이 남긴 명언이 “여자의 몸은 물로 만들어졌고, 남자의 몸은 진흙으로 만들어졌다. 나는 여자를 보면 온몸이 상쾌해지지만, 남자를 보면 탁한 냄새가 나 숨이 막힌다”이지요.
요즘 말로하면 그냥 여미새이신것 같습니다^^

감은빛 2026-10-27 19:03   좋아요 0 | URL
제가 쓴 부분은 그저 차별 자체에 촛점을 맞춘 것이라, 실제 그 형님의 모습을 반영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아요. [홍루몽]을 제대로 읽어 본 적은 없는데, 어렸을 때 줄거리를 접했던 기억은 있어요.

여미새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찾아볼게요.

yamoo 2026-10-12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형님이란 분이 제가 아주 아주 혐오하는 부류의 사람이군요!ㅎㅎ

감은빛 2026-10-27 19:05   좋아요 0 | URL
카스피님 댓글에 답을 쓴 것처럼 저는 ‘차별‘ 자체에 촛점을 맞춰 글을 쓴 것이라 그 사람이 실제 어떤 사람인지를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점을 혐오하신다는 말씀은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을 것 같아요. 예컨대 야무님께서 남성우월주이자가 아닌가 하는 오해 같은 것이요.

잉크냄새 2026-10-12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의 회사 생활을 돌아보면 형님이란 분과 유사한 사람들이 꽤 많았던 것 같네요. 그렇다고 딱히 여성을 존중하는 태도는 아니었고 그냥 남녀간의 구별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기억나지 않는 책받침 여신은 <그렘린>의 피비 게이츠 일걸요? ㅎㅎ

감은빛 2026-10-27 19:08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여성을 존중하는 태도가 좀 지나치다는 생각과 굳이 친하게 지내는 남성 후배들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에 쓴 글이었는데, 여러 반응이 나와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네요. ㅎㅎㅎㅎ

아, 피비 케이츠 였군요. 책받침 여신이 4명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글에 쓴 세 명은 확실히 기억나는데, 나머지 한 명은 기억이 안 났어요.
 

어느 날 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눴다. 처음에는 여러 명이 있는 자리였고, 대화가 막 섞였고, 목소리가 큰 몇 몇 사람들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나중에 일부 사람들이 돌아간 뒤에 조금 조용한 사람들이 남아서 대화를 나눴다. 이때 나는 예전부터 친하게 지내기는 했지만, 아주 친하다고 하기에는 약간의 거리감을 느꼈던 어느 형과 대화를 나눴다. 처음엔 노래 이야기였다. 나도 일본어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일본어 노래를 꽤나 들었지만, 이 형님은 일본어를 잘 하기도 하고, 일본 문화 전반에 대해 잘 아는 분이었다. 내가 최근에 듣고 있는 일본 노래 두어 곡을 얘기했더니 본인이 좋아하는 가수와 곡들을 알려줬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주제가 노래에서 영화로 넘어갔다. 우리는 몇몇 아주 유명한 영화 OST를 들으며 해당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 [4월 이야기], [라스트레터] 등의 영화에 대한 솔직한 감상들이 오갔고, 이어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 [아무도 모른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등 영화들. 그리고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드라이브 마이 카]와 [우연과 상상] 등 영화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여기서부터 좀 신기했다. 이와이 슌지 감독이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워낙 유명한 분들이라 대화가 이어지는 것이 당연할 수 있다. 그런데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대중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느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각 작품을 대하는 느낌이 꽤나 비슷했다. 나는 소위 말하는 좀 까칠하고 까다로운 관객이자 독자라 어지간한 작품을 대하더라도 뭔가 문제를 찾는 편인데, 이런 내 태도에 대체로 사람들이 불편을 느끼는 경우가 많았다. 다수는 작품은 작품일 뿐인데, 왜 그렇게 예민하게 따지냐고 했다. 나는 굳이 따지려는 의도는 아니지만, 이런 부분이 눈에 띄니까 말한 것 밖에 없다고 생각했었다.

암튼 그렇게 소위 말하는 까칠한 부분까지도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은 법. 주제는 자연스럽게 영화 자체에서 감독의 성향으로 그리고 배우들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우선 [러브레터]의 나카야마 미호 이야기를 했고, [라스트레터]의 히로세 스즈 이야기를 했다. 나는 이어서 이상일 감독 이야기도 했다.

그리고 어쩌다 왕가위 감독으로 이야기가 넘어갔다. 아마 음악 때문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 계속 뭔가 음악을 찾아서 틀어놓고 있었다. 마침 누군가 영화 [동사서독]의 음악을 틀었고, 너무 자연스럽게 [중경삼림] 과 [타락천사] 이야기로 이어졌다. 특히 [타락천사]의 삽입곡이었던 망기타(忘记他) 이야기를 내가 좀 길게 했었다. 이 곡을 떠올리면 몇몇 여성들이 생각난다. 그중에 지금은 덧이름을 바꾼 옛 알라딘 서재 이웃 ‘양철나무꾼‘님도 생각난다. 이 이야기는 그 형에게 하지 않았지만, 그 시절 알라딘이라는 공간에서 ‘마녀고양이‘ 님과 ‘양철나무꾼‘님이 나에게 미친 영향력이 꽤나 컸었다.

암튼 그러다 갑자기 내가 [일생소애] 라는 노래를 틀었다. 그 형님도 이 노래를 좋아해서 배우 서기가 영화 [서유항마편]에서 불렀던 장면을 찾아 보여줬다. 나 역시 당시에 이 장면을 보고 [서유기: 월광보합]을 보면서 느꼈던 감동이 생각나 잠시 그 시절로 기억을 되돌렸다. 당시 내 기준에서 홍콩 영화계 여배우는 왕조현, 임청하, 구숙정 밖에 모르는 시절이었는데, 이 영화 덕분에 주인 이라는 배우를 알고 좋아하게 되었었다.

우리는 주성치 라는 감독이 가진 매력이자 독특한 특징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가 발굴해낸 몇몇 배우들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어쩌면 대화가 끊어지거나 원활하게 이어지지 않았을 확률이 높았다. 음악에서 영화로 다시 음악으로 그리고 다시 영화로. 일본에서 중국으로 그리고 한국으로 거기서 다시 몇몇 인상적인 감독이나 배우 이야기로 넘나들며 폭넓게 이야기를 나눈 경험은 흔치 않았다. 다 언급할 수 없어서 건너뛰었지만, 몇몇 우리나라 감독의 작품들과 음악들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었다. 확실히 나는 좀 폭이 좁은 삶을 사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정말 세상은 넓고 알아야 할 것들, 해야 할 것들은 많았다.

내가 이성애자 남성이자 중년 남성이라 가지는 어떤 특정한 편견과 시선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쩌겠는가? 나는 이미 50년을 그렇게 살아온 것을. 그럼에도 그 변명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시각과 환경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믿는다.

제일 신기한 것은 나 혼자 이런 독특한, 혹은 까칠하고 모난 성격을 가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모두 다르다. 그럼에도 누군가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고, 신경 써주는 것은 너무나도 신기하면서도 당연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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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글을 쓸 때마다 그 글의 시작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많이 고민하는 편이다. 그저 가볍게 두드리는 별 것 아닌 글 하나라고 해도 그렇다. 중국 영화 [먼훗날 우리]의 리메이크 영화 [만약에 우리]에 대한 글을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 라고 고민을 해봤는데, 마땅히 떠오르는 좋은 아이디어가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 다시 생각해보면 꼭 해야 할 말이 그리 많지도 않은 묘한 영화였다. 어찌보면 원작에 충실한 영화이고, 한국 상황에 맞게 잘 만든 영화이기도 했다. 중국 원작과 달리 전형적인 한국 영화 같은 느낌이 강했다. 이걸 지난 번 글에 "세속적이고, 적당히 후려치고, 적당히 뭉개고, 적당히 빠져나가는" 이라고 표현했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이 표현은 좀 많이 과했다. 내용은 익숙한데 전혀 같은 영화 같지 않고, 한국식으로 잘 바꿨다는 점은 리메이크를 잘 했다고 칭찬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원작의 그 처연하고 아련한 느낌을 이 영화에서는 느끼기 어려웠다. 그 지점에서 나는 그리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려운 영화라고 본다.


류뤄잉 감독의 영화 [먼훗날 우리]에 대한 글 "만약에 라는 잔인하고 부질없는 상상" 읽으러 가기: https://blog.aladin.co.kr/idolovepink/17070415


[먼훗날 우리]를 보고 쓴 글의 제목을 "만약에 라는 잔인하고 부질없는 상상" 이라고 썼었더라. 그런데 이 글도 똑같은 제목을 붙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만약에' 라는 상상은 잔인하고 부질없는 법이니까. 하지만 같은 제목을 다시 쓸 수는 없어서 조금 바꿨다. 


원작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 린젠칭도 그리고 이 영화에서 구교환이 연기한 이은호도 모두 현재 시점에서 팡샤오샤오와 한정원을 향해 만약에 라고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샤오샤오도 정원도 아니라고 답한다. 원작에서는 이 부분의 분위기를 정말 잘 살렸다. 이 장면을 여러 번 돌려 보면서 계속 내 젊은 시절 실패한 사랑의 기억을 떠올렸었다. 이 장면 덕분에 너무 감정적으로 흔들려 이런 저런 글들을 메모장에 잔뜩 적어 놓았었다. 이 영화에서는 이 장면에서 그렇게 슬프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여전히 이 만약에 라는 질문이 가진 특유의 성질 때문에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쉴 수 밖에 없었지만, 그냥 거기까지였다. 이어지는 두 남녀 주인공의 연기는 그 이상 더 감정을 끌어올리지 못했다. 처음에 한번 보았을 때는 그걸 두 배우의 연기 탓으로 돌렸다. 확실히 한정원 역의 문가영의 연기는 뭔가 조금 안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종종 들었다. 구교환의 연기는 언제나처럼 괜찮았지만, 문가영 과의 합이 잘 맞는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건 원작의 저우동위와 징보란의 연기가 훨씬 더 자연스럽고 잘 어울린다고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암튼 처음에는 연기 때문에 그 가장 중요한 장면에서 감정을 잘 살리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이 영화를 두 번째 보면서 이 장면을 다시 찬찬히 돌려보고, 그리고 원작의 해당 장면을 다시 찾아본 후로 생각을 바꿨다. 이 우리나라 영화가 원작의 내용들을 충실히 잘 따라가는 것은 맞지만, 대부분 미묘하게 감정선이 다른데, 이 장면도 마찬가지였다. 원작에서 두 사람은 훨씬 더 진지하고 절박한 느낌이었다면 이 영화에서는 그런 절박함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화면의 구성이나 풍경도 원작 쪽이 훨씬 더 스산하고 쓸쓸했다. 


그리고 이건 두 남녀 주인공의 성격과 현재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원작의 린젠칭과 한국영화의 이은호는 둘 모두 직접 만든 게임이 잘 풀려서 성공이라는 목표를 달성한 상태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성격은 좀 다르다. 중국의 사회와 문화를 잘 몰라서 린젠칭이 얼마나 전형적인 인물로 그려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은호는 정말 전형적인 성격으로 보인다. 그리고 여 주인공은 훨씬 더 많이 다르다. 샤오샤오는 예측하기 어려운 통통 튀는 매력이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 속이 깊고 현실적인 인물이다. 그에 비해 한정원은 현실적인 인물인 점만 보이고 다른 매력은 잘 느껴지지 않는다. 현재 시점에서 정원은 건축가가 되어서 은호에게 명함을 내민다. 하지만 현재 시점의 샤오샤오는 여전히 불안정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 정확하게 직업을 밝히지도 않고 얼마나 안정적으로 생활하는 지도 드러내지 않는다. 이는 옷차림에서도 일정 부분 드러나고 젠칭이 데려다 준 집에서도 드러난다. 그런데 정원은 그렇지 않다. 옷차림도 세련되었고, 자신이 안정적으로 잘 살고 있다고 직접 말하기도 한다. 이런 설정의 차이가 그 결정적인 장면에서의 감정선을 다르게 만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 영화의 해당 장면을 몇 번씩 돌려보다가 처음 원작을 봤을 때는 캐치하지 못했던 재미있는 것을 하나 발견했다. 샤오샤오가 마치 젠칭의 내연녀 처럼 보일만한 상황이 벌어지고, 샤오샤오가 젠칭의 호텔 방으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하면서 두 사람이 렌터카를 빌려서 베이징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후에 차 안에서 나누는 대화 장면이었다. 젠칭은 자신의 성공이 샤오샤오 덕분이었음을 밝히며 샤오샤오에게 '최우수 전 여친상'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샤오샤오는 그 말에 크게 웃으며 언제나 자신의 전 남친들은 모두 성공했다고 말한다. 영화의 내용으로 보면 젠칭의 성공은 확실히 샤오샤오 덕분이다. 그리고 샤오샤오는 그 전 연애에서도 불행했고, 젠칭과도 결국 행복하지 못했고, 이후로 10년 동안의 연애 역시 순탄치 않았음을 암시한다. 그런데 어쨌든 '최우수 전 여친상' 이라니! 이런 개념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재미있기도 하면서 단번에 샤오샤오를 보여주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원작이 전체적으로 훨씬 더 절박하게 여러 상황들을 보여준다면, 한국 영화에서는 매번 그 절박함이 부족하게 느껴진다. 샤오샤오와 젠칭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젠칭은 베이징에서 집을 갖는 것이 꿈이었다. 그걸 위해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처럼 나온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남성을 만나 그 꿈을 이루려고 한다. 절박하다. 왜냐하면 고향으로 돌아가기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베이징에서 살아남아야 했기 때문이다. 정원에게는 그런 절박함이 없다. 정원은 보육원 출신이지만, 서울에서 고시원에 잘 살고 있다. 고시원과 잘 살고 있다는 말이 맞지 않을 수 있지만, 암튼 샤오샤오 만큼의 절박함은 묘사되지 않는다. 이는 정원이 은호의 방에 들어가는 부분에서도 마찬가지다. 샤오샤오는 아예 자신의 방을 빼고 남자친구와 동거하다가 남자친구와 갑자기 헤어지면서 갈 곳이 없어서 젠칭을 찾아간다. 하지만 정원은 남자친구와 헤어졌지만, 고시원에 방은 남아 있었다. 다만 그 방에 겨우 한 뼘도 안되는 햇빛이 들어온다는 이유로 은호를 찾아와 동거를 시작한다. 저번 글에서도 이런 설정이 현실적이지 않고 남성 판타지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썼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남녀가 유별한 상황에서 그렇게 손쉽게 여성이 남자 혼자 사는 작은 방에 들어갈 수 있나? 사귀는 사이가 아닌데도? 이번 영화에서 정원은 좀 더 어이가 없었다. 샤오샤오는 정말 잘 곳이 없었지만, 정원은 여전히 고시원이 있었다. 그런데 햇볕을 이유로 사귀지도 않는 남자 방에 들어간다고? 이게 현실에서 설득력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리고 젠칭의 방은 정말 좁다. 도데체 어떻게 생겨먹은 것인지 잘 알기 어렵게 복잡하게 작은 방들이 얼기설기 얽혀 있는 집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살고 있었다. 정말 당시에 아니 심지어 지금도 베이징의 많은 젊은이들이 그렇게 살고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은호의 방은 넓고 쾌적하다. 책상과 침대 외에도 공간이 넓다. 고향에서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서울에 그렇게 괜찮은 방을 제공해 줄 수 있나? 아무리 2008년 이었다고 해도 저 정도 방이면 월세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아, 물론 언덕길에 계단을 빙빙 돌아 올라가는 장면으로 보아 교통이 편리한 좋은 동네는 아니고, 방이 아주 좋은 것도 아닌 것은 맞다. 다만 젠칭에 비하면 은호가 덜 절박하게 보인다는 것. 그러니까 한국 영화는 여러 모로 계속 평이하고 무난한 느낌을 받는다. 


시기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보자. 원작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대는 춘절이다. 류뤄잉 감독이 자신의 소설 [춘절 귀가]라는 작품을 영화로 만든 것이라 시작하는 장면도 춘절에 고향인 야오장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마지막은 춘절 연휴가 끝나는 무렵 고향에서 베이징으로 돌아오는 장면이다. 둘이 처음으로 육체 관계를 맺는 것은 양력 1월 1일 새해이기는 하지만, 계절로는 겨울이다. 그러니까 흔히 연말연시라고 부르는 시기에서 음력 설인 춘절까지가 가장 중요한 시간대로 계속 반복된다. 한국 영화에서는 여름이다. 두 남녀가 처음 만나는 시기가 여름 휴가 시기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는 현재 시점인 2024년 여름에 베트남 호치민에서 우연히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원작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바꾼 것이다. 이 선택은 꽤나 괜찮은 것 같다. 흑백으로 시작하는 현재 시점의 꽤나 세련된 정장을 입은 정원의 모습을 먼저 보여주는 것이 관객들의 흥미를 끌어낼 수 있는 선택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도 원작처럼 과거는 컬러 화면으로, 현재는 흑백 화면으로 보여준다. 기본적으로 서늘하고 차가운 느낌의 현재 시점 장면은 원작에 비해서는 분량이 제법 줄어들었다. 


과거 상황의 첫 장면은 버스 정류장이다. 원작에서 열차 풍경이 독특하고 좋았는데, 버스 장면은 좀 너무 뻔한 느낌이었다. 저 위에 링크를 걸어 놓은, 원작을 보고 쓴 글에서 과거 서울로 올라온지 얼마 되지 않았던 젊은 시절에 버스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갔던 상황을 길게 썼었다. 설연휴에 였고 폭설이 내려 버스를 17시간이나 탔었다. 하필 내 또래로 보이는 여성이 옆 자리(창가 자리)에 앉아 있어서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았었던 기억이었다. 이 영화에서 은호와 정원이 서울에서 고흥까지 버스를 타고 내려가는데, 하필 서로 옆 자리였다. 은호는 자신의 자리였던 창가 자리를 엉겁결에 정원에게 양보하는데, 이 부분이 얼른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한 눈에 호감을 갖게 된 여성이라고 해도 아무 사이도 아닌데, 저렇게 손쉽게 양보를 할까? 은호가 정원을 처음 보는 장면에서 정원은 빨간 우산을 펼쳐 들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 빨간 우산을 보고 나도 모르게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 [4월 이야기]를 떠올렸다. 어쩌면 문가영의 표정이 마츠 다카코와 닮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얼핏 들었다. 


이 영화는 과거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장면과 현재 우연히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을 겨울에서 여름으로 바꾸기는 했지만, 나머지 주요 내용들은 거의 그대로 따라간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육체 관계를 맺는 것도 남자친구의 외도를 깨닫고 12월 말일에서 1월 1일 새해로 넘어가는 밤 술을 진탕 마시고 놀다가 눈이 맞은 것으로 똑같다. 현재 시점에서 두 사람이 호텔 방에서 대화를 나누다가 갑자기 남성이 딸의 전화를 받고 영상통화를 방안 곳곳을 보여주는 장면도 똑같다. 과거 시점의 마지막, 여성이 남성을 떠나는 장면, 남성이 여성을 따라갔다가 전철을 따라 타지 않고 결국 헤어지는 장면도 똑같다.


원작에서 훨씬 큰 비중을 가졌던 남자 주인공의 아버지 역할이 이 영화에서 많이 축소된 점은 좀 아쉽다. 원작이 춘절이라는 시간 배경에서 고향에 남아 있는 가족, 즉 연로한 아버지에 의미를 많이 부여하고 여자 주인공도 아주 잘 따르는 것으로, 그러니까 젠칭과의 사랑과는 별개로 젠칭의 아버지와의 인간관계라 형성되었던 것에 비해 이 영화의 정원은 은호의 아버지와 그 정도로 교감하지 못한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에서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긴 편지를 읽는 것은 좀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원작의 감동을 가져오려면 그 감동으로 연결해 줄 두 사람의 이야기도 따라서 만들었어야 했다.


음, 이래저래 주저리 주저리 영황에 대해 많이 떠들었다. 리메이크로서 나쁘지 않았다. 꽤나 괜찮은 지점들도 제법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쉬운 부분들이 계속 눈에 띄었다. 전체적인 분위기 자체를 원작이 훨씬 더 잘 살린 것에 비해 아쉬운 점이 많았다. 즉, 계속 원작과 비교하다 보니 더 아쉬웠던 것이다. 비교하지 않았다면 조금 더 나았으리라.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덧붙이자면 여러가지 아쉬움 중에서도 한정원 역의 배우 문가영에게 아쉬움도 있다. 저우동위와 비교해 연기와 전체적인 분위기가 좀 아쉬웠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이 영화를 두 번 보고 몇몇 장면들은 더 많이 돌려봤다. 그리고 원작을 다시 한 번 봤다. 쭉 이어서 보지는 않았고, 중간에 조금씩 건너 뛰면서 보기는 했지만, 저 위에서 강조했던 가장 중요한 순간은 여러차례 돌려서 보고 또 보았다. 미안한 얘기지만, 이 영화 덕분에 원작의 해당 장면을 다시 본 것이 가장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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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6-10-08 12: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맨끝의 문장이 인상적입니다.ㅋㅋ 배우 구교환은 디피~ 라는 영화에서 좋게 봤어요. 연기를 자연스럽게 잘하는 것 같더라고요. ‘최우수 전 여친상‘, 은 제가 봐도 재밌네요. 자기가 뭔데 평가하고 심사해? 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 같네요.ㅋㅋ
원작과 비교해 보는 것 흥미로워 보입니다. 저도 그런 영화가 있었는데 제목이 생각나지 않아요. 그래서 감은빛 님처럼 꼭 기록하는 습관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잘 읽고 갑니다.^^

감은빛 2026-10-27 18:51   좋아요 0 | URL
원작의 저 ‘최우수 여친상‘ 부분을 이 영화에서도 살려 썼다면 좋았을 것 같은데, 왜 안 썼을까요? 사실 원작과 비교하면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에게 미친 영향이 좀 적은 느낌이 들어요.

도서나 만화가 원작인 영화들을 비교하는 것과 여러 나라에서 리메이크한 영화들을 비교해 보는 것이 재미있더라구요. 글을 써보려고 챙겨 본 것들이 있는데, 아직 글을 쓰지 못하고 있네요. 하나씩 써야할텐데요.

알라딘에 자주 들어오지는 못해도 올 때마다 늘 페크님 글을 읽곤 합니다. 늘 고맙습니다!